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公非由남해南海 亦不能爲此文이리라
敎小學 常百人이니 予幼時亦與焉이라
하니 予蓋從之三年이라
할새 一日 夢至其處하야장도사張道士하니 如平昔하야 汛治庭宇하야 若有所待者하고노선생老先生且至라하니라
其徒有誦노자老子하야이라하야늘
予曰 妙 一而已 容有衆乎 道士笑曰 一已陋矣 何妙之有리오
若審妙也 雖衆이라도 可也라하고 因指灑水薙草者하고 曰 是各一妙也라하니라
予復視之하니 則二人者 手若風雨하고 而步中規矩하니 蓋煥然霧除하고 霍然雲消
予驚歎曰 妙蓋至此乎
信矣로다
二人者釋用而上하야 曰 子未覩眞妙하니
庖, 郢 非其人也
是技與道相半하고 習與空相會하니 非無挾而徑造者也
子亦見夫蜩與鷄乎
夫蜩登木而號 不知止也하고 夫鷄俯首而啄 不知仰也하니 其固也如此
이나 至蛻與伏也하야는 則無視無聽하고 無饑無渴하야
黙化於荒忽之中하고 候伺於毫髮之間하야 雖聖知(智)라도 不及也
是豈技與習之助乎
二人者出커늘 道士曰 少安하고노선생老先生 至而問焉하라 二人者顧曰 노선생老先生未必知也시리니
子往見蜩與鷄而問之하면 可以養生이요 可以長年이리라
중묘당하야 榜曰중묘당衆妙라하고 以書來海南하야 求文以記之하니 予不暇作也일새 獨書夢中語以示之하노라


13. 중묘당衆妙堂에 대한 기문記文
남해南海로 귀양 간 뒤가 아니면 이런 글을 짓지 못했을 것이다.
미산眉山도사 장이간道士 張易簡이 가르치는 소학생小學生들이 항상 백 명이 되었는데, 나도 어릴 적에 여기에 참여하였다.
장도사張道士천경관 북극원天慶觀 北極院에 거처하였는데, 그때 나는 그에게서 3년을 배웠다.
그 후 내가 해남도에 귀양 와서 있을 적에 하루는 꿈에 그곳에 가서 보니, 장도사張道士가 평소처럼 정원을 쓸고 청소하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며, 말하기를 “노선생老先生(노자老子)이 장차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문도 중에 《노자老子》를 외는 자가 말하기를 “현묘玄妙하고 또 현묘玄妙하니, 여러 묘함의 문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는 하나일 뿐이니, 어찌 많겠는가?”라고 하자, 도사道士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나도 이미 누추하니, 어찌 묘함이 있겠는가?
만약 참으로 묘하다면 아무리 많아도 괜찮다.”라 하고, 인하여 물을 뿌리고 풀을 베는 자들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들도 각각 한 묘함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살펴보니, 두 사람은 손놀림이 비바람처럼 빠르고 걸음걸이가 법도에 맞으니, 안개가 환하게 걷히고 구름이 갑자기 사라지는 듯하였다.
내가 놀라 감탄하기를 “묘함이 여기에 이른단 말인가?
포정庖丁이 결에 따라 소를 해체하고, 영인郢人이 코에 백토를 칠하고 깎은 것이 사실이구나!”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하던 기예技藝를 놓고 올라와서 말하기를 “그대는 아직 참으로 묘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포정庖丁영인郢人은 인력으로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이들은 기예와 가 서로 반반씩이고 익힘과 공간이 서로 만났으니, 가진 것이 없이 곧바로 나아간 자가 아닙니다.
그대는 또한 저 매미와 닭을 보셨습니까?
매미가 나무에 올라가 울 적에 그칠 줄을 모르고, 닭이 고개를 숙이고 쪼아먹을 적에 우러를 줄을 모르니, 융통성이 없이 하나밖에 모르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매미가 껍질을 벗고 닭이 알을 품게 되면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으며 굶주림도 없고 목마름도 없어서,
황홀한 가운데에 묵묵히 변화하고 털끝만 한 사이를 자세히 살펴서, 비록 훌륭한 성인聖人과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미치지 못하니,
이 어찌 기예와 익힘의 도움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나가자, 도사道士가 말하기를 “그대는 조금 앉아 있다가 노선생老先生이 이르시기를 기다려 물으시오.”라고 하였는데, 두 사람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노선생老先生도 반드시 알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가서 매미와 닭을 보고 물어보면 양생養生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광주廣州도사道士숭도대사 하덕순崇道大師 何德順을 짓고 ‘중묘당衆妙堂’이라 써서 붙이고, 해남도에 있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서 글을 지어 기록해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지을 겨를이 없으므로 다만 꿈속의 말을 써서 보여주었다.
