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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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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구양자歐陽子붕당론朋黨論〉의 속편續篇
長公此論 眞可以補歐陽子之不足이니 元祐紹聖之間 豈其說不用耶
장공長公의 이 은 참으로 구양자歐陽子의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는데, 원우元祐소성紹聖 연간에 어찌하여 그의 이 쓰이지 못했단 말인가?
通篇轉摺處 皆如游龍하니라
전편全篇에 걸쳐 돌리고 꺾은 부분이 마치 자유자재로 노니는 과 같다.
구양자歐陽子가 말씀하기를 “소인小人이 남의 나라를 텅 비게 만들려고 하면 반드시 붕당朋黨을 임금에게 올린다.”라고 하였다.
嗚呼
아!
國之將亡 此其徵歟인저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이 붕당朋黨이 바로 그 조짐이라 할 것이다.
禍莫大於權之移人이요 而君莫危於國之有黨하니 有黨則必爭이요 爭則小人者必勝하야 而權之所歸也
군주의 는 권세가 남에게 옮겨지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군주는 나라에 붕당朋黨이 있는 것보다 더 위태로운 것이 없으니, 붕당朋黨이 있으면 반드시 다투고 다투면 소인小人들이 반드시 이겨서 권세가 소인小人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君安得不危哉
그러니 군주가 어찌 위태롭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何以言之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말하는가?
君子 以道事君하니 人主必敬之而疏하고 小人 唯予言而莫予違하니 人主必狎之而親이라
군자君子로써 군주를 섬기니, 군주가 반드시 그를 공경하여 소원히 하고, 소인小人은 군주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어기지 않으니, 군주가 반드시 그를 가까이하여 친애한다.
疏者 易間하고 而親者 難睽也하며 而君子者 不得志 則奉身而退하야 樂道不仕하고 小人者 不得志 則徼倖復用하야 唯怨之報하니 此其所以必勝也니라
소원한 자는 간격이 벌어지기 쉽고 친한 자는 반목하게 하기가 어려우며, 군자君子는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받들고 물러가서 를 즐거워하고 벼슬하지 않는데, 소인小人은 뜻을 얻지 못하면 요행으로 다시 등용되어 오직 원한을 보복하려 하니, 이것이 소인小人이 반드시 승리하는 이유이다.
蓋嘗論之컨대
내 한번 논해보겠다.
君子 如嘉禾也하야 封植之甚難하고 而去之甚易하며 小人 如惡草也하야 不種而生하고 去之復蕃하니 世未有小人不除而治者也
군자君子는 아름다운 곡식과 같아서 북돋아 심어주기는 매우 어렵고 제거하기는 매우 쉬우며, 소인小人은 나쁜 잡초와 같아서 심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고 제거하여도 다시 무성해지니, 세상에 소인小人을 제거하지 않고서 나라가 다스려지는 경우는 있지 않다.
이나 去之爲最難하야 斥其一이면 則援之者衆하고 盡其類 則衆之致怨也深이라
그러나 소인小人을 제거하기가 가장 어려워서 소인小人 중의 한 사람을 배척하면 구원하는 자가 많고, 무리를 다 배척하면 여러 사람들의 원망을 크게 부른다.
小者 復用而肆威하고 大者 得志而竊國하야
그리하여 작은 경우에는 다시 등용되어 위엄을 부리고 큰 경우에는 뜻을 얻어 나라를 도둑질한다.
善人 爲之掃地하고 世主爲之屛息하니
그리하여 선인善人이 이 때문에 땅을 쓸듯이 남김없이 다 없어지고 세상의 군주가 이 때문에 숨을 죽인다.
譬之斷蛇不死하고 刺虎不斃하야 其傷人則愈多矣 是已
비유하면 뱀을 잘라도 죽지 않고 범을 찔러도 죽지 않아서 사람을 더욱 많이 상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 나라의 전씨田氏나라의 계손씨季孫氏가 이 경우이다.
