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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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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頌而不諂하고 援而不卑하니라
軾聞之호니 進說於人者 必其人之有間而可入이면 則其說易行이라
戰國之人하니 天下之士 因其貪而說之하고 危國之人하니 天下之士 因其懼而說之
是故 其說易行이라하니이다
古之人 一說而合하야 至有立談之間 而取公相者 未嘗不始於戰國危國하니 何則
有間而可入也일새니이다
居今之世하야 而欲進說於明公之前호되 不得其間而求入焉이면 則亦可謂天下之至愚無知者矣니이다
地方萬里而制於一姓하니 極天下之尊而盡天下之富하야 不可以有加矣어늘 而明公爲之宰하야 四夷不作하고 兵革不試하니 明公無貪於得而無懼於失也니이다
이어늘 明公 人人而食之하고 旦旦而撫之하시니 此百萬人者 出於溝壑之中하야 而免於烏鳶豺狼之患하야 生得以養其父母而祭其祖考하고 死得以使其子孫葬埋祭祀하야 不失其故常하니 明公之仁 及於百世也니이다
勇冠於天下하고 而仁及於百世하시니 士之生於世 如此 亦足矣
今也 處於至足之勢하시니 則是明公 無復有所羨慕於天下之功名也니이다
五帝三代之事 百家之書 莫不盡讀하고 禮樂刑政之大小 兵農財賦之盛衰 四海之內 地里之遠近 山川之險易 土物之所宜 莫不盡知하고 當世之賢人君子 與夫姦僞險詐之徒 莫不盡究하시며
至於曲學小數 茫昧戃怳而不可知者하야도 皆獵其華而咀其英하고 泛其流而涉其源하사 雖自謂當世之辯이라도 不能傲之以其所不知하니 則是 明公 無復有所畏憚於天下之博學也니이다
名爲天下之賢人하고 而貴爲天子之宰하야 無貪於得而無懼於失하고 無羨於功名而無畏於博學하시니 是其果無間而可入也 天下之士 果不可以進說也니이다
軾也聞之호니
衛武公 年九十有五로되 猶日箴儆於國하야
自卿以下 至於官師 苟在朝者 無謂我老耄而舍我하야 朝夕以交戒我하라하고
猶以爲未也하야 而作詩以自戒하니
夫衛武公 惟居於至足이로되 而日以爲不足이라
其沒也 謚之曰 睿聖武公이라하니이다
嗟夫 明公 豈以其至足而無間으로 以拒天下之士하며 則士之進說者 亦何必其間之入哉잇가
不然이면 軾將誦其所聞호리니 而明公 試觀之하소서
夫天下之小人 所爲奔走輻輳於大人之門而爲之用者 何也
大人 得其全하고 小人 得其偏일새니이다
大人 得其全이라 能兼受而獨制하고 小人 得其偏이라 是以 聚而求合於大人之門이니이다
古之聖人 惟其聚天下之偏하야 而各收其用하야 以爲非偏則莫肯聚也
是故 不以其全而責其偏하니이다
夫惟全者之不可以多有也
天下之偏者 惟全之求하야 今以其全而責其偏하나니
夫彼若能全이면 將亦爲我而已矣 又何求焉이리오
昔者 夫子廉潔而不爲異衆之行하시고 勇敢而不爲過物之操하시며 孝而不徇其親하시고 忠而不犯其君하시니 凡此者 是夫子之全也니이다
夫子居其全하야 而收天下之偏이라
是以 若此巍巍也하시니이다
若夫明公 其亦可謂天下之全矣
廉而天下不以爲介하고 直而天下不以爲訐하며 剛健而不爲彊하고 敦厚而不爲弱하니 明公之所得之於天이요 而天下之所不可望於明公者也니이다
明公居其全하고 天下效其偏이면 其誰曰不可리오
異時 士大夫皆喜爲卓越之行하고 而世亦貴狡悍之才러니 自明公執政으로 而朝廷之間 習爲中道하야 而務循於規矩하야
士之矯飾力行爲異者 衆必共笑之하니이다
夫卓越之行 非至行也로되 而有取於世하고 狡悍之才 非眞才也로되 而有用於天下하니 古之全人 所以坐而收其功也니이다
今天下卓越之行 狡悍之才 擧不敢至於明公之門 懼以其不純而獲罪於門下일새니이다
軾之不肖 竊以爲 天下之未大治하고 兵之未振하고 財之未豊하야 天下之有望於明公而未獲者 其或由此也歟아하노이다
收天下之士하야 不考其素하고 苟可用者 莫不咸在하야 雖其狂獧(狷)無行之徒라도 亦自效於하고 而范公亦躬爲詭特之操以震之하니 夫范公之取人者 是也어니와 其自爲者 非也니이다
伏惟 明公 以天下之全而自居하야 去其短而襲其長하야 以收功於無窮하소서
軾也 西南之匹夫 求斗升之祿하야 而至於京師러니 翰林歐陽公 不知其不肖하시고 使與於制擧之末하야 而發其猖狂之論이라
是以 輒進說於左右하야 以爲明公必能容之라하노이다
所進策論五十篇 貧不能盡寫하야 而致其半하오니 觀其大略하시면 幸甚이리이다


01. 부승상富丞相에게 올린 글
칭송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끌어 잡으면서도 비굴하지 않다
제가 들으니, “남에게 말을 올리는 자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들어갈 만한 틈이 있으면 그 말이 행해지기가 쉽다.
