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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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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瀟洒 而入思 少喫緊하니라
某每讀詩하고 讀書하야는 常竊悲하니이다
及觀 見孔子厄於陳蔡之間이로되 而絃歌之聲不絶하고 顔淵仲由之徒 相與問答하니 夫子曰 라하니 吾道非耶
吾何爲於此 顔淵曰 夫子之道至大 天下莫能容이니이다
雖然이나 不容何病이리오
不容然後 見君子니이다
夫子油然而笑曰 回 使爾多財 吾爲爾宰라하시니이다
夫天下雖不能容이나 而其徒自足以相樂 如此하니 乃今知周公之富貴 有不如夫子之貧賤이니이다
夫以(周)[召]公之賢 以管蔡之親으로도 而不知其心하니 則周公 誰與樂其富貴시리오
而夫子之所與共貧賤者 皆天下之賢才 則亦足與樂乎此矣시리이다
七八歲時 始知讀書러니
聞今天下 有歐陽公者하니 其爲人 如古孟軻, 韓愈之徒
而又有梅公者하야 從之遊하야 而與之上下其議論이라하니이다
其後益壯하야 始能讀其文詞하고 想見其爲人하니 意其飄然脫去世俗之樂하고 而自樂其樂也니이다
方學爲하야 求斗升之祿일새 自度無以進見於諸公之間이니이다
來京師逾年이로되 未嘗窺其門이러니
今年春 天下之士 群至於禮部어늘 執事與歐陽公으로 實親試之하시니 誠不自意獲在第二하니이다
旣而 聞之人호니 執事愛其文하야 以爲有孟軻之風이라하시고
而歐陽公亦以其能不爲世俗之文也라하야 而取焉이라 是以 라하니이다
非左右爲之先容이요 非親舊爲之請屬이로되 而嚮之十餘年間 聞其名而不得見者 一朝爲知己하니이다
退而思之호니 人不可以苟富貴 亦不可以徒貧賤이라 有大賢焉而爲其徒 則亦足恃矣라하니이다
苟其僥一時之幸하야 從車騎數十人하야 使閭巷小民으로 聚觀而贊歎之라도 亦何以易此樂也리오
執事名滿天下 而位不過五品이로되 其容色 溫然而不怒하고 其文章 寬厚敦朴而無怨言하시니
此必有所樂乎斯道也 願與聞焉하노이다


06. 매직강梅直講에게 올린 글
글은 매우 깨끗하나 구상은 긴요함이 부족하다.
모관집사某官執事께 올립니다.
저는 매번 《시경詩經》을 읽을 적에 〈치효鴟鴞〉에 이르고, 《서경書經》을 읽을 적에 〈군석君奭〉에 이르러서는 항상 속으로 주공周公의 불우함을 슬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기史記》를 읽어보니, 공자孔子께서 의 사이에서 곤액을 당하셨는데 거문고와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안연顔淵중유仲由의 무리가 함께 서로 문답할 적에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 ‘외뿔소도 아니고 범도 아닌데 저 광야를 따르게 한단 말인가.’라고 하니, 나의 가 잘못되었는가?
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시자,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가 능히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납되지 못함이 어찌 나쁠 것이 있겠습니까?
용납되지 못한 뒤에 군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자夫子께서는 유유하게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안회顔回야, 만일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내가 너의 가 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천하가 용납하지 못하나 문도들이 서로 즐거워하기를 이와 같이 할 수 있었으니, 저는 지금에야 비로소 주공周公의 부귀가 부자夫子(공자孔子)의 빈천만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공召公의 어짊과 관숙管叔채숙蔡叔 등 형제들도 주공周公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으니, 주공周公이 누구와 함께 그 부귀를 즐거워하셨겠습니까?
