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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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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首尾二千五百言 如一串念佛珠하고 其深入人情處 如川雲嶺月하니라
方今天下何病哉
其始不立이면 其卒不成이니 惟其不成이라 是以 厭之而愈不立也하나니라
凡人之情 一擧而無功則疑하고 再則勌(倦)하고 三則去之矣
今世之士 所以相顧而莫肯爲者 非其無有忠義慷慨之志也 又非其才術謀慮不若人也
患在苦其難成而不復立이요 不知其所以不成者 罪在於不立也 苟立而成矣리라
今世有三患이어늘 而終莫能去하니 其所從起者 則五六十年矣
으로 하고 하야 而天下常患無財
五六十年之間 下之所以游談聚議하고 而上之所以變政易令하야 以求豊財者 不可勝數矣로되 而財終不可豊이라
二國益驕하야 以戰則不勝하고 以守則不固하야 而天下常患無兵이라
五六十年之間 下之所以游談聚議하고 而上之所以變政易令하야 以求强兵者 不可勝數矣로되 而兵終不可强이라
自選擧之格嚴으로 而吏拘於法하야 不志於功名하며 之法壞 而賢者無所勸하고 不肖者無所懼하야 而天下常患無吏
五六十年之間 下之所以游談聚議하고 而上之所以變政易令하야 以求擇吏者 不可勝數矣로되 而吏終不可擇이라
財之不可豐 兵之不可强 吏之不可擇 是豈眞不可耶리오
曰 其始不立이면 其卒不成이니 惟其不成이라 是以 厭之而愈不立也라하노라
夫所貴於立者 以其規模先定也일새라
古之君子 先定其規模而後 從事
其應也有候하고 而其成也有形이라
衆人 以爲是汗漫不可知로되 而君子 以爲理之必然하야 如炊之無不熟하고 種之無不生也
是故 其用力省而成功速하나니라
子産以爲不思而行 與凡行而出於思之外者 如農之無畔也하야 其始雖勤이나 而終必棄之라하니라
今夫富人之營宮室也 必先料其資財之豊約하야 以制宮室之大小호되 旣內決於心然後 擇工之良者하야 而用一人焉이라
必告之曰 吾將爲屋若干하노니度用材幾何 役夫幾人이며 幾日而成이며 土石材葦 吾於何取之오하야든
其工之良者 必告之曰 某所有木하고 某所有石하며 用財役夫若干하야 某日而成이라하리니
主人率以聽焉하야 及期而成하나니 旣成而不失當 則規模之先定也일새라
今治天下則不然하야 百官有司 不知上之所欲爲也하야 而人各有心이라
好大者 欲王하고 好權者 欲霸하고 而婾(愉)者 欲休息하며 文吏之所至 則治刑獄하고 而聚斂之臣 則以貨財爲急하야 民不知其所適從也
及其發一政이면 則曰姑試行之而已라하야 其濟與否 固未可知也
前之政 未見其利害어늘 而後之政 復發矣
凡今之所謂新政者 聽其始之議論하면 豈不甚美而可樂哉리오마는 然而布出於天下 而卒不知其所終하니 何則
其規模不先定也일새니라
用舍係於好惡하고 而廢興決於衆寡
萬全之利 以小不便而廢者 有之矣 百世之患 以小利而不顧者 有之矣
所用之人 無常責하고 而所發之政 無成效하니 猶適千里 不賫糧而假丐於塗人이요 治病 不知其所當用之藥하고 而百藥皆試하야 以僥倖於一物之中이니 欲三患之去 不可得也니라
其所施專一이면 則其勢固有以使之也일새라
相桓公 自始爲政으로 而至於霸 其所施設 皆有方法하고 及其成功하야는 皆知其所以然하야 至今可覆也
見之明而策之熟也일새라
夫今之世 亦與明者 熟策之而已
士爭言曰 如是而財可豊이요 如是而兵可彊이요 如是而吏可擇이라하니
