臣近以左臂不仁하고 兩目昏暗하야 有失儀曠職之憂일새 堅乞一郡이러니 伏蒙聖慈降詔不允하시고 遣使存問하며 賜告養疾하시니 恩禮之重이 萬死莫酬니이다
以臣子大義言之하면 病未及死면 皆當勉强이니 雖有失儀曠職之罰이나 亦不當辭니이다
然이나 臣終未敢起就職事者는 實亦有故하니 言之則觸忤權要하여 得罪不輕이요 不言則欺罔君父하야 誅罰尤大라
以此로 知事君之義는 雖以報國爲先이나 而報國之道는 當以安身爲本이니
若上下相忌하야 身自不安이면 則危亡是憂니 國何由報리잇고
恭惟陛下踐祚之始
에 收臣於
하고 半年之間
에 擢臣爲
하시니 方將致命
이니 豈敢告勞
리오마는
特以臣拙於謀身하고 銳於報國하야 致使臺諫으로 列爲怨仇하니이다
臣이 與故相司馬光으로 雖賢愚不同이나 而交契最厚라
光旣大用에 臣亦驟遷하니 在於人情에 豈肯異論이리오
但以光所建
一事
를 臣實以爲未便
이라하야 不免力爭
이러니 而
이 皆希合光意
하야 以求進用
하니이다
及光旣歿하야는 則又妄意陛下以爲主光之言이라하야 結黨橫身하야 以排異議하야 有言不便이면 約共攻之하니이다
光至誠爲民하야 本不求人希合하고 而陛下虛心無我하시니 亦豈有所主哉잇가
其後
에 又因
이 與
로 爭議
하야 欲守
하야 不敢以疑法殺人
하고 而
又論維專權用事
하니이다
臣本蜀人
이라 與此兩人
으로 實是知舊
니 因此
로 韓氏之黨
이 一例疾臣
하야 指爲
하니이다
在元豊末
에 通判德州
할새 而著作
이 方監本州德安鎭
하니이다
而庭堅以謂鎭小民貧하야 不堪誅求하니 若行市易이면 必致星散이라하야 公文往來하야 士人傳笑하니이다
其後에 挺之以大臣薦으로 召試館職이어늘 臣嘗對衆言호되 挺之는 聚斂小人이라
又挺之妻父郭槩 爲西蜀提刑時에 本路提擧官韓玠 違法虐民이어늘 朝旨委槩體量이러니 而槩附會隱庇한대 臣弟轍이 爲諫官하야 劾奏其事하야 玠槩竝行黜責하니이다
臣二年之中
에 四遭口語
하고 發策草麻
를 皆謂之誹謗
하고 에 先言其失士
하며
臣與此兩人으로 有何干涉이완대 而於意外에 巧構曲成하야 以積臣罪하야
中外之人이 具曉此意하야 謂臣若不早去면 必致傾危라하니이다
臣非不知聖主天縱聰明하사 察臣無罪나 但以臺諫氣焰이 震動朝廷하야 上自執政大臣으로 次及侍從百官하고 外至監司守令하야 皆畏避其鋒하야
奉行其意하야 意所欲去면 勢無復全하니 天下知之로되 獨陛下深居法宮之中하사 無由知耳니이다
臣竊觀三代以下로 號稱明主는 莫如漢宣帝, 唐太宗이니이다
然宣帝
는 殺
하고 太宗
은 殺劉洎
하니 皆信用讒言
하야 死非其罪
하야
宣帝初知蓋寬饒忠直하야 不畏强禦하야 自候司馬로 擢爲太中大夫, 司隷校尉하니 不可謂不知之深矣러니
而當時讒人이 乃謂寬饒欲求禪位라하니 宣帝不察하여 致使寬饒自剄北闕下하니이다
太宗
이 信用劉洎
하야 言無不從
하야 嘗比之
하니 亦不可謂不知之深矣
러니
而太宗征遼患癰이어늘 洎泣曰 聖體不康이 甚可憂懼라한대
而當時讒人
이 乃謂洎欲行
라하니 太宗不察
하고 賜洎自盡
하니이다
二主非不明也
요 二臣之受知 非不深也
로되 恃明主之深知
하고 不避讒人積毁
하야 以至
하야 爲天下笑
하니이다
今臣自
컨대 受知於陛下
가 不過如蓋寬饒之於漢宣帝
와 劉洎之於唐太宗也
요 而讒臣者
는 乃十倍於當時
하니 雖陛下明哲寬仁
이 度(渡)越二主
나 然臣亦豈敢恃此不去
하야 以卒蹈二臣之覆轍哉
잇가
且二臣之死에 天下後世皆言 二主信讒邪而害忠良이라하야 以爲聖德之累하니
使此二臣者 識幾畏漸하야 先事求去런들 豈不身名俱泰하고 臣主兩全哉잇가
臣縱不自愛나 獨不念一旦得罪之後에 使天下後世로 有以議吾君乎잇가
昔에 先帝召臣上殿하야 訪問古今하시고 勅臣今後遇事卽言하시니이다
라한대 而趙挺之以爲誹謗先帝
라하니 則是以白爲黑
하고 以西爲東
하야 殊無近似者
하니이다
臣以此로 知挺之嶮毒이 甚於李定, 舒亶, 何正臣이요 而臣之被讒이 甚於蓋寬饒, 劉洎也니이다
