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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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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作 本以率意而書者로되 而於中 識度自遠하니라
慶曆三年 하니 士有自京師來者하야이어늘
軾從旁竊觀하야 則能誦習其詞하고 問先生以 何人也잇고 先生曰 童子何用知之리오
軾曰 此天人也耶인댄 則不敢知어니와 若亦人耳인댄 何爲其不可잇고
先生奇軾言하야 盡以告之하고 且曰 니라
時雖未盡了 則已私識之矣로라
嘉祐二年 始擧進士하야 至京師하니 則范公沒하야 旣葬而이라
讀之至流涕하고 曰 吾得其爲人 蓋十有五年이로되 而不一見其面하니 豈非命也歟아호라
是歲登第하야 始見知於歐陽公하고 因公以識韓, 富하니 皆以國士待軾하야 曰 恨子不識范文正公이라하시다
其後三年 하야 始識公之仲子今하고 又六年 始見하고 又十一年 하니 皆一見如舊하고 且以公遺藁見屬爲序하야
又十三年 乃克爲之하니라
嗚呼
公之功德 蓋不待文而顯이요 其文亦不待序而傳이라
이나 不敢辭者 自以八歲 知敬愛公 今四十七年矣
皆得從之游로되 而公獨不識하야 以爲平生之恨하니 若獲挂(掛)名其文字中하야 以自託於門下士之末이면 豈非疇昔之願也哉
古之君子 其王伯(霸)之略 皆定於畎畝中이요 非仕而後學者也
이러니 及佐帝定天下 漢中之言 無一不酬者하며 臥草廬中하야 與先主論曹操, 孫權하고 規取劉璋이러니 因蜀之資하야 以爭天下하야 終身不易其言하니 此豈口傳耳受하야 嘗試爲之하야 而僥倖其或成者哉
公在天聖中 할새 則已有憂天下致太平之意
하야 天下傳誦이러니 考其平生所爲하면 無出此書者
今其集二十卷 爲詩賦二百六十八이요 爲文一百六十五 其於仁義禮樂, 忠信孝悌 蓋如饑渴之於飮食하야 欲須臾忘而不可得이라 如火之熱하고 如水之濕하니 蓋其天性 有不得不然者하야
雖弄翰戱語하야 率然而作이나 必歸於此 天下信其誠하야 爭師尊之하나니라
이라하시니 非有言也 德之發於口者也 又曰 이라하시니 非能戰也 니라


01. 《범문정공문집范文正公文集》의
이 작품은 본래 가벼운 뜻으로 쓴 것인데, 그 가운데 식견과 도량이 절로 원대하다.
경력慶曆 3년(1043)에 내가 처음 총각總角을 하고서 향교에 들어가니, 선비 중에 경사京師(개봉開封)에서 온 자가 나라 사람 석수도石守道(석개石介)가 지은 《경력성덕시慶曆聖德詩》를 향선생鄕先生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옆에서 가만히 보고서 그 를 외워 익히고, 선생에게 여쭙기를 “에서 칭송한 열한 분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하였더니, 선생이 말씀하기를 “동자童子가 그것을 알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분들이 천상天上의 사람이라면 제가 감히 알 수 없겠지만, 만약 또한 인간의 인물이라면 어째서 알면 안 된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나의 말을 기특히 여겨서 그 열한 분을 모두 일러주고 또 말씀하기를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부필富弼구양수歐陽脩 이 네 분은 인걸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당시에 비록 다 알지는 못했으나 이미 마음속으로 기억하였다.
가우嘉祐 2년(1057)에 내가 처음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경사京師에 오니, 범공范公이 별세하여 이미 장례를 치르고 그에 대한 묘비문墓碑文이 나왔다.
나는 비문을 읽고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그 사람됨을 안 지 15년이 되었는데 한 번도 얼굴을 뵙지 못했으니,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해에 내가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구양공歐陽公에게 인정을 받았고 을 통하여 한공韓公부공富公을 알았는데, 두 분이 모두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하며 말씀하기를 “자네가 범문정공范文正公을 알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셨다.
