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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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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전국시대 임협任俠에 대한
或謂唐末之 五代之 皆客游類라하니라
혹자는 나라 말기의 방훈龐勛오대시대五代時代번약수樊若水 같은 사람이 모두 세객說客으로 유세游說하는 부류라고 한다.
春秋之末 至於戰國 하야, , 之流 下至之徒 하야 靡衣玉食以館於(上)[舍]者 何可勝數리오
춘추시대 말엽으로부터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제후諸侯경상卿相들이 모두 다투어 선비를 길러서 모부謀夫세객說客, 하늘을 말하고 을 조각하고 견백동이堅白同異를 말하는 부류로부터 아래로 으로 치고 구정九鼎을 들어 올리고 닭 울음소리를 흉내내고 개처럼 도둑질을 잘하는 무리에 이르기까지 빈객賓客으로 예우하지 않음이 없어서, 화려한 옷을 입고 쌀밥을 먹고 좋은 집에 거주한 자를 어찌 이루 다 셀 수 있었겠는가?
越王句踐 有君子六千人하고 皆有客三千人이로되 而田文 하고 이며 皆致客無數
월왕 구천越王 句踐군자君子(문객門客) 6천 명이 있었고, 나라의 무기無忌(신릉군信陵君)와 나라의 전문田文(맹상군孟嘗君)과 나라의 조승趙勝(평원군平原君)과 나라의 황헐黃歇(춘신군春申君)과 나라의 여불위呂不韋는 모두 문하門下에 3천 명의 식객食客이 있었는데, 그중에 전문田文임협任俠간인姦人 6만 가호를 자기 식읍食邑설읍薛邑으로 초치하였고 나라 직하稷下 지방에 세객說客들이 또한 1천 명에 이르렀으며, 나라 문후文侯나라 소왕昭王, 나라 태자 단太子 丹빈객賓客을 초치한 것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下至秦漢之間하야도 號多士하야 賓客廝養 皆天下豪傑이요亦有士五百人이라
이후로 나라와 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장이張耳진여陳餘문하門下에 선비가 많기로 이름나서 빈객賓客노복奴僕들도 모두 천하의 호걸이었고, 전횡田橫 또한 선비 5백 명이 있었다.
其略見於傳記者 如此하니度其餘하면 當倍官吏而半農夫也
전기傳記에 대략 보이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를 헤아려보면 그 숫자가 마땅히 관리의 갑절이 되고 농부의 절반이 되었을 것이다.
此皆姦民蠹國者 民何以支 而國何以堪乎
이들은 모두 간사한 백성으로 나라를 좀먹는 자들이니, 〈이들이 이렇게 많고서〉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하며 나라가 어떻게 감당하였겠는가?
蘇子曰
소자蘇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先王之所不能免也
이는 선왕先王도 면하지 못한 바이다.
國之有姦也 猶鳥獸之有猛鷙 昆蟲之有毒螫也 區處條理하야 使各安其處 則有之矣어니와 鋤而盡去之 則無是道也
나라에 간사한 백성이 있는 것은 새와 짐승 중에 맹수猛獸맹금猛禽이 있고 곤충 중에 독충毒蟲이 있는 것과 같으니, 조리에 맞게 잘 대처해서 각각 그 자리를 편안히 하게 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것을 제거해서 모두 없애는 그런 방도는 없는 것이다.
吾考之世變하야 知六國之所以久存 而秦之所以速亡者 蓋出於此하니 不可以不察也니라
내가 세상의 변고를 고찰하여 육국六國이 오랫동안 보존한 이유와 나라가 속히 멸망한 이유가 다 여기에서 나왔음을 알았으니, 이것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夫智, 勇, 辯, 力 此四者 皆天民之秀傑者也
지혜와 용맹, 구변과 힘을 가진 네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낸 사람 중에 빼어나고 걸출한 자들이다.
이요 皆役人以自養者也
이들은 대부분 스스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먹어 남을 기르지 못하고, 모두 남을 부려서 자신을 기르는 자들이다.