齊, 魯之執事 莫匪田, 季之黨也 歷數君토록 不忘其誅로되하니 小人之黨 其不可除也如此
나라와 나라의 집사執事(관리官吏)들은 전씨田氏계손씨季孫氏이 아닌 사람들이 없었으니, 여러 군주가 그들을 죽일 것을 잊은 적이 없었으나, 결국에는 나라 간공簡公전씨田氏에게 시해弑害당하였고, 나라 소공昭公애공哀公계손씨季孫氏 때문에 나라를 잃었으니, 소인小人은 제거할 수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忠義之士 斥死無餘하니 君子之黨 其易盡也如此
그리고 나라 당고黨錮옥사獄事나라 백마역白馬驛충의忠義로운 선비들이 배척받아 죽어서 남김이 없었으니, 군자君子은 다하기 쉬움이 이와 같은 것이다.
使世主知易盡者之可戒하고 而不可除者之可懼 則有瘳矣리라
만일 군주가 다하기 쉬운 군자君子들이 경계할 만한 것임을 알고 제거할 수 없는 소인小人들이 두려워할 만한 것임을 안다면 이런 화가 그칠 것이다.
且夫君子者 世無若是之多也 小人者 亦無若是之衆也 凡才智之士 銳於功名而嗜於進取者 隨所用耳
군자君子가 세상에 이와 같이 많지 않으며 소인小人도 이와 같이 많지 않으니, 무릇 재주 있고 지혜로운 선비로서 공명功名에 뜻을 다하고 진취를 탐하는 자들은 쓰는 바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라하시니 未必皆君子也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仁者을 편안히 여기고, 지혜로운 자는 을 이롭게 여긴다.”라고 하셨으니, 반드시 다 군자君子는 아닌 것이다.
염유冉有부자夫子를 따르면 문인門人 중에 뛰어난 사람이 되고 계씨季氏를 따르면 취렴聚斂하는 신하가 되며, 나라 유종원柳宗元유우석劉禹錫이 만일 왕숙문王叔文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높은 재주와 뛰어난 학문으로 또한 충분히 나라의 유명한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옛날 난회자欒懷子나라에서 죄를 얻어 그 들이 모두 쫓겨나자, 악왕부樂王鮒범선자范宣子에게 이르기를 “어찌 난회자欒懷子의 무리 중에 주작州綽형괴邢蒯를 돌아오게 하지 않습니까?
勇士也라하니 宣子曰 彼欒氏之勇也 余何獲焉이리오
그들은 용사입니다.”라고 하니, 범선자范宣子가 대답하기를 “저들은 난씨欒氏의 용사이니, 내가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王鮒曰 子爲彼欒氏 乃子之勇也리라하니
그러자 악왕부樂王鮒가 말하기를 “그대가 저들의 난씨欒氏가 된다면(난씨欒氏처럼 저들을 아낀다면) 저들이 그대의 용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嗚呼
아!
宣子早從王鮒之言이런들 豈獨獲二子之勇이며 且安有리오
범선자范宣子가 진작 악왕부樂王鮒의 말을 따랐더라면 어찌 다만 두 사람의 용맹만을 얻었을 뿐이며, 또 어찌 곡옥曲沃의 변란이 있었겠는가?
愚以謂 治道 去泰甚耳 苟黜其首惡而貸其餘하야 使才者不失富貴하고 不才者無以致憾이면 將爲吾用之不暇리니 又何怨之報乎
어리석은 나는 생각하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너무 심한 것을 제거할 뿐이니, 만약 의 괴수를 내치고 나머지 사람들을 용서해주어서 재주 있는 자가 부귀를 잃지 않고 재주 없는 자가 유감을 갖지 않게 한다면, 장차 나의 쓰임이 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니, 또 어찌 원한을 갚을 것이 있겠는가?
人之所以爲盜者 衣食不足耳 農夫, 市人 焉保其不爲盜
인민人民들이 도둑이 되는 이유는 옷과 밥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농부와 상인들이 어찌 도둑이 되지 않는다고 보장하겠는가?
而衣食旣足이면 盜豈有不能返農夫市人也哉리오
그리고 또 옷과 밥이 풍족하다면 도둑이 어찌 농부와 상인으로 돌아오지 못하겠는가?
善除盜者 開其衣食之門하야 使復其業하고 善除小人者 誘以富貴之道하야 使隳其黨이니 以力取威勝者 蓋未嘗不反爲所噬니라
그러므로 도둑을 잘 제거하는 자는 옷과 밥을 얻을 을 열어주어서 도둑으로 하여금 생업을 회복하게 하고, 소인小人을 잘 제거하는 자는 부귀한 길로써 유인해서 소인小人으로 하여금 그 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니, 힘으로써 취하고 위엄으로써 이기려 하는 자는 일찍이 도리어 도둑이나 소인小人들에게 당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옛날 조참曹參나라를 다스릴 적에 말하기를 “부디 형옥刑獄시장市場을 동요하지 말라.”고 하였다.
