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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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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전적벽부
予嘗謂東坡文章仙也라하니 讀此二賦하면 令人有遺世之想하니라
내 일찍이 말하기를 “동파東坡문장文章의 신선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두 (〈전적벽부前赤壁賦〉,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읽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려는 생각이 있게 한다.
蘇子與客泛舟하야 遊於赤壁之下하니 淸風 徐來하고 水波 不興이라
임술년壬戌年 가을 7월 기망旣望소자蘇子과 함께 배를 띄워 적벽강赤壁江 아래에서 노니, 맑은 바람은 서서히 불어오고 파도는 일지 않았다.
擧酒屬客하여하며이러니 少焉 月出於東山之上하야 徘徊於斗牛之間하니 白露 橫江하고 水光 接天이라
술잔을 들어 객에게 권하고 명월시明月詩를 외우며 요조장窈窕章을 노래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달이 동산 위로 떠올라 두성斗星(남두성南斗星)과 우성牛星(견우성牽牛星)의 사이에 배회하니, 흰 이슬은 강을 가로질러 있고 파란 물빛은 하늘을 접해 있었다.
縱一葦之所如하야 凌萬頃之茫然하니 浩浩乎如馮(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하고 飄飄乎如遺世獨立하야 羽化而登僊(仙)이라
갈대만 한 배 한 척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어 만경창파萬頃蒼波의 아득하게 드넓은 물결을 타고 가니, 호호浩浩함이 마치 허공에 의지하고 바람을 타고 가는 듯하여 그칠 바를 모르겠고, 표표飄飄함이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이 되어 신선으로 오르는 듯하였다.
於是 飮酒樂甚하야 扣舷而歌之하니 歌曰 桂棹兮蘭槳으로 이로다
이에 술을 마시며 몹시 즐거워 뱃전을 두드리고 노래하니, 그 노래에 이르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木蘭 상앗대로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를 치며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渺渺兮予懷 이로다
아득하고 아득한 내 그리움이여, 미인을 바라보니 하늘 한쪽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客有吹洞簫者하야 倚歌而和之하니 其聲 嗚嗚然하야 如怨如慕하며 如泣如訴하고 餘音嫋嫋하야 不絶如縷하니 舞幽壑之潛蛟하고 泣孤舟之嫠婦
객 가운데 퉁소를 부는 자가 있어 노래에 맞추어 부니, 그 소리가 오열하듯 구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하고, 여운이 가냘프고 길게 이어져 끊이지 않음이 실오라기와 같으니, 깊숙한 골짝에 잠겨 있는 교룡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의 과부를 눈물 흘리게 하였다.
蘇子愀然正襟危坐而問客曰 何爲其然也 客曰
소자蘇子초연愀然히 옷깃을 여미고 무릎 꿇고 앉아 객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슬피 퉁소를 부는가?”라고 하자, 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之詩乎
“ ‘달이 밝고 별이 드문데, 오작烏鵲이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조조曹操)의 가 아닌가?
西望하고 東望이라
서쪽으로 바라보니 하구夏口이고 동쪽으로 바라보니 무창武昌이다.
山川相繆하야 鬱乎蒼蒼하니 此非孟德之困於者乎
산천山川이 서로 감아돌아 울울창창하니, 이는 조맹덕曹孟德주랑周郞(주유周瑜)에게 곤액을 당하던 곳이 아닌가?
하야 順流而東也 旌旗蔽空이라
그가 형주荊州를 격파하고 강릉江陵으로 내려와 물결을 따라 동쪽으로 진출할 적에 전함戰艦의 대열이 천 리에 뻗쳐 있고 깃발이 공중을 가리고 있었다.
釃酒臨江하고 橫槊賦詩하니 固一世之雄也러니 而今安在哉
술을 걸러 강가에 임하며 창을 비껴 들고 를 읊으니 진실로 한 세상의 영웅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하야 侶魚鰕而友麋鹿이라
하물며 나와 그대는 강저江渚의 사이에서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채취하면서 물고기와 새우들과 짝하고 사슴들과 벗하고 있다.
駕一葉之扁舟하야 擧匏尊(樽)以相屬하니 寄蜉蝣於天地 渺滄海之一粟이라
나뭇잎처럼 작은 배를 타고서 술바가지와 술동이를 들어 서로 권하니, 천지天地에 하루살이가 붙어 있는 것이요 창해에 좁쌀 한 알처럼 보잘것없다.
