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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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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其憂深하고 其思遠이라
之盛也 鼎爲宗廟之觀美而已러니 及其衰也之患 有不可勝言者
之衰也 與匹夫何異리오
嗟夫
孰知九鼎之爲之角齒也哉
이나 三國之君 未嘗一日而忘 以寶在焉故也
三國爭之하니 莫知所適與
得鼎者 未必能存로되 而不得者 必碎之하니 此九鼎之所以亡也니라
하니 此與兒童之見으로 無異니라
善夫 之說也
분음汾陰之鼎 鼎也이라하니
有鼎이면 亦有鼎이니 豈三趾兩耳之謂哉리오
오구수왕壽王小子 方以諛進하야 不能究其義
予故作한정명漢鼎銘하야 以遺後世君子하노라
其詞曰
惟五帝三代及漢以來 受命之君 靡不有玆鼎하니 鼎存而昌하고 鼎亡而亡이라
蓋鼎必先壞 而國隨之하니 豈有易姓而鼎猶傳者乎
不寶此器하고 而拳拳於一物 孺子之智 婦人之仁이니 嗚呼悲夫


05. 한정漢鼎에 대한
우려가 깊고 사려가 원대하다.
임금이 구정九鼎을 주조한 것은 기물로 사용하려는 것이었고 애당초 보물로 여긴 것이 아니며, 물건을 형상하여 꾸민 것 또한 백성들로 하여금 상서롭지 못한 물건을 멀리하게 한 것이 아니었으니, 무왕武王이 이것을 낙읍洛邑으로 옮기자 백이伯夷숙제叔齊에게 이미 비웃음을 당하였다.
나라가 한창 흥성할 적에는 이 솥이 종묘의 아름다운 구경거리가 될 뿐이었는데, 쇠망함에 이르러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필부匹夫는 죄가 없고 구슬을 품고 있는 것이 죄이니, 나라가 쇠망할 적에 나라의 천자天子필부匹夫와 무엇이 달랐겠는가?
아!
누가 저 구정九鼎나라를 다투는 뿔과 이빨이 될 줄 알았겠는가?
춘추시대春秋時代초 장왕楚 莊王이 처음으로 구정九鼎의 무게와 크기를 물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세 나라가 모두 이것을 욕심내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해서 마치 호랑이 세 마리가 침을 흘리면서 자신을 노려보는 것처럼 여겼다.
나라 종묘宗廟의 제사를 끊더라도 다른 나라의 침공을 불러들일 수 없고, 나라의 땅을 다 나누어 갖더라도 나라를 살지게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세 나라의 군주君主가 일찍이 단 하루도 나라를 잊지 못했던 것은 이 보물이 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 나라가 이것을 서로 다투니, 나라가 어느 나라에 주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솥을 얻은 나라는 반드시 나라를 보존시키지는 못하는데, 얻지 못한 나라는 반드시 나라를 쳐부술 것이니, 이것이 구정九鼎이 없어지게 된 이유이다.
주 현왕周 顯王 42년에 나라 태구太丘가 망하자 구정九鼎사수泗水로 매몰되니, 이것은 나라 사람들이 구정九鼎을 훼손하여 화를 늦추고는 의 요망한 말에다가 가탁해서 변명한 것이다.
그런데 진 시황秦 始皇한 무제漢 武帝는 처음으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구정九鼎을 끌어냈으니, 이는 아이들의 식견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훌륭하다, 오구수왕吾丘壽王의 말이여!
분음汾陰(분수汾水 남쪽)의 솥은 나라 이고, 나라 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라에 이 있으면 나라에도 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주역周易》에서 말한 “자리를 바르게 하여 명령命令엄중嚴重하게 내린다.”는 것이니, 어찌 다리 셋에 귀가 둘인 그 솥을 말한 것이겠는가?
한스럽게도 오구수왕吾丘壽王소자小子여서 아첨으로 등용되어 그 뜻을 끝까지 규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한정명漢鼎銘〉을 지어서 후세의 군자君子에게 남겨주는 것이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오제五帝삼대三代 이래로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는 이 (괘상卦象으로 천자의 상징)을 소유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이 보존되면 나라가 창성하고 이 없어지면 나라가 망하였다.
만일 이 먼저 무너지면 나라도 따라서 망하였으니, 어찌 이 바뀌면서 이 그대로 전해지는 경우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을 보물로 여기지 않고 임금의 구정九鼎 한 물건에만 연연해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지혜요 부인의 이니, 아! 슬프다.