전쟁하는 나라의 군주는 탐욕스러우니 천하의 선비가 그 탐욕스러움을 인하여 설득하고, 위태로운 나라의 군주는 두려워하니 천하의 선비가 그 두려움을 인하여 설득한다.
이 때문에 그 말이 행해지기가 쉬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 가운데 한마디 말로 군주와 의기가 투합해서 심지어 서서 말하는 사이에 공상公相의 지위를 취한 자가 있었는데, 이는 전쟁하는 나라와 위태로운 나라에서 비롯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어째서이겠습니까?
틈이 있어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에 명공明公의 앞에서 말씀을 올리고자 하면서 그 틈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면 또한 천하의 지극히 어리석고 무지한 자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만 리나 되는 광활한 땅을 한 성씨姓氏(조씨趙氏)가 다스려서 천하의 높음을 지극히 하고 천하의 부유함을 모두 차지하여 더할 것이 없는데, 명공明公이 재상이 되어서 사방 오랑캐들이 일어나지 않고 병기와 갑옷을 쓰지 않으니, 이는 명공明公이 얻기를 탐하지 않고 잃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융西戎이 강성할 적에 오랑캐들이 틈을 타서 우리 북쪽 지방을 점령하면서 중국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명공明公의 한마디 말씀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명공明公의 용맹이 천하의 으뜸인 것입니다.
명공明公산동山東 지방에 계실 적에 황하黃河 북쪽 지방의 유민들이 모두 몰려와서 아버지는 자식을 버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서 스스로 명공明公에게 귀의한 자들이 백여만 명이 넘었는데 명공明公께서 유민들을 사람마다 먹여주고 날마다 어루만지시니, 백여만 명의 사람들이 구학溝壑에서 벗어나 까마귀와 솔개에게 쪼아 먹히고 승냥이에게 잡아먹히는 근심을 면하여, 살아서는 부모를 공양하고 조고祖考에게 제사를 지내며, 죽어서는 자손들로 하여금 장례하고 제사하여 그 상례常禮를 잃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명공明公의 어짊이 백 대에 미친 것입니다.
용맹이 천하에 으뜸이면서 인자함이 백 대에 미치시니,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와 같다면 또한 충분합니다.
