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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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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위국 한령공魏國 韓令公에게 올린 제문祭文
韓公祭文 當時第一이라
한공韓公에 대한 제문祭文이 당시에 으뜸이었다.
天生 必作之配하니 有神司之하야 不約而會
하늘이 큰 성인을 낼 때에는 반드시 배필을 만드시니, 이 이것을 맡아서 약속하지 않아도 만나게 됩니다.
임금과 임금이 나오시자 후직后稷이 스스로 오고, 인종仁宗께서 처럼 날아서 등극하시자 진사進士로 급제하셨습니다.
妙齡秀發하야 秉筆入侍하니
젊은 나이에 재주가 빼어나서 붓을 잡고 들어가 모시니, 이때에 은 비유하면 동중서董仲舒가의賈誼였습니다.
方將登庸이러니 盜起西夏하야 四方騷然하니 帝用不赦
을 장차 등용하려 하였는데, 도둑이 서하西夏에서 일어나서 사방四方이 소란하니 황제께서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에게 부월鈇鉞을 주어 가서 서쪽 군대를 감독하게 하시니, 이때에 방숙方叔이요 소호召虎였습니다.
入贊兵政하고 出殿大邦하니 恩威竝行하야 春雨秋霜이라
〈적을 평정한 뒤에〉 들어와서는 병정兵政을 돕고 나가서는 큰 고을을 진무하니, 은혜와 위엄이 함께 행해져서 은혜는 봄비와 같고 위엄은 추상과 같았습니다.
兵練民安하고 四夷屈降하니 公於是時 이라
군사들이 훈련되고 백성들이 편안하며 사방 오랑캐들이 항복하니, 이때에 임회왕臨淮王분양왕汾陽王이었습니다.
帝在明堂하야 欲行王政하시니 이라
황제께서 명당明堂에 계시면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행하고자 하시니, 여러 재상들이 을 아뢰었으나 성공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을 북방에서 불러와서 추형樞衡을 맡기시니, 이때에 소하蕭何조참曹參이요 위상魏相병길邴吉이었습니다.
하야 呼吸之間 有雷有風이라
두 황제(인종仁宗영종英宗)의 산릉山陵을 만듦에 천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호흡하는 사이에 천둥처럼 놀라고 바람처럼 쓰러졌습니다.
有存有亡하고 有兵有戎하니 公於是時 이라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고 전쟁이 있으니, 이때에 이윤伊尹이요 주공周公이었습니다.
功成而退 이러니 天下嗷然하야 曷日而復
을 이루고 물러남에 세 진영이 조용하였는데, 천하가 원망하는 소리로 시끄러워서 언제 회복될지 몰랐습니다.
필공畢公은 밖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왕실에 있었고, 방공房公(방현령房玄齡)은 죽으면서도 요동遼東 정벌을 걱정하셨습니다.
아! 서글픕니다.
六月甲寅 이라
6월 갑인일甲寅日에 백성들이 복이 없어서 우리 종신宗臣을 잃었습니다.
我有黎民 誰與敎之하고 我有子孫 誰與保之 巍巍堂堂 寧復有之리오
우리 백성들을 누가 가르쳐주고, 우리 자손들을 누가 보호해주며, 처럼 거룩하고 당당한 분을 어찌 다시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이 돌아가시자 저는 태양을 잃었습니다.
慟哭流涕하니 何嗟及矣리오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니, 슬퍼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公爲二詩하야 以祖其行하니 이라
옛날 우리 선친(소순蘇洵)께서 동경東京에서 별세하시자, 만시挽詩 두 수를 지어서 상여 길을 전송하시니, 문장은 전고典誥를 따르고 의논은 삼황三皇오제五帝를 지극히 하셨습니다.
公言一出 孰敢改評이리오
의 말씀이 한 번 나오니, 누가 감히 고치고 평하겠습니까?
施及不肖하야 待以國士하니 非我自知 公實見謂
의 은덕이 뻗쳐 불초에게까지 미쳐서 국사國士로 대우하시니, 이는 제가 스스로 알려진 것이 아니요 께서 실로 이렇게 불러주신 것입니다.
父子昆弟 竝出公門이라
그래서 저희 부자와 형제가 모두 문하門下에서 나왔습니다.
이 보답을 바라지 않으시니, 제가 어찌 은혜를 품겠습니까?
惟此涕泣 實哀斯人이라
오직 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로 이 인민人民을 불쌍히 여겨서입니다.
有肉在俎하고 有酒在樽하니 公歸在天 寧聞我言이리오
고기가 도마 위에 있고 술이 술동이에 담겨 있는데 이 하늘로 돌아가셨으니, 어찌 저의 말을 들으시겠습니까?
