軾은 幼穎悟有識이러니 比冠에 博通經史하고 好賈誼, 陸贄, 莊子書라
後以書見脩
한대 脩語
曰 吾當避此人出一頭地
라하니라
五年
에 調
러니 復對
하야 入三等
하니 自宋以來
로 制策入三等
은 惟
與軾耳
라
로 聞其名
하고 欲以唐故事
로 召入翰林知制誥
한대 宰相
曰 軾
은 遠大器也
라
今驟用之하면 則天下之士未必以爲然하리니 適足以累之也니이다
素
其異己
하야 以
이러니 旣而
오 安石
이 欲變科擧興學校
하야 詔兩制
議
한대 軾議上
이라
神宗卽日召對하니 軾曰 陛下는 天縱文武이시니 不患不明이요 不患不勤이요 不患不斷이요 但患求治太急하고 聽言太廣하고 進人太銳하오니
願鎭以安靜하야 待物之來然後應之하소서 帝悚然曰 朕이 當熟思之하리라
軾
은 見安石贊帝以獨斷專任
하고 因試進士
하야 發策
호되 以
하고 하고 齊桓
은 專任管仲而霸
하고 하니 事同而功異
로 爲問
한대
河決曹村하야 泛溢匯城下하고 漲不時洩하야 城將敗라
卒長曰 太守猶不避塗
하시니 吾儕
는 小人
이라 當效命
이라하고
復請於朝하야 增築故城하고 爲木岸하야 以虞水之再至하다
한대 이라하야 逮赴
하야 欲置之死
러니 帝獨憐之
하야 以黃州團練副使安置
한대
帝嘗語宰相
호되 命蘇軾
하야 成國史
하라하니 珪有難色
이어늘
帝曰 軾不可인댄 姑用曾鞏하라한대 鞏進太祖總論이나 帝意不允이라
道過金陵할새 見王安石하고 曰 大兵大獄은 漢唐滅亡之兆라
今
하고 東南數起大獄
이어늘 公獨無一言以救乎
잇가 安石曰 二事
는 皆
啓之
라
安石又曰 人須知行一不義하고 殺一不辜하면 得天下弗爲라야 乃可니라
軾戱曰 今之君子
는 爭減
하야 雖殺人
이라도 亦爲之
니이다하다
初
에 祖宗行
하니 充役者多不習
하고 又虐使之
하야 有終歲不得息者
라
光欲復差役한대 軾曰 差役, 免役이 各有利害니이다 光曰 於君何如오
自是
로 農出穀帛以養兵
하고 兵出性命以衛農
하니 雖聖人復起
라도 不能
也
니이다
公欲驟罷免役
하고 行差役
하시니 正如罷長征
하고 復民兵
이니 蓋未
也
니이다 光不以爲然
하다
韓公不樂호되 公亦不顧러니 豈今日作相하야 不許軾盡言耶잇가하다
今賞罰不明하야 善惡無所勸沮하고 又黃河勢方北流어늘 而彊之使東하고
先帝每誦卿文章에 必歎曰 奇才奇才라하시더니 但未及進用卿耳니라
軾不覺哭失聲한대 宣仁后與哲宗亦泣하고 左右皆感涕라
已而오 命坐賜茶하고 徹御前金蓮燭하야 送歸院하다
四年
에 軾
은 不爲
所容
하고 遂請外
하야 拜
러니 未行
에 諫官
이 論前蔡確罪
하야 大臣議遷之嶺南
이라
軾密疏호되 朝廷이 不宜深罪하야 爲仁政累라하니 宣仁后心善其言이나 而不能用이라
軾請減
上供米
하고 又減價
米
하야 多作饘粥藥劑
하야 活者甚衆
이라
唐刺史
가 始引西湖水
하야 作
하고 又浚西湖水
하야 入漕河
하야 漑田千頃
하야 民以殷富
라
湖水多葑호되 宋廢不治하니 葑積爲田하야 水無幾矣요 漕河失利하고 六井亦幾廢라
軾見茅山一河專受江潮
하고 鹽橋一河專受湖水
하고 遂浚二河
하야 以通漕
하야 復造
하야 以爲蓄洩之限
하고 以餘力
으로 復完六井
하며
又取葑田積湖中하야 南北徑三十里로 爲長堤하야 以通行者하다
