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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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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公晩年 歷世故多 爲言如此하니라
所好夫剛者 非好其剛也 好其仁也
吾平生多難하야 常以身試之호니 凡免我於厄者 皆平日可畏人也 擠我於嶮(險)者 皆異時可喜人也
吾是以 知剛者之必仁하고 佞者之必不仁也하노라
之初 하야 하고 追論平生所見剛者하니 或不幸死矣
若孫君介夫諱立節者 眞可謂剛者也
始吾弟자유子由 爲條例司屬官이러니 以議不合引去
謂君曰 吾條例司 當得開敏如子者니라 君笑曰 公過矣
當求勝我者 若我輩人 則亦不肯爲條例司矣라한대
公不答하고 徑起入戶하니 君亦趨出하니라
君爲진강군서기書記할새 이라가 見君京口하니
方新法之初하야 감사監司皆新進少年이라 馭吏如束濕하야 不復以禮遇士大夫로되 而獨敬憚君하야 曰 是 라하니라
할새 계주절도사태수왕기王奇 與蠻戰死하니 君爲하야 被旨鞠吏士[之]有罪者
사린 因收大小使臣十二人하야 付君幷按하고 且盡斬之한대 君持不可
사린以語侵君한대 君曰 獄當論情이요 吏當守法이라
逗撓不進 諸將罪也어늘 旣伏其辜矣 餘人 可盡戮乎
若必欲以非法斬人이면경제사經制司自爲之하라
我何與焉이리오하다
사린 奏君抗拒한대 君亦奏사린侵獄事
刑部定如君言하야 十二人 皆不死하고 或以遷官하니 吾以是 益知剛者之必仁也로라
不仁而能以一言活十二人於必死乎
공자孔子하야 可謂多君공자로되 而曰 라하사 以明其難得如此어시늘
而世乃曰 太剛則折이라하니
士患不剛耳 長養成就라도 猶恐不足이어늘 當憂其太剛하야 而懼之以折耶
折不折 天也 非剛之罪 爲此論者
君平生可紀者甚多로되 獨書此二事하야 遺其공자하야 明剛者之必仁하야 以信공자孔子之說하노라


02. 강함에 대한
만년晩年에 세상의 변고를 많이 겪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한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한 자가 에 가깝다.”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는 자는 한 이가 적다.”라고 하셨다.
한 자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의 함을 좋아해서가 아니요 그의 을 좋아해서이며, 말 잘하는 자를 미워하는 까닭은 그의 말 잘하는 것을 미워해서가 아니요 그의 불인不仁함을 미워해서이다.
내 평소 환난을 많이 겪어서 항상 내 몸을 가지고 시험해보니, 무릇 나를 곤액困厄에서 면하게 한 자들은 다 평소에 두려워할 만한 사람들이었고, 나를 험한 길로 떠민 자들은 모두 예전에 좋아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때문에 한 자가 반드시 하고 말 잘하는 자가 반드시 불인不仁함을 알게 되었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초년에 내가 해남도海南島로부터 돌아와서 옛 친구들을 만나 생존 여부를 묻고 평소 내가 보았던 한 자를 추론追論해보니, 혹은 불행히 죽은 자가 있었다.
그중에 손군 개부孫君 介夫 휘 입절諱 立節로 말하면 참으로 한 자라고 이를 만하였다.
처음 내 아우 자유子由(소철蘇轍)가 삼사조례사三司條例司에 소속된 관리가 되었는데, 〈왕안석王安石과〉 의논이 부합하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었다.
왕형공王荊公(왕안석王安石)이 에게 이르기를 “우리 조례사條例司는 마땅히 그대와 같이 개명하고 민첩한 자를 얻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웃으며 말하기를 “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마땅히 저보다 나은 자를 구해야 하니, 저와 같은 사람들은 조례사條例司의 벼슬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형공王荊公이 〈노하여〉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문으로 들어가니, 도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진강군서기鎭江軍書記가 되었을 적에 나는 마침 전당錢塘통판通判이 되어서 상주常州윤주潤州 사이를 왕래하다가 경구京口에서 을 만났다.
이때 막 신법新法을 시행하는 초기여서, 감사監司들이 모두 신진의 연소年少한 자들이었으므로 부하 관리를 다스리기를 젖은 물건을 쥐어짜듯이 하여 다시는 사대부士大夫들을 예우하지 않았으나, 유독 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분은 승상丞相에게 항거하여 조례사條例司 벼슬을 하려 하지 않은 자이다.”라고 하였다.