獄市 奸人之所容也 如此 亦庶幾於善治矣리라
형옥刑獄시장市場은 간사한 사람들을 용납하는 곳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또한 거의 나라를 잘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奸固不可長이나 而亦不可不容也 若奸無所容이면 君子豈久安之道哉리오
간사한 사람들은 진실로 키워서는 안 되나 또한 용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간사한 자들이 용납될 곳이 없다면 군자君子들이 어찌 오랫동안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가?
徧天下어늘 而李德裕以一夫之力으로 欲窮其類而致之必死하니 此其所以不旋踵 罹仇人之禍也
옛날 우승유牛僧孺이덕유李德裕이 온 천하天下에 널려 있었는데, 이덕유李德裕는 한 사람의 힘으로 우승유牛僧孺의 무리를 모두 몰아서 반드시 죽을 자리에 두고자 하였으니, 이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서 원수들의 화를 만났던 것이다.
奸臣復熾하야 忠義益衰하니 以力取威勝者 果不可耶인저
그 후 나라는 간신들이 다시 번성하여 충의로운 선비가 모두 쇠했으니, 힘으로 취하고 위엄으로 이기려는 것이 과연 옳지 않은 것이다.
愚是以 續歐陽子之說하야 而爲君子小人之戒하노라
나는 이 때문에 구양자歐陽子붕당설朋黨說을 이어서 군자君子소인小人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역주
역주1 續歐陽子朋黨論 : 이 글은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작품이다. 郎曄本에는 ‘歐陽子’ 세 字가 없는데, 歐陽子는 歐陽脩(1007~1072)의 경칭이다.
歐陽脩는 字가 永叔이며 醉翁 또는 六一居士로 自號하였다. 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으로 韓愈와 함께 古文運動의 영수로 꼽히며 벼슬이 參知政事에 이르렀다. 嘉祐 2년(1056) 당시 禮部侍郞으로 知貢擧(과거시험위원장)의 직책을 맡았는데, 이때 蘇軾이 급제하였기 때문에 蘇軾은 평생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仁宗 慶曆 연간 초기에 范仲淹이 재상 呂夷簡을 비판하다가 知饒州로 좌천되었는데, 歐陽脩가 范仲淹을 비호하다가 朋黨으로 몰려 夷陵縣令으로 좌천되자, 歐陽脩는 〈朋黨論〉을 지어 논박하였다. 이 글은 歐陽脩의 의논 중에 일부 미진한 뜻을 蘇軾이 보충하여 쓴 것이다. 그러므로 ‘續’자를 앞에 붙인 것이다.
역주2 歐陽子曰……必進朋黨之說 : 歐陽脩의 〈朋黨論〉에 보이는 내용으로 〈朋黨論〉은 본서 11권 〈大臣論 上〉의 부록에 全文이 있다.
역주3 齊田氏魯季孫 : 齊田氏는 춘추시대 齊나라의 대부인 田氏 가문을 이른다. 공족이었던 田氏는 본래 陳나라 陳完의 후손들이다. 陳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齊 桓公 14년(B.C. 672)에 齊나라로 망명하였는데, 桓公의 신임을 얻어 工官으로 등용되었으며, 성을 陳과 발음이 같은 田氏로 바꾸었다. 이후 田氏는 대대로 齊나라의 대부가 되어 국정을 전횡하였는데, 康公 19년(B.C. 386)에 田和가 康公을 폐위하고 齊나라를 찬탈하였다. 《史記 田敬仲田完世家》
‘魯季孫’은 춘추시대 魯나라의 世卿인 季孫氏 가문을 이른다. 魯 桓公의 후손들로 孟孫氏, 叔孫氏와 함께 三桓으로 불렸는데, 이들은 대대로 魯나라의 國政을 맡아 권력이 公室을 위협할 만큼 막강하였다. 그러나 이중에도 季孫氏가 魯나라의 4분의 2를 소유하여 더욱 강성하였다. 孔子가 집정하여 이들의 권력을 억누르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벼슬을 내놓았으며 마침내 魯나라를 떠나셨다.