浙江潮自海門東來하야 勢如雷霆하고 而浮山이 峙於江中하야 與漁浦諸山으로 犬牙相錯하야 洄洑激射하야 歲敗公私船을 不可勝計라
軾議호되 自江上流地名石門으로 鑿漕河하야 自慈浦北折하야 抵小嶺하고 浚古河하야 以避浮山之險이라하고
復言
之水瀦爲太湖
하고 太湖之水溢爲松江
하야 以入海
라
以來
로 松江築
扼塞
이라 故
로 今三吳多水
라 欲鑿挽路
하야 爲十橋
하야 以迅江勢
라하나 俱不果用
하니 人以爲恨
이라
軾再莅杭
하니 有德於民
하야 家有畫像
하고 飮食必祝
하며 作
云
이라
數月에 復以讒請外하야 乃以龍圖閣學士로 知潁州하다
七年에 徙揚州러니 未閱歲에 召爲兵部尙書兼侍讀하다
郊祀
에 爲
러니 한대 駕回
에 詔皇后而下毋迎謁
하다
軾命擧舊典
하야 하고 將吏戎服執事
하야 無敢慢者
라
初
이러니 及紹聖初
에 御史復以爲言
한대 謫軾知英州
하다
未至
에 貶寧遠軍節度副使
하야 하고 居三年
에 又貶瓊州別駕
하야 로 非人所居
요 藥餌皆無有
라
軾自元祐以來로 未嘗以歲課乞遷이라 故로 官止於此하다
弱冠에 父子兄弟至京師하니 一日而聲名赫然하야 動於四方이라
其體渾涵光芒하야 雄視百代하니 有文章以來로 蓋亦鮮矣라
洵이 晩作易傳未究하고 命軾述其志러니 軾成易傳하고 復作論語說하다
一時文人如黃庭堅, 晁補之, 秦觀, 張耒, 陳師道는 擧世未之識이러니 軾待之如朋儔하고 未嘗以師資自予也하니라
自爲
로 至出入
히 必以愛君爲本
하야 挺挺大節
이로되 라
소식蘇軾은 자字가 자첨子瞻이니, 미산眉山 사람이다.
소식蘇軾은 어려서 영오穎悟하여 지식이 있었는데, 관례冠禮할 때에 이르자 경사經史를 널리 통달하고 가의賈誼와 육지陸贄와 장자莊子의 책을 좋아하였다.
가우嘉祐2년(1057)에 예부禮部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구양수歐陽脩가 그를 제2(次席)로 뽑았고, 다시 《춘추春秋》의 뜻으로 대책對策하여 제1(首席)을 차지하고, 전시殿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뒤에 편지를 보내어 구양수歐陽脩를 뵈었는데, 구양수가 매성유梅聖兪(梅堯臣)에게 말하기를 “내 마땅히 이 사람을 피하여 한 자리를 내주어야 되겠다.”라고 하였다.
가우嘉祐 5년(1060)에 복창현주부福昌縣主簿로 조용調用되었는데 다시 제책制策에 답하여 3등에 드니, 송宋나라 건국 이래로 제책制策에서 3등에 든 것은 오육吳育과 소식蘇軾 두 사람뿐이다.
대리시평사大理寺評事에 제수되고 첨서봉상부판관簽書鳳翔府判官이 되었으며 치평治平 2년에 판등문고원判登聞鼓院으로 들어왔다.
영종英宗은 번저藩邸에 있을 때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당唐나라의 고사故事를 따라 불러 한림원翰林院에 들여 지제고知制誥로 삼고자 하였는데, 재상宰相 한기韓琦가 말하기를 “소식蘇軾은 원대遠大한 기국器局입니다.
후일에 마땅히 천하를 위해 쓰여야 하니, 조정에서는 그를 잘 배양하여야 합니다.