사린謝麟계동溪洞사의事宜를 다스릴 적에 태수太守왕기王奇가 오랑캐와 싸우다가 죽었는데, 이때 계주절도사桂州節度使판관判官이 되어서 성지聖旨를 받고 죄가 있는 관리와 군사들을 심문하게 되었다.
사린謝麟하여 크고 작은 사신使臣 열두 사람을 체포하여 에게 맡겨 함께 조사하고 또 모두 참수하게 하자, 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사린謝麟이 말로 을 침해하자, 은 말하기를 “옥사獄事는 마땅히 실정을 논해야 하고, 옥리獄吏는 마땅히 법을 지켜야 합니다.
군사들이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은 것은 제장諸將들의 죄인데, 이미 제장諸將들이 그 를 받았으니, 나머지 사람을 다 죽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반드시 불법으로 사람을 참수하고자 한다면 경제사經制司 당신이 직접 하시오.
내 어찌 관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사린謝麟이 상관에게 항거한다고 아뢰자, 또한 사린謝麟옥사獄事를 침탈한다고 아뢰었다.
형부刑部에서 판정하기를 의 말과 같이 하여 열두 사람이 모두 죽지 않았고 혹은 벼슬이 승진하였으니, 나는 이로써 한 자가 반드시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 않고서 한마디 말로 열두 사람을 반드시 죽을 자리에서 살릴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 당시에는 〈문하門下에〉 군자君子가 많다고 이를 만하였으나,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시어 한 자를 얻기 어려움이 이와 같음을 밝히셨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말하기를 “너무 하면 부러진다.”라고 한다.
선비는 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니, 함을 길러 성취시키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운데, 더구나 너무 할까 근심하여 꺾인다는 것으로 두렵게 한단 말인가?
꺾이고 꺾이지 않는 것은 천운天運이요 함의 가 아니니, 이 의논을 하는 자는 벼슬자리를 잃을까 염려하는 비부鄙夫이다.
은 평소에 기록할 만한 훌륭한 행실이 매우 많으나, 나는 유독 이 두 가지 일을 써서 그의 아들 에게 주어 한 자가 반드시 하다는 것을 밝혀서, 공자孔子의 말씀이 사실임을 입증하노라.


역주
역주1 剛說 : 東坡는 元符 3년(1100)에 사면되어 海南島를 떠나 建中靖國 원년(1101) 2월에 虔州에 이르렀는데, 이때 孫立節의 아들 孫勴가 찾아와 문안하였다. 孫立節은 이미 몇 해 전에 별세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東坡는 매우 가슴 아파하며 孫立節을 위하여 이 글을 지었다.
孫立節은 字가 介夫이고 寧都 사람이다. 李覯에게 수학하였으며 曾鞏과 交友하였다. 學問을 깊이 닦아 일찍이 孫復이 그를 보고 감탄하기를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介夫는 모두 발명한다.”라고 하였다. 皇祐 5년(1053)에 進士로 출사하였는데, 王安石이 新法을 시행하면서 그를 발탁하려 하였으나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뒤에 鎭江軍書記가 되었다.
역주2 孔子曰 剛毅木訥近仁 : 이 말은 《論語》 〈子路〉에 그대로 보이는데, 何晏은 《論語集解》에서 “剛은 욕심이 없는 것이고, 毅은 과감함이고, 木은 질박함이며, 訥은 遲鈍함이다. 이 네 가지는 仁에 가깝다.”라고 注하였다.
역주3 巧言令色 鮮矣仁 : 이 말은 《論語》 〈學而〉에 그대로 보이는데, 朱子의 《論語集註》에 “巧는 아름다움이요, 令은 잘함(좋게 함)이다. 그 말을 듣기 좋게 하고 그 얼굴빛을 좋게 하여 외면에 꾸미기를 지극히 해서 남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면 人欲이 함부로 부려져서 本心의 德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4 所惡夫佞者……惡其不仁也 : 佞은 말재주가 뛰어나 남에게 아첨하고 남을 중상모략함을 이른다. 이는 곧 말재주가 뛰어나 말 잘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의 말재주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말재주를 부려 不仁을 행함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論語》 〈公冶長〉에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구변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다.[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역주5 建中靖國 : 徽宗의 연호로 그 기간은 1101년 한 해이다.
