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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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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甚嫋娜 而見似未透하니라
事有以拂乎吾心이면 則吾言 忿然而不平하고 有以順適乎吾意 則吾言 優柔而不怒하나니 天下之人 其喜怒哀樂之情 可以一言而知也
喜之言 豈可以爲怒之言耶리오
此天下之人 皆能辨之 而至於聖人하야는 其言 丁寧反覆하야 布於方冊者甚多하고 而其喜怒好惡之所在者 又甚明而易知也니라
이나 天下之人 常患求而莫得其意之所主하니 其故何也
天下之人 以爲聖人之文章 非復天下之言也라하야 而求之太過
是以 聖人之言 更爲深遠而不可曉니라
且天下何不以己推之也
將以喜夫其人이로되 而加之以怒之之言이면 則天下且以爲病狂하리니 而聖人 豈有以異乎人哉시리오
不知其好惡之情하고 而不求其言之喜怒 是所謂大惑也니라
昔者 하사 上自商, 周之으로 至於失道之際하고하시니 自詩人以來 至於仲尼之世 蓋已數百餘年矣
愚嘗怪
大雅, 小雅之詩 當幽, 厲之時어늘 而稱道文, 武, 成, 康之盛德하고
及其終篇하야도 又不見幽, 厲之暴虐하니
此誰知其爲幽, 厲之詩而非文, 武, 成, 康之詩者리오
蓋察其辭氣하면 有幽憂不樂之意
是以 系之幽, 厲而無疑也하니라
若夫 天下之是非 雜然而觸乎其心이라
見惡而怒하고 見善而喜하니 則求其是非之際 又可以求諸其言之喜怒之間矣
今夫人之於事 有喜而言之者하고 有怒而言之者하고 有怨而言之者하니 喜而言之 則其言 和而無傷하고 怒而言之 則其言 厲而不溫하고 怨而言之 則其言 深而不洩하니 此其大凡也
이라하고이라하니 此所謂怒之之言也
이라하고라하니 此所謂怨之之言也
夫喜之而和하고 怒之而厲하고 怨之而深 此三者 無以加矣니라
至於하야는 則不然하야
夫日月之不知 土地之不詳 何足以爲喜 而何足以爲怒리오
喜怒之所不在也니라
이라하야 (怒)[甚]而至於變人之國하니
又喜怒之所不及也
愚故曰 春秋者 亦人之言而已 而人之言 亦觀其辭氣之所嚮而已矣라하노라


03. 《춘추春秋》에 대한
문장은 아주 아름다우나 식견은 통투하지 못한 듯하다.
일이 내 마음에 거슬리면 내 말이 노여워져서 불평해하는 기색이 드러나고, 일이 내 마음에 순하고 맞으면 내 말이 부드럽고 조용하여 노기를 띠지 않으니, 천하 사람들의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을 한마디 말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뻐하는 말이 어찌 노여워하는 말이 될 수 있겠는가?
이는 천하天下 사람들이 모두 분간할 수 있으며, 성인聖人에 이르러서는 말씀이 정녕丁寧(간절)하고 반복反覆해서 서책書冊에 나열되어 있는 것이 매우 많으며,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들어 있는 부분은 또 매우 분명해서 알기가 쉽다.
그러나 천하 사람들이 성인聖人의 주장하신 뜻을 찾아도 이를 얻지 못함을 항상 염려하니, 이는 그 이유가 어째서인가?
천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성인聖人의 문장은 다시는 천하天下 사람들의 말이 아니다.’라고 여겨서 추구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한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의 말씀이 다시 심원해져서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천하天下 사람들은 어찌하여 자기 마음을 가지고 미루어보지 않는가?
장차 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면서 그 사람이 노여워할 말을 가한다면, 천하天下 사람들은 장차 그 사람을 미친병을 앓는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니, 성인聖人이 어찌 일반인과 다름이 있겠는가?
성인聖人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의 기뻐함과 노여워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이른바 큰 의혹이라는 것이다.