3년이 지난 뒤에 허주許州을 지나면서 지금 승상丞相으로 있는 의 둘째 아들인 요부堯夫를 처음 알게 되었고, 또다시 6년 후에 아우(셋째 아들)인 이수彝叟경사京師에서 처음 만나보았고, 또 11년 후에 마침내 막내인 덕유德孺서주徐州에서 동료가 되니, 모두 한 번 만나자 구면인 것처럼 친하였고, 또 유고遺稿를 나에게 보여 주고 서문序文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또다시 1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서문序文을 짓게 되었다.
아!
공덕功德은 문장을 기다리지 않고도 세상에 드러나고, 문장 또한 나의 서문序文을 기다리지 않고도 후세에 전해진다.
그런데도 내 감히 사양하지 않고 서문序文을 짓는 것은, 8세 때로부터 을 존경하고 사랑할 줄을 안 지 지금 47년이 되었다.
저 세 분의 인걸들은 내 모두 따라서 교유하였으나 유독 만은 얼굴을 알지 못하여 평생의 한으로 삼고 있으니, 만약 의 문자(글) 가운데 내 이름을 넣어서 스스로 문하사門下士의 말석에 의탁할 수 있다면, 내 어찌 오래전부터 바라던 바가 아니겠는가?
옛날 군자君子 중에 이윤伊尹태공太公, 관중管仲악의樂毅 같은 무리들은 왕도王道패도霸道의 계략이 모두 밭두렁에서 농사지을 적에 미리 정해진 것이지, 벼슬한 뒤에 배운 것이 아니었다.
회음후 한신淮陰侯 韓信고조高祖한중漢中에서 만나보고서 유방劉邦항우項羽의 장단점을 논하고 삼진三秦을 점령할 것을 획책함에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분명하게 하였는데, 고조高祖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게 되자 한중漢中에서 한 말이 하나도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초려 가운데에 누워서 선주 유비先主 劉備와 함께 조조曹操손권孫權을 논하고 유장劉璋을 취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결국은 유장劉璋 지방을 기반으로 삼아 천하를 다투어서 종신토록 자기 말을 바꾸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입으로 전해주고 귀로 얻어들어서 한번 시험삼아 해보고 혹 성공하기를 바란 것이겠는가?
천성天聖 연간에 대부인大夫人상중喪中에 있을 적에 이미 천하를 걱정하여 태평성세를 이룩할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만언萬言의 글을 지어서 재상宰相에게 보내어 천하 사람들이 그 글을 전하여 외웠는데, 이 장수로 등용되고 집정대신執政大臣으로 발탁되어 평소에 한 바를 살펴보면 그 글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지금 문집文集 20권 가운데 가 268수이고 이 165편인데, 그 내용에 인의仁義예악禮樂, 충신忠信효제孝悌에 대하여 강조한 것이 마치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에 대하여 잠시 잊고자 해도 잊을 수 없는 것과 같아서 불처럼 뜨겁고 물처럼 젖어드니, 아마도 의 천성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는 듯하다.
비록 붓을 놀리고 말을 희롱해서 갑작스레 글을 지었더라도 반드시 이 인의仁義예악禮樂, 충신忠信효제孝悌로 귀결되었으므로, 천하天下 사람들이 의 진실함을 믿어서 다투어 스승으로 높이고 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라고 하셨으니, 말이 있는 것이 아니요 이 입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싸우면 이기고 제사 지내면 복을 받는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싸움을 잘한 것이 아니요 덕이 노여움에 나타난 것이다.