지금 명공明公께서 지극히 만족한 형편에 처하셨으니, 이는 명공明公이 다시는 천하의 공명功名을 부러워하거나 사모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제五帝삼대三代의 일과 백가百家의 책을 다 읽지 않음이 없고, 예악禮樂형정刑政의 크고 작은 것과, 병가兵家농가農家재부財賦의 성하고 쇠함과, 사해 안의 지리의 멀고 가까움과,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토질에 맞는 토산물을 다 알지 않음이 없으시며, 당세의 현인 군자와 간사하고 거짓되고 음험한 무리들을 다 연구하지 않음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정도正道가 아닌 학문과 작은 기예로 아득하고 어렴풋해서 알 수 없는 것에 이르러서도 그 정화精華를 섭렵하고 정영精英을 삼키며 그 흐름을 타고 근원에 통하여, 비록 스스로 당세의 변사辯士라고 말하는 자라도 명공明公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거만하게 굴 수 없으니, 이는 명공明公이 다시는 천하의 박학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꺼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명공明公께서는 이름은 천하의 현인이 되고 귀함은 천자의 재상이 되시어 얻기를 탐하지 않고 잃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공명을 부러워하지 않고 박학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니, 이는 과연 들어갈 만한 틈이 없으신 것으로, 천하의 선비가 과연 말씀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들으니, 나라 좌사 의상左史 倚相이 말하기를
“옛날 나라 무공武公은 나이가 95세인데도 날마다 도성 안에서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하로부터 관사官師(작은 관청의 수장)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있는 자는 내가 늙었다고 생각하여 나를 버리지 말고 아침저녁으로 서로 나를 경계하라.’라고 하였고,
그러고도 이것을 부족하다고 여겨서 를 지어 스스로 경계하니,
에 이르기를 ‘빈틈없는 위의威儀는 덕이 밖으로 드러남이로다.’라고 하였다.
나라 무공武公은 지극히 만족한 자리에 처하였으나 날로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가 죽었을 때에 시호를 예성무공睿聖武公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명공明公이 어찌 지극히 만족하여 들어갈 만한 틈이 없다고 해서 천하의 선비를 막을 것이며, 선비로서 말씀을 올리는 자 또한 어찌 틈이 있어서 들어가기를 기필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제가 장차 들은 바를 말씀드릴 터이니, 명공明公께서는 한번 살펴보소서.
천하의 소인들이 분주하게 대인의 문하에 모여들어서 쓰여지고자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인은 그 온전함을 얻었고 소인은 편벽된 한쪽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대인은 온전함을 얻었기 때문에 겸하여 받아들여서 홀로 제재할 수 있고, 소인은 한쪽만을 얻었기 때문에 모여들어 대인의 문하에서 합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옛날 성인이 천하의 편벽된 자들을 모아 각각 그 쓰임을 거두고서 생각하시기를 ‘편벽된 자가 아니면 모이려 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자기가 온전하다 하여 그 편벽됨을 책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온전한 자는 세상에 많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편벽된 자들이 오직 온전함을 구하기 때문에, 지금 〈왕공王公들이〉 자신의 온전한 것을 가지고 천하의 편벽된 자들을 책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온전할 수 있다면 장차 또한 자신을 위할 뿐일 것이니, 또 어찌 왕공을 찾겠습니까?
옛날에 부자夫子(공자孔子)께서는 청렴하고 깨끗하셨으나 남들과 다른 행실을 하지 않으셨고, 용감하셨으나 남보다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으셨고, 효도하셨으나 어버이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셨고, 충성하셨으나 임금을 범하지 않으셨으니, 무릇 이것은 부자夫子의 온전함입니다.
원헌原憲은 청렴하여 가난함에 이르렀고, 공량유公良孺는 용맹하여 싸움에 이르렀고, 증자曾子는 효도하여 뜻을 굽혀 어버이를 따랐고, 자로子路는 충성하여 군주를 범하였으니, 무릇 이것은 여러 제자들의 편벽됨입니다.
부자夫子께서는 그 온전함을 보유하시고서 천하의 편벽됨을 거두셨습니다.
이 때문에 이처럼 거룩하신 것입니다.
명공明公으로 말하면 또한 천하의 온전한 재주라고 이를 만합니다.
청렴한데도 천하 사람들이 너무 꼿꼿하다고 여기지 않고, 곧은데도 천하 사람들이 남의 약점을 들춰낸다고 여기지 않고, 강건한데도 고집스럽다고 여기지 않고, 돈후한데도 심약하다고 여기지 않으니, 이는 명공明公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요, 천하 사람들이 명공明公과 같이 되기를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명공明公이 그 온전함에 처하고 천하 사람들이 편벽됨을 다 바친다면 그 누가 불가하다고 여기겠습니까?
예전에는 사대부들이 모두 탁월한 행실을 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세상에서도 또한 교활하고 강한 재주를 귀하게 여겼는데, 명공明公께서 집정하신 이후로는 조정에서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을 익혀 되도록 법도를 따르고자 힘씁니다.
그리하여 선비 중에 억지로 꾸미고 힘써 괴이한 짓을 하는 자들을 사람들이 반드시 함께 비웃고 있습니다.