嗚呼哀哉
아! 서글픕니다.
역주
역주1 祭魏國韓令公文 : 이 글은 東坡가 韓琦를 위해 지은 祭文이다. 韓琦(1008~1075)는 字가 稚圭이고 號가 贛叟이며 安陽 사람으로 魏國公에 봉해졌다. 天聖 5년(1027) 약관의 나이에 진사가 되어 右司諫과 樞密院直學士 등을 역임하였고, 仁宗 嘉祐 4년(1059)부터 英宗 治平 4년(1067)까지 재상으로 있었다. 范仲淹․富弼과 함께 명재상으로 명망이 높았다.
역주2 元聖 : 큰 聖人으로 여기서는 황제를 가리킨 것이다.
역주3 旣生堯舜禹稷自至 : 稷은 后稷으로 堯임금 때에 농사를 담당한 관원인데 이름은 棄이다. 堯임금이 늙어 舜임금이 섭정하였는데, 이때 9년의 홍수가 있어 백성들이 제대로 거처하지 못하고 곡식을 먹지 못하였다. 이에 禹가 홍수를 다스리고 后稷이 곡식을 파종하여 백성들이 곡식을 먹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여기서는 하늘이 훌륭한 제왕을 내면 어진 신하가 저절로 이르러 보필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4 仁宗龍飛 公擧進士 : 龍飛는 龍이 날아 하늘에 오르는 것으로 帝王의 즉위를 이른다. 韓琦가 仁宗 즉위 6년인 天聖 5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5 公於是時 仲舒賈誼 : 仲舒는 董仲舒(B.C. 179~B.C. 104)로 漢 武帝 때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장가인데 廣川 사람이다. 賢良科로 등용되어 박사를 지내고 武帝에게 상주하여 儒敎를 국교로 정하게 하였으며, 《春秋繁露》를 지었다. 賈誼(B.C. 200~B.C. 168)는 漢 文帝 때의 명신으로 洛陽 사람인데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였다.
역주6 授公鈇鉞 往督西旅 : 鈇鉞은 斧鉞로도 표기하는데 장군이 상징적으로 가지고 있는 도끼로 지휘권을 의미하며, 西旅는 서쪽 지방의 군대를 이른다. 韓琦가 慶曆 2년(1042)에 陝西經略招討使가 되어 西夏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서쪽 변방에서 군대를 지휘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7 方叔召虎 : 方叔과 召虎는 모두 周 宣王 때의 名臣으로, 당시 周나라를 배반한 이민족을 정벌하여 중흥을 이룩한 功臣들이다.
역주8 臨淮汾陽 : 唐 肅宗 때에 臨淮王에 봉해진 李光弼과 汾陽王에 봉해진 郭子儀를 이른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지략과 무용으로 安祿山과 史思明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名將들이다.
역주9 群后奏功 罔底于成 : 群后는 원래 여러 제후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여러 신하를 가리킨다. 곧 여러 신하들이 공을 이루는 방법을 다투어 아뢰었으나, 실제로 성공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0 召自北方 付之樞衡 : 樞衡은 중요한 관직을 이른다. 韓琦는 嘉祐 원년(1056) 三司使로 朝廷의 부름을 받았는데, 都城에 이르기 전에 정부의 요직인 樞密使에 제수되었으며 嘉祐 3년 6월에 同中書門下平章事 集賢殿太學士에 제수되었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11 蕭曹魏邴 : 蕭․曹는 蕭何와 曹參으로 모두 漢 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다음 차례로 승상의 지위에 올라 국가를 안정시켰으며, 魏․邴은 魏相과 邴吉로 모두 漢 宣帝 때의 名臣이다.
魏相은 景帝 때의 정략가인 晁錯와 武帝 때의 학자인 董仲舒의 奏議를 시행할 것을 宣帝에게 건의하여 漢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邴吉은 丙吉로도 표기하는데 字가 少卿으로 魯國 北海 사람이다. 미관말직인 獄吏로 시작하여 廷尉右監과 御史大夫를 거쳐 승상이 되고 사후에 定侯에 봉해졌다. 그는 B.C. 91년 巫蠱의 옥사 때 廷尉監으로 이 사건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젖먹이로 옥에 갇힌 戾太子의 손자 病已(詢으로 개명. 훗날의 宣帝)의 목숨을 구하였으나 끝내 함구하고 있었다. 宣帝가 다른 일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공적을 숨기는 고결한 성품에 크게 탄복하였다고 한다.
