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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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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채성주蔡省主에게 올려서 포흠逋欠 탕감을 논한 글
必蔡確爲省主리라
이때 필시 채확蔡確성주省主였을 것이다.
軾於門下 蹤迹絶疎 然私自揆度컨대 亦似見知於明公者니이다
저는 집사의 문하에 종적이 매우 소원하나 스스로 속으로 헤아려보건대 마치 명공明公에게 지우知遇를 받은 듯합니다.
尋常無因緣하니 固不敢造次致書어니와
평소에 인연이 없었으니 진실로 감히 급작스레 글을 올릴 수 없지만,
今旣有所欲言이어늘 而又黙黙拘於流俗人之議하야 以爲迹疎하야 不當干說이라하면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데도 또 침묵하면서 속세 사람들의 의논에 구애되어 “평소에 종적이 소원하였으니 마땅히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則是謂明公亦如凡人拘於疎密之分者 竊以爲不然이라
이것은 명공明公을 또한 보통 사람처럼 친분이 소원한가 친밀한가의 구분에 얽매이는 분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적이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輒有所言이면 不顧하오니 惟少留聽하소서
그러므로 번번이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 바라건대 조금 유념하여 들어주십시오.
軾於府中 하니 自今歲麥熟以來 日與小民으로 結爲嫌恨하야 鞭笞鏁(鎖)繫하야 與縣官으로 日得千百錢 固不敢憚也니이다
저는 봉상부鳳翔府에서 실로 포흠逋欠을 정리하는 일을 관장하는데, 금년 보리가 익은 이래로 날마다 백성들과 원한을 맺어서 백성들을 채찍질하고 볼기 치고 족쇄를 채우고 구금하여 현관縣官과 함께 하루에 천백 을 거두는 것은 진실로 감히 꺼리지 않았습니다.
彼寔侵盜欺官하야 而不以時償 雖日撻無愧 然其間 有甚足悲者
저 백성들 중에 실로 국가의 재물을 침해하고 도둑질하며 관청을 속이고 제때에 갚지 않는 자들은 비록 날마다 매질을 하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나, 그 사이에 가련하게 여길 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或管押竹木이라가 風水之所漂하고 或主持粮斛이라가 歲久之所壞하고 或布帛惡弱 估剝以爲虧官하고 紐計以爲實欠하며 責於當時主典之吏하고 或敗折之課 均於保任干繫之家하니
혹 나무와 대나무를 관리하다가 폭풍우에 떠내려가고, 혹 곡식 섬을 주관하다가 세월이 오래되어서 부패하고, 혹 질 나쁜 포백布帛을 값을 깎아 팔았다가 관청의 돈을 축냈다 하고, 혹 조재糟滓가 썩은 것까지 모두 계산하여 실제 포흠逋欠이라 하고, 혹 바치지 못한 장물(세금)을 당시 주관했던 관리에게 책임을 지우고, 혹 못 받은 포흠逋欠을 보증한 집들에게 균등히 분배하고 있습니다.
官吏上下 擧知其非辜하야 而哀其不幸이나 迫於條憲하야 勢不得釋하며
상관이나 부하들이 모두 그들의 죄가 아닌 줄을 알아서 그 불행함을 가엾이 여기나 법조문에 압박을 당하여 형편상 탕감하지 못합니다.
朝廷亦深知其無告也 是以 每赦必及焉하니이다
그리고 조정 또한 그들이 아뢸 곳이 없다는 것을 깊이 알기 때문에 매번 사면할 때마다 반드시 이들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凡今之所追呼鞭撻하야 日夜不得休息者 皆更數赦하야 遠者六七赦矣
오늘날 포흠逋欠을 받으려고 쫓아와 소리치고 채찍질하고 종아리를 쳐서 밤낮으로 쉬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여러 번의 사면을 거쳐서 심한 경우에는 예닐곱 번 사면을 거친 자들도 있습니다.
問其所以不得釋之狀하면 則皆曰 吾無錢以與之曹吏라하니이다
포흠逋欠을 탕감받지 못한 실상을 물어보면 모두 말하기를 “나는 삼사사三司使의 관리에게 줄 돈이 없어서 그렇다.”라고 하였습니다.
以爲不信하야 而考諸舊籍하면 則有事同而先釋者矣하니 曰此有錢者也라하니이다
제가 그 말을 거짓이라 여겨서 옛 장부를 조사해보니, 저들과 똑같은 경우인데도 먼저 탕감된 자가 있어 물어보니, 이들은 돈이 있는 자들이라고들 말합니다.
嗟夫
아!
