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子與執政之大臣으로 既已相得而無疑라야 可以盡其所懐하고 直己而行道하나니
則夫當今之所宜先者는 莫如破庸人之論하야 以開功名之門이니 而後에 天下可爲也리이다
方其奔衝潰決하고 騰湧漂蕩하야 而不可禁止也엔 雖欲盡人力之所至하야 以求殺其尺寸之勢라도 而不可得이요
故로 夫善治水者는 不惟有難殺之憂요 而又有易衰之患하야
導之有方하고 决之有漸하야 疏其故而納其新하야 使不至於壅閼腐敗而無用이니이다
人知江河之有水患也하야 而以爲沼沚之可以無憂면 是烏知舟楫灌漑之利哉잇가
夫天下之未平에 英雄豪傑之士 務以其所長으로 角奔而爭利하야 惟恐天下一日無事也라
是以로 人人各盡其材하야 雖不肖者라도 亦自淬厲而不至於怠廢라
故로 其勇者相吞하고 智者相賊하야 使天下不安其生하나니
爲天下者 知夫大亂之本이 起於智勇之士 爭利而無厭이라
是故로 天下既平이면 則削去其具하야 抑遠天下剛健好名之士하고 而奬用柔懦謹畏之人하나니 不過數十年하야 天下靡然하야 無復往時之喜事也니이다
於是에 能者는 不自憤發하야 而無以見其能하고 不能者는 益以弛廢而無用하니 當是之時하야 人君이 欲有所爲나 而左右前後에 皆無足使者라
是以로 綱紀日壊而不自知하니 此其爲患이 豈特英雄豪傑之士趑趄而已哉리잇가
聖人則不然하야 當其久安於逸樂也엔 則以術起之하야 使天下之心으로翹翹然常喜於爲善이라
夫使天下皆爲而己不爲者는 開其利害之端하고 而辨其榮辱之等하야 使之踴躍奔走하야 皆爲我役而不自知하니이다
夫是以로 坐而收其功也니 如使天下皆欲不爲而得이면 則天子誰與共天下哉리잇가
今者에 治平之日이 久矣니 天下之患이 正在此也라
臣은 故로 曰 破庸人之論하야 開功名之門이니 而後에 天下可爲也라하노이다
今夫庸人之論
이 有二
하니 其上之人
은 務爲寛深不測之量
하고 而下之士
는 好言
하나니
此二者는 皆庸人相與議論에 舉先賢之言하야 而獵取其近似者하야 以自解説其無能而已矣니이다
夫寛深不測之量은 古人所以臨大事而不亂하야 有以鎮世俗之躁요 蓋非以隔絶上下之情하야 養尊而自安也니이다
譽之則勸하고 非之則沮하며 聞善則喜하고 見惡則怒는 此三代聖人之所共也로되
而後之君子는 必曰 譽之不勸하고 非之不沮하며 聞善不喜하고 見惡不怒라야 斯以爲不測之量이라하니 不已過乎잇가
夫有勸有沮하고 有喜有怒然後에 有間而可入이요 有間而可入然後에 智者得爲之謀하고 才者得爲之用이어늘 後之君子는 務爲無間하니 夫天下誰能入之리잇고
後之所謂中庸者
는 循循焉爲衆人之所能爲
하야 斯以爲中庸矣
라하니 此
는 也
라
生斯世也하야는 爲斯世也하야 善斯可矣라하니 謂其近於中庸而非라
孔子, 孟子惡鄕原之賊夫徳也하사 欲得狂者而見之하시고 狂者를 又不可得見하야 欲得獧者而見之하사
曰
라하시니 今日之患
은 惟不取於狂者, 獧者
하고 而皆取於鄕原
이라
孔子는 子思之所從受中庸者也요 孟子는 子思之所授以中庸者也니이다
然이나 皆欲得狂者, 獧者而與之하시니 然則淬勵天下而作其怠惰인댄 莫如狂者, 獧者之賢也니이다
臣은 故로 曰 破庸人之論하야 開功名之門이니 而後에 天下可爲也라하노이다
此篇은 前後各自爲段落하니 起伏이 與決壅蔽篇同하니라
용렬한 사람들의 세속적 의논을 깨뜨려 문장文章에 기이한 기운이 있다.
천자天子가 집정대신執政大臣과 뜻이 서로 맞아 의심이 없어야만 대신大臣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계책을 다 말하고 자기 몸을 바르게 행하여 도道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마땅히 먼저 해야 할 것은 용렬한 사람들의 의논을 깨뜨려서 공명功名의 문을 열어주어야만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천하天下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것은 비유하건대 홍수를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홍수가 치달려 충돌해서 둑을 무너뜨리고 위로 세차게 용솟음쳐 사람과 물건들을 떠내려 보내서 막을 수 없을 경우에는 비록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동원하여 한 치나 한 자의 수세水勢를 줄이고자 해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홍수의 형세가 줄어들고 또 물러갈 적에는 수세水勢가 급속히 약해져서 하루를 마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므로 홍수를 잘 다스리는 자는 비단 수세水勢를 줄이기 어려움을 걱정할 뿐만이 아니요, 또 물이 너무 쉽게 줄어드는 것을 우려합니다.
그리하여 물을 인도함에 방법이 있고 물을 점진적으로 터놓아서 예전에 담겨져 있던 물을 소통시켜 쏟아내고 새로운 물을 받아들여서 물길이 막혀 물이 썩어서 쓸모없어지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합니다.
사람들이 강하江河에 수해가 있음만 알고, 작은 하천과 못들은 수해水害가 없다고 말한다면, 어찌 주즙舟楫과 관개灌漑의 이로움을 알겠습니까?