그런데 부자夫子께서는 빈천을 함께한 자들이 모두 천하의 어진 인재들이었으니, 그렇다면 또한 충분히 이것을 즐거워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7, 8세 때에 처음 독서할 줄을 알았는데,
이때부터 “지금 천하에 구양공歐陽公(구양수歐陽脩)이란 분이 계신데 그 사람됨이 옛날 맹가孟軻한유韓愈의 무리와 같고,
매공梅公이란 분이 계신데 서로 교유하여 구양공歐陽公과 함께 오르내리며 의논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뒤에 더욱 장성해서 비로소 그 문장을 읽어보고 사람됨을 상상해보니, 짐작컨대 세속의 즐거움을 깨끗이 떨쳐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분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막 그때에 대우對偶성률聲律의 문장 짓는 방법을 배워서 한 말 한 되의 녹봉을 구하고 있었으므로 스스로 헤아리기에 두 분 사이에 나아가 뵐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경사京師에 온 지 1년이 넘었으나 일찍이 그 문을 엿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에 천하의 선비들이 무리 지어 예부禮部과장科場에 이르렀을 적에 집사께서 구양공歐陽公과 함께 친히 시험을 보이셨는데, 실로 뜻하지 않게 제가 2등으로 급제하였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들으니, 집사께서는 저의 글을 사랑하여 “맹가孟軻의 유풍이 있다.”고 하셨고,
구양공歐陽公 또한 “능히 세속의 글을 짓지 않는다.”라고 칭찬하여 취하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에 있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저의 좌우 사람들이 저를 위해 주선한 것도 아니요 친구들이 청탁한 것도 아닌데, 지난 10여 년 동안 이름만 듣고 얼굴을 뵐 수 없었던 분들이 하루아침에 저를 인정해주셨습니다.
물러나 생각해보니 ‘사람은 구차히 부귀해서도 안 되고 또한 한갓 빈천해서도 안 되니, 대현大賢이 계시는데 그 문도가 된다면 또한 충분히 믿을 만하다.’라고 여겨졌습니다.
만일 한때의 요행으로 수레와 기마에 수십 명이 따라다녀서 여항閭巷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여 구경하면서 칭찬하고 감탄하게 하더라도 어찌 이 즐거움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에 이르기를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한가롭게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집사께서는 명성이 천하에 가득하나 지위는 5품에 지나지 않는데도 얼굴빛이 온화하여 성내지 않고 문장이 관후寬厚하고 돈박敦朴하여 원망하는 말이 없으십니다.
이는 반드시 이 도를 즐기는 바가 있어서일 것이니, 저는 참여하여 듣기를 원합니다.


역주
역주1 上梅直講書 : 이 글은 仁宗 嘉祐 2년(1057)에 蘇軾이 진사과에 급제한 후에 梅直講에게 보낸 글이다. 梅直講은 바로 梅堯臣(1002~1060)으로 字는 聖兪이며 宣城(現 安徽省 宣城) 사람인데, 당시 國子監直講이었다. 당시 禮部試의 知貢擧는 歐陽脩였고 梅堯臣은 시험관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蘇軾의 〈刑賞忠厚之至論〉을 보고 천거하여 歐陽脩의 칭찬을 얻었다. 이로 인해 蘇軾은 이 시험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이후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梅堯臣은 宋나라의 대표적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歐陽脩와 함께 詩文 혁신운동을 창도하여 당대의 문풍을 바꾸어 詩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젊어서 과거에 실패하여 州縣의 官屬을 지내다가 중년의 나이에 進士出身으로 급제하여 國子監直講이 되었으며 벼슬은 尙書都官員外郞에 이르렀다.
