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之以仁義하고 守之以仁義者는 周也요 取之以詐力하고 守之以詐力者는 秦也요 以秦之所以取로 取之하고 以周之所以守로 守之者는 漢也니 仁義詐力을 雜用以取天下者는 此孔明之所以失也니라
曹操因衰乘危하야 得逞其奸이어늘 孔明恥之하야 欲信(伸)大義於天下하니
當此時하야 曹公이 威震四海라 東據許, 兗하고 南收荊, 豫하니 孔明之所恃以勝之者는 獨以其區區之忠信으로 有以激天下之心耳라
夫天下廉隅節槪慷慨死義之士 固非心服曹氏也요 特以威劫而强臣之하니 聞孔明之風이면 宜其千里之外에 有響應者하리니
言兵이면 不若曹操之多요 言地면 不若曹操之廣이요 言戰이면 不若曹操之能이요 而有以一勝之者는 區區之忠信也라
孔明이 遷劉璋에 旣已失天下義士之望이어늘 乃始治兵振旅하야 爲仁義之師하야 東向長驅하야 而欲天下響應하니 蓋已難矣니라
曹操旣死에 子丕代立하니 當此之時하야 可以計破也라
어늘 而
하니 此其父子兄弟且爲寇讐
어든 而況能以得天下英雄之心哉
아
孔明이 旣不能全其信義하야 以服天下之心하고 又不能奮其智謀하야 以絶曹氏之手足하니 宜其屢戰而屢却哉인저
故로 夫敵有可間之勢而不間者는 湯, 武行之면 爲大義요 非湯, 武而行之면 爲失機니 此仁人君子之大患也니라
苟無以大過之하고 而又決不能事魏면 則天下安肯以空言竦動哉리오
蘇長公所罪孔明之取劉璋과 與其不能行間丕, 植一節은 愚未敢信이며
但其將略一節은 愚竊謂其可以守國이요 而非所以取天下者라하노라
大略先主之顧草廬하야 數言之間에 已了一生功案矣하니 何則고
卽其生平
하면 用兵之失
이 有三
하니 當關羽之鎭夏口也
에 何以不虞吳人之議其後
며 而
요
甚且
하야 已犯兵家大忌
어늘 何以黙無一言
하야 從中止之
오
卽如孔明所云 鞠躬盡瘁하야 死而後已니 其志雖勤이나 而其略이 豈足以定天下者哉리오
문장을 쓴 것은 좋으나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을 이간질하고 소원하게 한다는 것으로 계책을 삼은 것은 끝내 그림 속의 떡일 듯하다.
천하를 인의仁義로써 취하고 인의仁義로써 지킨 것은 주周나라이고, 속임수와 무력으로써 취하고 속임수와 무력으로써 지킨 것은 진秦나라이고, 진秦나라가 취한 것(속임수와 무력)으로써 취하고 주周나라가 취한 것(인의仁義)으로써 지킨 것은 한漢나라이니, 인의仁義와 속임수와 무력을 뒤섞어 써서 천하를 취하려 한 것은 바로 공명孔明(제갈량諸葛亮)의 잘못인 것이다.
조조曹操가 한漢나라의 쇠약하고 위태로운 틈을 타서 간악함을 부리자, 공명孔明이 이를 부끄러워하여 천하에 대의大義를 펴고자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조공曹公(조조曹操)의 위엄이 사해四海를 진동시켜 동쪽으로는 허창許昌과 연주兗州를 점거하고 남쪽으로는 형주荊州와 예주豫州를 점령하였으니, 공명孔明이 믿고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구구區區한 충신忠信으로 천하天下의 인심人心을 격발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저 천하에 청렴하고 절개가 있고 강개하여 의리에 죽을 수 있는 선비들이 진실로 조씨曹氏에게 심복한 것이 아니고, 다만 강압에 협박당하여 억지로 신하 노릇을 하였으니, 공명孔明의 풍도를 들으면 마땅히 천 리 밖에서 호응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다면 비록 발을 붙일 곳이 없더라도 천하 사람들이 진실로 그를 위하여 쓰일 것이다.
또 한 사람이라도 의롭지 못하게 죽이고서 천하를 얻는 것을 하지 않은 뒤에야, 천하의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기꺼이 그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유표劉表가 죽었을 적에 선주先主(유비劉備)가 형주荊州에 있었는데, 공명孔明이 형주荊州를 기습하여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선주先主가 차마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뒤 유장劉璋이 호의로 선주先主를 맞이하였는데, 촉蜀에 이른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공명孔明은 유장劉璋의 목을 조르고 등을 쳐서 나라를 빼앗으니, 이는 조조曹操와 다를 바가 거의 없는 것이다.