吾從其可行者而規模之하야 發之以勇하고 守之以專하고 達之以彊하야
日夜以求合於其所規模之內하고 而無務出於其所規模之外
其人專하고 其政一이요 然而不成者 未之有也
財之不豊 兵之不彊 吏之不擇此三者 存亡之所從出이요 而天下之大事也
夫以天下之大事 而有一人焉하야 獨擅而兼言之하면 則其所以治此三者之術 其得失 固不可知也
雖不可知 而此三者決不可不治者 可知也니라
是故 不可以無術이니 其術 非難知而難聽이요 非難聽而難行이요 非難行而難收
孔子曰 이라하시니 使好謀而不成이면 不如無謀
蓋世有好劍者하야 聚天下之良金하야 鑄之三年而成이어늘 以爲吾劍 天下莫敵也라하더니 劍成而狼戾缺折하야 不可用하니 何者
是知鑄而不知收也일새라
今世之擧事者 雖其甚小 而欲成之者 常不過數人하고 欲壞之者 常不可勝數
可成之功 常難形하고 若不可成之狀 常先見하니
上之人 方且眩瞀而不自信하리니 又何暇及於收哉리오
古之人 有犯其至艱而圖其至遠者하니 彼獨何術也
且非特聖人而已
之變秦法也攖萬人之怒하고 排擧國之說하야 勢如此其逆也
之爲從也 合天下之異以爲同하고 以爲親하야 計如此其迂也
請於高帝하야 求三萬人하야 願以北擧燕趙하고 東擊齊하고 南絶楚之糧道하야 而西會於滎陽하며
此皆越人之都邑하야 而謀人國하야 功如此其疎也
然而者 行之若易然하야 出於其口하고 成於其手하야 以爲旣已許吾君인댄 則親挈而還之라하니라
今吾以自有之天下 而行吾所得爲之事호되 其事又非有所拂逆於天下之意也 非有所待於人而後具也
如有財而自用之하고 有子而自敎之耳
然而政出於天下 有出而無成者 五六十年於此矣하니 是何也
意者컨대 知出而不知收歟인저
非不知收 意者컨대 汗漫而無所收歟인저
爲之說曰 先定其規模而後 從事라하노니
先定者 可以謀人이어니와 不先定者 自謀常不給이어든 而況於謀人乎
且今之世俗 則有所可患者 士大夫所以信服於朝廷者不篤하고 而皆好議論하야 以務非其上하야 使人眩於是非하야 而不知其所從이라
從之 則事擧無可爲者 不從이면 則其所行者 常多故而易敗하니 夫所以多故而易敗者 人各持其私意以賊之하야 議論勝於下하야 而幸其無功者衆也일새라
富人之謀利也 常獲 世以爲福이라하니 非也
彼富人者 信於人素深하고 而服於人素厚하야 所爲而莫或害之하고 所欲而莫或非之하야 事未成而衆已先成之矣
夫事之行也有勢하고 其成也有氣하니 富人者 乘其勢而襲其氣也
欲事之易成이면 則先治其所以信服天下者니라
天下之事 不可以力勝이요 力不可勝이면 則莫若從衆이니
從衆者 非從衆多之口 而從其所不言而同然者 是眞從衆也
衆多之口 非果衆也 特聞於吾耳而接於吾前하야 未有非其私說者也
於吾爲衆이나 於天下爲寡하니 彼衆之所不言而同然者 衆多之口 擧不樂也
以衆多之口所不樂이라하야 而棄衆之所不言而同然이면 則樂者寡而不樂者衆矣리라
古之人 常以從衆으로 得天下之心이러니 而世之君子 常以從衆으로 失之하나니 不知夫古之人 其所從者 非從其口 而從其所同然也
何以明之
世之所謂逆衆斂怨而不可行者 莫若減
이나 不顧而行之者 五六年矣로되 而天下未嘗有一言하니 何則
彼其口之所不樂이나 而心之所同然也일새라
從其所同然而行之호되 若猶有言者 則可以勿䘏矣니라
爲之說曰 發之以勇하고 守之以專하고 達之以彊이라하노니 苟知此三者 非獨爲吾國而已 雖北取契丹이라도 可也니라


08. 나라가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는
앞뒤 2천 5백 가 한 꿰미의 염주와 같고, 또 인정人情에 깊이 들어간 곳은 냇물에 비치는 구름과 고개 위의 달과 같다.
