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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1)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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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蘇文忠公本傳
蘇文忠公本傳
蘇軾 字子瞻이니 眉山人이라
소식蘇軾자첨子瞻이니, 미산眉山 사람이다.
幼穎悟有識이러니 比冠 博通經史하고 好賈誼, 陸贄, 莊子書
소식蘇軾은 어려서 영오穎悟하여 지식이 있었는데, 관례冠禮할 때에 이르자 경사經史를 널리 통달하고 가의賈誼육지陸贄장자莊子의 책을 좋아하였다.
한대 置第二하고 復以 居第一하고 하다
가우嘉祐2년(1057)에 예부禮部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구양수歐陽脩가 그를 제2(次席)로 뽑았고, 다시 《춘추春秋》의 뜻으로 대책對策하여 제1(首席)을 차지하고, 전시殿試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後以書見脩한대 脩語曰 吾當避此人出一頭地라하니라
뒤에 편지를 보내어 구양수歐陽脩를 뵈었는데, 구양수가 매성유梅聖兪(梅堯臣)에게 말하기를 “내 마땅히 이 사람을 피하여 한 자리를 내주어야 되겠다.”라고 하였다.
五年 調러니 復對하야 入三等하니 自宋以來 制策入三等與軾耳
가우嘉祐 5년(1060)에 복창현주부福昌縣主簿조용調用되었는데 다시 제책制策에 답하여 3등에 드니, 나라 건국 이래로 제책制策에서 3등에 든 것은 오육吳育소식蘇軾 두 사람뿐이다.
하고 治平二年하다
대리시평사大理寺評事에 제수되고 첨서봉상부판관簽書鳳翔府判官이 되었으며 치평治平 2년에 판등문고원判登聞鼓院으로 들어왔다.
聞其名하고 欲以唐故事 召入翰林知制誥한대 宰相曰 軾 遠大器也
영종英宗번저藩邸에 있을 때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나라의 고사故事를 따라 불러 한림원翰林院에 들여 지제고知制誥로 삼고자 하였는데, 재상宰相 한기韓琦가 말하기를 “소식蘇軾원대遠大기국器局입니다.
他日 自當爲天下用이니 要在朝廷培養之니이다
후일에 마땅히 천하를 위해 쓰여야 하니, 조정에서는 그를 잘 배양하여야 합니다.
今驟用之하면 則天下之士未必以爲然하리니 適足以累之也니이다
지금 대번에 그를 등용한다면 천하天下의 선비들이 반드시 옳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다만 그에게 누가 될 뿐입니다.
且請召試하노이다
우선 불러서 시험해보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及試 復入三等하야 得直史館하다
그리하여 두 편의 으로 시험을 보아 다시 3등에 들어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軾聞琦語하고 曰 公 可謂愛人以德矣라하니라
소식蘇軾한기韓琦의 말을 듣고 말하기를 “한공韓公은 사람을 으로써 아낀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아버지 상복喪服을 벗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마침 왕안석王安石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其異己하야이러니 旣而 安石 欲變科擧興學校하야 詔兩制한대 軾議上이라
왕안석王安石은 평소 자기와 뜻이 다른 것을 싫어하여 소식蘇軾판관고원判官告院으로 삼았는데, 얼마 후 왕안석王安石이 과거제도를 변경하고 학교를 일으키고자 하여 양제兩制삼관三館의 신하들에게 이것을 의논하도록 명하자, 소식蘇軾이 의논을 올렸다.
神宗卽日召對하니 軾曰 陛下 天縱文武이시니 不患不明이요 不患不勤이요 不患不斷이요 但患求治太急하고 聽言太廣하고 進人太銳하오니
신종神宗이 즉일로 불러 대면하니, 소식蘇軾이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이시니, 밝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부지런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결단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다만 다스림을 구하기를 너무 급히 하고 남의 말을 듣기를 너무 널리 하고 사람을 등용하기를 너무 빨리할까 염려됩니다.
願鎭以安靜하야 待物之來然後應之하소서 帝悚然曰 朕 當熟思之하리라
원컨대 안정安靜으로써 진정하여 사물事物이 오기를 기다린 뒤에 대응하소서.”라고 하니, 황제皇帝가 분연히 말하기를 “이 마땅히 심사숙고하겠다.”라고 하였다.
러니 軾決斷精敏하야 聲聞益遠이라
왕안석王安石은 기뻐하지 않고 소식蘇軾을 임시 개봉부추관開封府推官으로 임명하여 일로써 곤욕을 주려 하였는데, 소식蘇軾정밀精密하고 민첩하게 판결하여 명성이 더욱 멀리 퍼졌다.
安石創新法한대
이때 왕안석王安石신법新法을 창제하자, 소식蘇軾이 글을 올려 논변하였다.
見安石贊帝以獨斷專任하고 因試進士하야 發策호되하고 하고 齊桓 專任管仲而霸하고 하니 事同而功異 爲問한대
소식蘇軾왕안석王安石이 황제에게 ‘홀로 결단하고 정사政事를 자신에게 전적으로 맡길 것’을 부추기는 것을 보고 진사시進士試를 계기로 책문策問을 내어, 나라 무제武帝나라를 평정할 때에 홀로 결단決斷을 내려 이겼고 부견苻堅나라를 정벌할 때에는 독단獨斷으로 망하였으며, 나라 환공桓公관중管仲에게 오로지 맡겨 패자霸者가 되었고 연왕燕王 자지子之에게 오로지 맡겨 실패하였으니, 일은 같아도 이 다르다는 것으로 질문하였다.
이에 왕안석王安石이 더욱 노하여 어사御史사경온謝景溫으로 하여금 소식蘇軾의 잘못을 논주論奏하게 하여 끝까지 다스렸으나 찾아낸 바가 없었다.
소식蘇軾은 마침내 외직外職을 청하여 항주통판杭州通判이 되었고 지밀주사知密州事로 옮겼다가 또다시 서주徐州로 옮겼다.
河決曹村하야 泛溢匯城下하고 漲不時洩하야 城將敗
서주徐州에 있을 적에 황하黃河조촌曹村이란 마을로 터져 범람하여 아래에서 돌아 넘치고, 불어난 물이 제때에 빠지지 못해서 이 장차 무너지게 되었다.
軾詣武衛營하야 呼卒長하야 爲盡力한대
소식蘇軾무위영武衛營에 나아가 졸장卒長을 불러 힘을 다해 홍수를 막게 하자,
卒長曰 太守猶不避塗하시니 吾儕 小人이라 當效命이라하고
졸장卒長이 말하기를 “태수太守(知事)께서도 진흙과 흙탕물을 피하지 않으시니, 우리 소인小人들은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한다.” 하고는
率其徒하야以出하야 遂築東南長堤
병사들을 거느리고 삼태기와 가래를 가지고 나와 동남쪽에 긴 제방을 쌓았다.
雨日夜不止하야 城不沈者三版이러니
비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아 이 잠기지 않은 것이 겨우 세 이었다.
復請於朝하야 增築故城하고 爲木岸하야 以虞水之再至하다
소식蘇軾은 다시 조정에 청하여 옛 을 증축하고 나무로 강안江岸을 만들어서 홍수가 다시 닥쳐올 것에 대비하였다.