조씨曹氏와 유씨劉氏(유비劉備)가 서로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병력을 말하면 조조曹操처럼 많지 못하였고, 영토를 말하면 조조曹操처럼 넓지 못하였고, 전술을 말하면 조조曹操처럼 능하지 못하였으니, 오직 한 가지 더 나은 것은 구구한 충신忠信이었다.
공명孔明이 유장劉璋을 딴 곳으로 옮겨 이미 천하 의사義士들의 신망을 잃었는데,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군대를 정돈하여 인의仁義의 군대라 칭하고 동쪽으로 향하여 길게 몰아 위魏나라를 공격하면서 천하 사람들이 호응하기를 바랐으니, 이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조조曹操가 죽은 뒤에 아들 조비曹丕가 대를 이어 지위를 계승하였으니, 이때에는 계략으로 이들을 격파할 수 있었다.
조조曹操가 임종할 즈음 조비曹丕를 불러 작은 아들 조식曹植을 부탁하면서 일찍이 원소袁紹의 아들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을 가지고 경계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도, 조비曹丕가 조식曹植을 끝내 해치려 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부자간과 형제간에도 원수가 된 것인데 하물며 천하 영웅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이간질할 만한 형세가 있는 것이니, 불과 수십만 금金의 재물을 내어 대신大臣들과 골육骨肉(친족)들로 하여금 안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해치게 하고 그런 뒤에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다면, 이는 바로 한 고조漢 高祖가 항적項籍(항우項羽)을 멸망시킨 계책을 쓰는 것이다.
공명孔明은 이미 신의信義를 온전히 보전하여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하였고, 또 지모智謀를 떨쳐서 조씨曹氏의 수족을 끊지 못하였으니, 조씨曹氏와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퇴각당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적에게 이간질할 만한 형세가 있는데도 이간질하지 않는 것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이것을 행하면 대의大義가 되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아니면서 이것을 행하면 실기失機가 되는 것이니, 이는 인인仁人과 군자君子의 큰 병통인 것이다.
여온呂溫이 이르기를 “공명孔明이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뒤를 이어서 백성들에게 한漢나라를 사모할 것을 강요할 수가 없었으니, 천하의 백성들에게 널리 포고할 적에 우선 말하기를 ‘조씨曹氏(조비曹丕)가 너희들을 이롭게 하면 내가 그를 섬길 것이고, 너희들을 해롭게 하면 내가 그를 주벌할 것이다.’라고 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내 알지 못하겠다. 촉한蜀漢이 위魏나라보다 과연 크게 뛰어난 점이 있었는가?
만일 크게 뛰어난 점이 없고 또 결코 위魏나라를 섬기지 못한다면, 이러한 빈말을 가지고 어찌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의 의논이니, 입으로 말할 수는 있으나 실지로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소장공蘇長公이 공명孔明이 유장劉璋을 취한 것과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에게 이간책을 시행하지 못한 것을 비판한 이 한 구절은 내가 믿을 수가 없다.
다만 공명孔明의 장략將略에 대한 한 구절은 내가 생각하건대, 나라를 지킬 수는 있어도 천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대략 선주先主가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여 공명孔明이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사이에 이미 일생의 공안功案을 끝마쳤으니, 어째서인가?
공명孔明은 절제하는 계책은 뛰어났으나 민첩하게 움직여 승기를 휘어잡는 기운은 부족하였다.
그의 평생을 살펴보면 잘못 용병한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관우關羽가 하구夏口에 진주했을 적에 공명孔明은 어찌하여 오吳나라 사람들이 그 뒤를 의논(기습)할 것을 헤아리지 않았으며, 관우關羽가 죽자 선주先主가 눈물을 흘리면서 출병을 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분병憤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또 7백여 리에 걸쳐 길게 진영을 늘어놓아서 이미 병법가兵法家에서 크게 꺼리는 일을 범하였는데, 공명孔明은 어찌하여 묵묵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 중앙에서 이를 저지하지 않았는가?
몇 년 동안 기산祁山에 출군함에 이르렀으나, 위연魏延이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샛길로 나아가 관중關中(장안長安)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다시 나와서 공명孔明과 함께 서로 만나자는 계책’을 청함에 있어서는,
이 또한 용龍을 도륙하고 범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계책이었는데, 공명孔明은 또 어찌하여 머뭇거리고 쓰지 않았는가?
유선劉禪의 잔약함으로는 원래 대한大漢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공명孔明이 말한 “몸을 굽히고 수고로움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라는 것이니, 그 뜻은 비록 부지런하나 그 지략이 어찌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 것이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