先王 分天下之富貴하야 與此四者共之하시니 此四者不失職이면 則民靖矣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천하의 부귀를 나누어 이 네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하셨으니,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직책을 잃지 않고 길러짐이 있으면 백성들이 안정된다.
四者雖異 先王 因俗設法하야 使出于一하니 三代以上 出於學하고 戰國至秦 出於客하고 漢以後 出於郡縣吏하고 魏晉以來 出於하고 隋唐至今 出於科擧하니 雖不盡然이나 取其多者論之
네 부류의 사람들은 행위가 비록 다르나 선왕先王이 풍속을 따라 법을 만들어서 이들로 하여금 한 길로 나오게 하였으니, 삼대三代 이상은 학문學問에서 나오고, 전국시대로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세객說客에서 나오고, 나라 이후는 군현郡縣관리官吏에서 나오고, 이래로는 구품중정九品中正에서 나오고, 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과거科擧에서 나왔으니, 이는 비록 모두 그렇지는 않으나 그중에 많은 것을 취하여 논한 것이다.
六國之君 虐用其民 不減始皇, 二世
육국六國의 군주들이 백성들을 모질게 부린 것이 나라의 시황제始皇帝이세황제二世皇帝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나 當是時하야 百姓無一人叛者 以凡民之秀傑者 多以客養之하야 不失職也일새라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 백성 중에 한 사람도 배반한 자가 없었으니, 이는 평민 중에 빼어나고 걸출한 자들을 대부분 식객食客으로 길러서 직책을 잃지 않게 했기 때문이었다.
其力耕以奉上 皆椎魯無能爲者
농사에 힘써서 윗사람을 받드는 것은 모두 용렬하고 노둔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雖欲怨叛이나 而莫爲之先하니 此其所以少安而不卽亡也니라
이들은 비록 조정을 원망하여 배반하고자 하나 자신들을 위해서 앞장서줄 자들이 없으니, 이것이 나라가 다소 편안하여 즉시 망하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러니 旣幷天下에는 則以客爲無用하야 於是 任法而不任人하야
시황제始皇帝가 처음에 을 축출하고자 하다가 이사李斯의 말을 듣고서 중지하였는데, 천하를 병합하고 나서는 을 쓸모없다고 여겨서 마침내 법에 맡기고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謂民可以恃法而治라하고 謂吏不必才取 能守吾法而已
그리하여 시황제始皇帝는 법만 있으면 백성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관리는 굳이 인재를 취할 필요가 없고 나라의 법을 잘 지키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墮(隳)名城하고 殺豪傑하야 民之秀異者 散而歸田畝하니 向之食於四公子, 呂不韋之徒者 皆安歸哉
그러므로 유명한 을 허물고 호걸들을 죽여서 백성들 중에 빼어나고 특이한 자들이 흩어져 전묘田畝로 돌아갔으니, 지난날 네 명의 공자公子여불위呂不韋에게 얻어먹던 무리들이 다 어디로 돌아갔겠는가?
不知케라
알지 못하겠다.
其能槁項黃馘하야 以老死於
이들이 참으로 목이 비쩍 마르고 얼굴이 부황으로 누렇게 뜬 채 포갈布褐로 늙어 죽었을 것인가?
抑將輟耕太息以俟時也
아니면 장차 밭 가는 것을 그만두고 크게 탄식하면서 때를 기다렸겠는가?
秦之亂 雖成於二世 然使始皇 知畏此四人者하야 有以處之하야 使不失職이런들 秦之亡 不至若是速也리라
나라의 혼란이 비록 이세황제二世皇帝 때에 이루어졌으나, 만일 시황제始皇帝가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두려워할 줄 알아서 이들을 잘 대처하여 이들로 하여금 직책을 잃지 않게 했더라면, 나라가 이처럼 빠르게 멸망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縱百萬虎狼於山林하야 而饑渴之하고 不知其將噬人하니 世以始皇爲智 吾不信也로라
백만 마리의 호랑이와 이리를 산림에 풀어놓아 굶주리고 목마르게 하고서 이들이 장차 사람을 물어 죽일 줄을 알지 못했으니, 세상에서 시황제始皇帝를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楚漢之禍 生民盡矣 豪傑宜無幾어늘 而代相從車千乘이로되 蕭, 曹爲政 莫之禁也하고
나라와 나라의 병화兵禍에 백성들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마땅히 호걸들도 거의 다 없어졌을 것이나, 대왕代王의 정승인 진희陳豨는 따르는 수레가 천승千乘이었는데도 소하蕭何조참曹參정사政事를 펼 적에 이것을 금하지 않았다.