한대 이라하야 逮赴하야 欲置之死러니 帝獨憐之하야 以黃州團練副使安置한대
그러다가 지호주사知湖州事로 옮겼는데, 어사御史이정李定서단舒亶하정신何正臣소식蘇軾사은謝恩표문表文의 말을 트집잡고 아울러 탁풍시託諷詩매얼媒蘖로 해서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로 엮어서 체포하여 어사대御史臺으로 끌고 와서 사형死刑에 처하고자 하였는데, 황제皇帝(神宗)께서 홀로 가엾게 여겨서 황주단련부사黃州團練副使로 〈황주黃州에〉 안치安置하게 하였다.
軾築室於居士하다
소식蘇軾동파東坡라는 곳에 집을 짓고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 하였다.
帝嘗語宰相호되 命蘇軾하야 成國史하라하니 珪有難色이어늘
황제皇帝가 일찍이 재상宰相왕규王珪채확蔡確에게 말하기를 “소식蘇軾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이루게 하고자 한다.” 하니, 왕규王珪가 난색을 표하였다.
帝曰 軾不可인댄 姑用曾鞏하라한대 鞏進太祖總論이나 帝意不允이라
황제皇帝가 말하기를 “소식蘇軾이 안 된다면 우선 증공曾鞏을 등용하라.”고 하여, 증공曾鞏이 〈태조총론太祖總論〉을 지어 올렸으나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제皇帝수찰手札을 내려 소식蘇軾여주汝州로 옮겼는데, 소식蘇軾여주汝州에 부임하기 전에 글을 올려 자신의 춥고 굶주린 정황을 말하고 전지田地상주常州에 있으니 그곳에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아침에 아뢰자 저녁에 허락하는 비답을 내렸다.
道過金陵할새 見王安石하고 曰 大兵大獄 漢唐滅亡之兆
도중에 금릉金陵(南京)을 지나가다 왕안석王安石을 보고 말하기를 “큰 전쟁과 큰 옥사獄事나라와 나라가 멸망할 때의 조짐이었습니다.
하고 東南數起大獄이어늘 公獨無一言以救乎잇가 安石曰 二事啓之
지금 서방西方에는 해마다 군대를 출동시키고 동남 지방에는 여러 번 큰 옥사獄事를 일으키는데도, 은 어찌 한마디 말씀으로 이를 바로잡지 않습니까?” 하니, 왕안석王安石이 말하기를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여혜경呂惠卿이 계도한 것이다.
安石在外하니 安敢言이리오
내가 밖에 있으니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安石又曰 人須知行一不義하고 殺一不辜하면 得天下弗爲라야 乃可니라
왕안석王安石은 또 말하기를 “사람은 모름지기 ‘한 가지 일이라도 불의不義를 행하며 한 사람이라도 무고無辜한 이를 죽여서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 비로소 하다.”라고 하니,
軾戱曰 今之君子 爭減하야 雖殺人이라도 亦爲之니이다하다
소식蘇軾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지금 군자君子들은 반년半年마감磨勘을 줄일 것을 다투어, 비록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哲宗立하야 하고 元祐元年하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연달아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에 발탁되고 원우元祐 원년元年(1086)에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朝廷以으로 復散한대 請申이라
조정에서 범순인范純仁의 말을 따라 다시 청묘전靑苗錢을 나누어주려 하자, 사마광司馬光이 강제 배정을 하는 법령法令을 엄하게 할 것을 거듭 청하였다.
하니 是軾議하야 遂止하다
소식蘇軾사마광司馬光의 아룀을 격주繳奏하니, 소식蘇軾의 의논을 옳게 여기고 청대請對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祖宗行하니 充役者多不習하고 又虐使之하야 有終歲不得息者
처음 조종조祖宗朝에서 차역差役을 행하였는데, 부역에 충원된 자들이 대부분 일에 익숙하지 못하였고, 또 이들을 모질게 부려서 해를 마치도록 쉬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니 行法者過取하야 爲民病이라
왕안석王安石이 이것을 면역免役으로 바꿔, 마다 고하高下의 차등을 두어 돈을 내게 해서 부역할 자들을 고용하였는데, 을 시행하는 자들이 지나치게 돈을 받아 백성들의 폐해弊害가 되었다.
光欲復差役한대 軾曰 差役, 免役 各有利害니이다 光曰 於君何如
사마광司馬光차역差役을 복구하려 하자, 소식蘇軾이 “차역差役면역免役은 각각 이해利害가 있다.”고 말하니, 사마광司馬光소식蘇軾의 생각이 어떠한지 물었다.
軾曰 法相因則事易成이요 事有漸則民不驚이니이다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이 서로 인습因習하면 일이 이루어지기 쉽고, 일이 점진적으로 행해지면 백성들이 놀라지 않습니다.
삼대三代의 법은 이 하나였는데, 나라 때에 이르러 비로소 둘로 나뉘었고, 나라 중엽에 이르러 부병제府兵制장정長征의 군대로 바꿨습니다.
自是 農出穀帛以養兵하고 兵出性命以衛農하니 雖聖人復起라도 不能니이다
이로부터 농민農民들은 곡식과 비단을 내어 군대를 기르고 군사들은 생명을 내어 농민들을 호위하였으니, 이 제도制度는 비록 성인聖人이 다시 나오더라도 바꿀 수 없습니다.
今免役 實大類此어늘
지금 면역免役은 실로 이것과 크게 유사합니다.
公欲驟罷免役하고 行差役하시니 正如罷長征하고 復民兵이니 蓋未니이다 光不以爲然하다
이 갑자기 면역免役을 파하고 차역差役을 시행하고자 하시니, 이는 바로 장정長征을 파하고 민병民兵을 복구하려는 것과 같으니, 쉽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사마광司馬光은 그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軾又陳於政事堂한대 光忿然이라
소식蘇軾이 또다시 정사당政事堂에서 이것을 말하자, 사마광司馬光이 노여워하였다.
軾曰 昔 이어늘 公爲諫官하야 爭甚力이라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지난날 한위공韓魏公(韓琦)이 섬서陝西의용군義勇軍을 내도록 명하자, 간관諫官으로서 매우 강력히 간쟁諫爭하였습니다.
韓公不樂호되 公亦不顧러니 豈今日作相하야 不許軾盡言耶잇가하다
한공韓公이 좋아하지 않았으나 은 이것을 돌아보지 않았는데, 어찌 오늘 정승이 되셔서 제가 말을 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尋除翰林學士하고 二年 하다
얼마 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고 원우元祐 2년(1087)에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嘗讀이라가 因及時事 軾歷言
일찍이 황제를 모시고 《조종보훈祖宗寶訓》을 읽다가 이로 인해 시사時事를 언급하게 되었는데, 이때 소식蘇軾은 당시의 상황을 일일이 들어 말하기를
今賞罰不明하야 善惡無所勸沮하고 又黃河勢方北流어늘 而彊之使東하고
“지금 상벌賞罰이 밝지 못해서 을 권면하고 을 저지하는 바가 없으며, 또 황하黃河의 형세가 막 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을 억지로 동쪽으로 흐르게 하며,
하야 殺掠數萬人이어늘 不以聞하니 每事如此
서하西夏 사람들이 진융군鎭戎軍으로 쳐들어와서 수만 명을 죽이고 노략질해 가는데도 수신帥臣이 이것을 보고하지 않으니,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恐寖成衰亂之漸이니이다
점차 쇠란衰亂의 조짐을 이룰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軾嘗할새 이러니 曰 卿官遽至此 乃先帝意也
소식蘇軾이 일찍이 금중禁中에서 숙직할 적에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하였는데, 선인황후宣仁皇后가 말하기를 “의 벼슬이 대번에 여기에 이른 것은 바로 선제先帝의 뜻이다.
