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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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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不爲巉刻之言하고 而文自達이니라
故諫議大夫贈司徒이라
嗚呼
田公
其盡言不諱 蓋自敵以下受之라도 有不能堪者어든 而況於人主乎
以來 至於 可謂天下大治千載一時矣로되 而田公之言 常若有不測之憂 近在朝夕者 何哉
古之君子 必憂治世而危明主하나니 明主 有絶人之資하고 而治世 無可畏之防일새라
夫有絶人之資 必輕其臣하고 無可畏之防이면 必易其民하나니 此君子之所甚懼也
方漢文時하야 刑措不用하고 兵革不試어늘라호되
後世不以是少漢文하고 亦不以是甚賈誼하니 由此觀之하면 君子之遇治世而事明主 法當如是也니라
誼雖不遇 而其所言 略已施行이러니 不幸하야 功烈不著於時
이나 로되 文帝未及用이러니 歷孝景, 至武帝하야하야 漢室以安이라
今公之言 十未用五六也하니 安知來世不有若偃者하야 擧而行之歟
願廣其書於世하면 必有與公合者하리니 此亦忠臣孝子之志也니라


03. 《전표성주의田表聖奏議》의
각박한 말을 하지 않고도 문장文章이 저절로 통달하였다.
이것은 사도司徒로 추증된 고 간의대부故 諫議大夫 전공 표성田公 表聖주의奏議 10편이다.
아!
전공田公은 옛날의 유직遺直이다.
솔직하게 말씀을 다하여 숨기지 않은 것은 대등한 자 이하의 사람들이 받더라도 감당하지 못할 터인데, 하물며 군주에 있어서이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태종太宗진종眞宗 두 임금의 스러움을 알겠다.
태평흥국太平興國으로부터 함평咸平 연간에 이르기까지 천하가 크게 다스려져서 천 년 만에 한 번 있는 좋은 시기라고 이를 만하였는데도, 전공田公의 말씀이 항상 측량할 수 없는 걱정거리가 가까이 조석에 있는 듯했던 것은 어째서인가?
옛날의 군자君子들은 반드시 치세治世를 걱정하고 명주明主를 위태롭게 여겼으니, 명주明主는 남보다 뛰어난 자품이 있고, 치세治世는 두려워할 만한 방비가 없기 때문이다.
남보다 뛰어난 자품이 있으면 반드시 신하를 가볍게 여기고, 두려워할 만한 방비가 없으면 반드시 백성을 함부로 대하니, 이는 군자君子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바이다.
한 문제漢 文帝 때에 형벌을 버려두고 쓰지 않았고 병기와 갑옷을 쓰지 않았는데도 가의賈誼의 말에 “천하에 탄식할 만한 것이 있으며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있으며 통곡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후세後世에서는 이 때문에 한 문제漢 文帝를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가의賈誼도 심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로 말미암아 살펴본다면 군자君子치세治世를 만나 현명한 군주를 섬길 적에는 법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가의賈誼는 비록 불우하였으나 그가 말한 것이 대략 이미 실행되었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 공렬功烈이 당시에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의賈誼가 일찍이 제후왕諸侯王의 자손들로 하여금 각기 차례로 영지領地를 나누어 받게 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문제文帝가 미처 그의 말을 쓰지 못하였는데, 효경제孝景帝를 지나 무제武帝에 이르러 주보언主父偃이 거행해서 나라 왕실王室이 편안해졌다.
이제 의 말씀이 열 가지 가운데 대여섯 가지도 쓰여지지 못하였으니, 내세來世주보언主父偃과 같은 자가 있어 이를 거행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원컨대 이 글을 세상에 널리 반포하면 반드시 과 뜻이 합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이는 또한 충신忠臣효자孝子의 뜻인 것이다.


역주
역주1 田表聖奏議序 : 이 글의 저작 시기는 미상이다. 田表聖(940~1004)은 이름이 錫으로 表聖은 그의 字이고 嘉州 洪雅 사람이다. 太宗 太平興國 3년(978)에 進士로 출사하여 宣州通判이 되었다가 戶部郎中과 知泰州事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右諫議大夫에 제수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直諫을 잘하였으며 權門勢家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眞宗으로부터 直臣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에 《咸平集》 50卷이 있으며,《宋史》에 傳이 있다.