至文, 景, 武之世하야 法令至密이나之流 皆爭致賓客이로되 世主不問也하니
문제文帝경제景帝무제武帝의 세상에 이르러 법령이 지극히 엄밀하였으나, 오왕 유비吳王 劉濞회남왕淮南王(유안劉安)과 양왕梁王(유무劉武), 위기후魏其侯(두영竇嬰)와 무안후武安侯(전분田蚡)의 무리들이 모두 다투어 빈객을 초청하였는데도 군주가 이것을 묻지 않았다.
豈懲秦之禍하야 以爲爵祿不能盡縻天下士 少寬之하야 使得或出於此也邪
이는 어찌 나라의 를 경계로 삼아 작록爵祿으로는 천하의 선비를 다 얽어맬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다소 늦춰주어 이들로 하여금 혹 이 길로 나오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若夫先王之政 則不然하야라하니 嗚呼
선왕先王의 정사로 말하면 그렇지 않아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군자君子를 배우면 인민을 사랑하고, 소인小人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라고 하였으니, 아!
此豈秦漢之所及哉리오
이것이 어찌 나라와 나라가 미칠 바이겠는가?
역주
역주1 戰國任俠論 : 이 글은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제목이 郎曄의 《經進東坡文集史略》에는 〈六國論〉으로, 本集에는 〈論養士〉로 되어 있다. 任俠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구제하는 豪俠으로 자임하는 俠客을 이른다.
역주2 龐勛 : 唐나라 때 반란군의 우두머리이다. 懿宗 咸通 9년(868)에 桂林에 주둔해 있던 徐州와 泗州의 병사 8백여 명이 수자리 사느라 오랫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지휘관을 죽이고 龐勛을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북상하면서 湖南과 浙西를 거쳐 淮南에 들어가 난을 일으켰다.
역주3 樊若水 : 北宋 초기 長安 사람으로, 太祖 때에 南方을 정벌하기 위해 平南策이라는 계책을 세웠다고 한다.
역주4 諸侯卿相 皆爭養士 : 諸侯와 卿相들이 앞을 다투어 士를 초치하여 門下에 두고 衣․食․住를 책임진 것을 이른다. 춘추시대 이래로 이른바 ‘士’에는 策士와 俠士․辯士가 있었는데, 본문에서는 이들을 모두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
역주5 謀夫說客 : 謀夫는 계책을 내는 謀士를 이르고, 說客은 趨時附勢하여 권모술수의 계책으로 諸侯들 사이에 遊說하는 자들을 이른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合從을 주장한 蘇秦과 連橫을 주장한 張儀가 대표적 인물이며, 이외에도 蘇秦의 아우 蘇代와 蘇厲, 公孫衍․淳于髡 등의 많은 辯士가 있었다.
역주6 談天雕龍 : 談天은 하늘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전국시대 齊나라의 陰陽家인 鄒衍을 가리킨다. 그는 陰陽五行을 기초하여 하늘의 일에 대해 잘 말했으므로 齊나라 사람들이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는 鄒衍[談天衍]”이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陰과 陽의 사라지고 자라남을 깊이 관찰하고, 황당무계하고 현실과 거리가 먼 변화와 환상의 일을 주제로 〈終始〉․〈大聖〉 등 10여 만 자에 달하는 책을 저술하였다.