臣欲依違苟且하야 雷同衆人이면 則內愧本心하고 上負明主요
若不改其操하야 知無不言이면 則怨仇交攻하야 不死卽廢하리이다
伏望聖慈는 念爲臣之不易하고 哀臣處此之至難하사 始終保全하야 措之不爭之地하시고 特賜指揮하야 檢會前奏하야 早賜施行하소서
臣無任感恩知罪하야 祈天請命하야 激切戰恐之至로소이다
이 글을 보고서도 오열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인정人情이 없는 것이다.
신臣이 근래에 왼쪽 팔이 마비되고 두 눈이 어두워서 위의威儀를 잃고 직책을 수행하지 못할 우려가 있기에 굳이 한 고을을 맡을 것을 청원하였는데, 성聖스럽고 자애로우신 폐하께서 조칙詔勅을 내려 윤허하지 않으시고, 사자를 보내어 존문存問(위문)하고 휴가를 주어 질병을 요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은혜와 예우의 중함이 만 번 죽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신하의 큰 의리를 가지고 말한다면 병이 들어 죽기 전까지는 모두 마땅히 힘써 일해야 하니, 비록 위의威儀를 잃고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는 벌이 있더라도 또한 마땅히 사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臣이 끝내 감히 일어나 직책과 일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실로 또한 이유가 있으니, 이것을 말씀드린다면 권력을 쥐고 요로要路를 담당한 자에게 저촉되어 죄를 얻는 것이 가볍지 않을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군부君父를 속여서 주벌이 더욱 클 것입니다.
신臣이 들으니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그 몸을 편안히 한 뒤에 동動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주가 신밀愼密하지 않으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신밀愼密하지 않으면 몸을 잃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군주를 섬기는 의리는 비록 보국報國을 우선으로 하나 보국報國하는 방도는 마땅히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꺼려서 자신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다면 위태로움과 멸망을 근심해야 할 것이니, 무슨 방법으로 나라에 보답하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아홉 번이나 죽을 뻔한 신臣의 목숨을 거두어주시고 반년 뒤에 신臣을 발탁하여 양제兩制의 수장首長을 삼으셨으니, 신臣은 장차 목숨을 바쳐야 할 터인데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말씀드리겠습니까?
다만 신臣은 자신을 도모하는 데에 졸렬하고 보국報國하려는 데 예의銳意해서 대간臺諫들로 하여금 줄지어 원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신臣은 별세한 정승 사마광司馬光과는 비록 어질고 어리석음은 똑같지 않았으나 교분은 매우 두터웠습니다.