先帝每誦卿文章 必歎曰 奇才奇才라하시더니 但未及進用卿耳니라
선제先帝께서 매번 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감탄하시기를 ‘기재奇才로다! 기재奇才로다!’ 하셨는데, 다만 미처 을 등용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軾不覺哭失聲한대 宣仁后與哲宗亦泣하고 左右皆感涕
소식蘇軾이 자기도 모르게 실성통곡失聲痛哭을 하자, 선인황후宣仁皇后철종哲宗도 함께 눈물을 떨어뜨리고, 좌우 측근들도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已而 命坐賜茶하고 徹御前金蓮燭하야 送歸院하다
얼마 후 자리에 앉도록 명하여 를 대접하고 어전御前에 있는 금련촉金蓮燭을 거두어 하사하여 으로 돌려보냈다.
四年 不爲所容하고 遂請外하야러니 未行 諫官 論前蔡確罪하야 大臣議遷之嶺南이라
4년(1089)에 소식蘇軾은 권세를 잡은 자들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임을 헤아리고 마침내 외직을 청하여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 지항주사知杭州事에 제수되었는데, 길을 떠나기 전에 간관諫官이 지난날 채확蔡確의 죄를 논하여 대신大臣들이 영남嶺南으로 좌천시킬 것을 의논하였다.
軾密疏호되 朝廷 不宜深罪하야 爲仁政累라하니 宣仁后心善其言이나 而不能用이라
이에 소식蘇軾은 은밀히 상소上疏하여, “조정朝廷에서 그를 무겁게 처벌하여 인정仁政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선인황후宣仁皇后는 마음속으로는 그 말을 좋게 여겼으나 쓰지 못하였다.
旣至杭하니 大旱하고 饑疫竝作이라
소식蘇軾항주杭州에 부임하니, 크게 가물고 기근饑饉과 염병이 함께 일어났다.
軾請減上供米하고 又減價하야 多作饘粥藥劑하야 活者甚衆이라
소식蘇軾본로本路상공미上供米를 줄여줄 것을 청하고 또 값을 낮춰 상평창常平倉의 쌀을 방출해서 미음과 죽과 약재를 많이 만들어 구제하니, 이로 인해 산 자가 매우 많았다.
杭本近海하야 地泉醎苦하니 居民稀少
항주杭州는 본래 바다에 가까워서 땅과 샘물이 짜고 쓰니, 거주하는 백성이 극히 드물었다.
唐刺史 始引西湖水하야하고 又浚西湖水하야 入漕河하야 漑田千頃하야 民以殷富
나라 때 자사刺史 이필李泌가 처음으로 서호西湖의 물을 끌어다가 여섯 우물을 만들었고, 백거이白居易가 또다시 서호西湖를 준설하여 운하로 끌어들여 천경千頃의 토지에 물을 관개하니, 백성들이 많아지고 부유하게 되었다.
湖水多葑호되 宋廢不治하니 葑積爲田하야 水無幾矣 漕河失利하고 六井亦幾廢
호수湖水에는 갈대가 많았는데, 나라 때에는 버려두고 다스리지 않으니, 갈대가 쌓여 밭이 되어 물이 얼마 없게 되었으며, 운하가 쓸모가 없어지고 여섯 우물 또한 거의 버려지게 되었다.
軾見茅山一河專受江潮하고 鹽橋一河專受湖水하고 遂浚二河하야 以通漕하야 復造하야 以爲蓄洩之限하고 以餘力으로 復完六井하며
소식蘇軾모산茅山의 한 물은 오로지 조수潮水만을 받아들이고 염교鹽橋의 한 물은 오로지 호수湖水의 물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두 물을 준설하여 조운漕運을 통하게 하고 다시 제방堤防갑문閘門을 만들어서 물을 저장하고 흘려보내는 한계로 삼았으며, 여력餘力으로 다시 여섯 우물을 완전히 회복시켰다.
又取葑田積湖中하야 南北徑三十里 爲長堤하야 以通行者하다
또 갈대밭의 흙을 취하여 호수湖水 가운데에 남북南北으로 길이가 30 되는 긴 둑을 쌓아서 사람들이 통행하게 하였다.
堤成 植芙蓉楊柳其上하니 望之如畫圖
제방堤防이 이루어지자 부용芙蓉(연꽃)과 버드나무를 그 위에 심으니, 바라보면 마치 그림과 같았다.
杭人 名爲蘇公堤라하니라
항주杭州사람들은 이것을 소공제蘇公堤라고 이름하였다.
浙江潮自海門東來하야 勢如雷霆하고 而浮山 峙於江中하야 與漁浦諸山으로 犬牙相錯하야 洄洑激射하야 歲敗公私船 不可勝計
절강浙江(錢塘江)의 조수는 바다 어귀 동쪽으로부터 와서 형세가 우레와 같고, 부산浮山이 강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어 어포漁浦 등 여러 산과 함께 개 이빨처럼 서로 어긋나서 물이 급히 맴돌고 격하게 쏟아지니, 해마다 공선公船사선私船을 파선시키는 것을 이루 다 계산할 수가 없었다.
軾議호되 自江上流地名石門으로 鑿漕河하야 自慈浦北折하야 抵小嶺하고 浚古河하야 以避浮山之險이라하고
소식蘇軾의 상류인 석문石門으로부터 운하를 파서 자포慈浦로부터 북쪽으로 꺾어 소령小嶺에 이르고 옛날 하수河水를 준설하여 부산浮山의 험함을 피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고,
復言 之水瀦爲太湖하고 太湖之水溢爲松江하야 以入海
다시 말하기를 “삼오三吳의 물이 모여 태호太湖가 되고 태호太湖의 물이 넘쳐 송강松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以來 松江築扼塞이라 今三吳多水 欲鑿挽路하야 爲十橋하야 以迅江勢라하나 俱不果用하니 人以爲恨이라
그런데 경력慶曆 연간 이래로 송강松江만로挽路를 쌓아 물길을 막았기 때문에 지금 삼오三吳 지방에 홍수가 많으니, 만로挽路를 파서 10개의 다리를 만들어 강물의 형세를 빠르게 하자.”라고 하였으나, 모두 끝내 쓰이지 못하니, 사람들이 한탄하였다.
軾再莅杭하니 有德於民하야 家有畫像하고 飮食必祝하며이라
소식蘇軾이 다시 항주杭州에 부임하니, 백성들에게 은덕이 있어서 집집마다 소식蘇軾의 화상을 그려두고 음식을 먹고 마실 적에 반드시 축원하였으며, 생사당生祠堂을 만들었다.
六年 召爲吏部尙書러니 未至하다
원우元祐 6년(1091)에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부름을 받았는데, 부임하기 전에 아우 우승右丞으로 제수되었기 때문에 피혐하여 한림승지翰林承旨로 바뀌었다.
數月 復以讒請外하야 乃以龍圖閣學士 知潁州하다
몇 개월 만에 다시 참언讒言 때문에 외직을 청하여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지영주사知潁州事가 되었다.