지금 대번에 그를 등용한다면 천하天下의 선비들이 반드시 옳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다만 그에게 누가 될 뿐입니다.
우선 불러서 시험해보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편의 논論으로 시험을 보아 다시 3등에 들어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소식蘇軾은 한기韓琦의 말을 듣고 말하기를 “한공韓公은 사람을 덕德으로써 아낀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아버지 상복喪服을 벗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마침 왕안석王安石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왕안석王安石은 평소 자기와 뜻이 다른 것을 싫어하여 소식蘇軾을 판관고원判官告院으로 삼았는데, 얼마 후 왕안석王安石이 과거제도를 변경하고 학교를 일으키고자 하여 양제兩制와 삼관三館의 신하들에게 이것을 의논하도록 명하자, 소식蘇軾이 의논을 올렸다.
신종神宗이 즉일로 불러 대면하니, 소식蘇軾이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문文과 무武이시니, 밝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부지런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결단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다만 다스림을 구하기를 너무 급히 하고 남의 말을 듣기를 너무 널리 하고 사람을 등용하기를 너무 빨리할까 염려됩니다.
원컨대 안정安靜으로써 진정하여 사물事物이 오기를 기다린 뒤에 대응하소서.”라고 하니, 황제皇帝가 분연히 말하기를 “짐朕이 마땅히 심사숙고하겠다.”라고 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은 기뻐하지 않고 소식蘇軾을 임시 개봉부추관開封府推官으로 임명하여 일로써 곤욕을 주려 하였는데, 소식蘇軾이 정밀精密하고 민첩하게 판결하여 명성이 더욱 멀리 퍼졌다.
이때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을 창제하자, 소식蘇軾이 글을 올려 논변하였다.
소식蘇軾은 왕안석王安石이 황제에게 ‘홀로 결단하고 정사政事를 자신에게 전적으로 맡길 것’을 부추기는 것을 보고 진사시進士試를 계기로 책문策問을 내어,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오吳나라를 평정할 때에 홀로 결단決斷을 내려 이겼고 부견苻堅이 진晉나라를 정벌할 때에는 독단獨斷으로 망하였으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에게 오로지 맡겨 패자霸者가 되었고 연왕燕王 쾌噲는 자지子之에게 오로지 맡겨 실패하였으니, 일은 같아도 공功이 다르다는 것으로 질문하였다.
이에 왕안석王安石이 더욱 노하여 어사御史인 사경온謝景溫으로 하여금 소식蘇軾의 잘못을 논주論奏하게 하여 끝까지 다스렸으나 찾아낸 바가 없었다.
소식蘇軾은 마침내 외직外職을 청하여 항주통판杭州通判이 되었고 지밀주사知密州事로 옮겼다가 또다시 서주徐州로 옮겼다.
서주徐州에 있을 적에 황하黃河가 조촌曹村이란 마을로 터져 범람하여 성城 아래에서 돌아 넘치고, 불어난 물이 제때에 빠지지 못해서 성城이 장차 무너지게 되었다.
소식蘇軾이 무위영武衛營에 나아가 졸장卒長을 불러 힘을 다해 홍수를 막게 하자,
졸장卒長이 말하기를 “태수太守(知事)께서도 진흙과 흙탕물을 피하지 않으시니, 우리 소인小人들은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한다.” 하고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삼태기와 가래를 가지고 나와 동남쪽에 긴 제방을 쌓았다.
비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아 성城이 잠기지 않은 것이 겨우 세 판版이었다.
소식蘇軾은 다시 조정에 청하여 옛 성城을 증축하고 나무로 강안江岸을 만들어서 홍수가 다시 닥쳐올 것에 대비하였다.
그러다가 지호주사知湖州事로 옮겼는데, 어사御史인 이정李定과 서단舒亶‧하정신何正臣이 소식蘇軾이 사은謝恩한 표문表文의 말을 트집잡고 아울러 탁풍시託諷詩를 매얼媒蘖로 해서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로 엮어서 체포하여 어사대御史臺의 옥獄으로 끌고 와서 사형死刑에 처하고자 하였는데, 황제皇帝(神宗)께서 홀로 가엾게 여겨서 황주단련부사黃州團練副使로 〈황주黃州에〉 안치安置하게 하였다.
