應制之文은 非장공公之至者로되 而其所見與議는 亦自有典刑하니라
然이나 臣愚不知宮之所以廢興과 與凡材用之所從出하야 敢昧死請이러니 乃命有司하사 具其事以詔臣軾하시니라
始
에 하시고 旣卽位
에 盡以
태조太祖所賜金帛
으로 作上淸宮
조양문朝陽門之內
하야 旌興王之功
하시고 且爲五代兵革之餘
의 遺民赤子
하야 請命上
태종황제帝하야 以
元年正月
에 宮成
하니 民不知勞
하야 天下頌之
러니
至
三年十二月
하야 有司不戒于火
하야 一夕而燼
하니 自是
로 爲荊棘瓦礫之場
이 凡三十七年
이니이다
二年二月
에 신종황제神宗皇帝始命道士
하야 居宮之故地
하야 以
하시니 民趨歸之
어늘 稍以其力
으로 修復祠宇
하니이다
乃賜名上淸儲祥宮
하고 且賜
과 與佛廟神祠之遺利
하야 爲錢一千七百四十七萬
하고
及所被服冠佩劍履를 以賜왕태초太初하야 所以寵之者甚備라
聞之
하시고 喟然歎曰 民不可勞也
요 兵不可役也
요 을 不可發也
나 而先帝之意
를 不可以不成
이라하시고
乃勅禁中하사 供奉之物을 務從約損하고 斥賣珠玉하야 以巨萬計라
凡所謂以天下養者를 悉歸之저상궁儲祥하야 積會所賜하니 爲錢一萬七千六百二十八萬에 而저상궁宮乃成이라
내공봉관內出
六千三百餘兩
하야 以爲
하고 召道士
하야 嗣行
왕태초太初之法
하고 命入
내공봉관內供奉官하야 典領其事
하시니이다
하니 爲三門兩廡
하고 中大殿三
이요 旁小殿九
요 鍾經樓二
요 石壇一
이며 建齋殿于東
하야 以待臨幸
하고 築道館于西
하야 以居其徒
하니 凡七百餘間
이라
雄麗靖深하야 爲天下偉觀이로되 而民不知하고 有司不與焉하니 嗚呼라
臣謹按 道家者流는 本出於황제黃帝, 노자老子하니 其道以淸淨無爲爲宗하고 以虛明應物爲用하고 以慈儉不爭爲行하야
하야 乃有
과 과 와 와 하고 下至於丹藥奇技
와 하야도 皆歸於道家
하니 學者不能必其有無
니이다
然이나 臣嘗竊論之하니 황제黃帝, 노자老子之道는 本也요 方士之言은 末也니 修其本而末自應이라
故
로 仁義不施
면 則
이 不能以降天神
이요 忠信不立
이면 則
라
한漢興
에 하니 以謂治道
는 貴淸淨而民自定
이라하야
以此爲政
한대 天下歌之曰
爲法
에 顜(講)若畫一
이러니 조참曹參代之
하야 守而勿失
이로다
臣觀上與태황태후太皇太后所以治天下者호니 可謂至矣니이다
檢身以律物故로 不怒而威하고 捐利以予民故로 不藏而富하고 屈己以消兵故로 不戰而勝하고 虛心以觀世故로 不察而明하시니 雖황제黃帝, 노자老子라도 其何以加此리잇고
本旣立矣어늘 則又惡衣菲食하고 卑宮室, 陋器用하사 斥其贏餘하야 以成此宮하사 上以終先帝未究之志하고 下以爲子孫無疆之福이라
宮成之日에 民大和會하야 鼓舞謳歌하니 聲聞于天이라
天地喜答
하야 神祇來格
하니 無求
로되 福祿自至
하야 時萬時億
하야 永作神主
라
태조太祖之功
과 태종太宗之德
과 신종神宗之志
를 而
成之
하시니 汝作銘詩
하라
通篇이 以私錢爲案하고 以爲民祈福爲幟하니 此等應制文은 不得不如此니라
황명皇命에 응하여 지은 글은 장공長公의 지극한 것이 아니나, 그의 소견과 의논은 본래 전형典刑이 있다.
신臣이 글을 쓰라는 명령을 받고 북문北門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으니, 일을 기록하여 완성하는 것이 본래 신臣의 직무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臣은 이 궁궐이 폐해지고 일어난 이유와 모든 재용材用이 어디로부터 나왔는지를 몰라서 감히 죽을죄를 무릅쓰고 물었더니, 성상聖上께서 마침내 유사有司에게 명하사 그 일을 자세히 구비하여 신 소식臣 蘇軾에게 명하셨다.
