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1. 신규각宸奎閣에 대한
看議論持大體處니라
의론議論이 대체를 유지한 부분을 볼 수 있다.
有詔廬山하고 召對하야 問佛法大意한대 奏對稱旨어늘 賜號大覺禪師하다
황우皇祐 연간에 여산廬山의 승려인 회련懷璉에게 명하여 경사京師십방정인선원十方淨因禪院에 거주하게 하고 화성전化成殿에 불러서 불법佛法의 대의를 물었는데, 회련懷璉이 상주하고 대답한 것이 임금의 뜻에 맞았으므로 대각선사大覺禪師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是時 北方之爲佛者
이때 북방에서 불교를 하는 자들은 모두 명예와 이익에 마음을 두고 인과응보설에 얽매여 있었다.
以故 士之聰明超軼者 皆鄙其言하야 詆爲蠻夷下俚之說이라
이 때문에 선비 중에 총명하고 뛰어난 자들은 모두 불가佛家의 말을 비루하게 여겨서 만이蠻夷의 저속한 말이라고 비방하였다.
獨指其妙與合者하야 其言 文而眞하고 其行 峻而通이라
그런데 유독 회련懷璉은 불교의 묘리가 공자孔子노자老子와 부합하는 것들을 지적해서 그 말이 문채나면서도 진실하고 행실이 준엄하면서도 화통하였다.
一時士大夫喜從之游하야 遇休沐日이면 璉未盥漱 而戶外之屨滿矣러라
그러므로 사대부士大夫들이 한때 그를 따라 교유交遊하기를 좋아해서 휴가일이 되면 회련懷璉이 아직 세수하고 양치질하기도 전에 찾아온 사람들의 신발이 문밖에 가득하곤 하였다.
으로 不由師傳하고 自然得道하사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는 하늘이 내신 재능으로 스승의 전수를 따르지 않고 저절로 득도得道하셨다.
與璉問答하시고 親書頌詩以賜之하시니 凡十有七篇이라
그리하여 회련懷璉과 문답을 하시고는 친히 송시頌詩를 써서 하사하시니, 모두 열일곱 편이었다.
上書하야 乞歸老山中한대 上曰 將安歸乎아하시고 不許하시다
지화至和 연간에 회련懷璉이 글을 올려 산중에 돌아가 늙을 것을 청원하자, (인종仁宗)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바로 여여如如이니,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시고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再乞堅甚한대 英宗皇帝留之不可하야 賜詔許自便이라
치평治平 연간에 재차 더욱 견고히 청원하니, 영종황제英宗皇帝께서 만류할 수 없으므로 조칙을 내려서 편한 대로 하라고 허락하셨다.
璉旣渡江하야 少留於라가 遂歸老於하니
회련懷璉이 양자강을 건너가서 금산金山서호西湖에서 잠시 머물다가 마침내 사명四明아육왕산 광리사阿育王山 廣利寺에 돌아가 늙으니,
四明之人 相與出力하야 建大閣하야 藏所賜頌詩하고 榜之曰宸奎라하다
사명四明 사람들이 서로 재력을 내어 큰 누각을 세워서 황제께서 하사한 송시頌詩를 보관하고 ‘신규각宸奎閣’이라 써 붙였다.
京師始建하니 詔取其副本藏焉하고 且命歲度僧一人하다
이때 경사京師에 처음으로 보문각寶文閣을 세우니, 명하여 그 부본副本을 가져다가 보문각寶文閣에 보관하게 하고, 또 명하여 해마다 승려 한 사람을 하여(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
歸山二十有三年 年八十有三이라
회련懷璉이 산으로 돌아온 지 23년에 나이가 83세였다.
臣出守杭州하니 其徒使來告曰 宸奎閣 未有銘이라
이 외직으로 나와 항주杭州를 맡으니, 그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신규각宸奎閣에 아직 명문銘文이 없습니다.