지금 천하에는 무슨 병통이 있는가?
처음에 규모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종말에 성공하지 못하니,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여 더욱 규모를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사람의 심정은 한 번 무슨 일을 해서 성공하지 못하면 의심하고 두 번째는 권태감을 느끼고 세 번째는 버리게 된다.
지금 세상의 선비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아무 일도 하려 하지 않는 까닭은 충의롭고 강개한 뜻이 없어서도 아니요, 또 재술才術모려謀慮가 남만 못해서도 아니다.
그 병통은 성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겨서 다시는 규모를 세우지 않음에 있고, 그 성공하지 못하는 까닭은 규모를 세우지 않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데 있으니, 만약 규모를 제대로 세운다면 성공할 것이다.
지금 세상에 세 가지 병통이 있는데 끝내 이것을 제거하지 못하니, 이것이 시작된 것은 5, 6십 년이 되었다.
궁실과 기도하는 사당을 짓는 공사工事가 크게 일어남으로부터 전폐錢幣와 차와 소금을 전매하는 법이 파괴되었고, 여기에 전란이 더해져 천하가 항상 재정財政이 궁핍함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5, 6십 년 사이에 아랫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말하고 모여 의논하며, 윗사람들이 정령政令을 변경하여 재물을 풍족하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재정은 끝내 풍족해지지 못하였다.
전연澶淵의 전쟁으로부터 북쪽 오랑캐가 비록 화친을 요구하였으나 끝내 그 요령要領을 얻지 못하였고, 그 뒤에 서강西羌의 변란이 겹쳐서 변방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란契丹서하西夏 두 나라가 더욱 교만해져서 우리가 싸우면 이기지 못하고 수비하면 견고하지 못하여 천하가 항상 국방력이 없음을 근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 6십 년 사이에 아랫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말하고 모여 의논하며, 윗사람들이 정령政令을 변경하여 군대를 강성하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군대는 끝내 강성해지지 못하였다.
선거選擧의 격식이 엄격해지면서부터 관리들이 법에 구애되어 공명功名에 뜻을 두지 않았고, 관리들의 성적을 고과하는 법이 파괴되면서부터 어진 자들이 권면되지 않고 불초不肖한 자들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게 되어, 천하가 항상 훌륭한 관리가 없음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5, 6십 년 사이에 아랫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말하고 모여 의논하며, 윗사람들이 정령政令을 변경하여 훌륭한 관리를 가려 쓰려고 노력한 것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끝내 훌륭한 관리를 가려 쓰지 못하였다.
재정을 풍족하게 할 수 없는 것과, 군대를 강하게 할 수 없는 것과, 관리를 가려 쓸 수 없는 이 세 가지가 어찌 참으로 불가능한 것이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처음에 규모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종말에 성공하지 못하니,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여 더욱 규모를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규모를 세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 규모를 먼저 정하기 때문이다.
옛날 군자君子들은 먼저 규모를 정한 뒤에 종사하였다.
그러므로 대응함에 시기時期가 있고 일을 이룸에 드러나는 자취가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한만汗漫하여 알 수 없다고 여기나 군자君子는 이것을 이치의 필연으로 여겨, 마치 불을 때어 밥을 지으면 밥이 익지 않음이 없고, 씨앗을 심으면 곡식이 발아하여 자라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힘을 쓰는 것이 적으면서도 이 이루어짐은 빨랐던 것이다.
옛날 자태숙子太叔자산子産에게 정사政事를 묻자, 자산子産이 대답하기를 “정사政事는 농사와 같아서 밤낮으로 생각하여 그 처음을 생각하고 그 종말을 도모해서 당장 아침저녁으로 실행하되, 실행하는 바가 생각한 바를 넘지 않기를 농지에 밭두둑이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자산子産은 ‘생각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과 또 실행함이 생각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농지에 밭두둑이 없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비록 부지런하나 종말에는 반드시 폐기된다.’고 여긴 것이다.