옛날 중니仲尼께서 쇠퇴한 나라의 말기에 산삭刪削하시어 위로는 나라와 나라의 성왕盛王으로부터 를 잃은 군주인 유왕幽王여왕厲王의 즈음에까지 이르렀고 아래로는 진 영공陳 靈公에까지 미치셨으니, 시인詩人이 나온 이래로 중니仲尼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났다.
내가 일찍이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대아大雅〉와 〈소아小雅〉의 유왕幽王여왕厲王의 때를 당하였는데도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거룩한 덕을 칭송하였고,
그 끝 편에 이르러서도 또 유왕幽王여왕厲王포학暴虐함을 비판한 것을 볼 수 없으니,
그 누가 이것이 유왕幽王여왕厲王이고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가 아닌 줄을 알겠는가?
그러나 말씀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는 깊이 근심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뜻이 있다.
이 때문에 이것을 유왕幽王여왕厲王에 붙이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춘추시대 242년 동안을 말하면 천하天下의 옳고 그름이 뒤섞여 있어 내 마음에 저촉된다.
악한 것을 보면 노여워하고 선한 것을 보면 기뻐하니, 옳고 그름을 추구하는 즈음에 또 그 말의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사이에서 천하의 옳고 그름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일에 있어서 기뻐하여 말하는 경우가 있고 노여워하여 말하는 경우가 있고 원망하여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 기뻐하여 말하면 그 말이 화평하여 서글퍼함이 없고, 노여워하여 말하면 그 말이 거칠어서 온화하지 못하고, 원망하여 말하면 그 말에 원망이 깊어서 드러나지 않으니, 이것이 그 대체적인 것이다.
춘추春秋》에 중손추仲孫湫가 왔을 적에 기록하기를 “나라 중손仲孫이 왔다.”라고 하였고, 계우季友가 돌아왔을 적에 “계자季子내귀來歸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기뻐하는 말이란 것이요,
나라와 나라가 밭을 교환할 적에 “정백鄭伯벽옥璧玉을 가지고 허전許田을 빌렸다.”라고 하였고, 진 문공晉 文公천왕天王을 부름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천왕天王하양河陽에서 사냥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노여워하는 말이란 것이요,
숙아叔牙가 독살되었을 적에 “공자 아公子 牙(죽음)하였다.”라고 하였고, 경보慶父가 도망갔을 적에 “공자 경보公子 慶父나라에 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원망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기뻐하면 온화하고 노여워하면 거칠고 원망하면 깊어짐은 이 세 가지보다 더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아니하여 날짜와 토지土地를 모두 (해석)하였다.
일월日月을 알지 못하는 것과 토지土地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기뻐할 만한 것이 되며, 어찌 노여워할 만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기辭氣(문장)에 기뻐할 것도 없고 노여워할 것도 없는 것이다.
춘추春秋》에 “초구楚丘에서 범백凡伯을 정벌했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는 “나라가 범백凡伯을 정벌했다.”라고 기록하였고,
춘추春秋》에 “나라 중손仲孫이 왔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는 “나라 중손仲孫이다.”라고 기록하여, 심지어는 남의 나라를 뒤바꿔놓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또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미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춘추春秋》라는 것도 사람의 말일 뿐이니, 사람의 말은 그 사기辭氣가 향하는 바를 살펴볼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春秋論 : 이 글 역시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작품이다.
역주2 仲尼刪詩於衰周之末 : 仲尼는 孔子의 字이다. 孔子께서 詩를 刪削한 사실은 《史記》 〈孔子世家〉에 “옛날에 詩가 3천여 편이 있었으나 孔子 때에 이르러 그 중복된 것을 제외하고 禮義에 베풀 수 있는 것만 취하였다.……
《詩經》의 305편을 孔子께서 모두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하여 韶․武․雅․頌의 음악에 맞추고자 하였다. 禮樂이 이로부터 말할 수 있게 되었고, 王道가 갖추어지고 六藝가 완성되었다.[古者詩三千餘篇 及至孔子 去其重 取可施於禮義……三百五篇 孔子皆弦歌之 以求合韶武雅頌之音 禮樂自此可得而述 以備王道 成六藝]”라고 보인다.