逮事하고 而與吾師游最舊하니 其可以辭리오하니라
그대는 소릉昭陵(인종仁宗)을 섬기셨고 우리 선사先師와 매우 오래 교유하셨으니, 〈명문銘文 쓰는 일을〉 어떻게 사양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臣謹按 古之人君 號知佛者 必曰라하니 其徒蓋嘗以藉口하고 而繪其像于壁者
이 삼가 살펴보니, 옛날 군주君主 중에 불법佛法을 잘 안다고 이름난 자로는 반드시 한 명제漢 明帝양 무제梁 武帝를 말하는데, 그 무리(승려)들이 항상 이것을 이야기하고 그 화상을 벽에 그려놓곤 하였다.
하고하니 皆緣名失實하야 去佛遠甚이라
〈그러나〉 한 명제漢 明帝는 까다롭게 살핌을 총명함으로 여겼고 양 무제梁 武帝는 나약함을 으로 여겼으니, 모두 이름만 따르고 실제를 잃어서 불교와의 거리가 매우 멀었다.
恭惟 未嘗하고 崇侈寺廟하시며 로되 而升遐之日 하니
공손히 생각하건대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는 재위하신 42년 동안 일찍이 승니僧尼들을 많이 하고(출가시키고) 사찰을 크게 꾸미고 높이지 않으셨으며, 창과 방패와 형벌하는 도끼들을 일찍이 사사로이 쓰신 적이 없었으나, 승하하시던 날에 천하 사람들이 인군仁君이라고 허여하였다.
此所謂得 古今一人而已
이것은 이른바 부처의 심법心法을 얻었다는 것이니, 이는 고금에 우리 인종황제仁宗皇帝 한 분뿐이시다.
雖以이나 而持律嚴甚이라
회련懷璉은 비록 출세법出世法으로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나, 율법을 매우 엄격히 지켰다.
上嘗賜以한대 璉對使者하야 焚之하고 曰 吾法 以壞色衣하고 以瓦鐵食하니 此鉢非法이라하니
께서 일찍이 용뇌수龍腦樹로 만든 발우鉢盂(바리때)를 하사하자, 회련懷璉이 사자를 마주하고서 이것을 불태우며 말하기를 “우리 불법佛法은 색이 바랜 옷을 입고 질그릇과 쇠그릇으로 먹으니, 이 용뇌수龍腦樹발우鉢盂불법佛法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가서 이 말을 상주하자, 께서 가상히 여기고 오랫동안 감탄하셨다.
銘曰
다음과 같이 한다.
巍巍仁皇이여
거룩하고 거룩하신 인종황제仁宗皇帝시여!
體合自然이라
본체가 자연과 부합하셨네.
神耀得道하니 非有師傳이라
정신이 밝아 득도하시니, 스승의 전수함이 있지 않았다오.
維道人璉
오직 도인道人회련懷璉소요逍遙하여 자유자재하니,
禪律幷行하야 不相留礙
참선參禪계률戒律을 병행하여 서로 장애되지 않았도다.
아! 훌륭한 송시頌詩여!
我旣其文하니
내 그 글을 다 읽어보니,
惟佛與佛 乃識其眞이라
부처와 부처라야 비로소 그 진실을 알 수 있네.
咨爾東南 이여
아! 동남 지방의 산신山神해왕海王이여!
時節來朝하야 以謹其藏이어다
시절마다 조회 와서 여기에 보관한 것을 삼가 지킬지어다.
역주
역주1 宸奎閣碑 : 이 글의 저작 시기는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32권에 “東坡가 元祐 5년(1090) 12월에 승려 懷璉을 위하여 〈四明阿育王山 廣利寺 宸奎閣碑〉를 지었다.”라고 보인다. 이때 東坡는 知杭州事로 있었다.
宸은 황제의 거처를 이르고 奎는 奎宿로 28宿 가운데 하나인데 文章을 관장한다 하여, 帝王이 손수 쓴 글을 宸奎라 이르는바, 宸奎閣은 승려 懷璉이 자신이 하사받은 仁宗皇帝의 御書를 수장하기 위해 건립한 閣이다. 碑는 碑文으로 문체 가운데 하나인데, 주로 죽은 사람의 功業을 기록한 글이나, 일의 전말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 碑文은 東坡가 승려 懷璉의 요청을 받고 宸奎閣을 건립하게 된 일의 전말을 기록한 글이다.