탁월한 행실은 지극한 행실이 아닌데도 세상에서 취해지고, 교활하고 강한 재주는 참다운 재주가 아닌데도 천하에 쓰여지고 있으니, 이것이 옛날 온전한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그 공을 거두게 된 이유입니다.
지금 천하의 탁월한 행실과 교활하고 강한 재주들이 모두 감히 명공明公의 문하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순수하지 못하여 문하에서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불초한 저는 엎드려 생각하건대 ‘천하가 아직 크게 다스려지지 못하고 군대가 강성하지 못하고 재정이 풍족하지 못해서, 천하 사람들이 명공明公에게 바람이 있으나 그 바람이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혹 이 때문이 아니겠느냐.’라고 여깁니다.
옛날 범공范公(범중엄范仲淹)이 천하의 인재를 거두면서 평소의 행실을 고찰하지 않고 만일 쓸 만한 자이면 모두 지위에 있게 하여서, 비록 오활하고 고집스러워 행실이 바르지 못한 무리라도 또한 스스로 하풍下風에서 힘을 바치게 하였고, 자신 또한 몸소 기괴하고 독특한 행실을 하여 이들을 두렵게 하였으니, 범공范公이 사람을 취한 것은 옳았으나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은 잘못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명공明公께서는 천하의 온전한 재주로 자처하시어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이어받아서 무궁한 세대에 공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저는 서남 지방의 필부로 적은 녹봉을 구하려고 경사京師(서울)에 왔는데 한림 구양공翰林 歐陽公(구양수歐陽脩)이 저의 불초함을 알지 못하시고 저로 하여금 제거制擧의 끝에 참여하여 창광猖狂한 의논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제가 좌우左右집사執事에게 말씀을 올리면서 명공明公께서 반드시 제 말을 용납해주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은 50편이 있으나 가난하여 다 등사할 수가 없어서 절반만 올리오니, 대략을 살펴보아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역주
역주1 上富丞相書 : 이 글은 대략 嘉祐 6년(1061) 정월과 2월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蘇軾은 制科를 준비하면서 이 글을 써서 富弼에게 올려 자신을 알리고자 하였다. 富丞相은 富弼(1004~1083)을 이르며, 字가 彦國으로 河南 洛陽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范仲淹, 晏殊 등에게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고 晏殊의 사위가 되었다. 외교에 뛰어나 契丹과의 협상에서 공을 세웠으며 文彦博과 함께 재상에 올랐으나 王安石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뒤에 鄭國公에 봉해졌고 시호는 文忠이다.
역주2 方西戎之熾也……而畏明公之一辭 : 明公은 賢明한 公이라는 뜻으로 富弼을 가리킨다. 富弼은 뛰어난 외교가로 두 번 契丹에 사신 가서 빼앗긴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으로 위협하는 契丹의 군주와 당당하게 맞서 화친을 이끌어내는 큰 공을 세웠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西戎은 西夏를 이르는데 당시 西夏가 강성해지자 契丹은 西夏와 동맹을 맺고 宋나라와 전쟁을 벌여 북방의 여러 城을 함락시켰다.
역주3 明公居於山東……百餘萬 : 富弼이 宣撫靑州로 있을 적에 河北에 큰 홍수가 나서 수많은 이재민이 유리걸식하였는데, 富弼이 앞장서서 官民들에게 곡식을 거두고 官의 곡식을 내어 餓死하는 것을 막았으며 10여만 칸의 막사를 지어 이재민을 수용하였다.
역주4 楚左史倚相 : 左史는 관명으로 春秋時代에 임금의 좌측에서 임금을 모시며 임금의 말을 기록했던 史官이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晉나라와 楚나라에 있던 관직으로 軍隊에 종사하여 軍의 일을 기록하는 관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朱子는 “左丘明은 楚나라 左史인 倚相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이 楚나라 일을 설명한 부분은 상세하다.”라고 하였으니, 다만 군대의 일만을 기록한 관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하다. 倚相은 楚나라 靈王 때의 左史로 당대에 뛰어난 학자였다. 倚相의 말은 《詩經》 〈大雅 抑〉의 章下註에 《國語》 〈楚語〉의 말을 인용한 全文이 보인다.