天下之人 以爲言出而莫敢逆者 莫若天子之詔書也라하나니
천하의 사람들은 “말이 나오면 감히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 천자의 조서詔書만 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今詔書且已許之로되 而三司之曹吏 獨不許하니 是猶可忍邪잇가
그런데 지금 조서로 이미 탕감할 것을 허락했는데 삼사사三司使의 관리들이 홀로 허락하지 않으니, 이것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伏惟 明公在上하야 必不容此輩
엎드려 생각하건대 명공明公께서 높은 지위에 계시면서 반드시 이런 무리들을 용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敢以告하오니 凡四十六條 二百二十五人 錢七萬四百五十九千이요 粟米三千八百三十斛이며 其餘炭鐵器用材木冗雜之物 甚衆하니 皆經監司選吏詳定하야 灼然可放者니이다
그러므로 감히 아뢰는 것이오니, 모두 46조항 2백 25명에 돈이 7만 4백 59()이요 곡식과 쌀이 3천 8백 30이며 기타 목탄과 쇠, 기물, 재목 등 잡다한 물건들이 매우 많으니, 이것은 모두 감사監司와 선발된 관리들의 상정詳定을 거쳐서 분명히 탕감할 만한 것들입니다.
軾已具列하야 聞於本府하니 府當以奏 奏且下三司하리이다
제가 이미 이것을 자세히 나열하여 본부에 올렸으니, 본부에서는 마땅히 폐하께 아뢸 것이요, 아뢰면 장차 삼사三司에 내릴 것입니다.
議者皆曰 必不報 雖報라도 必無決然了絶之命이라하나 軾以爲不然이라하노이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폐하께 보고하지 않을 것이요, 비록 보고하더라도 분명하게 맺고 끊는 명령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往年 詳定放欠할새
지난해 한중승韓中丞이 탕감할 포흠逋欠상정詳定할 적에
以爲赦書所放 必待其家業蕩盡하야 以至於干繫保人亦無孑遺可償者하고 又當計赦後月日하야 以爲放數인댄
말씀하기를 “사면하는 글에 탕감하는 대상을 반드시 본인의 가세가 다 탕진되고 연계된 보증인 또한 보상할 만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경우로 제한하고, 또 마땅히 사면한 뒤의 연월年月을 계산해서 탕감하는 숫자로 삼을 경우,
如此 則所及甚少하야 不稱天子一切寬貸之意
사면이 미치는 바가 매우 적어서 천자께서 일체 너그러이 사면하라는 뜻에 걸맞지 않으니,
自今으로 苟無所隱欺者 一切除免하야 不問其他라하니이다
지금부터 만일 숨기거나 속인 것이 없는 자는 일체 면제하고 그 나머지는 불문에 붙여라.”라고 하였습니다.
以此 知今之所奏者 皆可放 無疑也니이다
이로써 지금 제가 아뢰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두 탕감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伏惟 明公 獨斷而力行之하야 使此二百二十五家 皆得歸安其藜糗하야 養其老幼하고 日晏而起하고 吏不至門하야 以歌詠明公之德하며 亦使赦書 不爲空言而無信者하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명공明公께서 홀로 결단하고 강력히 시행하셔서 이 2백 25명의 집안으로 하여금 모두 돌아가서 명아주국과 미숫가루를 편안히 먹으면서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잘 기르고, 날마다 느지막이 일어나고 관리들이 문에 이르지 않아서 명공明公의 덕을 노래하여 읊게 하며, 또한 황제의 사면한 글이 빈말이 되어 신용이 없어지게 하지 마소서.
干冒威重하오니 退增恐悚이로소이다
무거운 위엄을 범하오니, 물러남에 송구한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역주
역주1 上蔡省主論放欠書 : 이 글이 쓰인 시기는 상고할 수 없으나 글 가운데에 “저는 鳳翔府에서 실로 逋欠을 정리하는 일을 관장하는데 금년 보리가 익은 이래로[軾於府中 實掌理欠 自今歲麥熟以來]”라는 구절로 보아, 蘇軾이 鳳翔府簽判으로 있던 嘉祐 6년(1061) 11월부터 治平 원년(1064)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省主는 三司使를 말하는데 宋나라 때에 三司를 計省이라 하였으므로 三司使를 省主라 칭한 것이다. 蔡省主에 대해 茅坤의 評에는 ‘반드시 蔡確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蔡襄으로 보았다. 蔡襄은 字가 君謨이며 興化 仙游(現 福建省 仙游縣) 사람으로 書藝와 茶에 능통하였다. 天聖 8년(1030)에 진사로 출사하여 嘉祐 연간에 翰林學士와 三司使를 역임하였다.
역주2 實掌理欠 : 理欠은 포흠된 세금을 관리하는 것으로, 蘇軾이 실제로 밀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맡았음을 이른다.
역주3 糟滓潰爛 : 糟滓는 술지게미와 찌꺼기이며, 潰爛은 썩어 문드러진 것을 이른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糟’가 ‘漕’로 되어 있어 ‘漕運 중에 배에 물이 새서 생긴 손실’로 보았으나, 本集에는 ‘糟’로 되어 있으므로 本集을 따라 해석하였다.
역주4 未輸之贓 : ‘아직 바치지 않은 贓’이란 뜻으로, 贓은 본래 뇌물이나 부정한 재물을 이르나 여기서는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물건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5 三司 : 나라의 財政을 맡은 鹽鐵司, 度支司, 戶部司를 이르는데, 뒤에는 三司條例司로 통합되었다.
역주6 韓中丞 : 韓絳으로 仁宗 慶曆 2년(1042)에 進士로 출사하여 太子中允과 陳州通判 知制誥 등을 역임하였으며, 嘉祐 연간에 御史中丞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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