지금 부자富者궁실宮室을 짓게 되면 반드시 먼저 그 재물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궁실의 크기를 결정해서 안으로 마음속에 결단한 뒤에 훌륭한 목수를 가려서 한 사람을 쓴다.
그리고 반드시 그 목수에게 말하기를 “내가 장차 약간 규모의 집을 지으려 하니, 헤아려보건대 재물이 얼마나 들어가며, 인부가 얼마나 필요하며, 며칠 만에 이루어지며, 흙과 돌과 재목과 갈대를 어디에서 취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목수가 반드시 대답하기를 “어디에 재목이 있고, 어디에 돌이 있으며, 재물은 얼마가 들어가고, 인부는 약간 명이 필요하며, 아무 날에 완성될 것이다.”라고 할 것이니,
주인이 그 말을 따라서 때가 되면 집이 완성되는데, 완성되고 난 뒤에 마땅함을 잃지 않는 것은 규모가 먼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그렇지 아니하여, 백관百官유사有司들이 위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하여 사람마다 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큰 것을 좋아하는 자는 왕도王道를 하고자 하고 권도權道를 좋아하는 자는 패도霸道를 하고자 하고 게으른 자들은 휴식하고자 하며, 법조문을 따지는 관리들이 이르는 곳에는 형벌과 감옥으로 백성을 다스리려 하고 가렴주구하는 신하들은 재물을 모으는 것을 급하게 여겨서, 백성들이 주장하여 따를 바를 알지 못한다.
하나의 정사政事를 포고하면서 말하기를 “우선 한번 시험해볼 뿐이다.”라고 하여, 성공 여부는 진실로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옛 정사政事의 결과에 따른 이해를 아직 보지 못하였는데, 다음의 정사政事가 또다시 포고된다.
무릇 지금의 이른바 새로운 정사政事라는 것은 그 처음의 의논을 들어보면 어찌 매우 아름다워 즐거워할 만하지 않겠는가마는, 그러나 이것이 천하에 포고되어 나오면 끝내 그 끝마치는 바를 알지 못하니, 이는 어째서인가?
그 규모가 먼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등용하고 버리는 것은 군주의 마음에 좋아하고 미워함에 달려 있고, 일이 폐해지고 흥해지는 것은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만전萬全의 이익을 조금 불편하다 하여 폐지하는 경우가 있고, 백세百世의 환란을 작은 이익 때문에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등용되는 사람이 일정한 책임이 없고 포고되는 정사政事가 이루어지는 효험이 없으니, 이는 비유하면 천릿길을 가면서 양식을 가지고 가지 않고 길 가는 사람에게 빌리는 것과 같으며, 병을 치료함에 마땅히 써야 할 약을 알지 못하고 온갖 약들을 다 시험해서 그 가운데에 한 약재가 들어맞는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세 가지 병통을 제거하고자 하나 될 수 없는 것이다.
옛날 태공太公나라를 다스리고 주공周公나라를 다스릴 적에 수십 후의 자손들의 강하고 약함과 풍속의 좋아함과 미워함에 이르러도 미리 다 알 수 있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베푸는 바가 전일하면 형세가 진실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관중管仲환공桓公을 도울 적에 처음 정사政事할 때로부터 패자霸者가 됨에 이르기까지, 그 베푼 정사政事가 다 방법이 있었고 또 을 이룸에 있어서는 모두 그렇게 된 소이연을 알았으니, 지금도 그것을 실천할 수가 있다.
구범咎犯나라에 있을 때와 범려范蠡나라에 있을 때에, 나라 문공文公월왕 구천越王 句踐이 일찍이 백성을 동원하여 전쟁하고자 하였으나, 두 신하가 아직 불가하다고 만류했었는데, 그들이 백성을 동원해도 된다고 말함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나라를 격파하고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키기를 이웃집에 맡겼다가 취하듯이 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없다.
보는 바가 분명하고 계책을 세움이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도 또한 현명한 자와 함께 계책을 익숙하게 논할 뿐이다.