雕龍은 전국시대 齊나라의 術士인 騶奭을 가리킨다. 그는 鄒衍의 사상을 글로 잘 수식하여 齊나라 사람들로부터 “용을 조각하는 騶奭[雕龍奭]”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戰國策 齊策》
역주7 堅白同異 : 전국시대 齊나라의 名家 중 한 사람인 公孫龍이 주장한 궤변이다. 즉 눈으로 돌을 보면 흰 것은 알 수 있으나 견고한 것은 알 수 없고, 또 손으로 돌을 만져보면 견고한 것은 알 수 있으나 흰 것은 알 수 없으므로, ‘견고한 흰 돌’이라는 것은 동시에 성립될 수 없다는 논법을 사용하여, 옳은 것을 그른 것이라고 하고 같은 것을 다르다고 주장하는 변설이다.
역주8 擊劍扛鼎鷄鳴狗盜 : 擊劍은 劍客이 劍術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다. 扛鼎은 큰 솥을 드는 것으로, 鼎은 禹王이 주조했다는 九鼎을 듦을 이르는데, 당시 武力을 숭상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이 九鼎을 들곤 하였다.
전국시대 秦 武王은 힘이 세고 힘겨루기를 좋아하여 역사인 任鄙, 烏獲, 孟說이 모두 높은 관직에 이르렀으며, 《史記》 〈秦本紀〉에 “武王은 孟說과 九鼎을 들다가 맥이 끊겨 죽었다.[王與孟說 擧鼎絶脈死]”라고 보인다.
또 項羽 역시 힘이 세어 《史記》 〈楚霸王本紀〉에 “項籍은 신장이 8尺이 넘었고, 힘이 능히 솥을 들었다.[籍身長八尺餘 才能扛鼎]”는 기록이 보인다.
鷄鳴狗盜는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내고 개구멍으로 들어가 도둑질을 잘함을 이른다. 秦 昭王이 齊나라의 孟嘗君(田文)을 정승을 삼겠다며 초청하였으나 참소하는 자의 말을 듣고 그를 감옥에 가두어 죽이려 하자, 孟嘗君이 昭王의 寵姬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풀어주도록 昭王을 설득해줄 것을 간청하니, 寵姬는 “내 君의 狐白裘를 갖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였다.
孟嘗君은 천하의 명품인 狐白裘 한 벌이 있었으나, 이미 昭王에게 바친 뒤였으므로, 이를 걱정하자 문객 한 사람이 “제가 그 狐白裘를 되찾아 오겠습니다.” 하고는 개처럼 변신하고 개구멍으로 秦나라의 宮中에 들어가 앞서 바쳤던 狐白裘를 다시 훔쳐다가 寵姬에게 바치니, 寵姬가 昭王을 설득하여 孟嘗君을 풀어주게 하였다.
孟嘗君은 풀려나서 밤중에 길을 재촉하여 函谷關까지 왔으나, 關門의 法에 닭이 울어야 客을 내보냈으므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門客 중에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내는 자가 있어 닭 울음소리를 내니, 모든 닭이 다 따라 울었다. 이에 孟嘗君은 추격해 오는 秦軍을 따돌리고 무사히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史記 孟嘗君列傳》
역주9 莫不賓禮 : 底本에는 ‘莫不’로만 되어 있으나 本集에 의거하여 ‘賓禮’를 추가하였다.
역주10 魏無忌齊田文趙勝黃歇呂不韋 : 魏나라의 無忌는 昭王의 아들로 信陵君에 봉해졌는데, 훌륭한 선비를 좋아하여 당시 賓客을 좋아하는 公子들 가운데 가장 信望이 있었던 인물이다. 齊나라의 田文은 威王의 손자이고 靖郭君 田嬰의 庶子로 孟嘗君에 봉해졌는데, 닭의 울음소리를 흉내내고 개처럼 깊숙한 곳에 들어가 물건을 잘 도둑질하는 자들까지도 식객으로 길러 유명하였다. 趙나라의 勝은 惠文王의 아우로 平原君에 봉해졌는데, 魏나라의 無忌와 함께 姓이 모두 國姓이었으므로 魏와 趙를 國名으로 보지 않고 姓으로 보기도 한다. 黃歇은 楚나라 考烈王의 정승이다. 이상 네 사람은 모두 귀족 출신이었으므로 당시 四公子라고 칭하였다.