역주2 田公表聖 奏議十篇 : 奏議는 관리가 제왕에게 어떤 일에 대해 진술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논한 글을 이른다. 元나라 馬端臨은 《文獻通考》에서 陳振孫의 말을 인용하여 “〈《咸平集》의〉 첫 번째 권에 奏議 12편이 있는데, 바로 蘇軾이 序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3 古之遺直 : 遺直은 정직한 道를 실행하여 古人의 遺風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昭公 14년에 “晉 邢侯와 雍子가 鄐 땅의 田地를 다투었는데, 오래도록 판결이 나지 않았다. 이때 법관 士景伯이 楚나라에 가고 없으므로 叔魚가 그 직무를 대행하였다. 韓宣子가 叔魚에게 명하여 이전에 심리한 판례(舊獄)대로 판결하게 하였는데, 雍子에게 잘못이 있었다. 이때 雍子가 자기 딸을 叔魚에게 시집보내니, 叔魚는 邢侯에게 잘못이 있는 것으로 잘못 판결하였다. 邢侯는 노하여 叔魚와 雍子를 조정에서 죽였다.
宣子가 叔向에게 이들의 죄에 대해 묻자, 叔向은 ‘이들 세 사람의 죄가 똑같으니, 산 자는 사형에 처하여 시신을 진열하고 죽은 자들은 戮屍하는 것이 옳습니다. 雍子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딸을 뇌물로 주어 판결에 이겼고, 鮒(叔魚)는 뇌물을 받고서 부당하게 판결하였고 邢侯는 멋대로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가 똑같습니다.
자신이 사악하면서도 남의 美行을 가로채는 것이 「昏」이고, 재물을 탐하여 직무를 폐기하는 것이 「墨」이고, 기탄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賊」입니다. 《書經》 〈夏書〉에 「昏․墨․賊은 주살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皐陶의 법이니, 이 법을 따르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邢侯를 죽여 戮尸하고 죽은 雍子와 叔魚를 저잣거리에 시신을 진열하였다. 仲尼께서 이 말을 듣고 ‘叔向은 옛날의 遺直이다.’라고 칭찬하셨다.[晉邢侯與雍子爭鄐田 久而無成 士景伯如楚 叔魚攝理 韓宣子命斷舊獄 罪在雍子 雍子納其女於叔魚 叔魚蔽罪邢侯 邢侯怒 殺叔魚與雍子于朝 宣子問其罪於叔向 叔向曰 三人同罪 施生戮死可也 雍子自知其罪 而賂以買直 鮒也鬻獄 邢侯專殺 其罪一也 己惡而掠美爲昏 貪以敗官爲墨 殺人不忌爲賊 夏書曰 昏墨賊殺 臯陶之刑也 請從之 乃施邢侯 而尸雍子與叔魚於市 仲尼曰 叔向古之遺直也]”라고 보인다.
역주4 吾是以知二宗之聖也 : 二宗은 太宗과 眞宗을 가리킨다. 田錫은 太宗과 眞宗 두 황제를 모셨는데, 두 황제는 모두 흉금이 넓어 直諫을 잘 받아들이고 곧은 말을 하는 신하들을 아꼈다. 太宗은 ‘田錫은 文行이 있고 과감히 간언한다.’라고 칭찬하였고, 眞宗은 田錫이 죽자, ‘田錫은 直臣인데 하늘이 어찌 이리도 서둘러 빼앗아 가는가?’라고 아쉬워하였다. 이 때문에 東坡가 ‘二宗之聖’이라고 칭한 것이다.
역주5 太平興國 : 太宗의 연호로 976년부터 984년까지이다.
역주6 咸平 : 眞宗의 연호로 998년부터 1003년까지이다.
역주7 賈誼之言曰……有可痛哭者 : 賈誼(B.C. 200~B.C. 168)는 漢 文帝 때의 명신이다. 洛陽 사람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였으며, 20세에 文帝에게 발탁되어 博士가 되었다가 太中大夫로 승진되었다. 正朔과 服色을 고치고 법률을 제정하며 禮樂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周勃 등 당시 대신들의 반대로 長沙王 太傅로 좌천되었다가 4년 뒤에 文帝의 막내아들인 梁懷王의 太傅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죄책감과 함께 이를 애도한 나머지 33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賈誼가 梁懷王의 太傅로 있으면서 세칭 ‘賈誼上疏’라고 하는 長篇의 上疏文을 文帝에게 올렸는데, 본문의 내용은 바로 이 上疏文에 보인다.
역주8 早世 : 세상을 젊은 나이에 일찍 떠나가는 것으로 早死와 같은데, 賈誼가 33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역주9 誼常建言……各以次受分地 : 이 내용은 賈誼가 文帝에게 올린 上疏文에 “천하가 다스려지고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제후를 많이 세워서 그 힘을 약화시키는 것만 못하니, 힘이 약화되면 義理로 부리기가 쉽고, 나라가 작으면 간사한 마음을 품지 않게 됩니다. 海內의 형세로 하여금 몸이 팔뚝을 부리고 팔뚝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처럼 해서 제재하여 따르지 않음이 없게 한다면 제후의 군주가 감히 딴 마음을 품지 못하여 바퀴살이 바퀴통에 모이듯 함께 나와 天子에게 목숨을 맡길 것입니다.