선비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재물을 풍족하게 할 수 있고, 이와 같이 하면 군대를 강하게 할 수 있고, 이와 같이 하면 좋은 관리를 가려 뽑을 수 있다.”라고 하니,
이 가운데에서 자신이 행할 만한 것을 따라 규모를 세워서 용기 있게 시작하고 전일專一함으로써 지키고 강함으로써 달성하여,
밤낮으로 규모의 안에 부합하기를 구하고 규모의 밖에 벗어나기를 힘쓰지 말아야 할 것이니,
그 사람이 전일專一하고 그 정사政事가 한결같은데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 않다.
재정이 풍족하지 못함과 군대가 강하지 못함과 훌륭한 관리를 가려 뽑지 못하는 이 세 가지는 국가의 존망이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천하의 대사大事이다.
천하의 대사大事를 어떤 한 사람이 독단하면서 겸하여 다 말한다면, 이 세 가지를 다스리는 그의 방법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진실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비록 이것을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세 가지를 결코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방법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그 방법을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따르기가 어렵고, 따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고,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갈무리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성공한다.”라고 하셨으니, 만일 도모하기를 좋아하는데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도모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다.
세상에 을 좋아하는 자가 있어서 천하의 좋은 쇠를 모아 검을 주조한 지 3년 만에 완성되자, 말하기를 “내 검이 천하에 무적이다.”라고 자랑하였는데, 검이 완성된 뒤에 어그러지고 날이 빠지고 부러져서 쓸 수가 없었으니, 이는 어째서이겠는가?
주조할 줄만 알고 갈무리할 줄을 몰라서이다.
지금 세상에 일을 거행하는 자들은, 비록 매우 작은 일이라도 이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는 항상 몇 사람에 불과하고 이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자는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성취할 수 있는 공은 항상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고, 성취할 수 없을 것 같은 형상은 항상 미리 보인다.
그리하여 윗사람이 장차 혼란하여 자신하지 못할 것이니, 또 어느 겨를에 갈무리함에 미치겠는가?
옛날 사람들 중에 지극히 어려운 것을 범하고 지극히 원대한 것을 도모한 자가 있었으니, 저들은 유독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 하였는가?
또 이는 비단 성인聖人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상군商君나라 법을 개혁할 적에 만인의 노여움을 범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을 물리쳐서 형세가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을 거슬렀으며,
소진蘇秦이 합종할 적에 천하의 다른 의견을 모아 똑같게 만들고 여섯 의 소원한 사람들을 연합하여 친하게 만들어서 그 계책이 이와 같이 오활하였으며,
회음후淮陰侯고제高帝에게 3만 명의 병력을 달라고 청하면서 이들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나라와 나라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나라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나라의 군량 수송로를 끊고서 서쪽으로 형양滎陽에서 회합할 것을 말하였으며,
경엄耿弇 또한 세조世祖(광무제光武帝)에게 말하기를 “먼저 어양漁陽을 평정하고 탁군涿郡을 취하고 돌아와 부평富平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나라를 함락시키고자 한다.”라고 하자, 세조世祖가 “계책이 너무 원대하여 세상에 부합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남의 도읍都邑을 넘어가서 남의 나라를 도모하여 공을 세우는 계책이 이와 같이 소략하였다.
그런데도 이 네 사람은 이것을 행하기 쉬운 일처럼 여겨서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자기 손으로 성취하여, 생각하기를 ‘이미 내가 군주에게 이것을 허락했다면 내가 친히 이것을 들어다가 돌려주겠다.’라고 여겼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천하를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데, 그 일이 또 천하 사람들의 뜻에 거슬리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요, 또 남에게 의뢰하는 바가 있은 뒤에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재물이 있어서 스스로 쓰고, 자식이 있어서 스스로 가르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사政事가 천하에 나오면 나오는 것만 있고 성공하지 못한 것이 지금 5, 6십 년이 되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짐작하건대 정사를 낼 줄만 알고 갈무리할 줄을 알지 못해서일 것이다.