역주2 皇祐 : 宋 仁宗의 연호로 1049년부터 1054년까지이다.
역주3 僧懷璉 住京師十方淨因禪院 : 懷璉은 大覺禪師(1009~1090)의 법명으로 泐潭懷澄의 법을 이었으며, 俗姓은 漳州 陳氏이다. 泐潭懷澄을 받들다가 廬山으로 행각을 떠나 圓通居訥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仁宗이 居訥을 궁궐로 초청하자, 居訥을 대신하여 京師로 가서 詔勅으로 十方淨因禪院의 주지가 되고, 化成殿에서 불법의 대의에 대답하고 大覺禪師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南宋 때의 승려 惠洪이 지은 《冷齋夜話》에 “大覺懷璉禪師는 佛學 이외에 詩에도 뛰어났다. 舒王(王安石)이 젊었을 적에 그와 從遊하였는데, 한번은 그의 詩를 歐陽脩에게 보여주었더니, 歐陽脩가 이르기를 ‘이 道人이 肝臟으로 만두를 빚었구나.’라고 하였다. 舒王이 그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고 뜻을 묻자, 歐陽脩가 ‘이 詩 가운데에 한 점의 채소 기운도 있지 않다.’라고 대답하였다.
懷璉은 仁宗皇帝의 賞讚과 知遇를 입어 東京에 있는 淨因禪院의 주지를 매우 오래 하였다. 한번은 偈頌을 지어 올려 山林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는데, 그 頌에 ‘산마다 구름 덮이고 계곡마다 물 흐르니, 한가한 몸 이 산마루로 돌아가 늙고자 합니다. 天壽를 빌 듯 간곡히 축원하니, 한 줄기 맑은 향 돌다락에 가득하네.’라고 하였으며, 또 偈頌하기를 ‘堯임금의 어진 덕 하늘처럼 광활하니, 외로운 구름 타고 마음대로 날 수 있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大覺璉禪師學外工詩 舒王少與遊 嘗以其詩示歐公 歐公曰 此道人作肝臟饅頭也 舒王不悟其戱 問其意 歐公曰 是中無一點菜氣 璉蒙仁廟賞識 留住東京淨因禪院甚久 嘗作偈進呈 乞還山林曰 千簇雲山萬壑流 閒身歸老此峰頭 慇懃願祝如天壽 一炷淸香滿石樓 又曰 堯仁況是如天闊 乞與孤雲自在飛]”라고 보인다.
역주4 化成殿 : 《宋史》 〈地理誌〉에 “後苑의 東門을 寧陽門이라고 하였고 苑內에 崇聖殿과 太淸樓가 있었으며, 또 서쪽으로 宜聖殿과 化成殿이 있었다.[後苑東門曰寧陽 苑內有崇聖殿太淸樓 其西又有宜聖化成]”라고 보인다.
‘寧陽’에 注하기를 “바로 예전의 宣和門이니, 明道 원년(1032)에 개명하였다.[卽宣和門 明道元年改]”라고 하였고, ‘化成’에 注하기를 “바로 예전의 玉宸殿이니, 明道 원년에 개명하였다.[卽玉宸殿 明道元年改]”라고 하였다.
역주5 留於名利 囿於因果 : 名利는 명예와 이익이라는 뜻인데, 本集에는 ‘利’가 ‘相’으로 되어 있는바, 이때의 相은 皮相으로, ‘名相’은 事物의 皮相(外見)을 가리킨다. 因果는 불교 용어로 善惡의 業(행위)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果報를 받음을 이른다.
역주6 孔老 : 孔은 儒學의 창시자인 孔子(孔丘)를 이르고, 老는 道家의 始祖인 老子(李耳)를 이른다.
역주7 仁宗皇帝以天縱之能 : 仁宗皇帝는 이름이 趙禎(1010~1063)으로 宋나라 제4대 황제이며, 眞宗의 여섯째 아들이다.