역주
역주1 漢鼎銘 : 이 글의 저작 시기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역주2 禹鑄九鼎 : 禹임금이 水土를 평정한 뒤에 九州에서 바친 쇠붙이를 모아 九州를 상징하는 아홉 개의 솥을 만들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宣公 3년》
역주3 象物以飾之 亦非所以使民遠不若也 : 不若은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을 해치는 괴물 등을 이른다. 禹임금이 九鼎에다가 각 지역의 괴물들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사람을 해치는 물건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어 멀리 피하게 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東坡는 이 역시 物象을 그렸을 뿐이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
역주4 武王遷之洛邑 蓋已見笑於伯夷叔齊矣 : 洛邑은 洛陽으로 周나라의 東都이다.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桓公 2년에 “여름 4월에 桓公이 宋나라에서 郜나라의 大鼎을 가져다가 戊申日에 太廟에 들여놓았으니, 禮가 아니다. 臧哀伯이 諫하였다. ‘옛날 武王이 商나라를 이기고 九鼎을 雒邑으로 옮기자 義士들이 오히려 비난하였습니다.’[夏四月 取郜大鼎于宋 納于大廟 非禮也 臧哀伯諫曰 武王克商 遷九鼎于雒邑 義士猶惑非之]”라고 보이는데, 杜預는 《春秋左氏經傳集解》에서 “義士는 伯夷 등의 무리인 듯하다.”라고 注하였다.
역주5 匹夫無罪 懷璧其罪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桓公 10년에 “당초에 虞叔이 좋은 玉을 가지고 있었는데, 虞公이 그 玉을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주지 않다가, 오래지 않아 후회하며 말하기를 ‘周나라 속담에 「匹夫에게는 죄가 없으나 玉璧을 가진 것이 죄이다.」라고 하였으니, 나에게 이 玉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玉 때문에 害를 살 것이다.’라고 하고서 그 玉을 虞公에게 바쳤다.[初虞叔有玉 虞公求旃 弗獻 旣而悔之曰 周諺有之 匹夫無罪 懷璧其罪 吾焉用此 其以賈害也 乃獻之]”라고 보인다.
역주6 自春秋時……始問其輕重大小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宣公 3년에 “楚子가 陸渾의 戎을 토벌하고 周나라 경내에서 군대를 진열하여 위용을 과시하니, 定王이 王孫滿을 보내어 楚子를 위로하였다.
楚子가 王孫滿에게 솥의 大小와 輕重을 묻자, 王孫滿은 ‘王者가 되는 것은 德에 달려 있는 것이지, 솥에 달린 것이 아니다.……周나라의 德이 비록 쇠하였으나 天命이 바뀌지 않았으니, 솥의 경중은 물을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楚子伐陸渾之戎 遂至於雒 觀兵于周疆 定王使王孫滿勞楚子 楚子問鼎之大小輕重焉 對曰在德不在鼎……周德雖衰 天命未改 鼎之輕重 未可問也]”라고 보인다.
九鼎의 輕重을 물은 것은 九鼎을 수송하여 자기 나라로 가져가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역주7 戰國之際……視三虎之垂涎而睨己也 : 楚나라가 九鼎을 노린 것은 《春秋左氏傳》 昭公 12년에 “楚子(靈王)가 乾谿에 주둔하였는데, 右尹 子革이 저녁에 알현을 청하니, 靈王이 그를 접견할 적에 被冠과 채찍을 내려놓고 말하기를 ‘옛날 우리 先王인 熊繹께서 呂伋, 王孫牟, 燮父, 禽父와 함께 康王을 섬길 적에 네 나라에는 모두 頒賜品이 있었으나, 유독 우리나라에만 없었다. 지금 나는 周나라에 사람을 보내 九鼎을 요구하여 頒賜品으로 삼고자 하니, 周王이 우리에게 九鼎을 주겠는가?’라고 하니, 子革이 대답하기를 ‘君王(楚王)께 줄 것입니다. 지금은 周나라와 네 나라가 君王에게 복명하여 섬기면서 명령하는 대로 따르고 있으니, 어찌 九鼎을 아끼겠습니까?’ 하였다.[楚子次于乾谿 右尹子革夕 王見之 去冠被舍鞭 與之語曰 昔我先王熊繹 與呂伋, 王孫牟, 燮父, 禽父 竝事康王 四國皆有分 我獨無有 今吾使人於周 求鼎以爲分 王其與我乎 對曰 與君王哉 今周與四國 服事君王 將唯命是從 豈其愛鼎]”라고 보인다.
秦나라와 齊나라가 九鼎을 노린 것은 《戰國策》에 “秦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周나라를 공격하여 九鼎을 요구하자, 周나라 임금이 이를 근심하여 顔率에게 고하였다. 顔率이 齊나라에 가서 齊王에게 이르기를 ‘周나라의 君臣들이 안에서 스스로 계책이 궁하여 생각하기를 九鼎을 秦나라에 주느니 齊나라에 드리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齊王이 크게 기뻐하여 군사 5萬을 내어 周나라를 구원하였다.