韶는 舜임금의 음악이고, 武는 武王의 음악이며, 雅는 《詩經》의 〈大雅〉와 〈小雅〉이고, 頌은 《詩經》의 〈周頌〉, 〈商頌〉, 〈魯頌〉을 이른다.
역주3 盛王 : 王朝 전성기의 유덕한 군주를 이른다.
역주4 幽厲 : 幽는 昏愚하다는 뜻으로 周나라의 幽王을 가리키고, 厲는 포악하다는 뜻으로 周나라의 厲王을 가리킨다.
厲王(?~B.C. 828)은 이름이 胡로 제10대 왕인데, 포학하고 재물을 좋아하여 백성을 괴롭혔으며,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멀리하였다. 이에 참다못한 제후들과 백성들이 봉기하자, 彘 땅으로 도망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B.C. 828년에 망명지에서 죽었다.
幽王(B.C. 795~B.C. 771)은 이름이 宮涅로 厲王의 손자이다. 褒姒를 총애하여 왕후인 申后를 축출하고 申后의 소생인 태자 宜臼를 폐위한 다음 褒姒의 아들 伯服을 후사로 세우자, 國舅인 申侯가 犬戎을 불러들여 周나라를 공격하고 幽王을 驪山 아래에서 시해하였다. 宜臼가 제후들에 의지하여 王으로 추대되고 洛邑으로 천도하니, 이가 곧 平王이다. 그러나 周나라는 이후로 유명무실한 왕실이 되었다.
역주5 下訖於陳靈 : 陳靈은 춘추시대 陳 靈公(B.C. 613~B.C. 599)을 이른다. 《史記》 〈陳杞世家〉에 靈公의 행적이 자세히 보이는데, 大夫인 孔寗과 儀行父와 함께 夏姬와 사통하고, 夏姬의 속곳을 朝堂에 가지고 와서 희롱할 정도로 荒淫無道하였다. 靈公 15년(B.C. 599)에 孔寗․儀行父와 함께 夏姬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 夏姬의 아들인 夏徵舒에게 시해되었으며, 夏徵舒는 楚 莊王에게 토벌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詩經》 〈陳風〉에 靈公의 이러한 음행을 풍자한 〈株林〉이란 詩가 있으므로 “아래로 여기에 미쳤다.”고 이른 것이다.
역주6 春秋二百四十二年之間 : 孔子는 魯 隱公 원년(B.C. 722)에서 哀公 14년(B.C. 481)까지 242년 동안, 모두 12명의 군주가 다스렸던 시기에 周나라 전체의 주요사건들을 기록하고 《春秋》라고 이름하였는데, 후세의 사가들이 책 이름을 빌어 이 시기를 춘추시대라고 칭하였다. 隱公 원년은 周 平王 49년이며, 魯나라의 12명의 군주는 隱公을 위시하여 桓公․莊公․閔公․僖公․文公․宣公․成公․襄公․昭公․定公․哀公이다.