역주2 某官執事 : 某官은 바로 梅堯臣을 가리킨다. 상대방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식 관직을 제대로 다 써야 되지만 이 글은 기초한 글이므로 생략하고 某官이라고 칭한 것이다. 執事는 본래 측근에서 신변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이르는데, 옛날에는 상대방을 직접 호칭하는 것을 결례라고 생각하고 執事 또는 左右라고 호칭하여 공경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역주3 鴟鴞 : 《詩經》 〈豳風〉에 있는 시의 편명이다. 《毛詩》의 小序에 이르기를 “〈鴟鴞〉는 周公이 國亂을 구원한 시이다. 成王이 周公의 뜻을 모르므로 周公이 마침내 시를 지어 왕에게 주고 鴟鴞라고 이름했다.”라고 하였다. 周나라 武王이 죽고 어린 成王이 즉위하여 周公이 섭정하였는데, 殷나라를 감시하던 管叔과 蔡叔 등은 “周公이 成王을 폐위하고 자신이 천자가 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殷나라에 봉해진 武庚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周公은 成王의 명을 받고 출정하여 이들을 평정한 다음 이 〈鴟鴞〉 詩를 지어 成王을 경계하였다. 管叔과 蔡叔은 周公의 형제들이며 鴟鴞는 솔개와 올빼미로 새들의 둥지를 허물고 새끼를 잡아먹으므로 周公은 武庚이 남의 나라를 전복시키고 남의 형제들을 살육하게 만든 것을 鴟鴞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역주4 君奭 : 《書經》 〈周書〉의 편명이다. 奭은 召公의 이름이고 君은 존칭이다. 召公은 周나라 武王의 친족으로 召邑(現 陝西省 기산의 서남쪽)에 봉해졌기 때문에 召公 혹은 召伯이라고 불렸다. 書序에 “召公이 太保가 되었는데 周公이 太師가 되어 成王을 左右에서 보필하자, 召公이 기뻐하지 않으므로 周公이 〈君奭〉을 지어 타일렀다.[召公爲保 周公爲師 相成王爲左右 召公不說 周公作君奭]”라고 하였는데, 《書經集傳》에 의하면 蘇軾은 〈君奭〉을 짓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를 “召公의 뜻은 周公이 告老하고 돌아가기를 바란 것이다.”라고 하였다. 書序는 《書經》의 각 편 앞에 붙은 小序로 각 편이 지어지게 된 동기 등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인데, 저자는 미상이다.
역주5 周公之不遇 : 周公은 周나라 武王의 아우로 이름은 旦이다. 武王을 도와 商나라를 정벌하고 紂王의 아들 武庚을 殷나라에 봉한 다음 庶兄인 管叔과 아우인 蔡叔․霍叔으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다. 武王이 죽고 成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周公이 섭정하자, 管叔 등은 ‘周公이 장차 어린 成王을 해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武庚과 함께 배반하므로 周公이 이들을 토벌하였다. 不遇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6 : 《史記》 〈孔子世家〉를 이른다.
역주7 匪兕匪虎 率彼曠野 : 《詩經》 〈小雅 何草不黃〉 에 보이는 句이다. 원래는 周나라의 征役이 끊이지 않아 부역 가는 자들의 괴로움이 심함을 노래한 내용인데, 여기서는 孔子가 곤경에 빠져 편히 거처하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다.
역주8 對偶聲律之文 : 進士科에 대비하여 익히는 문체로, 주로 對偶로 문장을 짓고 聲律을 맞추는 詩文과 辭賦 등의 작품을 이른다. 對偶는 한 聯의 上下句가 서로 짝이 되어 대조가 되게 하는 수사법을 이르고, 聲律은 시를 짓는 데에 있어 지켜야 하는 음률의 법칙을 이른다.
역주9 在此 : 여기에 있다는 것은 禮部試 진사과에 2등으로 급제함을 이른다.
역주10 不怨天 不尤人 :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남)을 탓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論語》 〈憲問〉에 보인다. 傳은 옛 책을 이른다.
역주11 優哉游哉 可以卒歲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襄公 21년조에 나오는데, 杜預의 注에는 이 시가 《詩經》 〈小雅 采菽〉이라고 하였으나 〈采菽〉에는 이 句가 보이지 않는다. 附注에 林氏(林堯叟)가 이르기를 “지금 〈小雅〉를 상고하건대 全句가 없고 오직 〈采菽〉에 ‘넉넉하고 한가로운지라 또한 이에 이르렀도다.[優哉游哉 亦是戾矣]’라고 보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可以卒歲는 한 해를 마칠 수 있다는 뜻으로, 《詩經》 〈豳風 七月〉에 “옷이 없고 갈옷이 없으면 어떻게 한 해를 마치겠는가.[無衣無褐 何以卒歲]”라고 한 말에서 何를 可로 바꿔 쓴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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