역주4 卒之簡公弑 昭哀失國 : 簡公은 齊 悼公의 아들로 이름은 壬이다. 대부 鮑牧이 悼公을 시해하자 簡公이 齊侯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때 田恒과 闞止가 左相과 右相을 맡아 簡公을 보좌하였다. 두 집안은 서로 반목하였는데 闞止가 簡公의 총애를 얻자 田恒은 백성들에게 양식을 빌려줄 적에는 큰 되를 쓰고 받을 적에는 작은 되로 받는 등 은혜를 베풀어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闞止의 族人인 子我(闞止 본인이라는 설도 있음)가 田氏를 멸족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를 알아차린 田氏들이 반란을 일으켜 闞止를 죽이고 나라 밖으로 도망친 簡公을 추격하여 마침내 俆州에서 시해하였다. 田恒이 簡公의 아우 驁를 齊侯로 세우니, 이가 바로 平公이다. 《史記 田敬仲田完世家》
田恒은 시호가 成子이며 후대에는 漢 文帝의 이름을 휘하여 田常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論語》 〈憲問〉에 “陳成子가 簡公을 시해하자, 孔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회하여 哀公에게 아뢰시기를 ‘陳恒이 그 군주를 시해하였으니, 토벌하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라고 보인다.
昭哀는 魯나라 군주인 昭公과 哀公을 이른다. 昭公은 이름이 裯이고 哀公은 이름이 蔣인데, 이들은 모두 季孫氏에게 쫓겨 국외로 도망하였다. 그러므로 失國이라고 한 것이다. 昭公은 평소 지나치게 강성한 三桓을 미워하였는데, 昭公 25년(B.C. 517)에 군대를 이끌고 季孫氏를 정벌하다가 오히려 三桓의 군대에게 패배하여 齊나라로 도망하였다. 哀公은 평소 越나라의 힘을 빌려 三桓을 정벌하려 하였는데, 三桓이 이를 미리 알고 힘을 합쳐 哀公 27년(B.C. 468)에 哀公을 공격하니, 哀公은 衛나라로 도망하였다. 《史記 魯世家》
역주5 漢黨錮之獄 : 黨錮之獄은 두 번에 걸친 黨錮의 옥사를 이르는데, 黨錮는 朋黨의 무리를 禁錮시킨다는 의미이다.
後漢 桓帝 때에 외척들을 주살하고 桓帝가 친정하는 과정에서 환관들이 공을 세워 정권을 잡았다. 환관들에 의한 정치적 폐단이 심해지자, 司隷校尉 李膺과 太傅 陳蕃 등이 太學生들과 함께 연합하여 스스로 淸流라 칭하며 환관들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환관들이 주동하여 延熹 9년(166) 詔令을 내려 淸流의 黨人 200여 명을 체포하고, 다음해에 黨人의 禁錮詔令을 내려 이들을 종신토록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제1차 黨錮의 옥사이다.
桓帝가 후사 없이 죽자 河間孝王의 曾孫인 靈帝(168~189)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외척 竇武가 정권을 장악하고 陳蕃과 함께 환관들을 모두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반역죄로 몰려 멸족의 화를 당하였다. 환관들이 다시 득세하여 李膺, 杜密 등을 주륙하고, 黨人과 太學生들을 대거 체포하였으며, 이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을 모두 폐출하거나 禁錮하니, 이것이 제2차 黨錮의 옥사이다. 《後漢書 黨錮列傳》
역주6 唐白馬之禍 : 白馬는 驛名으로 滑州 白馬縣에 있었다.
唐 昭宗 때에 黃巢의 난을 토벌한 朱全忠이 입조하여, 天復 4년(904)에 昭宗을 시해하고 13세의 昭宣帝(哀帝)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고 국정을 전횡하였다.
이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는데, 朱全忠의 심복인 諫議大夫 李璨과 靑州留後 李振이 이를 빌미로 삼아 평소 자신들이 미워하던 獨孤損, 裴樞 등을 죽이고자 朱全忠에게 아뢰기를 “이들은 모두 우리들을 원망하고 마음속으로 비방하니 마땅히 이들로써 재앙을 막아야 됩니다.”라고 하고, 또 “이들은 항상 스스로 淸流라고 말하니, 마땅히 이들을 黃河에 던져 濁流가 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朱全忠이 이 말을 따라 獨孤損, 裴樞, 崔遠, 陸扆, 王溥, 趙崇, 王贊 등 30여 명을 白馬驛으로 데려가서 모두 죽이고 시신을 黃河에 던졌는데, 이를 ‘白馬의 禍’라고 한다.
