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道
는 自宋儒
以後
에 纔說得分明
하니 而蘇家論性道處
는 不免癡人說夢矣
라
然이나 通篇因主論客하고 因客見主는 自是文家一法門이니라
始
에 孟子以爲善
하고 而荀子以爲惡
하고 이어늘 而
者又取夫三子之說
하야 而
하야
曰
로라하고 以爲
라하니 而天下之所是者於愈之說多焉
하니라
夫性與才는 相近而不同하야 其別이 不啻若黑白之異也라
聖人之所與小人共之하야 而皆不能逃焉이 是眞所謂性也요 而其才는 固將有所不同이라
今夫木이 得土而後生하야 雨露風氣之所養에 暢然而遂茂者는 是木之所同也니 性也요 而至於堅者爲轂하고 柔者爲輪하고 大者爲楹하고 小者爲桷하야 桷之不可以爲楹하고 輪之不可以爲轂하야는 是豈其性之罪耶리오
孔子所謂中人可以上下나 而上智與下愚不移者는 是論其才也요
而至於言性
하야는 則未嘗斷其善惡
하사 曰
而已
라하시니라
彼以爲性者 果泊然而無爲耶인댄 則不當復有善惡之說이요 苟性而有善惡也인댄 則夫所謂情者는 乃吾所謂性也라
人生而莫不有饑寒之患과 牝牡之欲하니 今告乎人曰 饑而食과 渴而飮과 男女之欲이 不出於人之性也라하면 可乎아
聖人無是면 無由以爲聖이요 而小人無是면 無由以爲惡이니라
聖人
은 以其
七者御之
하야 而之乎善
하고 小人
은 以是七者御之
하야 而之乎惡
이니 由此觀之
하면 則夫善惡者
는 性之所能之
요 而非性之所能有也
라
人之性은 善惡混하야 修其善則爲善人이요 修其惡則爲惡人이라하니
此其所以爲異者는 唯其不知性之不能以有夫善惡하야 而以爲善惡之皆出乎性也而已니라
夫太古之初에 本非有善惡之論하야 唯天下之所同安者를 聖人指以爲善하고 而一人之所獨樂者를 則名以爲惡이라
天下之人이 固將卽其所樂而行之하니 孰知夫聖人唯其一人之獨樂이 不能勝天下之所同安하야 是以로 有善惡之辨이리오
而諸子之意는 將以善惡으로 爲聖人之私說하니 不已疏乎아
區區乎以后稷之岐嶷과 文王之不勤과 瞽, 鯀, 管, 蔡之迹而明之하니라
聖人之論性也는 將以盡萬物之天理와 與衆人之所共知者하야 以折天下之疑어늘
愈之說에 以爲性之無與乎情하야 而喜怒哀樂이 皆非性者는 是愈流入於佛, 老而不自知也니라
성性과 도道는 송宋나라 유자儒者들인 염락濂洛 이후로부터 겨우 분명하게 말해졌으니, 소씨蘇氏 집안에서 성性과 도道를 논한 부분은 어리석은 사람이 꿈 얘기하는 정도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전편全篇에 걸쳐 주인을 인하여 객을 논하고, 객을 인하여 주인을 나타낸 것은 본래 문장가의 한 법칙이다.
옛날에 성性에 대해 논한 자들이 많아서 하나로 결정되지 못하였다.
처음에 맹자孟子는 선善하다고 하였고, 순자荀子는 악惡하다고 하였고, 양자揚子는 선善과 악惡이 혼재한다고 하였는데, 한유韓愈라는 분은 또 이 세 분의 말을 취하여 공자孔子의 의논으로 절충해서 성性을 분리하여 세 가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중인中人(중간 정도의 사람)은 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지만,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옮길 수 없다.”라 하고, 또 말하기를 “세 분의 말씀은 모두 그 중인中人에서 나왔고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빠뜨렸다.”라고 하였는데, 천하에서 한유韓愈의 말을 옳게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이것은 이른바 성性이란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재才라는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성性과 재才는 서로 비슷하나 똑같지 않아서 그 분별이 흑과 백이 다른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성인聖人과 소인小人이 똑같아서 모두 도피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이른바 성性이란 것이고, 재才는 진실로 똑같지 않은 것이다.