소식蘇軾은 동파東坡라는 곳에 집을 짓고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 호號하였다.
황제皇帝가 일찍이 재상宰相인 왕규王珪와 채확蔡確에게 말하기를 “소식蘇軾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이루게 하고자 한다.” 하니, 왕규王珪가 난색을 표하였다.
황제皇帝가 말하기를 “소식蘇軾이 안 된다면 우선 증공曾鞏을 등용하라.”고 하여, 증공曾鞏이 〈태조총론太祖總論〉을 지어 올렸으나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제皇帝는 수찰手札을 내려 소식蘇軾을 여주汝州로 옮겼는데, 소식蘇軾은 여주汝州에 부임하기 전에 글을 올려 자신의 춥고 굶주린 정황을 말하고 전지田地가 상주常州에 있으니 그곳에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아침에 아뢰자 저녁에 허락하는 비답을 내렸다.
도중에 금릉金陵(南京)을 지나가다 왕안석王安石을 보고 말하기를 “큰 전쟁과 큰 옥사獄事는 한漢나라와 당唐나라가 멸망할 때의 조짐이었습니다.
지금 서방西方에는 해마다 군대를 출동시키고 동남 지방에는 여러 번 큰 옥사獄事를 일으키는데도, 공公은 어찌 한마디 말씀으로 이를 바로잡지 않습니까?” 하니, 왕안석王安石이 말하기를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여혜경呂惠卿이 계도한 것이다.
내가 밖에 있으니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은 또 말하기를 “사람은 모름지기 ‘한 가지 일이라도 불의不義를 행하며 한 사람이라도 무고無辜한 이를 죽여서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 비로소 가可하다.”라고 하니,
소식蘇軾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지금 군자君子들은 반년半年의 마감磨勘을 줄일 것을 다투어, 비록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연달아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에 발탁되고 원우元祐 원년元年(1086)에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조정에서 범순인范純仁의 말을 따라 다시 청묘전靑苗錢을 나누어주려 하자, 사마광司馬光이 강제 배정을 금禁하는 법령法令을 엄하게 할 것을 거듭 청하였다.
소식蘇軾이 사마광司馬光의 아룀을 격주繳奏하니, 소식蘇軾의 의논을 옳게 여기고 청대請對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처음 조종조祖宗朝에서 차역差役을 행하였는데, 부역에 충원된 자들이 대부분 일에 익숙하지 못하였고, 또 이들을 모질게 부려서 해를 마치도록 쉬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왕안석王安石이 이것을 면역免役으로 바꿔, 호戶마다 고하高下의 차등을 두어 돈을 내게 해서 부역할 자들을 고용하였는데, 법法을 시행하는 자들이 지나치게 돈을 받아 백성들의 폐해弊害가 되었다.
사마광司馬光이 차역差役을 복구하려 하자, 소식蘇軾이 “차역差役과 면역免役은 각각 이해利害가 있다.”고 말하니, 사마광司馬光은 소식蘇軾의 생각이 어떠한지 물었다.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법法이 서로 인습因習하면 일이 이루어지기 쉽고, 일이 점진적으로 행해지면 백성들이 놀라지 않습니다.
삼대三代의 법은 병兵과 농農이 하나였는데, 진秦나라 때에 이르러 비로소 둘로 나뉘었고, 당唐나라 중엽에 이르러 부병제府兵制를 장정長征의 군대로 바꿨습니다.
이로부터 농민農民들은 곡식과 비단을 내어 군대를 기르고 군사들은 생명을 내어 농민들을 호위하였으니, 이 제도制度는 비록 성인聖人이 다시 나오더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지금 면역免役은 실로 이것과 크게 유사합니다.