哀吾生之須臾하고 羨長江之無窮이라
우리 인생이 너무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長江의 무궁함을 부러워한다.
挾飛僊以遨遊하고 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일새 託遺響於悲風하노라
비상하는 신선을 끼고 한가로이 놀며 명월明月을 안고 길이 마치는 것을 갑자기 얻을 수 없음을 알기에 남은 메아리를 슬픈 바람에 의탁하는 것이다.”
蘇子曰
소자蘇子가 말하였다.
客亦知夫水與月乎
“객은 또한 저 물과 달을 아는가?
逝者如斯로되 而未嘗往也
강물은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일찍이 다한 적이 없으며, 달은 찼다 기우는 것이 저와 같은데도 끝내 사라지거나 자라지 않는다.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이요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리오
변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하늘과 땅도 일찍이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변하지 않는 입장에서 본다면 물건과 우리 인간이 모두 무궁무진한 것이니, 또 어찌 장강長江을 부러워할 것이 있겠는가?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하니 苟非吾之所有인댄 雖一毫而莫取어니와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하고 目遇之而成色하야 取之無禁하고 用之不竭하니 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子之所共適이니라
천지天地의 사이에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으니, 만일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털끝만 한 물건도 취하지 말아야 하지만, 오직 에서 불어오는 청풍淸風 사이의 명월明月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색(달빛)을 이루어, 취하여도 금하는 이가 없고 써도 다하지 않으니, 이는 조물주의 무궁무진한 보장寶藏(보물 창고)이요 나와 그대가 함께 즐겨야 할 것이다.”
喜而笑하고 洗盞更酌하니 肴核 旣盡이요 盃盤 狼藉
객이 기뻐하여 웃으며 잔을 씻어 교대로 술을 따르니, 안주와 과일이 이미 다하고 술잔과 소반이 낭자하였다.
相與枕藉乎舟中하야 不知東方之旣白이러라
배 안에서 서로 베고 깔고 누워서 동방이 이미 훤하게 밝은 줄도 알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前赤壁賦 : 이 글은 神宗 元豐 5년(1082) 가을 7월에 쓰였다. 당시 東坡는 烏臺詩案으로 黃州(지금의 湖北省 黃岡縣)에 安置되어 있었다. 삼국시대 周瑜가 曹操를 격파한 赤壁은 이곳이 아니고 지금의 湖北省 嘉魚縣이다. 東坡 역시 자신이 있었던 赤壁이 정확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古文眞寶後集》에 실려 있는 〈前後赤壁賦〉의 評과 地名考 등을 뒤에 함께 기재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역주2 壬戌之秋七月旣望 : 壬戌은 元豐 5년인 1082년이고, 旣望은 16일이다.
역주3 明月之詩 :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曹操가 지은 〈短歌行〉을 이른다고 보았다. 이 詩에 “달이 밝고 별이 드문데, 烏鵲이 남쪽으로 날아간다.[月明星稀 烏鵲南飛]”와 “밝고 밝아 달과 같은데, 어느 시절에나 취할 수 있을까.[明明如月 何時可掇]”라는 구절이 있음을 착안한 것이다.
그러나 《詩經》 〈陳風 月出〉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여기에 “달이 떠서 환하거늘 아름다운 사람 예쁘기도 하도다. 어이하면 그윽한 시름을 펼까. 마음에 애태우기를 심히 하노라.[月出皎兮 佼人僚兮 舒窈糾兮 勞心悄兮]”라는 구절을 가리킨 것이라 한다.
역주4 窈窕之章 :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詩經》 〈周南 關雎〉를 이른 것이라 하였는바, 이 詩의 첫 장에 “窈窕한 淑女, 君子의 좋은 짝이로다.[窈窕淑女 君子好逑]”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窈窕는 위에 보이는 〈陳風 月出〉의 ‘窈糾’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음을 밝혀둔다. 東坡가 이때 뱃놀이를 하면서 ‘窈窕淑女’를 노래했다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역주5 擊空明兮泝流光 : 空明은 물속에 비친 달을 이르고, 泝는 溯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감을 이르며, 流光은 강의 물결에 달빛이 어림을 형용한 것이다.