지금 나무가 흙을 얻은 뒤에 싹이 나서 비와 이슬과 바람과 기운이 길러주는 바에 자라나서 마침내 무성해지는 것은 모든 나무가 똑같은 것이니 본성本性이요, 나무 중에 단단한 것은 바퀴통이 되고 부드러운 것은 바퀴가 되고 큰 것은 기둥이 되고 작은 것은 서까래가 되어서, 서까래가 기둥이 될 수 없고 바퀴가 바퀴통이 될 수 없음에 이르러는 이것이 어찌 그 성性의 책임이겠는가?
천하에 성性을 말하는 자들이 모두 재才를 뒤섞어서 성性을 말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신 ‘중인中人은 위로도 올라가고 아래로도 내려갈 수 있으나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은 재才를 말씀한 것이다.
성性을 말씀함에 이르러는 일찍이 그 선善․악惡을 결단하지 않으셔서 말씀하시기를 “성性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에 따라 서로 거리가 멀어진다.”라고 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한유韓愈의 설은 또 이보다 더 심하여, 성性을 분리하여 정情이라 하고 재才를 합하여 성性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그 의논이 끝내 통할 수 없는 것이다.
한유韓愈가 말하는 성性이라는 것이 과연 담박淡泊하여 작위함이 없는 것이라면 다시는 선善․악惡의 설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만일 성性에 선善과 악惡이 있다고 한다면 한유韓愈가 말하는 정情이라는 것은 바로 내가 말하는 성性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근심과 남녀의 정욕이 없을 수 없으니, 지금 남에게 말하기를 “굶주리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과 남녀의 정욕이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되겠는가?
이것은 천하 사람들이 그 불가함을 아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이것이 없으면 말미암아 성인聖人이 될 수가 없고, 소인小人이 이것이 없으면 말미암아 악행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인聖人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악惡․욕欲의 일곱 가지 정情을 사용하여 선善으로 가고, 소인小人은 이 일곱 가지 정情을 사용하여 악惡으로 가니,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선善과 악惡이라는 것은 성性이 가게 할 수는 있고 성性이 소유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성性을 말하는 자가 어찌 그 선善과 악惡을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양웅揚雄의 의논은 진실로 이치에 가까워서 말하기를
“사람의 성性은 선善과 악惡이 혼재되어 있어서 선善을 닦으면 선인善人이 되고 악惡을 닦으면 악인惡人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다른 것은 오직 성性이 선善․악惡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선善․악惡이 모두 성性에서 나온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저 태고시대에는 본래 선善․악惡의 의논이 있지 않아서 오직 천하 사람들이 똑같이 편안히 여기는 것을 성인聖人이 가리켜 선善이라 하고, 군주 한 사람이 홀로 즐거워하는 것을 일러 악惡이라 하였다.
천하 사람들은 진실로 장차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나아가서 이를 행하니, 저 성인聖人께서 오직 군주 한 사람이 홀로 즐거워하는 것이 천하 사람들이 똑같이 편안히 여기는 것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 때문에 선善․악惡의 분변分辨이 있게 한 것임을 그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제자諸子의 뜻은 장차 선善과 악惡을 성인聖人의 사사로운(개인적) 말씀이라고 여겼으니, 너무 엉성하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한유韓愈는 책에서 전하여 들은 옛사람들의 사적事迹을 가지고 세 사람의 의논을 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구구하게 후직后稷이 어려서 영특하고 숙성한 것과, 문왕文王이 어머니를 수고롭게 하지 않은 것과, 고수瞽叟와 곤鯀과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행적을 가지고 선善․악惡을 밝혔다.
성인聖人이 성性을 논하신 것은 장차 만물의 이치와 중인衆人들이 함께 아는 것을 다해서 천하의 의심을 꺾고자 해서였는데,
한유韓愈는 한 사람의 재주를 가지고 천하 사람들의 성性을 결정하고자 하고,
또 그 말에 이르기를 “지금 성性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불佛․노老의 이론에 뒤섞여 있다.”라고 하였다.
한유韓愈의 말에 “성性은 정情과 관계가 없어서 희喜․노怒․애哀․악樂이 모두 성性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한유韓愈가 불佛․노老로 흘러 들어갔으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
“제목題目은 양웅揚雄이나 오로지 한유韓愈를 변론하였으니, 이 또한 문장의 한 체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