軾
은 受性剛簡
하고 學迂材下
하야 에 不敢復齒縉紳
이라
自還
으로 見平生親舊
에 惘然如隔世人
이어든 況與
로 無一日之雅
하니 而敢求交乎
아
大略如行雲流水하야 初無定質하야 但常行於所當行하고 常止於不可不止하야
이라하시고 라하시니 夫言止於達意
면 則疑若不文
이나 是大不然
이라
하니 能使是物
로 了然於心者
는 蓋千萬人而不一遇也
어든 而況能使了然於口與手者乎
아
揚雄이 好爲艱深之詞하야 以文淺易之說하니 若正言之면 則人人知之矣리라
終身雕蟲하고 而獨變其音節하야 便謂之經이 可乎아
어늘 而乃以賦鄙之
하야 至與
하니 雄之陋 如此比者甚衆
이라
可與知者道요 難與俗人言也니 因論文하야 偶及之耳로라
이 言 文章
은 如精金美玉
하야 市有定價
하야 非人所能以口舌貴賤也
라하시니 紛紛多言
이 豈能有益於左右
리오
이 글에 논한 것은 문장이나, 이것은 또 소장공蘇長公 문장의 본색이기도 하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소탈하며, 학문은 오활하고 재주는 낮아서 죄에 걸려 폐출당한 지 수년에 감히 다시는 사대부 축에 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북海北에서 돌아와 평소의 친구들을 만나볼 적에도 아득하여 마치 딴 세상의 사람들과 같았는데, 하물며 좌우左右와는 단 하루도 만나 함께한 적이 없으니, 감히 사귀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런데 족하足下께서 여러 번 왕림하여 일산을 기울이고 잠시 만났어도 구면인 것처럼 대해주시니, 매우 다행으로 기대에 넘치는 것을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보여주신 편지와 시부詩賦와 잡문雜文은 여러 번 익숙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족하足下의 문장은 대략 떠돌아다니는 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아 애당초 정해진 형질이 없어서, 다만 항상 마땅히 가야 할 곳에는 가고 항상 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는 그칩니다.
그리하여 문리文理가 자연스럽고 미려한 모습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이 문채 나지 않으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멀지 못하다.”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말은 뜻이 통달하면 될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말이 뜻을 통달하는 데 그치면 말에 문채가 없을 것처럼 생각되나,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장으로 사물의 미묘함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바람을 묶어두고 그림자를 잡는 것과 같으니, 이 사물을 마음속에 분명하게 이해하는 자는 천 명이나 만 명 중에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것을 분명하게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쓰는 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것을 일러 말이 통달했다고 하는 것이니, 말이 통달하는데 이르면 문장을 이루 다 쓸 수 없게 될 것 입니다.
양웅揚雄은 어렵고 심오한 글을 짓기를 좋아해서 천근하고 쉬운 말에 문채를 입혀 어렵게 만들었으니, 만약 이것을 바로 말했으면 사람마다 그 내용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조충雕蟲의 전각篆刻이라는 것이니,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이 모두 이러한 것들인데도 유독 부賦를 지은 것을 후회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종신토록 조충雕蟲의 짓을 하고 오직 그 음절만을 바꾸어서 곧 이것을 경經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은 풍風과 아雅가 두 번 변한 것이니, 비록 해와 달과 광채를 다툰다고 하더라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글이 부賦와 비슷하다고 하여 조충雕蟲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가의賈誼가 공자孔子를 뵈었으면 당堂에 올라가는 것도 충분할 터인데 부賦를 지었다고 하여 그를 비천하게 여겨서 사마상여司馬相如와 같은 부류로 보았으니, 양웅揚雄의 누추함이 이와 같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이는 진리를 아는 자와 함께 말할 수 있고 속인과는 더불어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지금 내가 문장을 논하다가 우연히 여기에 말이 미쳤을 뿐입니다.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구양수歐陽脩)이 말씀하기를 “문장은 정제精製한 금金과 아름다운 옥玉과 같아, 시장에 정해진 값이 있어서 사람들이 입과 혀로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분분하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어찌 당신에게 유익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