처음에 태종황제太宗皇帝께서 성聖스러운 문덕文德과 신묘한 위무威武로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시고, 즉위하신 다음에는 태조太祖께서 하사한 금백金帛을 모두 내어서 상청궁上淸宮을 조양문朝陽門 안에 지어 왕업王業을 일으킨 공功을 표하시고, 또 오대시대 병란五代時代 兵亂의 뒤에 유민遺民과 적자赤子를 위하여 상제上帝께 명命을 청하셔서 지도 원년至道 元年(995) 정월에 상청궁上淸宮이 이루어지니, 백성들은 집을 짓는 수고로움을 몰라서 천하 사람들이 칭송하였습니다.
그러나 경력慶曆 3년(1043) 12월에 유사有司가 불을 조심하지 않아서 하룻저녁에 불타 없어지니, 이로부터 가시나무와 기왓장과 자갈의 마당이 된 지 모두 37년이었습니다.
원풍元豐 2년(1079) 2월에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처음으로 도사 왕태초道士 王太初에게 명하여 상청궁上淸宮의 옛터에 거주하면서 법록法籙과 부수符水로 백성들을 위해 재앙을 물리치고 기도하게 하시니, 백성들이 달려와 모여들었으므로 차츰 그 재력을 가지고 사우祠宇를 수리하고 복구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는 일자日者의 말을 따라 “이 궁宮이 있는 이유는 국가國家와 자손子孫을 위해서이다.”라 하시어,
마침내 ‘상청저상궁上淸儲祥宮’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시고, 또 도첩度牒과 불묘佛廟(사찰寺刹)와 신사神祠의 남은 이익을 하사하여 1,747만 전錢을 장만하시고,
또 국가의 토지 14경頃을 떼어주셨으며, 옥玉 도장을 한漢나라 장도릉張道陵이 사용하던 인印과 똑같이 새기시고,
또 황제께서 입고 쓰시던 관冠과 패옥佩玉과 검劍과 신발을 왕태초王太初에게 하사하시어, 그를 총애한 것이 매우 지극하셨습니다.
그러나 궁宮이 열에 여덟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왕태초王太初가 죽었습니다.
태황태후太皇太后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위연喟然히 탄식하시기를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수 없고 병사들을 부역시킬 수 없고 대사도大司徒의 돈을 지출할 수 없으나, 선제先帝의 뜻을 이루지 않을 수 없다.”라 하시고,
마침내 금중禁中에 명하여 자신을 공양하고 받드는 물건을 되도록 절약하고 줄이도록 하고 주옥珠玉을 팔아서, 그 돈이 거만巨萬으로 헤아려졌습니다.
그리하여 이른바 ‘천하로써 봉양한다.’는 것을 모두 저상궁儲祥宮에 돌려서 하사한 것을 모아 계산해보니 1억 7,628만 전錢이 되었는데, 이에 궁宮이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내탕內帑에서 백금白金 6,300여 냥을 내어서 향화香火와 오이와 과일 등의 비용으로 삼게 하시고, 도사 유응진道士 劉應眞을 불러서 왕태초王太初의 법法을 이어 행하게 하셨으며, 내공봉관內供奉官인 진연陳衍을 불러들여 이 일을 맡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공사工事가 원우元祐 4년 봄에 시작하여 6년 가을에 끝났는데, 세 개의 문과 두 개의 행랑채를 만들고, 중앙에 큰 궁전이 셋이요 옆에 작은 궁전이 아홉이요 종루鍾樓와 장경각藏經閣이 둘이요 석단石壇이 하나이며, 재전齋殿(재계하는 집)을 동쪽에 건립하여 황제의 임행臨幸에 대비하고 도관道館을 서쪽에 건축하여 도사道士들을 거주하게 하니, 모두 7백여 칸이었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조용하고 깊숙하여 천하의 장관이 되었으나 백성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유사有司가 관여하지 않았으니, 아!
신臣이 삼가 살펴보니, 도가자道家者의 유流는 본래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에서 나왔으니, 그 도道는 청정淸淨하여 무위無爲를 종주로 삼고, 허명虛明하여 사물에 대응하는 것을 용用으로 삼으며, 인자하고 검소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행行으로 삼습니다.