역주
역주1 范文正公文集序 : 本集에는 이 편 끝에 “元祐四年四月二十一日”이란 10字가 있다.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31권에도 “東坡가 元祐 4년(1089) 4월 21일 范純仁을 위하여 그의 아버지 仲淹의 文集의 敍를 지었다.[元祐四年四月二十一日 爲范純仁 作其父仲淹文集敍]”라고 하였다. 敍는 바로 序로, 실마리를 풀어내듯 조리 있게 서술하는 글의 통칭이다. 일반적으로는 주로 書序를 이르는데, 저작의 동기나 책의 체재 등을 소개하는 글로 오늘날의 序文과 같다. 東坡는 자신의 祖父의 이름이 ‘蘇序’이므로 序자를 諱하여 글을 쓸 적에 ‘序’字는 모두 ‘敍’字로 썼는데, 茅坤이 《蘇東坡文抄》를 편집하면서 序로 통일하였다. 范文正公은 宋 仁宗 때의 명신이자 문장가인 范仲淹(989~1052)으로 字가 希文이며 蘇州 吳縣 사람이다. 眞宗 大中祥符 8년(1015)에 進士로 출사하였는데, 仁宗 때에 이르러 중앙 관리가 되었으나 재상 呂夷簡을 비판하다가 知饒州事로 좌천되었다. 康正 元年(1040)에 陝西의 經略使에 제수되고 西夏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慶曆 3년(1043)에 參知政事에 제수되었다. 范仲淹은 문장가로도 뛰어나 그의 詩賦와 산문은 모두 깊은 사회적 성찰을 담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정평이 나있다. 특히 〈岳陽樓記〉는 宋代 최고 名文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데, 여기에 있는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해야 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는 한 句는 후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名句로 范仲淹의 인품과 정치관이 잘 드러나 있어 널리 人口에 회자되고 있다.
역주2 軾始總角 入鄕校 : 總角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남녀가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 뿔 모양으로 동여맨 것을 이르는데, 《詩經》 〈齊風 甫田〉에 “예쁘고도 아름다운 동자여! 앳되게 총각머리한 것을 얼마 후 만나보면 우뚝이 관을 쓰고 있네.[婉兮孌兮 總角丱兮 未幾見兮 突而弁兮]”라고 보인다. 鄕校는 지방의 소학교를 이른다. 《東坡志林》에 “나는 8세에 小學에 들어가서 道士 張易簡을 따라 배웠다.[吾八歲入小學 從道士張易簡]”라고 보인다.
역주3 魯人石守道所作慶曆聖德詩 : 石守道(1005~1045)는 이름이 介로 守道는 그의 字이다. 兗州 奉符(지금의 山東省 泰安) 사람인데, 兗州는 본래 魯나라 땅이었으므로 魯人이라고 칭한 것이다. 학문에 독실하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國子監直講과 太子中允을 역임하였는바, 古文運動의 창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慶曆 3년(1043)에 仁宗이 재상 呂夷簡과 樞密使 夏竦을 물러나게 하고, 杜衍을 樞密使로 范仲淹․富弼․韓琦를 樞密副使으로 삼고 歐陽脩․余靖․王素․蔡襄을 諫官으로 삼아 政事를 일신하자, 石介가 크게 기뻐하여 〈慶曆聖德詩〉를 지어 올렸다.
역주4 鄕先生 : 지방의 선생이란 뜻으로 그리 유명하지 않은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
역주5 所頌十一人者 : 《慶曆聖德詩》에 노래한 杜衍․章得象․晏殊․賈昌朝․范仲淹․富弼․韓琦․歐陽脩․余靖․王素․蔡襄을 이른다.
역주6 韓范富歐陽此四人者 人傑也 : 韓은 韓琦(1008~1075)로 字가 稚圭이고 號가 贛叟이며 安陽 사람이다. 天聖 5년(1027) 약관의 나이에 진사가 되어 右司諫, 樞密院直學士 등을 역임하였고 仁宗 嘉祐 4년(1059)부터 英宗 治平 4년(1067)까지 재상으로 있었다.