‘天縱之能’은 하늘이 풀어놓은 천부적 재능이란 뜻으로, 이 말은 《論語》 〈子罕〉에 “太宰가 子貢에게 ‘夫子(孔子)는 聖者이신가? 어쩌면 그리도 능한 것이 많으신가?’라고 묻자, 子貢이 말하였다. ‘〈선생님은〉 진실로 하늘이 풀어놓으신 아마도 聖人이실 것이고, 또 능함이 많으시다.’[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라고 보인다.
역주8 至和 : 宋 仁宗의 연호로 1054년부터 1056년까지이다.
역주9 山卽如如體 : 佛家에서는 眞如로서 항상 변하지 않고 圓融하여 凝滯되지 않는 경계를 ‘如如’라고 한다. 郎曄의 《經進東坡文集事略》의 55권의 注에 “馬永卿이 《嬾眞子》에서 이르기를 ‘仁宗皇帝는 道德이 옛날의 훌륭한 帝王들과 같았으며, 禪學 또한 본래 高遠하였다. 내가 阿育王山에 유람 가서 皇祐 연간에 仁宗皇帝께서 大覺禪師 懷璉에게 하사하신 御書 53권을 보았는데, 偈頌이 매우 많았다. 그 가운데 懷璉이 京師에 있을 적에 仁宗皇帝께서 지으신 頌이 하나 있었는데, 여기에 「虛空은 본래 막힘이 없는데, 智解가 이르러 빌미를 만든다. 山이 바로 如如한 體이니, 中位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다.’라고 하였다.[馬永卿 嬾眞子云 仁宗皇帝道德如古帝王 然禪學亦自高遠 僕遊阿育王山 見皇祐中所賜大覺禪師懷璉御書五十三卷而偈頌極多 內有一頌留懷璉住京師云 虛空本無礙 智解來作祟 山卽如如體 不落偏中位]” 하였다.
馬永卿(?~1136)은 宋나라 때의 文臣으로 揚州 사람이며 字가 大年인데 元城 劉安世의 제자이다. 《嬾眞子》는 馬永卿이 지은 考據와 辨證을 위주로 한 筆記로 모두 5권이다.
역주10 治平 : 宋 英宗의 연호로 1064년에서 1067년까지이다.
역주11 金山西湖 : 金山은 지금의 江蘇省 鎭江市 북쪽에 있는 낮은 야산이고, 西湖는 지금의 浙江省 杭州市 서쪽에 있는 錢塘湖이다.
역주12 四明阿育王山廣利寺 : 四明은 寧波府의 별칭으로 지금의 浙江省 寧波市인데 同名의 山이 경내에 있다. 阿育은 梵語 ‘Asoka’의 음역으로 아소카 王은 印度 마가다國의 세 번째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임금인데, 인도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阿育王山은 지금의 절강성 鄞縣에 있는 산으로 본래 이름이 鄮山이었다.
西晉 太康 연간에 幷州 사람 劉薩訶(법명 惠達)가 阿育王의 사리를 구하자, 국가에서는 鄮山에 廣利寺를 건립하고 사리탑을 세웠는데, 梁 武帝 때에 寺名을 阿育王寺로 개명하면서 山의 이름도 함께 바뀌었다.
역주13 寶文閣 : 宋나라는 황제마다 殿閣을 세워 御制文을 보관하고 관원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는데, 寶文閣은 仁宗의 御制文을 보관하던 전각이다.
《職官分紀》에 “寶文閣은 옛 壽昌宮으로 慶曆 초기에 지금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嘉祐 8년(1063)에 조칙을 내려 仁宗皇帝의 御書를 寶文閣에 보관하게 하고, 翰林學士 王珪에게 명하여 記文을 撰하게 하고 이를 돌에 새겨 세웠다.[寶文閣舊曰壽昌 慶曆初改今名 嘉祐八年 詔以仁宗御書藏於寶文閣 命翰林學士王珪 撰記立石]”라고 보인다. 《職官分紀》는 南宋의 문신인 孫逢吉(1135~ 1199)이 宋나라 제도를 기록한 책인데, 총 50권이다.
