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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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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부역선생시집鳧繹先生詩集》의
非公着意文이로되 却亦澹宕而有深思云이라
이 뜻을 두어 지은 글이 아닌데도 담박하고 호탕하면서 깊은 생각이 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오히려 사관史官이 글을 빼놓고 기록하지 않은 것과 말()을 소유한 자가 남에게 빌려주어 타게 하는 것을 미쳐 보았는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없어졌다.”라고 하셨다.
史之不闕文 與馬之不借人也 豈有損益於世者哉리오 然且識之하시니 以爲世之君子長者 日以遠矣하야 後生 不復見其流風遺烈이라
사관史官이 글을 빼놓지 않는 것과 말을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 것이 어찌 세상에 보탬이 되고 손실이 될 것이 있겠는가마는, 그런데도 공자孔子는 이것을 기록하셨으니, 이는 ‘세상의 군자君子장자長者가 날로 멀어져서 후생들이 다시는 그 전해 오는 풍속과 후세에 남긴 공적을 볼 수 없다.
是以 日趨於智巧便佞하야 而莫之止하니
이 때문에 날로 지혜롭고 공교로우며 말을 잘하는 데로 달려가서 그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여기신 것이다.
是二者 雖不足以損益이나 而君子長者之澤 在焉이면 則孔子識之어시든 而況其足以損益於世者乎
이 두 가지가 비록 세상에 보탬이 되고 손해될 것이 없더라도 군자君子장자長者의 은택이 남아있으면 공자孔子께서 이것을 기록하셨는데, 하물며 충분히 세상에 보탬이 되고 손해가 될 만한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昔吾先君 適京師하야 與卿士大夫游하시고 歸以語軾曰 自今以往으로 文章其日工而道將散矣리라
옛날 우리 선군先君(선친先親)께서 경사京師에 가시어 사대부士大夫들과 교유하고 돌아와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으로부터 이후로는 아마도 문장이 날로 공교로워져서 가 장차 이산될 것이다.
士慕遠而忽近하고 貴華而賤實 吾已見其兆矣로라하시고 以魯人鳧繹先生之詩文十餘篇으로 示軾曰 小子識之하라
선비가 멀리 있는 것만 흠모하고 가까이 있는 것은 소홀히 하며 화려한 것만 귀하게 여기고 실제를 천하게 여기는 것을 내 이미 그러한 조짐을 보았다.”라고 하시고, 땅 사람 부역선생鳧繹先生시문詩文 10여 편을 나에게 보여 주며 말씀하시기를 “소자小子야, 이것을 기억해두어라.
後數十年 天下無復爲斯文者也리라하시니라
수십 년 뒤에는 천하에 다시 이러한 글을 짓는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先生之詩文 皆有爲而作하야 精悍確苦하야 言必中當世之過하야 鑿鑿乎如五穀必可以療饑하고 斷斷乎如藥石必可以伐病하니 先生無一言焉하니라
선생先生시문詩文은 모두 까닭이 있어 지은 것이므로 정한精悍하고 확고해서 말씀마다 반드시 당시의 잘못에 적중하여 오곡五穀이 반드시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분명하고 약석藥石이 반드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진실하니, 근거 없는 말을 고상하게 여기며 산만하고 모호한 말로써 보기 좋게 하는 것은 선생의 문집에는 한마디 말씀도 없다.
其後二十餘年 先君旣沒이나 而其言存이라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선군先君은 이미 별세하셨으나 그 말씀은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세상에 문장을 짓는 자들이 모두 초연超然형기形器(현실세계)의 밖으로 벗어나서 은미하게 말하고 고상하게 의논하면서 이미 의 문장을 비루하게 여긴다.
而其反復論難하고 正言不諱 如先生之文者 世莫之貴矣
그리하여 선생先生의 글처럼 반복하여 논란하고 바르게 말씀하여 숨기지 않는 것을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軾是以 悲於孔子之言하고 而懷先君之遺訓하야 益求先生之文하야 而得之於하고 乃錄而藏之하노라
나는 이 때문에 공자孔子의 말씀을 슬퍼하고 선군先君유훈遺訓을 생각하여 더욱 열심히 선생先生의 글을 찾아서 그의 아들 에게서 얻고는 마침내 이것을 기록하여 보관하노라.