七年 徙揚州러니 未閱歲 召爲兵部尙書兼侍讀하다
7년에 지양주사知揚州事로 옮겼는데 1년이 지나지 않아 병부상서兵部尙書 겸시독兼侍讀으로 부름을 받았다.
郊祀러니 한대 駕回 詔皇后而下毋迎謁하다
교사郊祀를 지낼 적에 노부사鹵簿使를 맡고 있었는데, 황후皇后대장공주大長公主가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타고 황제의 의장儀仗을 피하지 않자, 소식蘇軾이 탄핵하여 아뢰니, 대가大駕가 돌아온 뒤에 황후皇后 이하를 맞이하여 배알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예부상서禮部尙書 겸단명전학사兼端明殿學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승진하였다.
어늘 朝廷以故事許之한대
고려高麗에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서책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朝廷에서 고사故事에 따라 허락하려 하자,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나라 동평왕東平王제자諸子태사공太史公의 책(《사기史記》)을 청하였을 때도 주려 하지 않았는데, 지금 고려高麗에서 청한 것은 이보다 더 심하니 어찌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八年 宣仁后崩하고 哲宗親政이라
원우元祐 8년(1093)에 선인황후宣仁皇后가 승하하고 철종哲宗친정親政을 하였다.
軾乞補外하야 以兩學士 知定州하다
소식蘇軾은 외직에 보임될 것을 청원하여 양학사兩學士지정주사知定州事가 되었다.
國事將變하니 하고 旣行 上書云云이라
이때 국사國事가 장차 변하려 하니, 소식蘇軾은 궁궐에 들어가 하직하지 못하고 길을 떠난 다음 이리이리 글을 올렸다.
定州軍政壞弛러니 會春大閱이라
정주定州군정軍政이 파괴되고 해이하였는데, 마침 봄에 큰 열병식閱兵式을 거행하였다.
軾命擧舊典하야 하고 將吏戎服執事하야 無敢慢者
소식蘇軾은 옛 법대로 거행할 것을 명하여 장수將帥는 평상복차림으로 장막 안에서 나오고 장관將官관리官吏들은 군복軍服차림으로 일을 집행하게 하여 감히 태만한 자가 없었다.
定人言 自韓琦後 不見此禮至今矣라하니라
정주定州사람들이 말하기를 “한기韓琦가 떠나간 이후로 지금에 이르도록 이 예식禮式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선인황후宣仁皇后가 생존해 있을 적에, 시어사侍御史 가이賈易감찰어사監察御史 동돈일董敦逸황경기黃慶基가 앞뒤로 소식蘇軾과 그의 아우 이 지은 문장이 선왕조先王朝(神宗)를 비판하고 배척排斥했다고 논죄하다가 세 사람이 모두 죄에 걸려 축출되었는데, 소성紹聖 초년初年에 이르러 어사御史가 다시 이것을 말하자, 소식蘇軾지영주사知英州事로 좌천되었다.
未至 貶寧遠軍節度副使하야 하고 居三年 又貶瓊州別駕하야 非人所居 藥餌皆無有
영주英州에 부임하기 전에 영원군절도부사寧遠軍節度副使로 좌천되어 혜주惠州에 안치되었고, 혜주惠州에 있은 지 3년 만에 또다시 경주별가瓊州別駕로 좌천되어 창화昌化에 거주하니, 창화昌化는 옛날 담이儋耳의 땅으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고 약품과 먹을 것이 모두 없었다.
初僦官屋호되 有司猶謂不可한대 軾遂買地築室하니
처음 관청의 집을 세내어 살려 하였으나, 유사有司불가不可하다 하였으므로 소식蘇軾은 마침내 땅을 사 집을 지었다.
儋人 運甓土助之
이때 담주儋州 사람들이 벽돌을 운반해오고 흙을 삼태기에 담아와 협조하였다.
獨與幼子過處하고 著書爲樂하다
소식蘇軾은 홀로 어린 아들 와 함께 거처하며 글을 짓는 것을 으로 삼았다.
徽宗立하야 連徙永州하고 三大赦하야하다
휘종徽宗이 즉위하여 연달아 영주永州로 옮기고, 세 번 대사면령을 거쳐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 되었으며 다시 조봉랑朝奉郞이 되었다.
軾自元祐以來 未嘗以歲課乞遷이라 官止於此하다
소식蘇軾원우元祐 이래로 일찍이 세과歲課(연공)를 가지고 승진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이 이에 그쳤다.
未幾 卒於常州하니 年六十六이라
얼마 안 있다가 상주常州에서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66세였다.
軾與轍 爲文章
소식蘇軾은 아우 과 함께 문장을 지을 적에 모두 그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았다.
弱冠 父子兄弟至京師하니 一日而聲名赫然하야 動於四方이라
약관弱冠부자父子형제兄弟경사京師에 이르니, 하루아침에 명성이 혁혁赫赫하여 사방에 진동하였다.
軾嘗自謂 作文 如行雲流水하야 初無定質이라
소식蘇軾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글을 짓는 것은 떠가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과 같아서 애당초 정해진 바탕이 없다.
但當行於所當行이요 止於所不可不止라하다
다만 마땅히 흘러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고 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 그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雖嬉笑怒罵之辭라도 皆可書而誦之
그리하여 비록 장난하고 웃고 성내고 꾸짖는 말이라도 모두 글로 표현하여 욀 만하였다.
其體渾涵光芒하야 雄視百代하니 有文章以來 蓋亦鮮矣
문체文體혼함渾涵하고 광채光彩가 있어서 백대百代를 오만하게 보니, 문장이 있은 이후로 이와 같은 경우는 드물었다.
晩作易傳未究하고 命軾述其志러니 軾成易傳하고 復作論語說하다
소순蘇洵은 말년에 《역전易傳》을 지었으나 끝마치지 못하고 소식蘇軾에게 명하여 그 뜻을 계술繼述하게 하니, 소식蘇軾이 《역전易傳》을 완성하고 다시 《논어설論語說》을 지었다.
後居海南할새 作書傳하고 又有하다
뒤에 해남海南에 거처할 적에 《서전書傳》을 지었고, 또 《동파문집東坡文集과 《주의奏議》와 《내외제內外制》와 《화도시和陶詩》 등을 지었다.
一時文人如黃庭堅, 晁補之, 秦觀, 張耒, 陳師道 擧世未之識이러니 軾待之如朋儔하고 未嘗以師資自予也하니라
같은 시대時代의 문인으로 황정견黃庭堅조보지晁補之진관秦觀장뢰張耒진사도陳師道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는데, 소식蘇軾은 이들을 친구와 같이 대하고 일찍이 스승의 자격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自爲 至出入 必以愛君爲本하야 挺挺大節이로되
소식蘇軾거자擧子가 되었을 때부터, 출입出入하며 시종侍從함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군주를 사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큰 절개가 우뚝하였으나, 매번 소인小人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아서 죽은 후에도 이름이 원우당元祐黨에 들어가 간행된 문집文集이 훼손되었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를 추증하고 손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임명하였고, 또 소식蘇軾의 문집을 좌우에 두고 읽어 피곤함을 잊었으며 친히 문집文集을 지어 증손 에게 주었다.
遂崇贈太師하고 이라하다
그리고 마침내는 높여 태사太師를 추증하고 시호諡號문충文忠이라 하였다.