역주7 孔子曰……智者利仁 : 이 내용은 《論語》 〈里仁〉에 “仁하지 못한 자는 오랫동안 곤궁한 데 처할 수 없으며 장구하게 즐거움에 처할 수 없으니, 仁者는 仁을 편안히 여기고, 智者는 仁을 이롭게 여긴다.[子曰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安仁 知者利仁]”라고 보인다.
謝良佐는 이에 대해 “仁者는 마음에 內와 外, 遠과 近, 精과 粗의 간격이 없어서 보존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지 않고, 다스리는 마음이 있지 않아도 저절로 혼란해지지 않으니, 마치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손으로 잡고 발로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智者는 所見이 있다고 이르는 것은 괜찮지만 얻은 바가 있다고 이르는 것은 안 된다. 보존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없어지지 않고 다스리려는 마음이 있어야 혼란해지지 않아서 意識이 없지 못하다.
安仁은 하나요, 利仁은 둘인 것이다. 仁을 편안히 여기는 것은 顔子(顔回)와 閔子(閔損) 이상으로 聖人과의 거리가 멀지 않은 자가 아니면, 이러한 맛을 알지 못한다. 여러 弟子들은 비록 탁월한 才質이 있으나, 道를 봄에 의혹하지 않았다고 이르는 것은 괜찮지만, 이것을 이롭게 여김을 면치 못하였다.[謝氏曰 仁者 心無內外遠近精粗之間 非有所存而自不亡 非有所理而自不亂 如目視而耳聽 手持而足行也 知者 謂之有所見則可 謂之有所得則未可 有所存 斯不亡 有所理 斯不亂 未能無意也 安仁則一 利仁則二 安仁者 非顔閔以上去聖人爲不遠 不知此味也 諸子雖有卓越之才 謂之見道不惑則可 然未免於利之也]”라고 부연설명하였다. 《論語集註》
역주8 冉有從夫子……則爲聚斂之臣 : 冉有(B.C. 552~B.C. 489)는 魯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求이고 字는 子有인데, 冉有로 많이 칭하였다. 孔門十哲 중의 한 사람으로 政事에 뛰어났으며 다재다능하고 지혜가 뛰어났다. ‘選’은 선발된 뛰어난 인재라는 뜻이다. ‘聚斂’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둠을 이른다.
이 일은 《論語》 〈先進〉에 “季氏가 周公보다 부유하였는데도, 冉求가 그를 위해 聚斂하여 재산을 더 늘려주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冉求는〉 우리 무리가 아니니, 小子들아! 북을 울려 죄를 聲討함이 옳다.’[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 鳴鼓而攻之 可也]”라고 보인다.
역주9 唐柳宗元劉禹錫 使不陷叔文之黨 : 柳宗元(773~819)은 唐나라 德宗, 順宗, 憲宗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이다. 字가 子厚이며 長安 출생인데, 조상의 본적이 河東이기 때문에 柳河東이라고도 불리며, 마지막 벼슬이 柳州刺史였으므로 柳柳州라고도 불린다. 柳宗元은 德宗 貞元 9년(793)에 進士로 출사하여 集賢殿正字, 監察御史, 禮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며 韓愈, 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는데, 王叔文의 新政에 참여하였다가 그가 실패하자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劉禹錫(772~842)은 唐나라 德宗, 順宗, 憲宗 때의 문신이자 詩人으로, 字가 夢得이며 蘇州 嘉興 사람인데, 太子賓客에 제수된 적이 있어 劉賓客으로도 불린다. 德宗 貞元 9년(793)에 柳宗元과 함께 進士로 출사하여 監察御史, 屯田員外郞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王叔文의 新政에 참여하였다가 그가 실패하자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叔文은 王叔文(753~806)으로 越州 山陰 사람이다. 德宗 때 太子의 侍讀이 되어 총애를 받았는데, 永貞 원년(805)에 太子가 즉위하여 順宗이 되자, 翰林學士를 거쳐 재상에 제수되고, 柳宗元, 劉禹錫 등과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 혁신정책을 폈으나 너무 급진적이고 무계획적이었는데, 順宗이 즉위 당년에 병들어 퇴위하고 太子인 憲宗이 즉위하자, 渝州司戶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賜死되었다.