역주14 昭陵 : 仁宗皇帝의 陵號로 옛날에는 흔히 陵號로써 제왕을 칭하였다.
역주15 漢明梁武 : 漢明은 後漢(東漢)의 제2대 황제인 明帝(28~75)로 원래의 이름은 陽인데 莊으로 개명하였는바, 光武帝 劉秀의 넷째 아들로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불교를 처음으로 숭앙하여 印度에 사신을 보내 佛經을 구해 왔으며, 중국 최초의 사원인 白馬寺를 洛陽에 건립하였다.
梁武는 南朝의 梁 武帝(464~549)로 姓名이 蕭衍인데, 齊 和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梁나라를 건국하였다. 武帝는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수많은 사찰을 짓고, 세 번에 걸쳐 스스로 同泰寺에 舍身하고 신하들로 하여금 막대한 돈을 들여 자신을 되찾아 오게 하는 등 중국 역사상 불교를 가장 열심히 신봉한 황제였다.
역주16 漢明以察爲明 : 이 내용은 范曄의 《後漢書》 〈明帝紀〉 論에 “明帝는 형벌로 다스리는 것을 잘하여 法令이 분명하고 날이 늦도록 조정에 앉아서 백성들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반드시 알아내었다. 안팎에 요행을 바라거나 부정한 일을 저지르는 사사로움이 없고, 윗자리에 있을 적에 자랑하고 큰 체하는 기색이 없어, 獄事를 결단함에 實情을 얻어서 獄訟이 前代에 비하여 10분의 2로 줄어들었다고 이름났다.
그러므로 후세에 정사를 말하는 자들이 建武 연간과 永平 연간의 정사를 먼저 말하지 않은 자가 없으나, 鍾離意와 宋均의 무리는 明帝가 항상 까다롭게 살핀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큰 사람의 도량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明帝善刑理 法令分明 日晏坐朝 幽枉必達 內外無倖曲之私 在上無矜大之色 斷獄得情 號居前代十二 故後之言事者 莫不先建武永平之政 而鍾離意宋均之徒 常以察慧爲言 夫豈弘人之度未優乎]”라고 보인다. 建武는 光武帝의 연호이고, 永平은 明帝의 연호이다.
역주17 梁武以弱爲仁 : 이 내용은 《梁書》 〈武帝紀〉에 “上이 文雅를 지극히 숭상하고 刑法을 간략히 하여, 公卿과 大臣으로부터 모두 옥사를 鞫問하여 처벌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으니, 간사한 아전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법을 농간해서 뇌물이 성행하여 억울하게 형벌을 받은 자가 많았다.
이때에 王侯의 子弟들이 교만하고 음탕하여 不法을 자행하였으나, 上이 연로하여 政務를 처리하는 것을 싫증내고, 또 오로지 불교의 계율을 專心으로 닦아서 매번 중죄를 판결하면 종일토록 기뻐하지 않았으며, 혹 반역을 도모하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어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해주었다.
이 때문에 宗親의 王과 諸侯들이 더욱 횡포를 부려 혹은 대낮에 도로에서 사람을 죽이고 혹은 밤낮없이 공공연하게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죄를 짓고 도망한 자가 王侯의 집 안에 숨으면 有司가 감히 수색하여 체포하지 못하였다. 上이 그 폐해를 깊이 알았으나, 佛敎의 慈悲에 빠져 이러한 행위를 금지시키지 못하였다.[上敦尙文雅 疎簡刑法 自公卿大臣 咸不以鞫獄爲意 奸吏招權弄法 貨賂成市 枉濫者多 時王侯子弟多驕淫不法 上年老 厭於萬幾 又專精佛戒 每斷重罪 則終日不懌 或謀反逆 事覺 亦泣而宥之 由是王侯益橫 或白晝殺人於都街 或晝夜公行剽掠 有罪亡命者 匿於主家 有司不敢搜捕 上深知其弊 而溺於慈愛 不能禁也]”라고 보인다.