呂不韋는 趙나라 사람으로 陽翟의 大商이었다. 秦나라의 王子 楚가 趙나라에 인질로 와 있었는데, 呂不韋는 王子 楚를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위해 秦나라에 들어가 昭襄王의 華陽夫人을 설득하여 王子 楚를 양자로 삼게 하였다. 그리하여 楚가 후계자가 되어 즉위하니, 이가 바로 莊襄王이다. 呂不韋는 이 공로로 文信侯에 봉해지고 국정을 전담하였으며, 文士 등의 빈객들을 불러 모아 《呂氏春秋》를 짓기도 하였다. 始皇帝는 바로 莊襄王의 아들인데, 始皇帝의 어머니가 始皇帝를 잉태했을 적에 莊襄王에게 바쳐져 그를 낳았으므로, 始皇帝는 呂不韋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史記》에 보인다.
역주11 招致任俠姦人六萬家於薛 : 薛은 孟嘗君의 食邑으로 지금의 山東省 滕縣이다. 《史記》 〈孟嘗君列傳〉에 “孟嘗君은 薛邑에 있으면서 제후들의 빈객과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을 招致하여 모두 자신에게 돌아오게 했다.”라고 보인다.
역주12 齊稷下談者亦千人 : 稷下는 稷門의 아래로, 劉向의 《別錄》에 “齊나라에는 稷門이라는 都城門이 있었는데, 천하의 선비들이 稷門의 아래에 모여들었다.” 하였으며, 《史記》 〈田敬仲世家〉에는 “齊 宣王 때에 稷門의 아래에 學士들이 모여들어 그 숫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하였다.
역주13 魏文侯燕昭王太子丹 : 魏 文侯는 전국시대 초기 晉나라 卿으로 있다가 처음으로 魏侯에 봉해진 자로 이름이 斯인데, 선비들을 좋아하여 孔子의 제자인 卜子夏와 田子方을 스승으로 예우하였는바, B.C. 445~B.C. 396년까지 재위하였다.
燕 昭王은 이름이 平으로 燕나라가 齊나라에게 격파된 뒤에 즉위하여 천하의 선비들을 유치해서 樂毅를 임용한 끝에 齊나라에 복수전을 벌여 大勝을 거두었는바, B.C. 311~B.C. 279년까지 재위하였다.
太子 丹은 燕王 喜의 太子로 荊軻 등의 협객들을 초치하여 秦나라의 始皇帝를 죽이려 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죽었으며, 燕王 喜는 B.C. 245~B.C. 222년까지 재위하였는데, 마지막 해에 燕나라는 秦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주14 張耳陳餘 : 秦나라 말기 大梁 사람으로 두 사람은 한 마을에 살아 死生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刎頸之交를 맺었으며, 빈객을 좋아하였으나 뒤에 서로 사이가 나빠져 張耳는 漢나라에 귀순하고 陳餘는 趙王 歇을 옹립하였다. 그 후 張耳는 韓信과 함께 趙나라를 공격하여 趙나라를 멸망시키고 陳餘의 목을 베었다.
역주15 田橫 : 齊나라의 종실로, 漢나라의 韓信이 齊나라를 공격하여 齊王 田廣을 사로잡자, 스스로 齊王이 되고 項羽에게 붙었으나, 뒤에 高祖가 천하를 통일하니, 田橫은 두려워하여 嗚呼島라는 海島로 도망하였다. 高祖가 난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부르자, 田橫은 두 門客과 함께 파발마를 타고 洛陽으로 오다가 자살하니, 高祖는 王의 禮로 장례하였다. 海島에 남아 있던 5백 명의 선비들은 田橫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모두 자살하였다. 《史記 高祖本紀》
역주16 類不能惡衣食以養人 : 惡衣食은 나쁜 옷을 입고 나쁜 음식을 먹는 것으로, 천한 백성이 되어 나쁜 옷을 입고 나쁜 음식을 먹으면서 王公․貴人을 섬기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17 九品中正 : 魏․晉時代의 관리등용 제도이다. 漢나라 때의 鄕擧․里選法을 대신한 것으로, 각 州․郡․縣의 지방관과는 별도로 中正官을 설치하고, 中正官이 지방의 인사를 덕행과 재능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판정하여 중앙의 吏部로 천거하였다.