范은 范仲淹이며, 富는 富弼(1004~1083)로 字가 彦國이고 河南 洛陽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范仲淹, 晏殊 등에게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고 晏殊의 사위가 되었다. 외교에 뛰어나 契丹과의 협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文彦博과 함께 재상에 올랐으나 王安石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뒤에 鄭國公에 봉해졌고 시호는 文忠이다.
歐陽은 歐陽脩(1007~1072)로 字가 永叔이며 醉翁 또는 六一居士로 自號하였다. 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으로 韓愈와 함께 古文運動의 영수로 꼽히며 벼슬이 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역주7 墓碑出 : 墓碑는 歐陽脩가 지은 〈資政殿學士 文正范公神道碑銘〉을 이른다.
역주8 過許 : 許는 許州(지금의 河南省 許昌)를 이른다. 嘉祐 5년(1060) 東坡는 모친의 服喪을 마치고 아우 子由(蘇轍)와 함께 아버지 蘇洵을 모시고 개봉으로 돌아왔는데, 이해 2월에 許州를 경유하였다.
역주9 丞相堯夫 : 堯夫는 范仲淹의 둘째 아들 范純仁의 字이다. 哲宗 때에 尙書僕射 겸 中書侍郞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丞相이라고 칭하였다. 范仲淹에게는 모두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長子는 純佑이고 次子(仲子)는 純仁이고 三子(叔子)는 純禮이고 四子(季子)는 純粹이다.
역주10 其叔彝叟京師 : 彝叟는 范仲淹의 셋째 아들인 純禮의 字이다. 哲宗 때에 給事中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東坡와 교유하였으며, 벼슬이 尙書右丞에 이르렀다. 叔은 세 번째 排行을 이른다.
역주11 遂與其季德孺 同僚于徐 : 德孺는 范仲淹의 넷째 아들 純粹의 字이다. 일찍이 徐州에 속해 있는 滕縣을 맡은 적이 있는데, 이때 東坡가 知徐州事였으므로 同僚라고 말한 것이다. 벼슬이 戶部侍郞에 이르렀다. 季는 네 번째 排行을 이른다.
역주12 彼三傑者 : 韓琦, 富弼, 歐陽脩의 세 사람을 이른다.
역주13 伊尹太公管仲樂毅之流 : 伊尹은 商나라를 개국한 成湯의 재상이다. 尹은 관명인 尹正의 尹이고 이름은 摯이다. 후세의 冢宰와 같은 阿衡을 맡고 成湯을 도와 夏나라 桀王을 정벌하고 商나라를 개국하였으며, 湯王의 손자인 太甲이 즉위한 다음 무도한 짓을 자행하자 추방하였다가 다시 왕위에 복위시키고 자신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太公은 周나라 武王의 軍師로 周나라의 군대를 지휘하여 商나라를 멸망시킨 太公望을 이른다. 본명은 呂尙으로 姓이 姜이어서 姜太公이라고도 불리는데, 兵略에 뛰어나 商나라 紂王을 토벌하고 周나라를 천자국으로 만들었으며, 兵法書인 《六韜》와 《三略》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管仲은 春秋時代 齊나라의 名相으로 이름이 夷吾이며, 仲은 그의 字인데 평소 字로 행세하였다. 潁上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鮑叔牙와 친하여 管鮑之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원래 桓公의 政敵이었으나 桓公의 중신인 鮑叔牙의 천거로 재상이 되어 桓公을 도와 霸業을 이루고 仲父로 일컬어졌다. 저서에는 《管子》 17권이 있다.