역주12 二帝山陵 天下悸恟 : 二帝는 두 황제로 仁宗과 英宗을 가리키며 山陵은 제왕의 陵墓를 이른다. 悸恟은 인심이 두려워하고 흉흉해지는 것으로 당시 두 황제가 불과 4년 만에 차례로 서거하여 山陵의 役事가 계속되었으므로 천하의 인심이 흉흉해졌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3 伊尹周公 : 伊尹의 이름은 摯로, 尹은 관명인 尹正의 尹이다. 商나라 湯王을 보필하여 夏나라 桀王을 토벌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湯王이 죽고 太甲이 즉위하여 부도덕한 일을 자행하자 太甲을 湯王의 묘소가 있는 桐 땅으로 추방하였다. 太甲이 이로 말미암아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자 그를 다시 모시고 돌아와 國政을 넘겨주고 퇴임하였다.
周公은 이름이 旦으로 文王의 아들이고 武王의 아우인데, 건국 초기의 周나라 國政을 총괄하였다. 周公은 殷나라의 紂王을 토벌한 다음 紂王의 아들 武庚을 殷나라에 봉하고 형인 管叔 鮮 등으로 하여금 殷나라를 감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武王이 죽고 어린 成王이 즉위하여 周公이 섭정하자 管叔 鮮 등은 “周公이 장차 어린 成王을 축출하고 자신이 王이 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武庚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周公은 이들을 토벌하여 周나라를 안정시키고 成王이 장성하자 퇴임하였다.
역주14 三鎭偃息 : 三鎭은 세 진영으로 보이나 자세하지 않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변방의 진영을 범연히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偃息은 ‘偃旗息鼓’의 줄임말로 국가가 평안하여 군대의 깃발을 눕히고 싸움을 재촉하는 북소리를 그침을 이른다.
역주15 畢公在外 心在王室 : 畢公은 周 文王의 열다섯 번째 아들로, 武王이 殷나라를 이기자 畢나라에 봉해져 畢公이라 칭하였다. 康王이 畢公에게 명하여 成周의 무리를 데리고 東郊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書經》 〈周書 畢命〉은 바로 이때 康王이 畢公에게 명한 내용을 적은 책이다. 여기서는 畢公이 멀리 封地에 있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王室을 안정시킴에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6 房公且死 征遼是恤 : 房公은 唐나라 초기의 名相인 房玄齡을 이르고, 征遼는 太宗 李世民이 遼東의 高句麗를 정벌한 일을 가리킨다.
房玄齡은 말년에 질병이 많아 집에 있었는데,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오직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황제께서 노여워하는 마음을 품고 高句麗를 기어이 정벌하려 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간쟁하지 못한다. 내가 만일 이것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지하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상소하여 太宗에게 高句麗 정벌을 중지할 것을 諫하였다. 그러나 太宗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정벌에 나섰다가 결국 安市城 싸움에서 부상을 당하고 돌아왔다.
역주17 嗚呼哀哉 六月甲寅 : 神宗 熙寧 7년(1074) 6월 甲寅日에 韓琦가 죽었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18 人之無祿 喪我宗臣 : 無祿은 福이 없는 것이고, 宗臣은 종묘와 사직을 편안히 하는 훌륭한 대신을 이르는데, 곧 人民이 福이 없어 名宰相이 죽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9 公之云亡 我無日矣 : ‘我無日矣’는 자세하지 않다. ‘내(제)가 태양을 잃은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 ‘내 오랫동안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니, 몹시 비통함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역주20 昔我先子 沒於東京 : 先子는 先親으로 蘇洵을 가리키며, 東京은 汴梁이다. 蘇洵은 治平 3년(1066)에 東京인 汴梁에서 죽었다.
역주21 文追典誥 論極皇王 : 典誥는 《書經》의 문체로, 韓琦의 문장이 《書經》의 〈堯典〉과 〈舜典〉, 〈湯誥〉와 〈大誥〉․〈康誥〉 등과 같음을 말한 것이며, 皇王은 三皇과 五帝 또는 三王으로 韓琦의 의논이 三皇․五帝와 三代의 治道를 지극히 논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22 公不責報 我豈懷恩 :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豈를 豈非로 보아 “公은 보답을 바라지 않지만, 내 어찌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로 해석하였다. 일반적인 詩語로 볼 적에 맞는 해석인 듯하나, 다만 아래의 ‘오직 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로 이 人民을 불쌍히 여겨서입니다.[惟此涕泣 實哀斯人]’라는 말이 있으므로, 이렇게 번역하였음을 밝혀둔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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