역주6 吾歸自海南 : 東坡는 哲宗 紹聖 4년(1097)에 海南島에 유배되었다가, 元符 3년(1100)에 사면을 받고 유배가 풀려 북쪽으로 돌아왔다.
역주7 見故人 問存沒 : 東坡는 元符 3년(1100) 海南島의 유배에서 풀려나 廉州로 옮겨 안치되었고, 8월에 舒州團練副使에 제수되고 永州에 거주하라는 조칙이 내려졌으며, 11월에 英州에 이르자 朝奉郞 提擧成都玉局觀에 임명되고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廣州를 경유하여 常州로 갔는데, 이곳에서 다음 해 6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東坡는 이 2년 동안 여러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거나 서로 방문하여 이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본 글과 〈答謝擧廉書〉 등 몇 편의 글을 지었다.
역주8 王荊公 : 王安石(1021~1086)으로 字는 介甫이고 號는 半山이며 만년에 荊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荊公이라고 칭한다. 神宗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부국강병을 위해 新法을 시행하였으나 많은 폐해를 남겼다.
역주9 鎭江軍 : 지금의 江蘇省 남부에 있던 군사 행정 구역인 軍으로, 본래 潤州였는데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軍으로 바뀌었다. 治所는 丹徒縣에 있었다.
역주10 吾時通守錢塘 往來常潤間 : 東坡는 熙寧 4년(1071)에 杭州通判으로 제수되었는데, 錢塘은 杭州의 별칭이다. 常은 常州를 이르고, 潤은 潤州(鎭江軍)를 이른다.
역주11 抗丞相 不肯爲條例司者 : 丞相은 고대의 정승으로 여기서는 王安石을 지칭한 것이다. 이는 앞의 王安石이 新法을 시행하면서 그를 발탁하려고 하자, 한마디로 거절하였던 일을 이른다.
역주12 謝麟 經制溪洞事宜 : 謝麟은 字가 應之로 建州 甌寧 사람이다. 진사로 출사하여 辰州通判을 거쳐 元祐 연간에 潭州․江寧․鳳翔府의 知事가 되었으며, 知桂州事로 있으면서 서남쪽에 있는 여러 오랑캐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溪洞은 서남 지방 오랑캐들의 거주지가 대부분 계곡과 골짜기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거주지를 범연히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역주13 桂州節度判官 : 桂州는 宋代 州의 이름으로 治所는 지금의 江西省 桂林市에 있었다. 節度判官은 節度判官廳公事로 節度使의 부관의 직책인데, 節度使를 보좌하고 제반 정사를 관리하였다.
역주14 未見剛者 : 이 내용은 《論語》 〈公冶長〉에 “孔子께서 ‘나는 아직 剛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다.[子曰 吾未見剛者]”라고 보이는데, 朱子의 《論語集註》에 “剛은 굳세고 강하여 굽히지 않는 뜻이니, 사람이 가장 능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신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15 鄙夫患失者也 : 鄙夫는 탐욕스럽고 비루한 사람이며, 患失은 벼슬자리를 잃을까 우려함을 이른다.
《論語》 〈陽貨〉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鄙夫와는,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벼슬자리를〉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걱정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잃을 것을 걱정하나니, 만일 잃을 것을 걱정한다면 이르지 않는 바가(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하셨다.[子曰 鄙夫 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苟患失之 無所不至矣]”라고 보인다.
이에 대하여 朱子의 《論語集註》에 “ ‘얻을 것을 걱정한다.’는 것은 ‘얻지 못함을 걱정함’을 이른다. 작게는 윗사람의 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음과 크게는 아비와 임금을 시해함이 모두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데서 생길 뿐이다.[患得之 謂患不能得之 小則吮癰舐痔 大則弑父與君 皆生於患失而已]”라고 注하였다. 古代에는 醫術이 발달하지 못하여 치질을 혀로 핥아주거나 종기를 입으로 빨아주는 것을 치료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매우 하기 어려운 일인데 小人들은 군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러한 짓도 서슴치 않고 행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16 勰勴 : 孫立節의 두 아들로, 兄인 勰은 字가 志康이며 勴는 字가 志擧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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