樂毅는 戰國時代 燕나라의 명장이다. 戰國時代 중엽에 燕나라는 齊나라의 침공을 받아 燕王 噲가 죽고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 燕나라 사람들이 太子 平을 세우니, 이가 바로 昭王이다. 昭王이 齊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樂毅를 大將軍으로 등용하자, 樂毅는 齊나라를 공격하여 70여 城을 함락하는 큰 공을 세웠다. 昭王이 죽고 태자인 惠王이 즉위하였는데, 惠王이 齊나라의 반간계에 말려들어 樂毅를 의심하고 직위를 박탈하자, 樂毅는 趙나라로 망명하였다. 趙나라에서 樂毅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樂毅는 끝까지 따르지 않고 燕나라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역주14 淮陰侯……畫取三秦如指諸掌 : 淮陰侯는 漢나라의 개국공신인 韓信이 楚王에 봉해졌다가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사로잡힌 뒤에 강등된 봉호이며, 三秦은 項羽가 秦나라를 점령한 다음 이 지역을 셋으로 나눈 것으로, 項羽에게 항복한 秦나라 장수 章邯을 雍王으로, 司馬欣을 塞王으로, 董翳를 翟王으로 봉하여 왕 노릇하게 하고, 이들을 三秦의 왕이라고 칭하였다.
이 내용은 《史記》 〈淮陰侯列傳〉에 “韓信을 대장으로 임명하는 禮가 끝나자, 韓信이 자리에 오르니, 漢王(劉邦)이 말하기를 ‘丞相(蕭何)이 여러 번 장군을 칭찬하였는데, 장군은 무엇으로 寡人에게 계책을 가르쳐 주겠는가?’라고 하였다. 韓信이 사례하고 인하여 漢王에게 묻기를 ‘지금 동쪽을 향하여 천하의 패권을 다툴 자는 어찌 項王(項羽)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니, 漢王이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韓信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스스로 헤아려 보시건대 용맹하고 위엄스럽고 인자하고 강함이 項王과 더불어 누가 낫다고 여기십니까?’ 하니, 漢王이 한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그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자 韓信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또한 대왕이 그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臣이 일찍이 項王을 섬겼으니, 項王의 사람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項王이 노하여 질타하면 천 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쓰러져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진 장수에게 맡기지 못하니, 이는 다만 匹夫의 용맹일 뿐입니다. 項王은 사람을 만나볼 적에 공경하고 자애로워 언어가 온화하며 사람들이 질병을 앓으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사람을 부려 공이 있어서 封爵해야 할 경우에 이르면 새로 만든 印이 닳아서 망가져도 차마 주지 못하니, 이는 이른바 婦人의 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項王이 비록 천하에 霸王이 되어 諸侯들을 신하로 삼고 있으나 關中에 거하지 않고 彭城에 도읍하며, 義帝를 추방하고 지나가는 곳마다 잔인하게 멸망시키지 않음이 없으니, 이름은 비록 霸王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천하의 인심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강함은 약해지기가 쉽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진실로 그 方道를 반대로 하시어 천하의 굳세고 용감한 자에게 맡기시면 어떤 사람인들 주벌하지 못하겠으며, 천하의 城邑을 가지고 功臣들을 봉하시면 어떤 사람인들 굴복시키지 못하겠으며, 義로운 군대를 데리고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군사들을 따르시면 어떤 사람인들 해산시키지 못하겠습니까?