땅을 떼어 分封해주는 제도를 정하여 封地의 제도가 한 번 정해지면 宗室의 자손들이 왕이 되지 못함을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래에서는 背反하는 마음이 없고 위에서는 誅伐하려는 뜻이 없어서, 법이 확립되어 죄를 범하지 않고 명령이 시행되어 거스르지 않아서, 赤子를 천하의 위에 눕혀놓아도 편안하며 遺腹子를 세우고 先帝가 남기신 갖옷에 朝會하게 하더라도 천하가 어지럽지 않을 것이니, 陛下께서는 무엇을 꺼리시어 오랫동안 이것을 행하지 않으십니까?[欲天下之治安 莫若衆建諸侯而少其力 力少則易使以義 國小則亡邪心 令海內之勢 如身之使臂 臂之使指 莫不制從 諸侯之君 莫敢有異心 輻湊並進而歸命天子 割地定制 地制一定 宗室子孫 莫慮不王 下無背畔之心 上無誅伐之志 法立而不犯 令行而不逆 臥赤子天下之上而安 植遺腹 朝委裘 而天下不亂 陛下誰憚而久不爲此]”라고 보인다.
역주10 主父偃擧行之 : 主父偃(?~B.C. 126)은 漢 武帝 때의 문신으로 臨淄(지금의 山東省 臨淄) 사람인데 主父는 복성이고 偃은 이름이다. 출신이 빈천하였으나 총명하여 어려서 縱橫家를 배우고 뒤에 《周禮》․《春秋》 및 百家의 학설을 두루 익혔다.
여러 제후국을 주류하면서 유세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자, 元光 元年(B.C. 134)에 직접 武帝에게 글을 올려 인정을 받고 郎中에 제수되었는데, 이후 武帝의 신임이 두터워져 승진을 거듭하여 中大夫에 이르고 武帝의 중요한 참모가 되었다. 武帝는 主父偃의 건의에 따라 賈誼의 정책을 써서 원칙적으로 嫡長子에게만 상속되던 諸侯王들의 영지를 다른 아들들에게도 分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날이 갈수록 諸侯들의 영지는 축소되고 이에 따라 郡縣制가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
《史記》 〈平津侯主父列傳〉에 “主父偃이 上을 설득하기를 ‘옛날에 제후들은 封地가 100리를 넘지 않아 강하고 약한 형세가 제재하기 쉬웠는데, 지금의 제후들은 혹 수십 개의 城邑을 연하고 있어서 땅의 넓이가 천 리입니다. 그러므로 통제를 늦추면 교만하고 사치하여 음란한 짓을 하기가 쉽고, 준엄하게 대하면 그 강함을 믿고 합종하여 京師(皇帝)에 거역하며, 법으로 封地를 떼어내고 깎으면 반역하는 일이 싹터 일어나니, 지난날 鼂錯의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제후의 자제들이 혹 십 수 명인데, 嫡子만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고 나머지는 한 자 되는 땅도 봉해줌이 없으니, 인자하고 효도하는 道가 펴지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제후들로 하여금 은혜를 미루어 자제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어 侯를 삼게 하시면 저들은 사람마다 소원을 얻음을 기뻐할 것입니다. 上께서는 德을 베푸시나 실제로는 그 나라를 나누어 영지를 축소하는 결과가 되니, 땅을 깎지 않아도 점차 약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上이 그의 말을 따랐다.[主父偃說上曰 古者 諸侯不過百里 彊弱之形易制 今諸侯或連城數十 地方千里 緩則驕奢 易爲淫亂 急則阻其彊而合從 以逆京師 以法割削之 則逆節萌起 前日鼂錯是也 今諸侯子弟或十數 而適嗣代立 餘無尺地之封 則仁孝之道不宣 願陛下令諸侯得推恩 分子弟以地侯之 彼人人 喜得所願 上以德施 實分其國 不削而稍弱矣 上從之]”라고 보인다.
漢 高祖인 劉邦은 천하를 통일하자 여러 功臣들에게 맞서게 하기 위해 자제들에게 많은 봉지를 주어 王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세대가 점점 멀어지자, 천자국의 봉지는 계속 나누어주어 점차 줄어드는 반면 제후들은 長子에게만 나라를 물려주어 상대적으로 제후국이 점차 강성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文帝 때에 吳王 濞는 병을 칭탁하고 조회오지 않았으며, 여타 제후들도 황제의 명령을 잘 받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景帝 때에 이르러 景帝의 신임을 받은 鼂錯가 어사대부에 제수되자, 제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吳․楚․趙․膠西 등의 봉지를 축소하였다. 이에 분노한 吳․楚 등 7국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周亞夫의 토벌을 받고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나머지 제후들의 영지가 너무 큰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武帝 말년에 主父偃이 賈誼가 일찍이 건의했던 정책을 시행하여 천하가 안정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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