역주7 春秋之於仲孫湫之來……此所謂喜之之言也 : 仲孫湫는 齊나라 대부로, 仲孫은 字이고 湫는 이름이다. 季友는 魯 桓公의 아들이고 莊公의 동복아우로 季孫氏의 시조인데, 季子는 그의 字이다. 그는 慶父의 난으로 빚어진 혼란을 극복하고 僖公을 세워 魯나라를 안정시켰다. 《春秋》에 이름 대신 字를 기록하는 것은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魯 閔公 원년에 慶父의 환란이 있었는데, 齊나라 仲孫湫가 齊 桓公의 명을 받아 이를 살피고 돌아가 齊 桓公에게 魯나라를 도와 환란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齊仲孫來’라고 字를 기록하였으며, 또 季子는 나라에 충성하여 國人들이 사모하였기 때문에 그를 어질게 여겨 《春秋》에 ‘季子來歸’라고 字를 기록한 것인데, 이를 蘇軾이 기뻐하는 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閔公 원년》
역주8 魯鄭之易田曰 鄭伯以璧假許田 : 鄭伯은 鄭 莊公을 이른다. 魯 桓公 원년에 桓公이 莊公과 垂 땅에서 회합하고 鄭나라의 祊田과 魯나라의 許田을 교환하면서 璧玉을 더 얹어주었는데, 이는 隱公 8년(B.C. 715)에 鄭나라가 魯나라의 始祖인 周公을 제사 지낸다는 명분으로 이미 약속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春秋》에 ‘鄭伯以璧假許田’이라고 기록하여 許田을 祊田과 바꾼 것이 아니고 璧玉을 주고 鄭나라에게 許田을 임차한 것처럼 말하였는데, 이는 許田이 祊田보다 커서 魯나라가 손해를 보는 부당함과 魯나라가 鄭나라로 하여금 周公을 제사 지내도록 허락한 부당함을 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蘇軾은 노여워하는 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桓公 원년》
역주9 晉文之召王曰 天王狩于河陽 : 晉文은 晉 文公으로 이름은 重耳이며, 天王은 당시의 周 襄王이고, 河陽은 溫邑으로 晉나라 땅이다. 魯 僖公 28년에 晉 文公이 여러 제후들과 溫邑에서 會盟하면서 먼저 天王을 불러 함께 사냥을 하고 이어 會盟에서 여러 제후들을 朝見하게 하였다.
그러나 《春秋》에는 會盟을 먼저 쓰고, 다시 ‘天王狩于河陽’이라고 써서 會盟과 상관없이 天王이 스스로 사냥한 것처럼 기록하였는데, 蘇軾이 이를 노여워하는 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春秋左氏傳》에는 “이번 會盟에 晉侯가 王을 불러 제후를 거느리고 朝見하게 하고 또 王에게 사냥하게 하였는데, 이에 대해 仲尼께서는 ‘신하로서 임금을 부른 것은 교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經에 ‘天王이 河陽에서 사냥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王이 사냥할 땅이 아님을 말한 것이고, 또 晉 文公의 德을 밝힌 것이다.[是會也 晉侯召王 以諸侯見 且使王狩 仲尼曰 以臣召君 不可以訓 故書曰 天王狩于河陽 言非其地也 且明德也]”라고 하였다.
역주10 叔牙之殺曰 公子牙卒 : 叔牙는 魯나라 대부인 僖叔으로 字가 牙이다. 桓公은 夫人이 낳은 네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莊公이며, 다음은 慶父로 孟孫氏(仲孫氏)의 시조이고, 다음은 叔牙(僖叔)로 叔孫氏의 시조이고, 막내는 季友로 季孫氏의 시조이다.
魯 莊公 32년에 莊公이 병이 들자, 아우 僖叔을 불러 후사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본래 莊公은 자신의 아들 子般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僖叔은 동복형인 慶父를 천거하였다. 이에 莊公의 뜻을 잘 알고 있던 季友가 僖叔을 독살하였는데, 《春秋》에는 ‘公子牙卒’이라고만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蘇軾이 원망하는 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역주11 慶父之奔曰 公子慶父如齊 : 慶父는 莊公의 부인인 哀姜과 사통하고 哀姜의 동생인 叔姜의 소생 開를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莊公이 죽자, 季友가 莊公의 뜻을 받들어 孟任의 소생인 子般을 세웠다. 이에 慶父가 莊公 32년 10월 己未日에 圉人인 犖을 시켜 黨氏의 집에 있던 子般을 죽이고 공자 開를 임금의 자리에 앉히니, 이가 바로 閔公이다. 이때 季友는 亂을 피하여 陳나라로 도망하였다.
