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作은 本以率意而書者로되 而於中에 識度自遠하니라
慶曆三年
에 하니 士有自京師來者
하야 以
로 示
이어늘
軾從旁竊觀
하야 則能誦習其詞
하고 問先生以
는 何人也
잇고 先生曰 童子何用知之
리오
軾曰 此天人也耶인댄 則不敢知어니와 若亦人耳인댄 何爲其不可잇고
嘉祐二年
에 始擧進士
하야 至京師
하니 則范公沒
하야 旣葬而
이라
讀之至流涕하고 曰 吾得其爲人이 蓋十有五年이로되 而不一見其面하니 豈非命也歟아호라
是歲登第하야 始見知於歐陽公하고 因公以識韓, 富하니 皆以國士待軾하야 曰 恨子不識范文正公이라하시다
其後三年
에 하야 始識公之仲子今
하고 又六年
에 始見
하고 又十一年
에 하니 皆一見如舊
하고 且以公遺藁見屬爲序
하야
公之功德은 蓋不待文而顯이요 其文亦不待序而傳이라
然이나 不敢辭者는 自以八歲로 知敬愛公이 今四十七年矣라
는 皆得從之游
로되 而公獨不識
하야 以爲平生之恨
하니 若獲挂(掛)名其文字中
하야 以自託於門下士之末
이면 豈非疇昔之願也哉
아
古之君子
에 如
는 其王伯(霸)之略
이 皆定於畎畝中
이요 非仕而後學者也
라
이러니 及佐帝定天下
에 漢中之言
이 無一不酬者
하며 은 臥草廬中
하야 與先主論曹操, 孫權
하고 規取劉璋
이러니 因蜀之資
하야 以爭天下
하야 終身不易其言
하니 此豈口傳耳受
하야 嘗試爲之
하야 而僥倖其或成者哉
아
故
로 하야 天下傳誦
이러니 에 考其平生所爲
하면 無出此書者
라
今其集二十卷에 爲詩賦二百六十八이요 爲文一百六十五니 其於仁義禮樂, 忠信孝悌에 蓋如饑渴之於飮食하야 欲須臾忘而不可得이라 如火之熱하고 如水之濕하니 蓋其天性에 有不得不然者하야
雖弄翰戱語하야 率然而作이나 必歸於此라 故로 天下信其誠하야 爭師尊之하나니라
이라하시니 非有言也
요 德之發於口者也
며 又曰
이라하시니 非能戰也
요 니라
이 작품은 본래 가벼운 뜻으로 쓴 것인데, 그 가운데 식견과 도량이 절로 원대하다.
경력慶曆 3년(1043)에 내가 처음 총각總角을 하고서 향교에 들어가니, 선비 중에 경사京師(개봉開封)에서 온 자가 노魯나라 사람 석수도石守道(석개石介)가 지은 《경력성덕시慶曆聖德詩》를 향선생鄕先生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옆에서 가만히 보고서 그 시詩를 외워 익히고, 선생에게 여쭙기를 “시詩에서 칭송한 열한 분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하였더니, 선생이 말씀하기를 “동자童子가 그것을 알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분들이 천상天上의 사람이라면 제가 감히 알 수 없겠지만, 만약 또한 인간의 인물이라면 어째서 알면 안 된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나의 말을 기특히 여겨서 그 열한 분을 모두 일러주고 또 말씀하기를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부필富弼․구양수歐陽脩 이 네 분은 인걸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당시에 비록 다 알지는 못했으나 이미 마음속으로 기억하였다.
가우嘉祐 2년(1057)에 내가 처음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경사京師에 오니, 범공范公이 별세하여 이미 장례를 치르고 그에 대한 묘비문墓碑文이 나왔다.
나는 비문을 읽고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그 사람됨을 안 지 15년이 되었는데 한 번도 얼굴을 뵙지 못했으니,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해에 내가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구양공歐陽公에게 인정을 받았고 공公을 통하여 한공韓公과 부공富公을 알았는데, 두 분이 모두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하며 말씀하기를 “자네가 범문정공范文正公을 알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셨다.
3년이 지난 뒤에 허주許州을 지나면서 지금 승상丞相으로 있는 공公의 둘째 아들인 요부堯夫를 처음 알게 되었고, 또다시 6년 후에 아우(셋째 아들)인 이수彝叟를 경사京師에서 처음 만나보았고, 또 11년 후에 마침내 막내인 덕유德孺와 서주徐州에서 동료가 되니, 모두 한 번 만나자 구면인 것처럼 친하였고, 또 공公의 유고遺稿를 나에게 보여 주고 서문序文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또다시 1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서문序文을 짓게 되었다.
공公의 공덕功德은 문장을 기다리지 않고도 세상에 드러나고, 문장 또한 나의 서문序文을 기다리지 않고도 후세에 전해진다.
그런데도 내 감히 사양하지 않고 서문序文을 짓는 것은, 8세 때로부터 공公을 존경하고 사랑할 줄을 안 지 지금 47년이 되었다.
저 세 분의 인걸들은 내 모두 따라서 교유하였으나 유독 공公만은 얼굴을 알지 못하여 평생의 한으로 삼고 있으니, 만약 공公의 문자(글) 가운데 내 이름을 넣어서 스스로 문하사門下士의 말석에 의탁할 수 있다면, 내 어찌 오래전부터 바라던 바가 아니겠는가?
옛날 군자君子 중에 이윤伊尹과 태공太公, 관중管仲과 악의樂毅 같은 무리들은 왕도王道와 패도霸道의 계략이 모두 밭두렁에서 농사지을 적에 미리 정해진 것이지, 벼슬한 뒤에 배운 것이 아니었다.
회음후 한신淮陰侯 韓信은 고조高祖를 한중漢中에서 만나보고서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장단점을 논하고 삼진三秦을 점령할 것을 획책함에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분명하게 하였는데, 고조高祖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게 되자 한중漢中에서 한 말이 하나도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초려 가운데에 누워서 선주 유비先主 劉備와 함께 조조曹操와 손권孫權을 논하고 유장劉璋을 취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결국은 유장劉璋의 촉蜀 지방을 기반으로 삼아 천하를 다투어서 종신토록 자기 말을 바꾸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입으로 전해주고 귀로 얻어들어서 한번 시험삼아 해보고 혹 성공하기를 바란 것이겠는가?
공公이 천성天聖 연간에 대부인大夫人의 상중喪中에 있을 적에 이미 천하를 걱정하여 태평성세를 이룩할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만언萬言의 글을 지어서 재상宰相에게 보내어 천하 사람들이 그 글을 전하여 외웠는데, 공公이 장수로 등용되고 집정대신執政大臣으로 발탁되어 평소에 한 바를 살펴보면 그 글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지금 문집文集 20권 가운데 시詩와 부賦가 268수이고 문文이 165편인데, 그 내용에 인의仁義와 예악禮樂, 충신忠信과 효제孝悌에 대하여 강조한 것이 마치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에 대하여 잠시 잊고자 해도 잊을 수 없는 것과 같아서 불처럼 뜨겁고 물처럼 젖어드니, 아마도 공公의 천성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는 듯하다.
비록 붓을 놀리고 말을 희롱해서 갑작스레 글을 지었더라도 반드시 이 인의仁義와 예악禮樂, 충신忠信과 효제孝悌로 귀결되었으므로, 천하天下 사람들이 공公의 진실함을 믿어서 다투어 스승으로 높이고 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德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라고 하셨으니, 말이 있는 것이 아니요 덕德이 입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싸우면 이기고 제사 지내면 복을 받는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싸움을 잘한 것이 아니요 덕이 노여움에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