사마광司馬光이 크게 등용되고 난 뒤에 신臣 또한 갑자기 승진하였으니, 인정상 어찌 그와 의논을 달리하고자 하였겠습니까?
다만 사마광司馬光이 건의한 차역差役 한 가지 일을 신臣은 실로 온당하지 못하다고 여겨서 어쩔 수 없이 강력하게 간쟁하였는데, 여러 대간臺諫들은 모두 사마광司馬光의 뜻에 영합해서 등용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사마광司馬光이 별세하자, 또 망령되이 폐하께서 사마광司馬光의 말을 주장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당黨을 지어 멋대로 행동하고 이론異論을 배척하여, 온당치 못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약속하여 함께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마광司馬光은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들을 위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영합하기를 본래 바라지 않았고, 폐하께서는 마음을 비우시고 아집我執이 없으시니, 또한 어찌 고집하여 주장하는 바가 있으시겠습니까?
그 뒤에 또 형부시랑刑部侍郞 범백록范百祿이 문하시랑門下侍郞 한유韓維와 함께 형명刑名을 가지고 논쟁해서 조종祖宗의 고사를 지켜 감히 의심스러운 법으로써 사람을 죽이지 않고자 하였고, 간관諫官 여도呂陶는 또 한유韓維가 권력을 독단하여 용사用事한다고 논죄하였습니다.
신臣은 본래 촉蜀 지방 사람이라서 이 두 사람(범백록范百祿, 여도呂陶)과 실로 친구간인데, 이로 인하여 한씨韓氏의 무리들이 한결같이 신臣을 미워하여 천당川黨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
어사御史 조정지趙挺之가 원풍元豐 말년에 덕주통판德州通判으로 있을 적에 저작著作 황정견黃庭堅이 막 본주本州의 덕안진德安鎭을 맡고 있었는데,
조정지趙挺之가 제거관提擧官 양경분楊景棻에게 영합하여 본진本鎭에다가 시역법市易法을 시행하려고 하자,
황정견黃庭堅이 말하기를 “진鎭은 작고 백성은 가난하여 가렴주구苛斂誅求를 감당하지 못하니, 만약 시역법市易法을 시행하게 되면 반드시 백성들이 별처럼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공문이 여러 번 오고 가서 선비들에게 비웃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조정지趙挺之가 대신의 천거로 부름을 받아 관각館閣의 직책에 시용試用되자, 신臣이 일찍이 여러 사람들을 대하여 “조정지趙挺之는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소인小人이다.
학식과 행실을 취할 것이 없으니, 어찌 이 선발選拔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조정지趙挺之의 처부妻父 곽개郭槩가 서촉西蜀의 제형提刑이 되었을 때에 본로本路의 제거관提擧官 한개韓玠가 법을 어기고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대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곽개郭槩에게 체량體量(조사)을 맡겼는데, 곽개郭槩가 한개韓玠에게 붙어 죄를 숨기고 비호하니, 신臣의 아우 소철蘇轍이 간관諫官이 되어 이 일을 탄핵해서 한개韓玠와 곽개郭槩가 모두 쫓겨나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조정지趙挺之가 신臣을 미워함에 더욱 죽을 힘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은 2년 사이에 네 번 구설口舌을 만났고, 신臣이 책문策問을 출제하고 마지麻紙에 초안草案한 것을 저들은 모두 “신臣이 조정을 비방했다.”고 비판하였으며, 신臣이 성방省榜을 내기도 전에 먼저 “〈선발이 공정하지 않아〉 선비를 잃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신臣이 천거한 선비들에게 의례히 모함을 가하고 신臣이 이해利害를 논한 것들을 서로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까지 하였습니다.
근일에 왕적王覿은 “호종유胡宗愈가 신臣을 왕적王覿의 당黨으로 지목한다.” 하였고, 손각孫覺은 “정즐丁隲은 손각孫覺이 신臣의 친한 집안이라고 말했다.” 하니,
신臣이 이 두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뜻밖에 교묘하게 얽고 거짓으로 만들어내 신臣의 죄를 쌓았습니다.