三子 邁, 迨, 過 俱善爲文하니라
세 아들은 이니, 모두 문장을 잘하였다.
역주
역주1 嘉祐二年에 試禮部 : 嘉祐 2년(1057)은 蘇軾의 나이 22세 때이다. 宋나라의 과거제도는 먼저 지방의 鄕試나 開封府試에 합격한 자에 한해서 禮部가 주관하는 중앙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蘇軾과 아우 蘇轍은 모두 嘉祐 元年에 開封府試에 합격하였었다.
역주2 歐陽脩 : 1007~1072. 字는 永叔인데 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으로 韓愈와 함께 古文運動의 영수로 꼽히며 벼슬이 參知政事에 이르렀다. 嘉祐 2년 당시 禮部侍郞으로 知貢擧(과거시험 위원장)의 직책을 맡았다. 옛날에는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자신을 급제시킨 知貢擧를 스승으로 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인연으로 蘇軾은 평생 歐陽脩를 스승으로 섬겼다.
역주3 春秋對義 : 과거제도에 있어 進士試의 경우, 詩賦의 시험과 별도로 《禮記》와 《春秋》 가운데 하나를 골라 對策文으로 시험하였다.
역주4 殿試에 中乙科 : 禮部試의 급제자들을 상대로 황제가 친히 시험하여 등급을 나누었는데, 이를 ‘殿試’라 한다. 급제자를 모두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3등급까지는 進士, 4등급은 進士出身, 5등급은 同進士出身이라 칭하였다. 乙科는 2등급이다.
역주5 梅聖兪 : 歐陽脩와 詩交를 맺었던 宋나라 시인 梅堯臣의 字이다. 새 울음소리를 따서 짓는 漢詩體의 하나인 ‘禽言體’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 후 宋나라의 蘇軾과 朱熹 등이 유사한 작품을 남기고, 한국에서는 張維‧權韠‧金允植 등이 이런 시를 지었다.
역주6 福昌主簿 : 福昌은 京西北路 河南府에 소속된 縣(現 河南省 宜陽 서쪽)의 이름이고, 主簿는 문서와 장부를 관리하는 낮은 관리이다.
역주7 制策 : 황제가 특별한 인재를 뽑고자 하여 일반적인 과거 외에 직접 시험하는 과거인 制科에 출제된 문제를 이른다. 宋나라 때의 制科는 일정한 시기가 없이 행해졌으며 응시자에 대한 제한도 있지 않았다. 太祖 때에는 3과목뿐이었으나, 眞宗 때에 이르러 6과목으로 확대되었다. 《日知錄 制科條》
역주8 吳育 : 1004~1058. 字는 春卿이고 建州 浦城 사람이다. 天聖 5년(1027)에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이 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역주9 大理評事 : 司法을 담당한 중앙기관인 大理寺의 관직인데, 獄事의 판결을 전담하였다.
역주10 簽書鳳翔府判官 : 宋나라에는 지방에 수령을 보조하고 제반 정사를 관리하는 判官廳公事를 두었는데, 큰 고을은 通判이 맡고 작은 고을은 簽書判官이 그 업무를 담당하였다. 鳳翔은 지금 陝西省의 鳳翔縣이다.
역주11 判登聞鼓院 : 登聞鼓를 관장하는 관서인 登聞鼓院의 判官이다. 登聞鼓는 申聞鼓라 칭하기도 하였는데, 朝廷에 달아놓은 북으로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으로 하여금 두드리게 하였다 한다.
역주12 英宗은 自藩邸 : 藩邸는 황제가 제후왕으로 있을 때를 이른다. 仁宗을 이어 즉위한 英宗(재위 1063~1067)은, 仁宗의 형인 濮安懿王 趙允讓의 아들로, 仁宗의 양자가 되어 태자가 되었다.
역주13 韓琦 : 1008~1075. 字는 稚圭이고 號는 贛叟이며 安陽 사람이다. 天聖 5년(1027) 약관의 나이에 진사가 되어 右司諫, 樞密院直學士 등을 역임하였고 仁宗 嘉祐 4년(1059)부터 英宗 治平 4년(1067)까지 재상으로 있었다. 范仲淹, 富弼과 함께 명재상으로 명망이 높았다.
역주14 二論 : 〈孔子從先進論〉과 〈春秋定天下之邪正論〉을 말한다.
역주15 父喪除還朝 : 蘇軾의 부친인 蘇洵은 治平 3년(1066) 4월에 별세하였다. 蘇軾과 蘇轍은 3년상을 치르고 熙寧 元年(1068) 12월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역주16 王安石執政 : 王安石(1021~1086)은 문인이자 정치가로, 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이다. 字는 介甫이고 號는 半山이며 만년에 荊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荊公이라고 칭한다. 神宗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부국강병을 위해 新法을 시행하였으나 많은 폐해를 남겼다. 그는 神宗 熙寧 2년(1069)에 參知政事에 임명되었으며 熙寧 3년 12월에 재상이 되었다. 《宋史 王安石傳》
역주17 : 오
역주18 判官告院 : 官告院의 副職인 判官을 이른다. 官告院은 吏部에 소속된 관서로 문무백관의 加勳과 封贈에 관한 公文인 官告(告身)를 관리하였다.
역주19 三館 : 昭文館, 集賢院, 史館(春秋館)을 이르는데, 역사책을 편수하고 藏書와 校正을 직임으로 하였다.
역주20 安石不悅……將困之以事 : 開封府推官은 判官을 보좌하는 직책인데 업무가 많고 복잡하였다. 그러므로 蘇軾을 이 직책에 임시로 임명하여 곤욕을 주려고 한 것이었다.
역주21 軾上書論之 : 蘇軾이 熙寧 4년(1071) 2월에 萬言疏로 알려진 〈上神宗皇帝書〉를 올려 王安石의 新法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22 晉武平吳는 獨斷而克 : 晉나라 武帝는 太康 元年(280)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張華‧王濬‧杜預 등의 말을 따라 정월에 출병하여 3월에 吳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역주23 苻堅伐晉은 獨斷而亡 : 苻堅은 南北朝時代 前秦의 3대 황제(재위 357~386)이다. 명재상인 王猛은 죽을 적에 苻堅에게 東晉을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나, 苻堅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建元 19년(383)에 東晉을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출병하였다가 東晉의 장군 謝玄과 劉牢之에게 淝水에서 대패하였다. 이 때문에 前秦은 급속히 약해져서 394년에 멸망하였다.
역주24 燕噲는 專任子之而敗 : 戰國時代 燕나라 임금인 噲는 재상인 子之에게 정사를 일임하다가 마침내 왕위를 양보하여 나라가 크게 혼란에 빠졌으며, 齊나라의 공격을 받아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역주25 使御史謝景溫……窮治無所得 : 당시에 王安石은 御史인 謝景溫을 시켜, 蘇軾이 부친상을 당해 고향 四川으로 返葬하면서 소금을 밀매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치죄하고자 하였으나, 사실무근이어서 끝내 죄를 엮지 못하였다.
역주26 通判杭州……又徙徐州 : 蘇軾은 王安石의 핍박을 피해 외직을 자청하여 熙寧 4년(1071)에 杭州通判이 되었고, 熙寧 7년(1074)에 知密州事로 옮겼다가, 熙寧 10년(1077)에 知徐州事가 되었다.