先生 諱太初 字醇之 姓顔氏 之四十七世孫云이라
선생先生태초太初이고 순지醇之이고 안씨顔氏이니, 선사 연국공先師 兗國公의 47세손이다.
역주
역주1 鳧繹先生詩集序 : 이 글은 熙寧 10년(1077) 6월에 쓰여졌다. 東坡가 徐州에 있을 적에 百步洪에서 아우 子由(蘇轍)와 顔復 등과 노닐었는데, 이때 顔復의 부친 顔太初의 詩集에 序文을 지었다. 顔太初는 詩人으로 字가 醇之이고 호가 鳧繹先生이다. 彭城(徐州) 사람인데 진사로 출사하여 國子監說書를 지내었다. 박학다재하고 正義로운 성품으로 과감하게 直言을 하였는데, 그의 詩는 時事를 풍자한 것이 많았다. 百步洪은 地名으로 泗水 가에 있는데, 徐州洪이라고도 한다.
역주2 孔子曰……今亡矣夫 : 이 내용은 《論語》 〈衛靈公〉에 그대로 보인다. 朱子의 《論語集註》에 “楊氏(楊時)가 말하기를 ‘史官이 글을 빼놓음과 말을 남에게 빌려주는 이 두 가지 일을 孔子께서도 오히려 미쳐 보셨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셨으니, 시대가 더욱 야박해짐을 서글퍼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건대 이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어서 하신 말씀일 것이니, 비록 하찮은 문제(연고)이나 時變의 큼을 알 수 있다.”라고 注하였다.
역주3 其游談以爲高 枝詞以爲觀美者 : 游談은 근거 없이 하는 말을 이르며, 枝詞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산만하고 모호한 말을 이르는바, 《周易》 〈繫辭傳 下〉에 “中心이 의심스러운 자는 그 말이 산만하다.[中心疑者 其辭枝]”라고 보인다.
역주4 世之爲文者 莫不超然出於形器之表 : 形器는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세계를 가리킨다. 《周易》 〈繫辭傳 上〉에 “形으로부터 그 이상을 道라 이르고 形으로부터 그 이하를 器라 이른다.[形而上者 謂之道 形而下者 謂之器]”라고 보인다. 東坡가 당시의 道學家들이 현실세계 밖으로 벗어나 구구절절이 道를 말하며 실질적이 아닌 관념적인 글을 쓰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역주5 微言高論 旣已鄙陋漢唐 : 微言高論은 당시 道學家들의 정미하고 오묘한 議論들을 이른다. 道學家들은 漢․唐 때 성행하던 訓詁學을 비루하다고 여겼으나, 東坡는 오히려 이를 옹호하고 道學家들의 학설을 空言, 大論의 비실제적인 것으로 여겼다.
역주6 其子復 : 顔復(1034~1090)은 字가 長道이다. 仁宗 嘉祐 6년(1061)에 진사로 출사하여 國子直講을 거쳐 哲宗 때에 中書舍人에 이르렀다. 詩文에 능하였고 저서에 《顔復集》 13卷이 있으며,《宋史》에 傳이 있다.
역주7 先師兗公 : 孔子의 제자 顔淵을 이른다. 顔淵(B.C. 521~B.C. 490)은 이름이 回이고 字가 子淵이며 魯나라 사람으로 德行에 뛰어났다. 安貧樂道하여 孔子께서 가장 훌륭한 제자로 꼽았으며, 후대 사람들은 ‘復聖’으로 칭하였다. 漢 高祖 때에 孔子의 사당에 배향되었고 唐 太宗 때에 先師로 높여졌으며 唐 玄宗 때에 ‘兗公’에 봉해지고 宋 眞宗 때에 ‘兗國公’으로 加封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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