이 사실을 《春秋》에는 ‘冬十月己未子般卒’이라고만 기록하여 弑害된 것을 숨겼고, 또 ‘公子慶父如齊’라고 기록하였는바, 이를 蘇軾이 원망하는 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慶父가 齊나라에 간 것은 赴告의 禮를 가탁하여 齊나라의 후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慶父는 哀姜과의 통정이 깊어지자, 閔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魯나라 임금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閔公 2년에 대부 卜齮를 시켜 武闈에서 閔公을 시해하였는데, 이때 陳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季友가 이를 알고 閔公의 동생 公子申과 함께 邾나라로 가서 魯나라의 國人들과 연락하여 公子申을 세우려고 하였다. 季友의 통고를 받은 國人들이 들고 일어나 慶父를 죽이려고 하자, 慶父가 두려워하여 莒나라로 도망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32년․閔公 2년》, 《史記 魯世家》
역주12 公羊穀梁之傳 : 公羊은 《春秋》의 해설서인 《春秋公羊傳》을 이르는데, 《春秋公羊傳》이라고도 한다. 저자는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인 公羊高로 子夏의 제자라 하는데 확실한 고증은 있지 않다.
穀梁은 《春秋穀梁傳》으로 또한 《春秋》의 해설서인데, 《春秋穀梁傳》이라고도 하는바 역시 子夏의 제자인 穀梁赤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책에 《春秋左氏傳》을 더하여 ‘春秋三傳’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春秋左氏傳》은 사실관계에 치중하였고, 《春秋公羊傳》과 《春秋穀梁傳》은 《春秋》의 義理的 측면을 중시하여 微言大義를 해석하는 데 힘썼다고 평가된다.
역주13 日月土地 皆所以爲訓也 : 日月은 연월일을 가리키고 土地는 지방을 가리키는 데, 訓을 하였다는 것은 모두 해설을 붙였음을 뜻한다.
역주14 春秋書曰……而以爲衛伐凡伯 : 戎은 북방의 戎狄을 이른다. 凡伯은 凡은 국명이고 伯은 爵名으로 곧 凡나라의 군주이며, 楚丘는 지금 山東省 成武縣 동남쪽에 있던 地名이다.
《春秋》 隱公 7년에 ‘戎伐凡伯于楚丘以歸’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春秋左氏傳》에는 “당초에 戎이 周나라에 朝見하러 가서 公卿들에게 폐백을 보냈으나, 凡伯이 戎을 귀빈의 禮로 대우하지 않았다. 겨울에 周王이 凡伯을 魯나라에 보내어 빙문하였는데, 凡伯이 빙문을 마치고 돌아갈 적에 戎이 楚丘에서 凡伯을 공격하여 사로잡아 데리고 갔다.[初戎朝于周 發幣于公卿 凡伯弗賓 冬王使凡伯來聘 還 戎伐凡伯于楚丘以歸]”라고 해설하였다.
그러나 《春秋穀梁傳》 隱公 4年에서 11年에는 “戎은 衛나라이다. 衛나라를 戎이라고 한 것은 天子의 사자를 정벌하였기 때문에 폄하하여 말한 것이다. 楚丘는 衛나라의 읍이다.[戎者衛也 戎衛者 爲其伐天子之使 貶而戎之也 楚丘衛之邑也]”라고 해설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5 春秋書曰……而以爲吳仲孫 : 蘇軾의 이 말은 魯 閔公 원년에 齊나라 대부인 仲孫湫가 齊 桓公의 명을 받고 慶父의 환란을 살피기 위해 魯나라를 방문하자, 《春秋》에 이를 ‘齊仲孫來’라고 기록하였는데, 《春秋公羊傳》의 해설에는 仲孫湫를 ‘吳仲孫’이라 하여 국적을 뒤바꿔 해설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春秋公羊傳》에는 ‘吳仲孫’이란 표현이 없고 《春秋》 경문을 해석하면서 “齊仲孫이란 자는 누구인가? 공자 慶父이다. 공자 慶父인데 어찌하여 齊仲孫이라고 하였는가? 齊나라에 달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齊나라에 달았는가? 外人으로 여긴 것이다.[齊仲孫者何 公子慶父也 公子慶父則曷爲謂之齊仲孫 繫之齊也 曷爲繫之齊 外之也]”라고 해설하여 仲孫을 慶父로 본 것인데, 東坡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齊나라에 달았다는 것은, 慶父는 魯나라 大夫인데 ‘魯仲孫’이라 쓰지 않고, 齊仲孫이라 하여 齊나라 밑에 그의 이름을 注記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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