역주18 仁宗皇帝 在位四十二年 : 仁宗은 1023년에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063년까지 42년간 재위하였다.
역주19 廣度僧尼 : 度는 승려로 출가함을 이르고, 僧尼는 비구와 비구니로 승려를 총칭한다. 宋나라 때에는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관청으로부터 出家許可狀인 度牒을 받아야 했다. 국가에 대하여 身役의 의무를 지고 있는 백성들이 마음대로 승려가 될 경우, 부역 인구가 크게 줄어들 우려가 있기 때문에, 승려가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소정의 금품을 받고 度牒을 발급하였다.
역주20 干戈斧鑕 未嘗有所私貸 : 干戈는 방패와 창으로 兵器를 이르고, 斧鑕은 도끼와 모루로 형벌하는 기구를 이른다. 私貸는 개인의 사사로운 용도로 씀을 이른다.
역주21 天下歸仁焉 : 仁宗의 仁德을 천하 사람들이 허여(인증)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論語》 〈顔淵〉에 “顔淵이 仁을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私慾을 이겨 禮에 돌아감이 仁을 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私慾을 이겨 禮에 돌아가면 天下 사람들이 仁을 허여한다. 仁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라고 보인다.
역주22 佛心法 : 心法은 文字 외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佛敎 最上乘의 불법이란 뜻이다. 釋迦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널리 설법을 폈는데, 하루는 靈山에서 梵王이 說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釋迦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으나, 제자 가운데 迦葉만이 참뜻을 깨닫고 微笑를 지으니, 釋迦는 말하기를 “나에게 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의 법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라고 하였다.
역주23 出世法度人 : 出世法은 佛法을 이른다. 佛敎에서는 세상을 俗世라고 여겨, 이 속세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을 出世라고 칭한다. 《南齊書》 〈顧歡傳〉에 “孔子와 老子는 治世를 근본으로 삼았고, 釋氏는 出世를 근본으로 삼았다.[孔老治世爲本 釋氏出世爲宗]”라고 보인다. 度人은 사람을 구제함을 이른다.
역주24 龍腦鉢盂(발우) : 龍腦는 龍腦樹로 인도에서 자라는 常綠 喬木의 이름이고, 鉢盂는 승려들이 가지고 있는 밥그릇 즉 바리때이다.
역주25 使者歸奏 上嘉歎久之 : 懷璉에 대한 호평은 仁宗뿐만이 아니고 大臣들 사이에서도 자자했던 것으로 보인다.
郎曄의 《經進東坡文集事略》 55권의 注에 “鄭國公 富弼이 이 말을 듣고 항상 賓客들에게 이르기를 ‘이 道人은 부처의 제자라고 이를 만하다. 혹시 朝廷에 서게 되면 반드시 절개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품이 비범하기 때문에 만나는 일마다 자신의 재능을 다한다. 그런데 지금은 懷璉과 같은 무리가 어찌 이리도 적은가?’ 하였다.[富鄭公聞此 每語客曰 此道人 可謂佛弟子也 倘使立朝 必能盡節 以其人品不凡 故隨所遇 輒盡其才 今卽璉輩何其少耶]”라고 보인다.
역주26 逍遙自在 : 일말의 구속 없이 자유자재로 노닒을 이른다.
역주27 於穆頌詩 : 於穆은 그 아름다움을 감탄하는 말이다. 《詩經》 〈周頌 淸廟〉에 “아, 아름다운 淸廟에 공경하고 和한 훌륭한 相이여.[於穆淸廟 肅雝顯相]”라고 보이는데, 毛萇의 《毛傳》에는 “於는 감탄사이고 穆은 아름다움이다.[於歎辭也 穆美也]”라고 풀이하였으며, 朱子의 《詩經集傳》에 “於는 감탄사이고 穆은 深遠함이다.”라고 注하였다. 相은 황제의 제사를 돕는 제후들이다.
역주28 山君海王 : 山君은 山神을 이르고, 海王은 海神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