무인戊寅년(1098) 3월 15일.


역주
역주1 衆妙堂記 :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42권에 “東坡가 紹聖 5년(1098) 3월 15일에 〈衆妙堂記〉를 지었다.”라고 보이는데, 이때 東坡는 海南島에 安置되어 있었다.
역주2 眉山道士張易簡 : 眉山은 宋代 縣의 이름으로 東坡의 고향인데 지금의 四川省 眉山市이다. 道士 張易簡은 東坡가 어렸을 적에 글을 배웠던 스승이다.
역주3 天慶觀北極院 :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蛾眉山 주변에 있었던 道家의 寺院인 듯하다.
역주4 謫居海南 : 東坡는 紹聖 4년에 瓊州別駕로 昌化軍(지금의 廣州 海南島 儋耳縣)에 안치되었는데, 이때 이 글을 쓴 것이다.
역주5 玄之又玄 衆妙之門 : 玄은 현묘한 眞理로, 眞理는 심오하여 알기 어려우므로 玄이라 이름한 것이다. 玄은 아득히 멀어 분별하기 어려운 것으로 예전에는 哲學을 玄學으로 표기하였다. 이 내용은 《道德經》 1장에 그대로 보이는데, 道家의 道理가 深奧하고 神妙하여 廣大하다는 뜻이다.
역주6 庖丁之理解 : 庖丁은 전국시대 이름난 白丁으로 소를 잡아 해체하는 데에 神技에 가까운 기술을 가져 유명하였으며, 理解는 소를 잡아 해체할 적에 힘줄과 살의 결에 따라 해체함을 이른다.
《莊子》 〈養生主〉에 “庖丁이 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았는데, 손이 닿는 곳과 어깨를 기대는 곳과 발을 딛는 곳과 무릎으로 누르는 곳마다, 휙휙 뼈를 발라내는 소리와 칼로 가르는 소리가 절도에 모두 맞았다. 庖丁의 몸놀림은 桑林의 舞樂에도 조화되며 칼을 움직이는 소리는 經首의 음절에도 맞았다.
文惠君이 이르기를 ‘아! 훌륭하다. 재주가 어떻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라고 하자, 庖丁은 칼을 놓고, ‘제가 좋아하는 것은 道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文惠君曰 譆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 道也進乎技矣]”라고 보인다.
桑林은 商나라 成湯의 舞樂이고 經首는 咸池樂의 악장 이름이다. 咸池는 黃帝가 만들고 堯임금이 보완하여 上帝에게 기우제를 지낼 때 연주한 음악이라 한다.
역주7 郢人之鼻斲 : 이 내용은 《莊子》 〈徐无鬼〉에 “郢 땅 사람이 자신의 코끝에 파리의 날개만큼 白土를 얇게 바르고, 匠石으로 하여금 이것을 깎아내게 하였다. 匠石이 도끼를 휘둘러 바람을 일으켜 백토를 깎아내었는데, 郢 땅 사람은 그 소리를 듣고도 코끝의 白土를 깎도록 맡겨두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백토가 말끔히 다 깎여졌는데도 코가 상하지 않았으며, 郢 땅 사람은 그대로 꼿꼿이 서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郢人堊慢其鼻端 若蠅翼 使匠石斲之 匠石運斤成風 聽而斲之 盡堊而鼻不傷 郢人立不失容]”라고 보인다.
郢은 楚나라의 도읍이고 匠石은 匠人인 石으로, 옛날 기예가 뛰어나면 그 기예를 姓으로 대용하였는데, 바둑을 잘 두는 秋를 奕秋라 하고 樂師인 曠을 師曠이라 칭한 것이 그 사례이다.
역주8 廣州道士崇道大師何德順 : 廣州는 宋代의 州의 이름인데 治所는 지금의 廣東省 廣州市에 있었다. 何德順은 道士로 廣州 天慶觀의 주지이며 崇道大師란 명호를 하사받았는데, 《宋代傳記資料索引》에 보인다.
역주9 戊寅三月十五日 : 戊寅年은 哲宗 紹聖 5년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