갈무리할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짐작하건대 산만하여 갈무리하는 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먼저 그 규모를 정한 뒤에 종사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먼저 그 규모를 정한 사람은 남을 도모할 수 있지만 먼저 그 규모를 정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를 도모하기에도 항상 부족한데 하물며 남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세속에 우려할 만한 일이 있으니, 이는 사대부士大夫들이 조정朝廷을 믿고 복종함이 돈독하지 못하고, 모두 자기 의논을 내세우기 좋아하며 윗사람을 비난하는 것에 힘써서 옳고 그름을 현혹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따를 바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의 말을 따르자니 모두 할 만한 일이 없고, 이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자니 실행함에 있어 항상 연고가 많아 실패하기가 쉬우니, 연고가 많아 실패하기 쉬운 까닭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사사로운 의견을 가지고 일을 방해하여, 아랫사람들의 주장이 우세하여 성공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부자들이 이익을 도모할 적에 항상 소득이 있는 것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이라고 말하나 결코 그렇지 않다.
저 부자들은 남들이 믿어주는 것이 평소에 깊고 남들이 복종하는 것이 평소에 두터워서, 하는 일마다 아무도 방해하는 자가 없고 하고자 하는 일을 아무도 비난하는 자가 없어서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람들이 이미 먼저 이루어주는 것이다.
일이 행해지는 데에는 형세가 있고 이루어지는 데에는 기운이 있으니, 부자들은 형세를 타고 그 기운을 그대로 따른다.
그러므로 일이 쉽게 성공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천하 사람들이 믿고 복종하도록 다스려야 할 것이다.
천하의 일은 힘으로 이길 수가 없으니,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른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입을 따르는 것이 아니요, 여러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으로 함께 옳게 여기는 것을 따르는 것이니, 이것이 참으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방법이다.
많은 입은 과연 많은 것이 아니요, 다만 내 귀에 들리고 내 앞에 나타나서 사사로운 말 아닌 것이 없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많은 것이 되나 천하에게는 적은 것이 되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함께 옳게 여기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입이 모두 좋아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의 입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 사람들이 말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옳게 여기는 것을 버린다면, 즐거워하는 자가 적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많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항상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천하의 인심을 얻었는데, 지금의 군자君子들은 항상 여러 사람의 말을 따름으로써 인심을 잃으니, 이는 옛날 사람들은 그 입을 따른 것이 아니요, 그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게 여기는 바를 따름을 알지 못해서이다.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세상에 이른바 사람들의 의견을 거스르고 원망을 받기 때문에 시행할 수 없는 것으로는 임자任子를 줄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나 조정에서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을 돌아보지 않고 시행한 것이 지금 5, 6년인데, 천하에 일찍이 한 사람도 이것을 비난하는 자가 있지 않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그 입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나 그 마음속으로는 똑같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마음으로 똑같이 옳게 여기는 바를 따라 행하는 데도 아직도 여전히 비난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용기 있게 시작하고 전일專一함으로써 지키고 강함으로써 달성한다.”라고 하는 것이니, 만일 이 세 가지를 안다면 비단 우리나라를 잘 다스릴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거란契丹을 점령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역주
역주1 思治論 : 이 글은 自註에 “嘉祐 8년(1063)에 지었다.”라고 하였다. 이때 蘇軾은 鳳翔府簽書判官으로 있었는데, 英宗 嘉祐 연간에 만든 法의 폐해를 통감하여 이 論을 지은 것이다.
역주2 自宮室禱祠之役興 : 眞宗 大中祥符(1008~1016) 연간에 玉淸宮․昭應宮․集禧宮 등의 道觀을 건립하였으며, 또 동쪽으로 泰山에 가서 封禪하고 汾陽에서 后土神에게 제사하였다. 眞宗은 道敎를 좋아하여 이른바 天書라는 것이 내려오면 제사를 끊임없이 지내 결국 국가의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역주3 錢幣茶鹽之法壞 : 錢幣는 화폐를 이르며, 茶鹽은 차와 소금으로, 당시 이것을 국가에서 專賣하여 막대한 재정을 충당하였다. 宋나라의 錢幣와 茶鹽은 張齊賢이 돈을 더 주조하고 陳恕가 법을 개정한 이후 凌策․皮仲容․李諮 등의 의견을 따라 여러 번 변경하였으므로, “錢幣와 차와 소금을 專賣하는 법이 파괴되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宋史 食貨志》
역주4 加之以師旅 : 師旅는 군대로 전란을 뜻한다. 宋나라는 북쪽으로는 契丹, 서쪽으로는 西夏와 吐蕃 등의 침공이 계속되어 전란이 끊이지 않고 軍費가 날로 증가되었다.