역주27 : 료
역주28 畚鍤 : 모삽
역주29 徙知湖州 : 蘇軾은 元豐 2년(1079)에 知徐州事에서 知湖州事로 옮겼다.
역주30 御史李定, 舒亶, 何正言이 摭謝表語하고 幷媒蘖託諷詩하야 以爲訕謗 : 李定‧舒亶‧何正言은 모두 王安石의 추종자들이다. 何正言은 《宋史》에 ‘何正臣’으로 되어 있다. 謝表는 지방관이 임지에 도착한 후 황제에게 感謝의 뜻을 올리는 表인데, 여기서는 蘇軾이 湖州에 부임하여 올린 表를 말하며, ‘媒蘖託諷詩’는 蘇軾이 지은 詩 가운데 황제를 풍자하고 조정을 비방한 내용이 있다고 트집을 잡아 죄를 엮은 것을 말한다.
역주31 臺獄 : 御史臺의 獄을 가리킨다. 御史臺는 중앙감찰기관으로, 蘇軾은 元豐 2년(1079) 7월에 御史臺 관리인 皇甫遵에게 체포되어 御史臺에 투옥되었다.
역주32 東坡 : 蘇軾은 黃州 유배시에 경제적으로 매우 궁색하였는데, 黃州의 서생 馬正卿이 관청에 요청하여 수십 畝의 황무지를 경작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 황무지는 옛 군영지의 동쪽에 있는 경사지였으므로 ‘東坡(동쪽 언덕)’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蘇軾 역시 東坡라고 自號한 것이다.
역주33 王珪, 蔡確 : 王珪(1019~1085)는 字가 禹玉으로 成都 華陽 사람이다. 熙寧 9년(1076)부터 元豐 5년(1082)까지 재상을 지냈으나 별다른 공적은 있지 않았다. 蔡確(1037~1093)은 字가 持正으로 泉州 晉江 사람이다. 간사하고 아첨을 잘한 자로 王安石에게 붙어 출셋길에 올랐으나 王安石이 내쳐지자 앞장서서 그를 비난하였던 인물로 《宋史》 〈奸臣傳〉에 기록되어 있다. 元豐 5년(1082)부터 哲宗 元祐 元年(1086)까지 재상을 지냈다.
역주34 移軾汝州 : 蘇軾은 元豐 7년 3월에 檢校尙書水部員外郞 汝州團練副使를 제수받았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역주35 軾未至汝에 上書自言饑寒하고 有田在常하니 願居之라한대 朝奏에 夕報可 : 蘇軾은 元豐 7년 10월에 常州에 살게 해줄 것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고, 8년 정월에 재차 常州에 살 것을 원하는 표문을 올렸는데, 2월에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아침에 아뢰자 저녁에 허락하는 비답을 내렸다.’는 것은 황제의 허락이 매우 신속하였음을 뜻한다.
역주36 西方連年用兵 : 神宗이 즉위한 뒤 西夏와의 강화를 깨고 군사를 내어 橫山 일부를 수복하였는데, 이후 西夏가 계속 국경을 침략하여 자주 접전하였다. 西夏는 중국의 서북쪽(現 陝西省, 甘肅省 일대)에 위치하였으므로 ‘西方’이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37 惠卿 : 呂惠卿을 가리킨 것으로 王安石에게 붙어 重用되었으나 뒤에는 王安石을 모함한 인물이다.
역주38 半年磨勘 : 磨勘은 정기적으로 관리들의 근무성적을 考課하여 승진을 결정하는 제도이다. 宋나라 때에는 관리들이 3년의 임기를 磨勘하고 큰 허물이 없으면 승진할 수 있었다. ‘半年의 磨勘을 줄일 것을 다투어’라는 말은 ‘반년 일찍 승진하길 다투어’라는 의미이다.
역주39 連擢起居舍人 : 蘇軾은 元豐 8년(1085) 6월에 朝奉郞에 복직되어 知登州事에 임명되었고, 10월에 登州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禮部郎中으로 소환되었다가 12월에 起居舍人으로 영전하였다. 起居舍人은 中書省의 요직인데 시종관으로 천자의 언동을 기록하였다.
역주40 中書舍人 : 中書省의 舍人으로 神宗 초기까지는 實職이 아니었으나, 元豐 연간의 제도개혁에 의해 實職이 되어 詔書를 기초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다.
역주41 范純仁 : 1027~1101. 字는 堯夫로 명재상 范仲淹의 아들인데, 皇祐 元年(1049)에 進士에 급제하고 벼슬이 中書侍郞에 이르렀다.
역주42 靑苗錢 : 王安石의 新法 중 靑苗法에 의해 농민에게 대여하는 돈을 이른다. 靑苗法은 매년 곡식이 익기 전에 常平倉과 廣惠倉으로 하여금 어려운 백성들에게 錢穀을 대여하였다가 곡식이 익은 뒤에 2割의 利息을 붙여 本色과 함께 갚게 하는 제도였다. 이는 朝鮮朝의 還穀제도와 비슷한데, 원래의 취지는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백성들에게 강제로 배정하고 중간 관리들이 농간하여 결국 백성들에게 폐해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역주43 司馬光 : 1019~1086. 字는 君實이고 號는 迂夫로 北宋의 名相이다. 죽은 뒤 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寶元 元年(1038)에 進士에 급제하고 翰林學士, 御史中丞 등 중앙 요직을 역임하였다. 神宗이 王安石을 발탁하여 新法을 단행하자, 이에 반대하여 樞密副使를 사퇴하고 熙寧 3년(1070)에 외직으로 나갔다가 哲宗 元祐 元年(1086)에 입조하여 재상이 되었다. 《資治通鑑》의 편찬자이다.
역주44 嚴抑配之禁 : 抑配는 靑苗錢을 강제로 배정함을 이른다. 靑苗法의 폐단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실적을 염두에 둔 관리들의 강제 배정이었다. 이 때문에 사마광이 이렇게 청한 것이다.
역주45 繳奏 : 詔書가 내렸으나 반대하여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의견을 내어 다시 아뢰는 것을 말한다.
역주46 請對 : 군주를 대면하고 중요한 정사를 아뢸 것을 청함을 이른다.
역주47 差役 : 백성들로 하여금 번갈아가며 의무적으로 지방 관부의 말단 직무를 부담하도록 한 제도이다. 宋나라는 민가를 9등으로 나누어, 4등 이상은 公用으로 인부를 징발하고, 5등 이하는 면제하였다.
역주48 安石……出錢雇役 : 王安石은 差役의 폐해를 막고자, 백성들의 差役을 면제해 주고 호구의 등급에 따라 대신 돈을 내게 하고, 이 돈으로 관에서 인부를 모집하여 지방 관부의 말단 직무를 담당시켰다. 이것을 일러 ‘雇役’ 또는 ‘募役’이라 하였다.