공公이 갑자기 면역免役을 파하고 차역差役을 시행하고자 하시니, 이는 바로 장정長征을 파하고 민병民兵을 복구하려는 것과 같으니, 쉽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사마광司馬光은 그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소식蘇軾이 또다시 정사당政事堂에서 이것을 말하자, 사마광司馬光이 노여워하였다.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지난날 한위공韓魏公(韓琦)이 섬서陝西에 의용군義勇軍을 내도록 명하자, 공公이 간관諫官으로서 매우 강력히 간쟁諫爭하였습니다.
한공韓公이 좋아하지 않았으나 공公은 이것을 돌아보지 않았는데, 어찌 오늘 정승이 되셔서 제가 말을 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고 원우元祐 2년(1087)에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일찍이 황제를 모시고 《조종보훈祖宗寶訓》을 읽다가 이로 인해 시사時事를 언급하게 되었는데, 이때 소식蘇軾은 당시의 상황을 일일이 들어 말하기를
“지금 상벌賞罰이 밝지 못해서 선善을 권면하고 악惡을 저지하는 바가 없으며, 또 황하黃河의 형세가 막 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을 억지로 동쪽으로 흐르게 하며,
서하西夏 사람들이 진융군鎭戎軍으로 쳐들어와서 수만 명을 죽이고 노략질해 가는데도 수신帥臣이 이것을 보고하지 않으니,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점차 쇠란衰亂의 조짐을 이룰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이 일찍이 금중禁中에서 숙직할 적에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하였는데, 선인황후宣仁皇后가 말하기를 “경卿의 벼슬이 대번에 여기에 이른 것은 바로 선제先帝의 뜻이다.
선제先帝께서 매번 경卿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감탄하시기를 ‘기재奇才로다! 기재奇才로다!’ 하셨는데, 다만 미처 경卿을 등용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이 자기도 모르게 실성통곡失聲痛哭을 하자, 선인황후宣仁皇后와 철종哲宗도 함께 눈물을 떨어뜨리고, 좌우 측근들도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얼마 후 자리에 앉도록 명하여 차茶를 대접하고 어전御前에 있는 금련촉金蓮燭을 거두어 하사하여 원院으로 돌려보냈다.
4년(1089)에 소식蘇軾은 권세를 잡은 자들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임을 헤아리고 마침내 외직을 청하여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 지항주사知杭州事에 제수되었는데, 길을 떠나기 전에 간관諫官이 지난날 채확蔡確의 죄를 논하여 대신大臣들이 영남嶺南으로 좌천시킬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소식蘇軾은 은밀히 상소上疏하여, “조정朝廷에서 그를 무겁게 처벌하여 인정仁政에 누累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선인황후宣仁皇后는 마음속으로는 그 말을 좋게 여겼으나 쓰지 못하였다.
소식蘇軾이 항주杭州에 부임하니, 크게 가물고 기근饑饉과 염병이 함께 일어났다.
소식蘇軾은 본로本路에 상공미上供米를 줄여줄 것을 청하고 또 값을 낮춰 상평창常平倉의 쌀을 방출해서 미음과 죽과 약재를 많이 만들어 구제하니, 이로 인해 산 자가 매우 많았다.
항주杭州는 본래 바다에 가까워서 땅과 샘물이 짜고 쓰니, 거주하는 백성이 극히 드물었다.
당唐나라 때 자사刺史 이필李泌가 처음으로 서호西湖의 물을 끌어다가 여섯 우물을 만들었고, 백거이白居易가 또다시 서호西湖를 준설하여 운하로 끌어들여 천경千頃의 토지에 물을 관개하니, 백성들이 많아지고 부유하게 되었다.
호수湖水에는 갈대가 많았는데, 송宋나라 때에는 버려두고 다스리지 않으니, 갈대가 쌓여 밭이 되어 물이 얼마 없게 되었으며, 운하가 쓸모가 없어지고 여섯 우물 또한 거의 버려지게 되었다.
소식蘇軾은 모산茅山의 한 물은 오로지 강江의 조수潮水만을 받아들이고 염교鹽橋의 한 물은 오로지 호수湖水의 물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두 물을 준설하여 조운漕運을 통하게 하고 다시 제방堤防과 갑문閘門을 만들어서 물을 저장하고 흘려보내는 한계로 삼았으며, 여력餘力으로 다시 여섯 우물을 완전히 회복시켰다.