역주5 自澶淵之役……而終不得其要領 : 澶淵은 옛날 호수 이름으로 繁淵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河北省 濮陽縣 서남쪽에 있다. 眞宗 景德 元年(1004) 閏 9월에 契丹이 대거 쳐들어오자, 大臣인 寇準은 眞宗에게 직접 정벌할 것을 권하였는데 眞宗이 澶淵에 행차하여 군대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11월에 李繼隆 등이 契丹의 大將을 사살하고 크게 승리하였는데, 이는 바로 北宋이 契丹과 싸워서 거둔 유일한 승리였다. 契丹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講和를 요청하였으나, 이때 송나라는 계책을 잘못 세워 도리어 契丹에 땅을 떼어주고 講和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蘇軾이 要領을 얻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6 其後 重之以西羌之變 : 西羌은 西夏를 가리킨다. 宋나라 仁宗 연간에 元昊가 宋나라를 배반하여 皇帝라 칭하고 국호를 西夏라 일컬었다. 元昊는 그 후 여러 번 서쪽 변경을 침략하여 전쟁이 계속되었다.
역주7 考功課吏 : 관리들의 成績과 잘못을 고찰함을 이른다.
역주8 昔者……如農之有畔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襄公 25년조에 보인다. 太叔은 複姓으로, 鄭나라 穆公의 손자인 太叔儀의 후손이다. 子産은 鄭나라 大夫 公孫僑의 字이다.
역주9 昔者太公治齊……皆可得而逆知之 : 太公이 齊나라를 다스릴 적에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功이 있는 사람을 높이자, 周公은 “후세에 반드시 君主를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하는 신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周公이 魯나라를 다스릴 적에 親族을 친애하고 높은 사람을 높이자, 太公은 “周公의 후세는 점점 쇠약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후에 과연 두 분의 예언대로 되었다. 《十八史略卷1》 逆知는 미리 아는 것을 이른다.
역주10 管仲 : 齊나라 桓公의 재상으로 이름은 夷吾인데, 桓公을 도와 霸業을 이루고 仲父로 일컬어졌다. 桓公은 春秋時代 五霸의 우두머리로 이름이 小白이다. 桓公은 周나라 莊王 11년에 兄 襄公이 無道하여 莒나라로 망명했었는데, 襄公이 시해당하자 귀국하고 즉위하여 周나라 왕실을 높이고 夷狄을 물리쳐, 죽을 때까지 제후들의 盟主가 되었다.
역주11 咎犯之在晉……如寄諸其隣而取之 : 咎犯의 咎는 바로 舅이니, 옛날 咎와 舅는 통용되었다. 犯은 子犯으로 晉나라 大夫 狐偃의 字인데, 晉나라 文公 重耳의 외삼촌(舅)이므로 생략하여 咎犯이라 한 것이다. 范蠡는 楚나라 사람으로 越王 句踐과 함께 吳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벼슬을 버리고 五湖에 배를 타고 떠나가서 은둔한 인물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27년조에 “晉侯(文公)가 처음 귀국했을 때부터 백성들을 교도하였는데, 2년 만에 이들을 전쟁에 동원하려 하자, 子犯은 ‘백성들이 아직 의리를 알지 못하여 그 생활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文公이 군대를 출동시켜 周나라 襄王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치에 힘쓰니, 백성들이 생활을 편안히 여겼다. 이들을 다시 전쟁에 동원하려 하자, 子犯이 ‘백성들이 아직 信義를 몰라 시행할 방법을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原나라를 정벌하여 信義를 보이니, 백성들이 물자를 교역할 적에 많은 이익을 바라지 않고 약속한 말을 분명한 증거로 삼았다. 다시 전쟁에 동원하려 하자, 子犯은 ‘백성들이 禮를 알지 못하므로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훈련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여 禮를 보이고 執秩을 설치하여 官爵의 등급을 바로잡으니, 백성들이 상사의 명령을 따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뒤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穀에 주둔한 楚나라의 戍兵을 축출하고 宋나라의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城濮에서 楚나라와 한번 싸워 패업을 이루었으니, 이는 文公이 백성을 교도한 결과이다.”라고 하였다. 《吳越春秋》에 “越王 句踐이 귀국한 지 4년만에 吳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范蠡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고, 그 후에도 여러 번 吳나라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20년에 이르러, 마침내 군대를 크게 일으켜 吳나라를 정벌해서 大勝을 거두고 마침내 吳나라를 멸망시켰다.”라고 하였다.