역주5 其詩曰……惟德之隅 : 抑抑은 치밀하여 빈틈이 없는 것이며, 隅는 귀퉁이로 모가 나는 곳인데 전하여 嚴正함을 이른다. 《詩經》 〈大雅 抑〉의 첫머리에 “치밀한 威儀는 엄정한 德이 밖으로 드러남이로다.[抑抑威儀 維德之隅]”라고 하였는데, 鄭玄의 注에 “사람이 威儀를 치밀하게 살피는 자는 그 德이 반드시 嚴正하다. 그러므로 옛 賢者들은 道가 행해지고 마음이 화평하여 외면을 보면 내면을 알 수 있었으니, 이는 마치 宮室의 제도에 내면이 먹줄에 맞아 곧으면 외면이 모가 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武公은 春秋時代 衛나라의 군주로 이름이 和이며 처음 衛나라에 봉해진 康叔의 8세손인데 康叔의 政事를 닦아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장수하여 55년 동안 재위하였다. 犬戎이 周나라의 幽王을 시해하자, 武公은 군대를 거느리고 周나라에 가서 犬戎을 토벌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또 《詩經》 〈小雅 賓之初筵〉을 지어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것을 풍자하고 경계하는 등 학문과 덕행이 모두 뛰어났다. 《詩經》 〈衛風 淇澳〉에는 그를 “아름다운 군자[有斐君子]”라고 칭송하고 있다.
역주6 原憲……忠而犯其君 : 原憲, 公良孺, 曾子, 子路는 모두 孔子의 제자들이다. 原憲은 字가 子思로 평생 벼슬하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는데, 집이 너무 가난하여 토담집에 거적을 치고 살아 비만 오면 지붕이 새어 방 안이 젖었으며 끼니를 자주 굶었다고 한다. 公良孺는 字가 子正으로 陳나라 사람인데 매우 용맹하였다. 孔子가 陳나라에서 衛나라로 가던 도중 衛나라의 蒲邑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公叔에게 포위되었는데, 이때 거느리고 있던 수레 5대를 이끌고 公叔과 교전하고 협상을 이끌어내어 위기를 구한 일이 있었다. 曾子는 曾參으로 字가 子輿인데, 孝誠으로 이름이 났다. 한 번은 소소한 잘못으로 아버지 曾點을 노엽게 하여 심한 매질을 당했는데도 피하지 않아 몸을 상하게 하였다가, 孔子로부터 ‘부모에게 받은 몸을 아끼지 않으면 진실한 효도가 아니다.’라는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子路는 이름이 仲由로 충성스럽고 강직하였다. 말년에 衛나라의 大夫 孔悝의 宰로 있었는데, 孔悝가 蒯聵와 함께 모의하고 난을 일으켜 出公을 몰아내자, 子路는 이들을 막다가 살해되었다. 위에 열거한 여러 제자들은 모두 후세에 자신의 德으로 명성이 높은 자들이었으나 夫子의 완전함에 비추어 보면 일면의 편벽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蒯聵는 衛나라 靈公의 太子였는데, 계모인 南子가 음란한 짓을 자행하자, 그녀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靈公의 노여움을 사서 망명하였다. 出公은 이름이 輒으로 蒯聵의 아들이다. 靈公이 죽자 衛나라에서는 輒이 嫡孫이라 하여 그를 군주로 세웠으나, 蒯聵가 晉나라의 도움을 받아 孔悝와 모의하고 出公을 몰아냈다.
역주7 范公 : 宋나라 仁宗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范仲淹(989~1052)으로 字가 希文이며 蘇州 吳縣 사람이다. 眞宗 大中祥符 8년(1015)에 進士로 출사하였는데, 仁宗 때에 이르러 중앙 관리가 되었으나 재상 呂夷簡을 비판하다가 知饒州事로 좌천되었다. 康定 元年(1040)에 陝西의 經略使로 제수되고 西夏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慶曆 3년(1044)에 參知政事에 제수되었다. 范仲淹은 문장가로도 뛰어나 그의 詩賦와 산문은 모두 깊은 사회적 성찰을 담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岳陽樓記〉는 宋代 최고 名文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데, 여기에 있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해야 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는 한 句는 후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名句로 范仲淹의 인품과 정치관이 잘 드러나 있어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역주8 下風 : 본래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랫자리 또는 手下의 뜻으로 쓰는 謙辭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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