또 三秦의 王들은 秦나라의 장수로 秦나라 자제를 거느린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그 무리를 속이고 諸侯들의 연합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그런데 新安에 이르러 項王이 秦나라의 항복한 군사 20여만 명을 속여서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유독 章邯과 司馬欣과 董翳만이 빠져 나오니, 秦나라 父兄들이 이 세 사람을 원통해 하는 마음이 골수에 사무칩니다. 이제 楚나라가 억지로 위엄을 내세워 이 세 사람을 왕으로 봉하니, 秦나라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關中에 들어가 털끝만큼도 해친 바가 없고 秦나라의 까다로운 법령을 제거하시니, 秦나라 백성들이 대왕을 얻어 秦나라의 왕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제 대왕이 군대를 들어 동쪽으로 진출하시면 三秦은 檄文만 돌리고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漢王이 크게 기뻐하여 스스로 韓信을 얻음이 늦었다고 여기고 마침내 韓信의 계책을 따랐다.[信拜禮畢上坐 王曰 丞相數言將軍 將軍何以敎寡人計策 信辭謝 因問王曰 今東鄕爭權天下 豈非項王邪 漢王曰 然 曰 大王自料勇悍仁强 孰與項王 漢王良久曰 不如也 信曰 信亦以爲大王不如也 然臣嘗事之 請言項王之爲人也 項王喑啞叱咤 千人自廢 然不能任屬賢將 此特匹夫之勇 項王見人 恭敬慈愛 言語嘔嘔 人有疾病 涕泣分食飮 至使人有功當封爵者 印刓敝 忍不能予 此所謂婦人之仁也 項王雖霸天下而臣諸侯 不居關中而都彭城 放逐義帝 所過無不殘滅 名雖爲霸 實失天下心 故其彊易弱 今大王誠能反其道 任天下武勇 何所不誅 以天下城邑封功臣 何所不服 以義兵從思東歸之士 何所不散 且三秦王爲將 將秦子弟數歲矣 欺其衆 降諸侯 至新安 項王詐坑秦降卒二十餘萬 唯獨邯欣翳得脫 秦父兄怨此三人 痛入骨髓 今楚彊以威王此三人 秦民莫愛也 大王入關 秋毫無所害 除秦苛法 秦民無不欲得大王王秦者 今大王擧 而三秦可傳檄而定也 於是 漢王大喜 自以爲得信晩 遂聽信計]”라고 보인다.
역주15 諸葛孔明 : 諸葛亮(181~234)으로 孔明은 그의 字이다. 삼국시대 蜀漢의 명재상이다. 琅邪 陽都 사람으로 襄陽의 隆中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司馬徽와 徐庶의 추천을 받은 劉備가 그를 초치하기 위해 禮를 다하여 草廬에 세 번 방문하자, 이에 감복하여 劉備에게 天下三分之計를 갈파하고 軍師가 되어 劉備를 섬겼다.
曹操가 劉備와 孫權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諸葛亮은 孫權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曹操를 赤壁에서 대파하여 荊州를 점령하였으며, 이어 四川의 益州를 차지하고 劉備로 하여금 蜀漢의 황제로 등극하게 하여 魏․吳․蜀 삼국의 시대를 열었다.
劉備가 죽고 난 뒤 後主 劉禪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後主 建興 12년(234) 北伐 중에 五丈原에서 魏나라의 司馬懿와 대치하던 도중 병으로 쓰러져 죽었다. 생전에 일체 재산을 증식하지 않았으며, 죽은 뒤에 武侯라는 시호를 받아 諸葛武侯로 통한다.
역주16 居大夫人憂 : 居憂는 부모의 喪을 당하여 服喪함을 이르고, 大夫人은 范仲淹의 어머니를 이른다.
역주17 爲萬言書 以遺宰相 : 萬言은 萬字에 달하는 장편의 글을 이르며, 宰相은 晏殊를 가리킨다.
朱子가 지은 《八朝名臣言行錄》에 “승상 晏殊가 南京의 留守로 있었는데, 이때 范仲淹이 모친상을 당하여 성 밑에 寓居하고 있었다. 이에 晏公이 南京府의 小學을 맡아줄 것을 청하자, 范仲淹은 항상 학교 안에서 유숙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감독하였다.……
范仲淹은 복상이 끝나고 京師에 이르자, 宰相에게 글을 올려 朝政의 得失과 백성들의 이해를 말한 것이 모두 만여 字였는데, 王曾이 이를 보고 훌륭하게 여겼다. 이때 晏殊 또한 京師에 있었는데, 한 사람을 천거하여 館閣의 직책을 맡겼다. 王曾이 晏殊에게 이르기를 ‘公은 范仲淹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를 천거하지 않고 이 사람을 천거하는가?……마땅히 다시 范仲淹을 천거하여야 한다.’라고 하니, 晏殊가 그의 말을 따라 마침내 館閣의 직책을 范仲淹에게 제수하게 하였다.[晏丞相殊 留守南京 仲淹遭母憂 寓居城下 晏公請掌府學 仲淹嘗宿學中訓督……服除 至京師 上宰相書 言朝政得失民間利病 凡萬餘言 王曾見而偉之 時晏殊亦在京師 薦一人爲館職 曾謂殊曰 公知范仲淹 捨不薦而薦斯人乎……宜更薦仲淹也 殊從之 遂除館職]”라고 보인다.