역주49 三代之法은 兵農爲一이러니 至秦하야 始分爲二하고 及唐中葉하야 變府兵하야 爲長征之卒 : 夏‧殷‧周 三代에는 兵制가 井田에 기초하여,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에는 군대가 되는 兵農一致의 제도였는데, 戰國時代 말엽에 이르러 秦나라 등 열국들이 전문 군인을 육성하여 兵農이 분리되었다. 법제상으로 완비된 府兵制는 南北朝時代의 西魏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농민들을 일정기간 교대로 군에 복무시키는 제도이다. 西魏의 경우 1년에 1개월씩 교대로 근무하였다. 唐나라는 西魏의 병제를 정비하여 兵農一致를 근간으로 하는 府兵制를 군제로 삼았으나, 중엽 이후 군역을 담당하는 折衝府의 관리 기능이 무너지자 794년에 兵農分離의 募兵制로 전환하였다. 蘇軾이 말한 ‘長征之卒’은 오랜 기간을 근무하는 募兵의 군대를 뜻한다.
역주50 : 역
역주51 : 이
역주52 韓魏公 刺陝西義勇 : 韓魏公은 魏國公에 봉해진 韓琦를 가리키며, 刺는 선발함을 이른다. 英宗 治平 2년(1065)에 西夏가 변방을 침입하자, 당시 재상으로 있던 韓琦는 병력이 부족할까 염려하여 陝西省에서 20만의 의용군을 모집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크게 동요되었다. 이때 간관으로 있던 司馬光은 이 조치가 병제의 근간을 흔들고 백성들에게 믿음을 잃는 失政이라고 극력 반대하였다.
역주53 兼侍讀 : 翰林院侍讀學士를 이르는데, 모두 겸직이었으므로 兼侍讀이라고 칭하였다. 侍讀學士는 천자의 經筵에서 강의하는 책무를 맡았다.
역주54 祖宗寶訓 : 《三朝寶訓》을 이른다. 제왕의 업적 가운데 善政만을 모아 후세의 제왕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편찬한 책을 寶訓이라고 하는데, 《三朝寶訓》은 宋나라 太祖‧太宗‧眞宗의 善政을 기록한 책으로 仁宗 慶曆 연간에 재상 富弼이 편찬하였다.
역주55 夏人入鎭戎 : 夏人은 西夏의 군사를 이르며, 鎭戎은 鎭戎軍으로 지금의 寧夏 고원 일대에 위치하였다. 元祐 2년(1087)에 西夏가 鎭戎軍을 침범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는데, 장수들이 이를 숨기고 조정에는 피해가 없다고 보고한 사건을 이른다. 이 내용은 뒤의 〈論邊將隱匿敗亡憲司體量不實箚子〉에 자세히 보인다. 1038년 새로운 지도자인 趙元昊가 등장하여 皇帝國임을 선포하고 국호를 大夏라고 칭하였는데, 宋나라에서는 西夏로 칭하였다. 西夏는 몇 번에 걸친 宋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044년 宋나라가 매년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講和한 이래, 宋나라와 화북 지역에 있던 契丹族의 遼나라(907~1125)와 함께 3국 병립의 관계를 유지하다가, 1227년 칭기즈칸의 몽골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주56 帥臣 : 변방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장수로 按撫使, 經略使 등을 이른다.
역주57 鎖宿禁中 : 禁中은 원래 宮中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翰林院을 말한다. 翰林院의 관리들은 밤중에 차례로 당직을 섰는데 기밀의 보안을 위해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에 당직을 鎖宿이라고 하였다.
역주58 召對便殿 : 召對는 황제가 신하를 불러 대면하여 정사를 논함을 이르며, 便殿은 皇帝가 평상시에 거처하는 殿을 이른다. 공식적인 집무를 보는 正殿과 구별된다.
역주59 宣仁后 : 英宗의 宣仁聖烈高皇后이다. 哲宗이 太皇太后로 높였는데, 당시 哲宗이 어려서 섭정을 하고 있었다.
역주60 : 탁
역주61 當軸者 : 주요한 지위에 있거나 정권을 담당한 자를 이른다.
역주62 龍圖閣學士知杭州 : 宋나라는 천자마다 殿閣을 세워 御製文을 보관하고 관원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는데, 龍圖閣은 太宗의 御製文을 보관하는 殿閣이다. 閣의 관원으로는 學士, 待制, 直閣 등이 있었다. 이때 蘇軾이 외직을 청하여 知杭州事로 나가면서 龍圖閣學士를 겸한 것이다.
역주63 本路 : 路는 宋代의 지방 행정구역 단위로 지금의 省과 같은바, 杭州가 속해 있는 浙東路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역주64 : 조
역주65 常平 : 常平은 본래 풍년이 들면 값을 올려서 곡식을 사들이고 흉년이 들면 값을 내려 곡식을 팔아서 백성을 보호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漢나라 때 耿壽昌이 처음 만들었다 한다. 여기서는 常平의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지방 관부에 설치한 창고의 의미로 쓰였다.
역주66 李泌 : 722~789. 唐나라 때 문인이자 정치가로 字는 長源이다. 玄宗‧肅宗‧代宗‧德宗 등 네 조정에 연이어 벼슬하였고 끝내 재상에 올랐다. 李泌는 代宗 때 杭州刺史로 부임하여 六井을 만드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역주67 六井 : 唐나라 代宗 때에 杭州刺史 李泌가 西湖의 물을 끌어다가 만든 여섯 개의 우물을 말한다. 相國井, 西井, 金午井, 方井, 百龜井, 小方井으로 杭州 시내에 고르게 위치하였는데, 뒤에 전부 매몰되었다가 穆宗 때에 刺史로 부임한 白居易가 西湖를 준설하고 六井을 다시 복구하였다. 宋나라 때에 이르러 다시 대부분 매몰되었었는데, 蘇軾이 知杭州事로 부임하여 모두 복구하였다.
역주68 白居易 : 772~846. 唐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로 字는 樂天이고 號는 香山居士이다. 穆宗 長慶 2년(822)에서 4년(824)까지 杭州刺史로 부임하여 西湖를 준설하고 운하와 연결하였다.
역주69 堰牐 : 堰은 물을 막기 위한 제방을 이르고, 牐은 물높이를 조정하는 閘門을 이른다.
역주70 三吳 : 揚子江을 비롯하여 많은 강하들이 합류하는 세 곳의 지역을 이른다. 시대마다 각각 지역이 달랐는데, 晉나라 때는 吳興‧吳郡‧會稽 지역이며, 唐나라 때는 吳興‧吳郡‧丹陽 지역이며, 宋나라 때는 蘇州‧常州‧湖州 지역이며, 혹은 東吳인 蘇州, 中吳인 潤州, 西吳인 湖州를 三吳라 하였다.
역주71 慶曆 : 宋나라 仁宗 때의 年號(1041~1048)인데, 仁宗이 어진 정사를 펴서 천하가 태평하였다.
역주72 挽路 : 물길을 막는 제방으로, 위로 수레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은 제방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역주73 生祠 : 지방관의 善政을 높이 사모하여 그가 살아 있을 때에 백성들이 제사 지내는 사당을 이른다.
역주74 弟轍除右丞으로 改翰林承旨 : 吏部는 尙書省에 소속된 관서인데, 蘇軾은 이때 아우 蘇轍이 尙書右丞으로 제수되었기 때문에 피혐하여 翰林承旨로 직위를 옮긴 것이다.
역주75 鹵簿使 : 鹵簿는 천자가 거둥할 때에 따르는 儀仗과 旌旗의 행렬을 말하며, 이를 맡은 長을 鹵簿使라 한다.