齊나라가 秦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장차 九鼎을 요구하려 하니, 周나라 임금이 또 이를 근심하였다. 顔率이 齊나라에 가서 齊王에게 이르기를 ‘周나라가 大國의 의로움에 힘입어 君臣과 父子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九鼎을 바치고자 하는데, 大國은 어느 길을 이용하여 九鼎을 齊나라로 가져가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齊王이 이르기를 ‘寡人은 장차 梁나라에게 길을 의탁하려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顔率이 ‘不可합니다. 梁나라의 君臣들이 九鼎을 갖고자 하여 暉臺의 아래와 少海의 위에서 도모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秦興師臨周 而求九鼎 周君患之 以告顔率 顔率至齊 謂齊王曰 周之君臣 內自盡計 與秦 不若歸之大國 齊王大悅 發師五萬人 救周 而秦兵罷 齊將求九鼎 周君又患之 顔率至齊 謂齊王曰 周賴大國之義 得君臣父子相保也 願獻九鼎 不識大國何塗之從而致之齊 齊王曰 寡人將寄徑於梁 顔率曰 不可 夫梁之君臣 欲得九鼎 謀之暉臺之下少海之上 其日久矣]”라고 보인다. 梁나라는 魏나라의 이칭이다.
역주8 絶周之祀……不足以肥國 : 絶周之祀는 周나라의 제사를 끓는다는 뜻으로 周나라를 멸망시킴을 이르고, 裂周之地는 周나라의 땅을 나누어 가짐을 이른다. 춘추시대에는 제후들끼리 서로 견제하여,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면 제3의 나라가 연합하여 승전국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周나라는 비록 天子國이었으나 영토가 하도 작고 人民이 너무 적어서 어떤 나라가 周나라를 멸망시키더라도 딴 나라가 그 나라를 공격하여 견제하지 않고, 周나라의 영토를 다 차지하더라도 나라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9 周顯王之四十二年……而鼎淪沒於泗水 : 저본에는 ‘四十三年’으로 되어 있으나 本集에 의거하여 ‘四十二年’으로 수정하였다.
太丘는 宋나라의 城으로 지금의 河南省 永城縣 서북쪽에 있었다. 泗水는 지금의 山東省 泗水縣의 陪尾山에서 발원하여 南西로 흘러 曲阜縣을 거쳐 濟寧 부근에서 大運河로 합류한다.
역주10 假之神妖 以爲之說也 : 이 내용은 《史記》 〈孝武本紀〉에 “周나라의 德이 쇠하여 宋나라의 社가 없어지니, 九鼎이 마침내 물에 수장되어 나타나지 않았다.[周德衰 宋之社亡 鼎乃淪伏而不見]”라는 글을 원용한 것이다.
역주11 秦始皇漢武帝乃始萬方以出鼎 : 秦 始皇帝의 경우는 《史記》 〈秦始皇本紀〉에 “始皇이 도성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彭城을 지날 적에 齋戒하고 神에게 제사하여 기도하고서 周나라의 九鼎을 泗水에서 꺼내고자 하였다. 이에 1천 명의 사람으로 하여금 물에 들어가서 찾게 하였으나 끝내 얻지 못하였다.[始皇還 過彭城 齋戒禱祠 欲出周鼎泗水 使千人沒水求之 弗得]”라고 보인다.
漢 武帝의 경우는 《史記》 〈孝武本紀〉에 “여름 6월 중에 汾陰의 무당 錦이란 자가 옛 魏나라의 언덕에서 后土에게 굿을 올리다가 땅이 갈고리처럼 튀어나온 것을 보고 이를 파서 鼎을 얻었다. 天子가 사람들로 하여금 巫錦이 鼎을 얻은 일에 간사함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禮祠로써 鼎을 맞이하여 甘泉宮에 두었다.[其夏六月中 汾陰巫錦 爲民祠魏脽后土營旁 見地如鉤狀 掊視得鼎 天子使使驗問巫錦得鼎無姦詐 乃以禮祠 迎鼎至甘泉]”라고 보인다.
역주12 吾丘壽王 : 前漢 때의 文臣으로 字가 子贛이며 趙나라 사람이다. 武帝 때에 東郡都尉로 임명되고 뒤에 光祿大夫에 올랐다. 汾陰에서 鼎이 발견되었을 적에 臣下들이 모두 이를 周나라의 九鼎이라고 여겨 경하하였으나, 吾丘壽王 홀로 이는 漢나라의 鼎이지 周나라의 鼎이 아니라고 하였다.
역주13 此易所謂正位凝命者 : 《周易》 鼎卦 〈象傳〉에 “나무 위에 불이 있음이 鼎이니, 君子가 보고서 地位를 바르게 하여 命令을 嚴重하게 내린다.[木上有火鼎 君子以 正位凝命]”라고 보인다.
여기에서 말한 鼎은 국가의 지위와 명령을 상징하는 卦象이고, 다리 셋에 귀가 둘인 九鼎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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