또 갈대밭의 흙을 취하여 호수湖水 가운데에 남북南北으로 길이가 30리里 되는 긴 둑을 쌓아서 사람들이 통행하게 하였다.
제방堤防이 이루어지자 부용芙蓉(연꽃)과 버드나무를 그 위에 심으니, 바라보면 마치 그림과 같았다.
항주杭州사람들은 이것을 소공제蘇公堤라고 이름하였다.
절강浙江(錢塘江)의 조수는 바다 어귀 동쪽으로부터 와서 형세가 우레와 같고, 부산浮山이 강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어 어포漁浦 등 여러 산과 함께 개 이빨처럼 서로 어긋나서 물이 급히 맴돌고 격하게 쏟아지니, 해마다 공선公船과 사선私船을 파선시키는 것을 이루 다 계산할 수가 없었다.
소식蘇軾은 강江의 상류인 석문石門으로부터 운하를 파서 자포慈浦로부터 북쪽으로 꺾어 소령小嶺에 이르고 옛날 하수河水를 준설하여 부산浮山의 험함을 피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고,
다시 말하기를 “삼오三吳의 물이 모여 태호太湖가 되고 태호太湖의 물이 넘쳐 송강松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그런데 경력慶曆 연간 이래로 송강松江에 만로挽路를 쌓아 물길을 막았기 때문에 지금 삼오三吳 지방에 홍수가 많으니, 만로挽路를 파서 10개의 다리를 만들어 강물의 형세를 빠르게 하자.”라고 하였으나, 모두 끝내 쓰이지 못하니, 사람들이 한탄하였다.
소식蘇軾이 다시 항주杭州에 부임하니, 백성들에게 은덕이 있어서 집집마다 소식蘇軾의 화상을 그려두고 음식을 먹고 마실 적에 반드시 축원하였으며, 생사당生祠堂을 만들었다.
원우元祐 6년(1091)에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부름을 받았는데, 부임하기 전에 아우 철轍이 우승右丞으로 제수되었기 때문에 피혐하여 한림승지翰林承旨로 바뀌었다.
몇 개월 만에 다시 참언讒言 때문에 외직을 청하여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로 지영주사知潁州事가 되었다.
7년에 지양주사知揚州事로 옮겼는데 1년이 지나지 않아 병부상서兵部尙書 겸시독兼侍讀으로 부름을 받았다.
교사郊祀를 지낼 적에 노부사鹵簿使를 맡고 있었는데, 황후皇后와 대장공주大長公主가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타고 황제의 의장儀仗을 피하지 않자, 소식蘇軾이 탄핵하여 아뢰니, 대가大駕가 돌아온 뒤에 황후皇后 이하를 맞이하여 배알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예부상서禮部尙書 겸단명전학사兼端明殿學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승진하였다.
고려高麗에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서책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朝廷에서 고사故事에 따라 허락하려 하자,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동평왕東平王이 제자諸子와 태사공太史公의 책(《사기史記》)을 청하였을 때도 주려 하지 않았는데, 지금 고려高麗에서 청한 것은 이보다 더 심하니 어찌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원우元祐 8년(1093)에 선인황후宣仁皇后가 승하하고 철종哲宗이 친정親政을 하였다.
소식蘇軾은 외직에 보임될 것을 청원하여 양학사兩學士로 지정주사知定州事가 되었다.
이때 국사國事가 장차 변하려 하니, 소식蘇軾은 궁궐에 들어가 하직하지 못하고 길을 떠난 다음 이리이리 글을 올렸다.
정주定州는 군정軍政이 파괴되고 해이하였는데, 마침 봄에 큰 열병식閱兵式을 거행하였다.
소식蘇軾은 옛 법대로 거행할 것을 명하여 장수將帥는 평상복차림으로 장막 안에서 나오고 장관將官과 관리官吏들은 군복軍服차림으로 일을 집행하게 하여 감히 태만한 자가 없었다.
