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君子雖能樂之나 而不知中庸이면 則其道必窮이니라
得其偏而忘其中하야 不得終日安行乎通塗하면 夫雖欲不廢나 其可得耶리오
然이나 天下有能過而未有能中하니 則是復之中者之難也니라
記曰
라하니 旣不可過
요 又不可[不]及
이면 如斯而已乎
아
皇極者는 有所不極而會於極이요 時中者는 有所不中而歸於中이니 吾見中庸之至於此而尤難也로라
君子之所以爲時中이요 而小人之所以爲無忌憚이니 記曰 小人之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라하니라
有小人焉하야 因其近似而竊其名하니 聖人이 憂思恐懼라
君子見危則能死로되 勉而不死하야 以求合於中庸하고 見利則能辭로되 勉而不辭하야 以求合於中庸하나니
小人이 貪利而苟免에도 而亦欲以中庸之名으로 私自便也하니 此孔子, 孟子之所爲惡鄕愿也시니라
同乎流俗하고 合乎汚世하야 曰 古之人은 行何爲踽踽凉凉고
以古之人爲迂하고 而以今世之所善으로 爲足以已矣면 則是不亦近似於中庸耶아
君子之欲從事乎此인댄 無循其迹이요 而求其味면 則幾矣니라
군자君子가 비록 도道를 즐거워할 수 있으나 중용中庸을 알지 못하면 그 도道가 반드시 궁하게 된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도道를 따라 행하다가 중도에 폐지하니, 나는 그만두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군자君子가 도道를 믿는 마음이 독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힘써 행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한쪽만 얻고 중도中道를 잊어서 종일토록 사통오달의 큰길을 편안히 가지 못한다면, 비록 폐지하지 않고자 하나 어찌 되겠는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나는 도道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으니, 어진 자는 지나치고 불초한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천하에는 능히 지나친 자는 있어도 능히 중도에 맞는 자는 없으니, 그렇다면 중도中道로 돌아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천하天下와 국國․가家(나라와 집안)를 똑 고르게 다스릴 수 있으며 관작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 있으나, 중용中庸은 능히 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지나쳐서도 안 되고 또 미치지 못해서도 안 된다면 이와 같이 중간에 할 뿐인가?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기를 “중中(중간)을 잡는 것이 도道에 가까우나 중간을 잡고 권도權道가 없는 것은 어느 한 가지를 잡은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극極에 맞지 않더라도 허물에 걸리지 않으면 임금이 이것을 받아주어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그 극極에 모이게 하고 그 극極으로 돌아오게 한다.”라고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중용中庸은 군자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한다.”라고 하였다.
황극皇極이라는 것은 극極에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극極에 모이게 하는 것이고, 시중時中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이것을 중中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니, 나는 중용中庸이 여기에 이르러서 더욱 어려움을 알겠다.
이 때문에 소인小人의 중용中庸이 있는 것이다.
맞지 않는 바가 있더라도 중中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도道이다.
이는 군자君子가 시중時中이 되고 소인小人이 기탄함이 없는 이유이니,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소인小人의 중용中庸은 소인小人이면서 기탄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소인小人이 있어서 도道와 유사한 것을 가지고 그 이름을 도둑질하니, 성인聖人이 이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싫어하지 않고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 도道는 진실로 소인小人들이 도둑질하여 스스로 편리하게 하는 것들이다.
군자君子는 위태로움을 보면 능히 죽을 수 있으나 억지로 참고 죽지 않아서 중용中庸에 부합하기를 구하고, 이익을 보면 능히 사양할 수 있으나 억지로 참고 사양하지 않아서 중용中庸에 부합하기를 구한다.
그런데 소인小人들이 이익을 탐하고 죽음을 구차히 면할 적에도 중용中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사사로이 스스로 편리하게 하고자 하니, 이것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향원鄕愿을 미워하신 이유인 것이다.
한 지방 사람들이 모두 삼가는 사람(원인愿人)이라고 칭찬한다면 가는 곳마다 삼가는 사람이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속流俗에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옛날 사람들은 행실이 어찌 이렇게도 외롭고 쓸쓸하였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사람들과 잘 지내면 된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옛사람을 오활하다 하고, 지금 세상 사람들이 좋게 여기는 것을 이만 하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중용中庸에 유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주색을 미워함은 붉은색을 어지럽힐까 염려해서이고, 가라지를 미워함은 벼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이다.”라고 하셨으니, 어째서인가?
군자君子가 이 중용中庸에 종사하고자 한다면, 그 행적을 따르지 말고 의미를 찾는다면 거의 가까울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시고 먹지 않는 이가 없지만 그 맛을 제대로 아는 이는 적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