柳宗元과 劉禹錫은 모두 뛰어난 자질로 전도가 유망하였으나, 王叔文의 新政에 연좌되어 외직을 전전해서 名臣으로 이름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0 欒懷子得罪於晉 其黨皆出奔 : 欒懷子는 춘추시대 晉나라의 대부로 이름이 盈이고 懷子는 그의 시호이며, 范宣子는 이름이 匄이고 宣子는 그의 시호이다.
欒盈의 어머니 范祁는 당시 晉나라 국정을 맡고 있던 范宣子(范匄)의 딸이었는데, 남편인 欒桓子(欒黶)가 죽자 家老인 州賓과 사통하여 가산을 탕진하였다. 欒盈이 이를 걱정하자, 范祁는 아들(欒盈)이 자신의 情夫를 죽일까 염려하여, 친정아버지인 范匄에게 아들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모함하였다. 范匄는 欒盈이 평소 은혜를 베풀어 주변에 인사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이를 빌미삼아 欒盈을 著邑으로 보내 城을 쌓게 하다가 마침내 축출하니, 欒盈은 무리를 거느리고 楚나라로 도망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21년》
역주11 樂王鮒謂范宣子曰……乃子之勇也 : 樂王鮒는 晉나라 대부로 시호가 桓子인데, 晉侯와 范匄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州綽과 邢蒯는 모두 晉나라의 대부로 무용이 뛰어난 자들인데, 欒盈이 齊나라로 망명할 적에 동행하였다. ‘子爲彼欒氏乃子之勇也’는 “그대가 저들을 欒氏처럼 우대한다면 저들도 그대의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21년》
역주12 曲沃之變 : 曲沃은 晉나라에 있는 欒盈의 봉읍이다. 欒盈은 襄公 23년에 齊나라에서 曲沃으로 들어와 읍민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도읍인 絳城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范宣子와 范鞅(范獻子)의 군대에 패퇴하여 曲沃으로 달아났으나 끝내 曲沃이 함락되어 欒氏 일족이 모두 족멸되었다. 《春秋左氏傳 襄公 23년》
역주13 曹參之治齊曰 愼無擾獄市 : 曹參(?~ B.C. 190)은 字가 敬伯으로 沛縣의 옥리였는데, 漢 高祖(劉邦)가 봉기하자 그를 도와 漢나라의 開國功臣이 되었다. 惠帝 2년(B.C. 193)에 승상 蕭何가 죽자, 齊나라 재상으로 있던 그가 蕭何의 후임으로 조정에 들어오게 되었다. ‘愼無擾獄市’는 曹參이 齊나라를 떠나면서 후임자에게 당부한 내용으로, 獄과 市場을 흔들게 되면 간사한 자들이 용납될 곳이 없어져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史記 曹相國世家》
역주14 牛李之黨 : 牛는 牛僧孺, 李는 李德裕를 가리킨다. 이들은 唐나라 中期의 인물로 牛僧孺는 진사 출신의 관료 계급을 이끌고, 李德裕는 귀족 계급을 이끌고서 조정에서 수십 년 동안 상대방을 공격하여, 唐나라의 몰락을 재촉한 소위 牛李黨爭의 당사자들이다.
牛僧孺(780~848)는 字가 思黯으로 安定 鶉觚 사람인데, 德宗 貞元 21년(805)에 進士로 출사하여 監察御史, 禮部員外郞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穆宗 長慶 3년(823)에 승상이 되었다. 武宗 때에 李德裕가 국정을 맡자 循州長史로 좌천되었으나, 宣宗이 즉위하자 다시 집권하여 李德裕를 좌천시켰다.
李德裕(787~849)는 字가 文饒이며 元和 연간에 宰相을 지낸 李吉甫의 아들로 趙州 사람인데, 武宗 때 재상이 되었으며 衛國公에 봉해졌다. 開成 5년(840)에 武宗이 즉위하자 재상이 되어 藩鎭을 억누르고 위구르를 물리치는 등 공적을 세웠으나, 李宗閔을 축출하는 등 牛僧孺 일파를 지나치게 탄압하여 당쟁을 격화시켰다. 武宗이 죽고 宣宗이 즉위하여 牛僧孺 일파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李德裕는 崖州司戶參軍事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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