천하天下가 평정되기 전에는 영웅호걸들이 힘써 자신의 소장所長을 가지고 달려와 이익을 다투어 행여 천하天下가 하루라도 무사할까 염려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마다 각기 자신의 재능을 다하여 아무리 불초한 자라도 또한 스스로 분발하여 태만하고 황폐함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용감한 자들은 서로 병탄倂呑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서로 해쳐서 천하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생업을 편안히 영위하지 못하게 합니다.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자는 이 대란大亂의 근본이 지혜롭고 용맹한 선비들이 만족할 줄 모르고 이익을 다투는 데서 시작됨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천하天下가 평정되고 나면 그들의 지혜와 용맹을 제거해서 천하天下에 강건剛健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들을 억제하여 멀리 하고, 나약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장려하고 등용하니, 이렇게 하면 불과 수십 년 만에 천하天下 사람들이 모두 그리로 쏠려서 다시는 예전처럼 일을 좋아하는 자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에 능한 자는 스스로 분발하지 못하여 자기 재능을 나타낼 수가 없고, 능하지 못한 자는 더욱 해이하고 황폐해져서 쓸모없게 되니, 이때를 당해서 군주가 비록 훌륭한 일을 하고자 하나 좌우와 전후에 모두 일을 맡길 만한 자가 없게 됩니다.
이 때문에 기강이 날로 무너져도 스스로 알지 못하니, 그 폐해가 어찌 다만 영웅호걸의 선비들이 멋대로 소란을 피우지 못하고 주저함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성인聖人은 그렇지 아니하여, 오랫동안 안일과 향락에 빠져 있을 적에는 방법을 만들어 이들을 진작시켜서 천하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분발하여 항상 선善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게 만듭니다.
이 때문에 능히 편안하면서도 쇠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군주가 믿고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방법은 천하天下 사람들이 모두 일을 하고 군주 자신은 일을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천하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일하게 하고 군주 자신은 일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에게 이해利害의 단서를 열어주고 또 그 영화와 치욕의 차등을 분별해주어 그들로 하여금 분발하여 달려와서 모두 군주 자신을 위해 쓰여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군주가 가만히 앉아서 그 공功을 거두는 것이니, 만약 천하天下 사람들이 모두 일하지 않고 얻고자 한다면 천자天子가 누구와 함께 천하天下를 다스리겠습니까?
지금 나라가 다스려지고 평온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천하天下의 화禍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臣은 이 때문에 “용렬한 사람의 의논을 깨뜨려서 공명功名의 문을 열어주어야만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천하天下를 다스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용렬한 사람들의 의논은 두 가지가 있으니, 윗사람들은 되도록 넓고 깊어서 측량할 수 없는 큰 도량을 갖추려 하고, 아랫선비들은 중용中庸의 도道를 말하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용렬한 사람들이 서로 의논할 적에 선현先賢의 말씀을 들어서 그 비슷한 것들을 절취하여 스스로 자신의 무능함을 변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넓고 깊어서 측량할 수 없는 큰 도량은 옛사람이 대사大事에 임하여도 혼란하지 아니하여 세속의 조급함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요, 상하간上下間의 마음을 막고 끊어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편안히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을 칭찬해주면 권면되고 그르다고 비난하면 의기가 저상되며, 선善을 들으면 기뻐하고 오惡을 보면 노여워하는 것은 삼대三代의 성인聖人들이 똑같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의 군자君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칭찬하여도 권면되지 않고 비난하여도 저상되지 않으며, 선善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오惡을 보아도 노하지 않아야 이에 측량할 수 없는 큰 도량이 된다.”라고 하니,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권면됨이 있고 저상됨이 있고 기뻐함이 있고 노여워함이 있은 뒤에야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고, 또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은 뒤에야 지혜로운 자가 군주를 위해 도모하고 재주 있는 자가 군주를 위해 쓰여질 수 있는데, 후세의 군자君子들은 되도록 틈이 없으려고 하니, 천하天下에 그 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이른바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만물의 도리를 다하여 지나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을 또한 황극皇極이라고도 하였으니, 이 극極은 극진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후세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은 고분고분하여 보통 사람들도 행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이것을 중용中庸이라고 하니, 이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말씀한 향원鄕原이라는 것입니다.
한 지방 사람들이 모두 근신하는 사람[원인原人]이라고 칭하여 가는 곳마다 근신하는 사람이 되어서 유속流俗과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말하기를 “옛사람은 어찌하여 행실을 외롭고 쓸쓸하게 하였는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세상에 맞춰 살아서 남들이 선善하다고 하면 될 뿐이다.”라고 하니, 이는 중용中庸과 유사하면서도 중용中庸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덕德의 적賊’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께서 향원鄕原이 덕德을 해침을 미워하여 광자狂者를 얻어 만나보고자 하셨고, 광자狂者를 또 만나볼 수가 없어서 견자獧者를 얻어 만나보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광자狂者는 진취적이고 견자獧者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라고 하셨으니, 오늘날의 병통은 오직 광자狂者와 견자獧者를 취하지 않고 모두 향원鄕原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이 나약하여 성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는 자사子思에게 중용中庸을 전수해주신 분이요, 또 맹자孟子는 자사子思에게 중용中庸을 전수받은 분입니다.
그런데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모두 광자狂者와 견자獧者를 얻어서 함께 하고자 하셨으니, 그렇다면 천하天下 사람들을 분발시켜서 나태함을 진작시키려 한다면 광자狂者와 견자獧者의 어진 사람을 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신臣은 그러므로 말하기를 “용렬한 사람의 의논을 깨뜨려서 공명功名의 문을 열어주어야만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천하天下를 다스릴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편은 앞뒤가 각각 따로 단락이 되었으니, 기복起伏한 것이 〈결옹폐決壅蔽〉편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