정주定州사람들이 말하기를 “한기韓琦가 떠나간 이후로 지금에 이르도록 이 예식禮式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선인황후宣仁皇后가 생존해 있을 적에, 시어사侍御史 가이賈易와 감찰어사監察御史 동돈일董敦逸과 황경기黃慶基가 앞뒤로 소식蘇軾과 그의 아우 철轍이 지은 문장이 선왕조先王朝(神宗)를 비판하고 배척排斥했다고 논죄하다가 세 사람이 모두 죄에 걸려 축출되었는데, 소성紹聖 초년初年에 이르러 어사御史가 다시 이것을 말하자, 소식蘇軾은 지영주사知英州事로 좌천되었다.
영주英州에 부임하기 전에 영원군절도부사寧遠軍節度副使로 좌천되어 혜주惠州에 안치되었고, 혜주惠州에 있은 지 3년 만에 또다시 경주별가瓊州別駕로 좌천되어 창화昌化에 거주하니, 창화昌化는 옛날 담이儋耳의 땅으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고 약품과 먹을 것이 모두 없었다.
처음 관청의 집을 세내어 살려 하였으나, 유사有司가 불가不可하다 하였으므로 소식蘇軾은 마침내 땅을 사 집을 지었다.
이때 담주儋州 사람들이 벽돌을 운반해오고 흙을 삼태기에 담아와 협조하였다.
소식蘇軾은 홀로 어린 아들 과過와 함께 거처하며 글을 짓는 것을 낙樂으로 삼았다.
휘종徽宗이 즉위하여 연달아 영주永州로 옮기고, 세 번 대사면령을 거쳐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 되었으며 다시 조봉랑朝奉郞이 되었다.
소식蘇軾은 원우元祐 이래로 일찍이 세과歲課(연공)를 가지고 승진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이 이에 그쳤다.
얼마 안 있다가 상주常州에서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66세였다.
소식蘇軾은 아우 철轍과 함께 문장을 지을 적에 모두 그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았다.
약관弱冠에 부자父子와 형제兄弟가 경사京師에 이르니, 하루아침에 명성이 혁혁赫赫하여 사방에 진동하였다.
소식蘇軾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글을 짓는 것은 떠가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과 같아서 애당초 정해진 바탕이 없다.
다만 마땅히 흘러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고 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 그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장난하고 웃고 성내고 꾸짖는 말이라도 모두 글로 표현하여 욀 만하였다.
그 문체文體가 혼함渾涵하고 광채光彩가 있어서 백대百代를 오만하게 보니, 문장이 있은 이후로 이와 같은 경우는 드물었다.
소순蘇洵은 말년에 《역전易傳》을 지었으나 끝마치지 못하고 소식蘇軾에게 명하여 그 뜻을 계술繼述하게 하니, 소식蘇軾이 《역전易傳》을 완성하고 다시 《논어설論語說》을 지었다.
뒤에 해남海南에 거처할 적에 《서전書傳》을 지었고, 또 《동파문집東坡文集》 등等과 《주의奏議》와 《내외제內外制》와 《화도시和陶詩》 등을 지었다.
같은 시대時代의 문인으로 황정견黃庭堅‧조보지晁補之‧진관秦觀‧장뢰張耒‧진사도陳師道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는데, 소식蘇軾은 이들을 친구와 같이 대하고 일찍이 스승의 자격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소식蘇軾은 거자擧子가 되었을 때부터, 출입出入하며 시종侍從함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군주를 사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큰 절개가 우뚝하였으나, 매번 소인小人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아서 죽은 후에도 이름이 원우당元祐黨에 들어가 간행된 문집文集이 훼손되었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를 추증하고 손자 부符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임명하였고, 또 소식蘇軾의 문집을 좌우에 두고 읽어 피곤함을 잊었으며 친히 문집文集의 찬贊을 지어 증손 교矯에게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높여 태사太師를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세 아들은 매邁와 태迨와 과過이니, 모두 문장을 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