역주18 至用爲將 擢爲執政 : 范仲淹은 仁宗 康正 元年(1040)에 陝西의 安撫經略招討使로 제수되어 西夏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慶曆 3년(1043)에는 參知政事에 제수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9 孔子曰 有德者必有言 : 이 내용은 《論語》 〈憲問〉에 “德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지만, 훌륭한 말이 있는 자는 반드시 德이 있지는 못하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고 보이는데, 朱子의 《論語集註》에 “德이 있는 자는 和順이 心中에 쌓여서 아름다운 榮華가 밖으로 나타나고, 말을 잘하는 자는 혹 말재주가 있어 口給(口辯)을 잘할 뿐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20 我戰則克 祭則受福 : 이 내용은 《禮記》 〈禮器〉에 “孔子께서 ‘나는 싸우면 이기고 祭祀 지내면 福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그 道를 얻었기 때문이다.[孔子曰 我戰則克 祭則受福 蓋得其道矣]”라고 보인다.
역주21 德之見於怒者也 : 德이 노여움에 나타난다는 것은 無道한 짓을 자행하는 군주를 토벌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을 이른다.
《孟子》 〈梁惠王 下〉에 孟子께서 齊나라 宣王과 용맹을 말씀하면서 “《詩經》에 이르기를 ‘文王께서 赫然히 노하시어 이에 그 군대를 정돈하여 阮나라를 침략하러 가는 密나라의 군대를 막아서 周나라의 福을 돈독히 하여 天下에 보답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文王의 勇이니, 文王이 한 번 노하시어 天下의 백성을 편안히 하셨습니다.
《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下民을 내리셔서 그 君主를 삼고 스승을 삼아주는 것은 上帝를 돕기 때문에 그를 사방에 특별히 총애해서이다. 죄가 있는 자이든 죄가 없는 자이든 내가 책임지고 있으니, 天下에 어찌 감히 그 마음을 제멋대로 하는 자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한 사람(紂王)이 天下에 橫行하거늘 武王이 이것을 부끄러워하셨으니, 이것은 武王의 勇이니, 武王이 또한 한 번 노하여 天下의 백성을 편안히 하셨습니다.[詩云 王赫斯怒 爰整其旅 以遏徂莒 以篤周祜 以對于天下 此文王之勇也 文王 一怒而安天下之民 書曰 天降下民 作之君作之師 惟曰其助上帝 寵之四方 有罪,無罪에 惟我在 天下曷敢有越厥志 一人衡行於天下 武王恥之 此武王之勇也 而武王亦一怒而安天下之民]”라고 하신 내용이 보인다.
詩는 《詩經》 〈大雅 皇矣〉이고 書는 《書經》 〈周書 泰誓〉인데, 《書經》의 내용은 “하늘이 下民들을 도우시어 君主를 만들고 스승을 만드심은 그 군주가 능히 上帝를 도와 四方을 사랑하고 편안하게 하기 때문이니, 罪가 있는 자를 토벌하고 罪가 없는 자를 용서함에 내 어찌 감히 그 마음을 잘못함이 있겠는가.[天佑下民 作之君作之師 惟其克相上帝 寵綏四方 有罪無罪 予曷敢有越厥志]”라고 하여, 《孟子》의 인용문과 약간 다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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