역주18 始皇初欲逐客 用李斯之言而止 : 전국시대에는 출생한 나라에 관계없이 외국에 가서 높은 벼슬을 하는 것을 客卿이라 하였는데, 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秦나라 宗室들은 始皇帝에게 “외국에서 와 벼슬하는 자들은 자기 故國을 위해 활동하니, 이들을 모두 축출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楚나라에서 와서 벼슬하던 李斯 또한 쫓겨나게 되었다. 이에 李斯가 〈上秦皇逐客書〉라는 名文을 올려 客卿의 축출이 부당함을 말하자, 始皇帝는 그의 말을 따라 逐客令을 중지시켰다.
역주19 布褐 : 布는 삼베옷이며 褐은 쇠털 등으로 거칠게 짠 毛布인데, 신분이 천한 자들이 입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한 자를 지칭하게 되었다.
역주20 陳豨 : 宛句 사람으로 漢 高祖를 섬겨 列侯에 봉해지고 趙․代 지방의 변경에 있는 군대를 감독하였다. 賓客을 초치하여 그가 출행하면 뒤따르는 수레가 1천 대에 이르렀다.
뒤에 趙나라의 정승인 周昌이 高祖에게 “陳豨가 수많은 호걸들을 불러 모아 門客이 많고 변경에서 兵權을 쥐고 있어 후일에 禍亂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高祖가 그를 불렀다. 이에 陳豨는 의심을 품고 배반하여 스스로 代王이 되었다가 高祖의 토벌을 받고 죽었다.
역주21 吳濞淮南梁王魏其武安 : 吳濞는 吳王 濞로 高祖의 兄의 아들(조카)인데, 陳豨를 토벌할 때 공을 세우고 吳王에 봉해졌다. 吳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소금과 철과 구리가 많이 생산되어 재정이 풍족하여 나라가 富强하였는바, 吳王 濞는 이것을 이용하여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뒤에 이것을 믿고 황제에게 조회하지 않았으며, 景帝 때에 楚王 戊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평정되었다.
淮南은 淮南王 劉安으로 高祖의 손자인데, 역시 선비를 좋아하여 《淮南子》를 엮기도 하였으나, 뒤에 반란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淮南을 淮南長王 劉厲라 하였으나, 門客을 좋아한 것으로 보아 옳지 않은 듯하다. 劉厲는 高祖의 아들로 文帝의 형이고 劉安의 아버지인데, 성질이 사납고 법도를 따르지 않다가 文帝가 蜀 지방으로 유배 보내자 자살하였다.
梁王은 劉武로 文帝의 아들이고 景帝의 아우인데, 竇太后의 총애를 받아 황제 자리를 넘보기도 하였으며, 諡號가 孝이다.
魏其는 魏其侯 竇嬰으로 文帝의 아내인 竇皇后의 친정조카이며, 武安은 武安侯 田蚡으로 景帝의 아내인 田皇后의 친정아우이다.
역주22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 : 이 내용은 《論語》 〈陽貨〉에 “孔子께서 子游가 읍재로 있는 武城에 가시어 현악기를 타고 여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들으시자 빙그레 웃으시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는가?’라고 하시니, 子游가 대답하기를 ‘예전에 제가 夫子께 들으니 「君子가 道를 배우면 인민을 사랑하고 小人이 道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孔子는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얘들아, 言偃의 말이 옳으니,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라고 하셨다.”라고 보인다.
子游는 성이 言이고 이름이 偃으로 文學에 뛰어나 孔門四科에 든 사람이며, 孔子가 여기에서 말씀한 君子와 小人은 지위를 가지고 칭한 것으로, 君子는 정치하는 벼슬아치를 가리키고 小人은 평민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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