역주12 好謀而成 : 이 내용은 《論語》 〈述而〉에 보이는데, 계책을 잘 세워야 성공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3 商君 : 商鞅을 가리키는데, 秦나라 孝公을 보좌하여 개혁정치를 시행해서 富國强兵을 이룩하였다. 원래 衛나라 공족이므로 衛鞅 또는 公孫鞅이라고도 칭하였는데, 뒤에 商於에 봉해져 商君이라 칭하였다.
역주14 蘇秦 : 戰國時代 辯說家로 六國을 연합하여 秦나라에 항거하였는데, 먼저 燕, 趙를 설득하고 다음으로 韓, 魏를 설득하고 최후에 齊, 楚를 설득하여 마침내 從約長이 되고 六國의 재상이 되었다. 《史記 蘇秦列傳》
역주15 六姓之疎 : 당시 六國의 姓氏가 각각 달랐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6 淮陰侯 : 韓信이 楚王에서 강등된 후 봉해진 칭호이다. 당시 陳餘와 趙歇은 趙를 점거하고 田廣은 齊를 점거하고 項羽는 楚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韓信은 高祖 劉邦에게 3만의 병력을 달라고 청하여, 자신이 말한 대로 여러 諸侯國을 차례로 평정하고 楚의 項羽를 대패시켜 開國三傑로 알려지게 되었다.
역주17 耿弇亦言於世祖……世祖以爲落落難合 : 耿弇은 光武帝 劉秀의 장수인데, 북쪽으로 上谷의 군대 중에 징발되지 않은 자를 모아 漁陽에 있는 彭寵을 평정하고 涿郡에 있는 張豐을 점령하고 돌아와 富平의 獲索을 거두고 동쪽으로 張步를 공격하여 齊나라 땅을 평정할 것을 청하자, 光武帝가 이를 허락하였다. 뒤에 耿弇이 과연 張步를 격파하자 光武帝는 耿弇에게 이르기를 “將軍이 예전에 南陽에 있으면서 이 큰 계책을 세우고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뜻이 부합하기 어렵다.’고 한탄하였는데, 뜻이 있는 자는 일이 끝내 이루어진다.” 하였다. 《後漢書 耿弇傳》 世祖는 바로 光武帝 劉秀의 廟號이다.
역주18 四子 : 商鞅, 蘇秦, 韓信, 耿弇의 네 사람을 가리킨다.
역주19 任子 : 자제들이 科擧를 거치지 않고 父兄의 功德에 따라 蔭職으로 出仕하는 것을 이른다. 이보다 앞서 范仲淹 등은 任子를 줄일 것을 강력히 청하였다. 이에 仁宗은 慶曆 3년(1043) 조칙을 내려 재상 이하에게 모두 任子의 숫자를 줄이게 하였으며, 仁宗 嘉祐 初年(1056)에 龍圖閣直學士인 李柬之의 요청으로 蔭補의 法을 수정하였고, 知諫院 范鎭이 또다시 말하여 이후 매년 流官 3백여 명을 줄였다. 《宋史 選擧志》 宋나라 제도는 流官과 非入流官의 구별이 있었는데, 流官은 정식 관원이고 非入流官은 試官이라 하여 임시직으로 官籍에 들지 않았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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