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之不闕文과 與馬之不借人也 豈有損益於世者哉리오 然且識之하시니 以爲世之君子長者 日以遠矣하야 後生이 不復見其流風遺烈이라
是二者 雖不足以損益이나 而君子長者之澤이 在焉이면 則孔子識之어시든 而況其足以損益於世者乎아
昔吾先君이 適京師하야 與卿士大夫游하시고 歸以語軾曰 自今以往으로 文章其日工而道將散矣리라
士慕遠而忽近하고 貴華而賤實을 吾已見其兆矣로라하시고 以魯人鳧繹先生之詩文十餘篇으로 示軾曰 小子識之하라
先生之詩文
은 皆有爲而作
하야 精悍確苦
하야 言必中當世之過
하야 鑿鑿乎如五穀必可以療饑
하고 斷斷乎如藥石必可以伐病
하니 는 先生無一言焉
하니라
而其反復論難하고 正言不諱를 如先生之文者는 世莫之貴矣라
軾是以
로 悲於孔子之言
하고 而懷先君之遺訓
하야 益求先生之文
하야 而得之於
하고 乃錄而藏之
하노라
先生
은 諱太初
요 字醇之
요 姓顔氏
니 之四十七世孫云
이라
공公이 뜻을 두어 지은 글이 아닌데도 담박하고 호탕하면서 깊은 생각이 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오히려 사관史官이 글을 빼놓고 기록하지 않은 것과 말(마馬)을 소유한 자가 남에게 빌려주어 타게 하는 것을 미쳐 보았는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없어졌다.”라고 하셨다.
사관史官이 글을 빼놓지 않는 것과 말을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 것이 어찌 세상에 보탬이 되고 손실이 될 것이 있겠는가마는, 그런데도 공자孔子는 이것을 기록하셨으니, 이는 ‘세상의 군자君子와 장자長者가 날로 멀어져서 후생들이 다시는 그 전해 오는 풍속과 후세에 남긴 공적을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날로 지혜롭고 공교로우며 말을 잘하는 데로 달려가서 그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여기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비록 세상에 보탬이 되고 손해될 것이 없더라도 군자君子와 장자長者의 은택이 남아있으면 공자孔子께서 이것을 기록하셨는데, 하물며 충분히 세상에 보탬이 되고 손해가 될 만한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옛날 우리 선군先君(선친先親)께서 경사京師에 가시어 경卿과 사대부士大夫들과 교유하고 돌아와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으로부터 이후로는 아마도 문장이 날로 공교로워져서 도道가 장차 이산될 것이다.
선비가 멀리 있는 것만 흠모하고 가까이 있는 것은 소홀히 하며 화려한 것만 귀하게 여기고 실제를 천하게 여기는 것을 내 이미 그러한 조짐을 보았다.”라고 하시고, 노魯 땅 사람 부역선생鳧繹先生의 시문詩文 10여 편을 나에게 보여 주며 말씀하시기를 “소자小子야, 이것을 기억해두어라.
수십 년 뒤에는 천하에 다시 이러한 글을 짓는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선생先生의 시문詩文은 모두 까닭이 있어 지은 것이므로 정한精悍하고 확고해서 말씀마다 반드시 당시의 잘못에 적중하여 오곡五穀이 반드시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분명하고 약석藥石이 반드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진실하니, 근거 없는 말을 고상하게 여기며 산만하고 모호한 말로써 보기 좋게 하는 것은 선생의 문집에는 한마디 말씀도 없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선군先君은 이미 별세하셨으나 그 말씀은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세상에 문장을 짓는 자들이 모두 초연超然히 형기形器(현실세계)의 밖으로 벗어나서 은미하게 말하고 고상하게 의논하면서 이미 한漢․당唐의 문장을 비루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선생先生의 글처럼 반복하여 논란하고 바르게 말씀하여 숨기지 않는 것을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이 때문에 공자孔子의 말씀을 슬퍼하고 선군先君의 유훈遺訓을 생각하여 더욱 열심히 선생先生의 글을 찾아서 그의 아들 복復에게서 얻고는 마침내 이것을 기록하여 보관하노라.
선생先生은 휘諱가 태초太初이고 자字가 순지醇之이고 성姓이 안씨顔氏이니, 선사 연국공先師 兗國公의 47세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