역주76 皇后及大長公主……軾劾奏之 : 皇后는 哲宗의 皇后인 昭慈聖獻孟皇后이고, 大長公主는 英宗의 3녀인 韓魏國大長公主이다. 元祐 7년(1092) 11월 哲宗이 郊祀를 지낼 때의 일로, 이 내용은 본서의 권5 〈奏內中車子爭道亂行箚子〉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77 禮部尙書兼端明殿翰林侍讀兩學士 : 禮部尙書의 직위와 端明殿學士 및 翰林侍讀學士를 겸한 것인데, 蘇軾은 元祐 7년(1092) 12월에 승진하였다.
역주78 高麗遣使請書 : 元祐 8년(1093)에 입조한 高麗 사신이 《冊府元龜》와 歷代의 史冊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蘇軾은 당시 高麗가 契丹의 동맹국이므로 이 책들을 내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역주79 漢東平王 : 漢나라 宣帝의 아들인 劉宇로, 甘露 2년(B.C. 52)에 東平王에 봉해졌다. 元帝가 승하하고 成帝가 즉위하자 來朝하였는데, 이때 글을 올려 諸子의 책들과 《史記》를 하사해줄 것을 청하였다. 당시 成帝의 元舅(큰외삼촌)인 平陽侯 王鳳이 大司馬와 大將軍의 직위를 겸하고 있었는데, 이런 서책이 제후왕에게 있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반대하자 마침내 하사하지 않았다. 《漢書 宣元六王傳 東平思王》
역주80 諸子及太史公書 : 諸子의 책은 《韓非子》나 《莊子》 등을 이르는데 이러한 책들은 孔子를 부정하였다. 太史公은 前漢의 司馬遷을 이르며 太史公書는 《史記》를 이른다. 《史記》의 〈列傳〉에는 蘇秦‧張儀 등 縱橫家와 漢나라 建國功臣인 陳平‧蕭何 등의 傳記가 기재되어 있고, 〈天官書〉에는 天文과 曆法의 원리와 天文과 災異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며, 〈河渠書〉에는 천하의 地形과 要塞에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으므로 제후왕에게 내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역주81 猶不肯予하니 今高麗所請은 有甚於此하니 其可予乎 : 이 내용은 본서의 권4 〈論高麗買書利害箚子〉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82 軾不得入辭 : 본래 중앙직을 담당하던 신하가 외직인 知州事로 나갈 때에는 궁궐에 들어가 황제에게 肅拜를 올리고 임지로 떠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때(元祐 8년) 이미 新法黨이 다시 득세하였으므로 哲宗이 蘇軾을 멀리하여 親見하지 않은 것이다.
역주83 帥常服出帳中 : 帥는 장수로 知州事인 蘇軾을 가리키고, 常服은 知州事가 집무할 때 늘상 입는 官服으로 보이며, 帳中은 軍幕 가운데를 이른다.
역주84 宣仁在時……三人者皆坐黜 : 元祐 6년(1091)에 侍御史 賈易는 蘇軾이 지은 詩에 先帝(神宗)를 비방하는 내용이 있다고 모함하다가 知宣州事로 쫓겨갔고, 監察御史 董敦逸과 御史 黃慶基는 蘇軾이 中書舍人으로 있으면서 先帝(神宗)의 정사를 비판하고 배척하였으며, 그 아우 蘇轍이 표리가 되어 조정을 문란하게 하였다고 논죄하다가 파면되었다.
역주85 惠州安置 : 惠州는 지금의 廣東省 惠陽市로 廣東南路에 속해 있었다. 蘇軾은 紹聖 元年(1094)에 惠州에 安置되었다.
역주86 居昌化하니 昌化는 故儋耳地 : 昌化는 昌化軍으로 당시 下州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의 廣州 海南島이다. 본래 儋州였으나, 熙寧 6년(1073)에 昌化軍으로 격하되었다. 漢나라 때에 이곳에 儋耳郡을 둔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옛날 儋耳의 땅이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87 : 분
역주88 : 경
역주89 提擧玉局觀하고 復朝奉郞 : 元符 3년(1100) 5월에 徽宗이 즉위하여 대사면령을 내렸는데, 이때 蘇軾도 사면되어 廉州로 옮겨 안치되었다. 8월에 舒州團練副使로 제수하고 永州에 거주하라는 조칙이 내렸으며, 11월에 英州에 이르자 朝奉郞 提擧成都玉局觀에 임명되고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提擧玉局觀은 본래 道敎의 宮觀을 관리하는 관직인데, 연로한 신하를 예우하여 녹봉을 주기 위해 이름만 있는 祠祿의 관직이다.
역주90 俱師其父 : 其父는 蘇軾의 父親인 老泉 蘇洵을 가리킨다. 뒤늦게 文學에 종사하여 두 아들과 함께 三蘇로 일컬어졌다.
역주91 東坡等集……和陶詩 : 東坡等集은 《東坡集》 40권과 《東坡後集》 20권을 말하며, 《奏議》는 15권인데 奏疏를 기록한 것이고, 《內外制》는 《內制》 10권과 《外制》 10권으로 각각 내외의 制文을 기록한 것이며, 《和陶詩》 4권은 陶淵明의 시에 화답하여 지은 시들이다.
역주92 擧子 : 각종 크고 작은 科擧시험에 응시하던 사람을 이르던 말이다.
역주93 侍從 : 侍從官으로 황제를 측근에서 모심을 이르는데, 蘇軾이 翰林學士, 中書舍人, 禮部尙書 등의 직위를 거쳤기에 한 말이다.
역주94 每爲小人忌惡하야 身後에 猶編名元祐黨하야 毁文集刊行者 : 哲宗이 친정을 시작한 때부터 실권을 잡기 시작한 章惇, 蔡京 등 新法黨은 徽宗이 등극하자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建中靖國 元年(1101) 9월에 蘇軾과 文彦博 등 舊法黨 128명을 姦黨으로 지목하여, 그 이름과 사실을 기록한 碑를 端禮門에 세우니, 이것을 ‘元祐姦黨碑’라 하였다. 이들의 명단을 천하에 반포하였으니, 崇寧 2년(1103)에는 蘇軾의 문집 등 元祐黨人들의 저작들을 불태웠으며, 崇寧 3년(1104)에 司馬光 이하 3백 명을 다시 姦黨으로 정하여 황제가 친히 그 이름과 행적을 써서 이를 비석에 새겨 文德殿의 東壁 밑에 세웠는데, 이를 ‘元祐黨籍碑’라고 하였다.
역주95 孫符로 爲禮部尙書 : 高宗 즉위 이듬해인 建炎 元年(1127)에 蘇軾에게 資政殿學士를 추증하고, 손자 符를 禮部尙書로 임명하였다.
역주96 又以其文置左右……賜曾孫矯 : 底本에는 단락이 끊기지 아니하여 高宗이 또다시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이나 이 내용은 孝宗의 일이니, 《宋史》 本傳에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孝宗 建道 9년(1173) 閏正月에 孝宗이 지은 《御製文集序》에 이 내용이 보이며, 말미에 “選德殿에서 써서 蘇矯에게 내린다.[選德殿書賜蘇矯]”라고 밝혀져 있다.
역주97 諡文忠 : 孝宗 乾道 6년(1170)에 蘇軾에게 文忠의 諡號를 내렸으며, 乾道 9년(1173)에 太師를 추증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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