역주6 望美人兮天一方 : 美人은 일반적으로 군주를 가리키며, 天一方은 하늘의 어느 한쪽을 가리킨다. 松江 鄭澈의 〈思美人曲〉 역시 군주를 사랑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一說에는 美人을 東坡가 그리워하는 벗으로 보기도 하고, 神仙으로 보기도 한다.
역주7 曹孟德 : 曹操(155~220)로 孟德은 그의 字이다. 沛國 譙縣 사람으로 後漢 말기 黃巾賊의 난에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여러 군벌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이후 승승장구하여 獻帝로부터 魏王에 봉해졌다. 뒤에 아들 曹丕가 선양을 받아 魏나라 황제가 된 뒤에 太祖 武帝로 추존되었다.
後漢 獻帝 建安 13년(208)에, 曹操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劉備와 孫權의 연합군과 맞선 赤壁大戰에서 대패하고, 이로부터 魏․蜀․吳 三國이 鼎立하게 되었다. 한편 曹操는 建安時代 가장 뛰어난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때로는 창을 비껴 들고 詩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역주8 夏口 : 옛 城의 이름으로 지금의 湖北省 武漢市에 있었다.
역주9 武昌 : 지금의 湖北省 鄂州市이다.
역주10 周郞 : 周瑜(175~210)의 애칭으로 吳나라 사람들이 周瑜를 사랑하여 이렇게 불렀다 한다. 字가 公瑾이며 廬江 舒縣(지금의 安徽省 舒城) 사람으로 孫策이 王業을 일으킬 적에 建威中郞將이라는 중책을 맡아,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孫策이 죽자 孫權을 보좌하여 前部大都督이 되어 吳나라의 병권을 장악하였는데, 建安 13년(208)에 劉備와 연합하여 曹操의 대군을 赤壁에서 대파하였다.
역주11 方其破荊州下江陵 : 荊州는 지금의 湖北省 荊州市 일대이고, 江陵은 지금의 湖北省 江陵縣이다. 당시 劉表가 荊州를 맡아 다스리고 있었는데, 劉備가 그에게 귀의하였다. 劉表가 죽자 그의 둘째 아들 劉琮이 뒤를 이었는데, 용렬한 劉琮은 曹操가 80만 대군으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그대로 曹操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曹操는 싸우지 않고 荊州를 점령한 다음 長江 하류에 있던 吳나라 孫權에게 항복할 것을 강요하였다. 曹操에게 쫓겨 멸망 직전에 몰렸던 劉備는 諸葛亮의 계책에 따라 吳나라와 연합하여 赤壁의 一戰으로 曹操를 대파하고 三國鼎立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曹操는 패전한 뒤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華容道로 도망하여 다시는 長江 지방을 엿보지 못하였다.
下江陵의 下를 下城으로 보아 江陵을 함락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 실제로 曹操는 荊州에 無血入城함으로써 이 일대를 싸움 없이 접수하였으므로 ‘내려가다’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역주12 舳艫(축로)千里 : 舳은 배의 꼬리이고 艫는 배의 머리로, 戰艦이 앞뒤로 꼬리를 물고 천 리 멀리 이어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3 盈虛者如彼……而吾與子之所共適 : 本集에는 適이 食으로 되어 있고 一本에는 樂으로 되어 있는데, 《古文眞寶後集》의 註에 “《朱子語錄》 한 조항에……‘盈虛者如代’의 代자는 대부분 彼자로 잘못되어 있고, ‘吾與子之所共食’의 食자는 대부분 樂자로 잘못되어 있다. 일찍이 東坡가 손수 쓴 本을 보니 모두 代자와 食자로 되어 있다. 食은 食邑의 食과 같다.[朱子語錄一條……云 盈虛者如代 代字多誤作彼字 而吾與子之所共食 食字多誤作樂字 嘗見東坡手本 皆作代字食字 食如食邑之食]”라고 보인다.
이 내용은 《朱子語錄》 130권에 보이는바, 食은 ‘누리다’의 뜻이라고 하며, 中華書局에서 刊行한 本集의 校勘記에도 이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板本마다 각기 다르므로, 우선 《唐宋八大家文抄》本을 따라 誤字로 처리하지 않고 註記하였음을 밝혀둔다. ‘目遇之而成色’의 遇도 寓로 표기된 本이 있으나 뜻에는 큰 차이가 없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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