그리하여 《주역周易》의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말과 《논어論語》의 “인자仁者는 고요하고 장수한다.”는 말에 부합하니, 이와 같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진秦․한시대漢時代 이래에 처음으로 방사方士들의 말을 따라 마침내 날아서 신선神仙이 되는 변화술과 《황정黃庭》․《대동大洞》의 법法과 태상太上․천진天眞․목공木公․금모金母라는 칭호와 연강延康․적명赤明․용한龍漢․개황開皇의 연기年紀와 천황天皇․태일太一․자미紫微․북극北極에 대한 제사祭祀가 있고, 아래로는 단약丹藥의 신기한 기술과 부록符籙의 작은 술수에 이르러서도 모두 도가道家로 돌리니, 배우는 자들이 이것이 참으로 있는지 없는지를 기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臣이 엎드려 논하건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도道는 근본이요 방사方士의 말은 지엽이니, 근본을 닦으면 지엽이 절로 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의仁義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소호韶濩의 음악이 천신天神을 내려오게 하지 못하고, 충신忠信이 확립되지 못하면 향사례鄕射禮가 형벌을 버리고 쓰지 않는 태평성대를 이루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을 적에 개공蓋公이 황黃․노老의 학문을 하였는데, 조참曹參이 그의 말을 따르니, 그가 이르기를 “정치하는 방도는 깨끗하고 그윽함을 귀하게 여기면 백성들이 스스로 안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조참曹參이 이대로 정사政事를 하자, 천하 백성들이 칭송하여 노래하기를 “소하蕭何가 법法을 만들 적에 ‘일一’자를 그은 것처럼 엄정하였는데, 조참曹參이 대신하여 정승이 되어서 이것을 지키고 잃지 않는도다.
그 청정淸靜함을 계승하니, 백성들이 이 때문에 편안하고 한결같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정치는 대체로 황黃․노老를 따르고 근본으로 삼아,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일을 줄이며 세금을 적게 거두고 옥사獄事를 느슨히 하여, 병사兵事를 말하지 않아서 천하가 부유해졌습니다.
신臣이 성상聖上과 태황태후太皇太后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는 것을 살펴보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셨습니다.
자신을 검속하여 남을 다스리셨기 때문에 노하지 않아도 두려워하였고, 이익利益을 덜어서 백성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재물을 쌓아두지 않아도 부유하셨고, 자기 몸을 굽혀서 병란兵亂을 없애셨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셨고,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관찰하셨기 때문에 살피지 않아도 밝으셨으니, 비록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근본이 확립되었는데 게다가 또 나쁜 옷을 입고 나쁜 음식을 드시며 궁실宮室을 낮게 짓고 기용器用을 누추하게 하시어 남은 것을 덜어 이 궁宮을 이루시어, 위로는 선제先帝께서 마치지 못한 뜻을 끝마치시고 아래로는 자손의 무궁한 복록을 만드셨습니다.
궁宮이 이루어지는 날에 백성들이 크게 화합하고 모여서 북치고 춤추고 노래하니, 그 좋아하는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립니다.
이에 천지天地가 기뻐하고 화답하여 천신天神과 지기地祇가 강림하니, 축사祝史들이 굳이 복을 바라지 않아도 복록이 스스로 이르러서 국운이 만년을 지내고 억년을 지내어서 영원히 백신百神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말하기를 “근본을 닦으면 지엽이 절로 응한다.”라고 말한 것이니,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신臣이 이 사실을 쓰자, 황제皇帝께서 말씀하시기를 “위대하다!
우리 태조太祖의 공功과 태종太宗의 덕德과 신종神宗의 뜻을 우리 성모聖母께서 완성하셨으니, 너는 명시銘詩를 지어라.
짐朕은 그 위에 ‘상청저상궁비上淸儲祥宮碑’라고 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신 소식臣 蘇軾은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명시銘詩를 올립니다.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이 바른 색色인가 아닌가?
저 천상에서 내려다볼 때도 이와 같을 것인가?
내(황제)가 상청궁上淸宮을 지으니 상서祥瑞로움을 모으는 궁宮이로다.
궁을 지어서 상제上帝를 오시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기꺼이 나를 따르겠는가?
원우元祐 연간의 정사政事는 상천上天과 하민下民들을 기쁘게 하니,
백성들은 그 인仁을 생각하고 관리들은 그 청렴함에 감복하며
귀신들은 그 바름을 두려워하고 신령들은 그 겸손함을 좋아하였네.
상제上帝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여 자식으로 여기시니
어찌 상제上帝를 섬기면서 그 자식들을 피폐하게 하겠는가?
진실로 명철하신 문모文母께서는 공公으로 사私를 멸하시어
천 기둥의 큰 궁宮을 지으셨는데, 백성들은 애당초 알지 못하였네.
아! 위대하신 조종祖宗의 신령께서 상제上帝의 좌우에 계셔서
바람 말과 구름 수레로 상제上帝를 따라와 순수巡狩하도다.
새로 지은 궁宮을 살펴보시고 백성들의 말을 살피시어
효손孝孫이 와서 제향하니 좌우에는 나이 많은 원로대신들이 있도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재로써 우리 후손을 편안히 하시도다.
많은 선비들이 상서祥瑞가 되니 문모文母께서 배양하신 바로다.
내 이것을 받아서 이루어놓은 재목을 돈독히 하리로다.
명시銘詩로 도우니 그 소리 사해四海에 진동하리로다!
전편全篇이 사전私錢을 쓴 것을 제목으로 삼고 백성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는 것으로 기치旗幟를 삼았으니, 이러한 응제應制의 글은 이와 같이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