그리하여 신臣으로 하여금 열 사람의 손으로 방망이를 휘어 굽게 만들고, 폐하로 하여금 터무니없는 말이 세 번 이름에 베 짜던 북을 던지시게 하였습니다.
중외中外의 사람들은 모두 이 뜻을 깨닫고 신臣이 만약 일찍 조정을 떠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주聖主께서는 하늘이 내신 총명聰明이시니, 신臣의 무죄함을 살피실 줄을 신臣이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다만 대간臺諫들의 기염이 조정을 진동해서 위로는 집정대신執政大臣으로부터 다음으로는 시종侍從하는 신하와 백관百官에 미치고 밖으로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까지 이르러 모두 그 예봉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의 뜻을 받들어 행해서, 그들 마음에 제거하고자 하는 바이면 형세상 다시 온전할 사람이 없으니,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으나 오직 폐하만이 법궁法宮의 가운데에 깊이 거처하셔서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신臣이 엎드려 살펴보건대 삼대三代 이하로 현명한 군주라고 일컬어지는 분으로는 한漢나라 선제宣帝와 당唐나라 태종太宗만 한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제宣帝는 합관요蓋寬饒를 죽였고 태종太宗은 유계劉洎를 죽였는데, 이것은 모두 참소하는 말을 믿어 그의 죄가 아닌 것으로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들을 가엾게 여기고 있습니다.
선제宣帝는 처음에 합관요蓋寬饒가 충직하여 강하고 포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후사마候司馬로부터 발탁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와 사례교위司隷校尉로 삼았으니, 그를 깊이 알지 않았다고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합관요蓋寬饒의 상소문에 “오제五帝는 천하를 공적公的인 관청으로 삼아 선양禪讓하였고, 삼왕三王은 천하를 자기 집으로 삼아 후손에게 물려주었다.”라고 하자,
당시 참소하는 사람들이 마침내 ‘합관요蓋寬饒가 천자의 지위를 선양禪讓받고자 한다.’고 모함하니, 선제宣帝가 이것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서 합관요蓋寬饒로 하여금 북쪽 대궐 아래에서 스스로 목 찔러 죽게 하였습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유계劉洎를 신용하여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어 일찍이 위문정공魏文貞公(魏徵)에 견주기까지 했으니, 또한 깊이 알지 않았다고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태종太宗이 요동을 정벌하다가 종기를 앓자 유계劉洎가 눈물을 떨구며 말하기를 “성체聖體가 편안하지 못함이 매우 근심스럽고 두려울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참소하는 사람들이 “유계劉洎가 이윤伊尹과 곽광霍光의 일을 행하고자 한다.”라고 모함하니, 태종太宗이 살피지 못하고 유계劉洎에게 자진自盡을 명하였습니다.
두 임금이 현명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두 신하가 군주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깊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들은 현명한 군주가 깊이 알아줌을 믿고 참소하는 사람들이 훼방하는 것을 피하지 아니하여, 몸과 머리가 다른 곳에 처하여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신臣이 스스로 헤아려보건대 폐하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합관요蓋寬饒가 한漢나라 선제宣帝에 있어서와 유계劉洎가 당唐나라 태종太宗에 있어서와 같음에 지나지 않고, 신臣을 참소하는 자들은 도리어 당시의 열 배나 되니, 비록 폐하께서 명철하고 너그럽고 인자하심이 두 군주보다 월등히 나으시나 신臣이 어찌 감히 이것을 믿고 떠나가지 않아서 끝내 두 신하의 전철을 밟겠습니까?
그리고 두 신하가 죽자 천하와 후세 사람들은 모두 두 군주가 참소하는 자와 사악한 자들을 믿고서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살해하였다고 비판하여 성덕聖德의 누累로 삼고 있습니다.
만일 이 두 신하가 기미를 알고 조짐을 두려워하여 일에 앞서서 미리 떠나갔더라면 어찌 몸과 명예가 모두 편안하고 신하와 군주가 모두 온전하지 않았겠습니까? 신臣
이 비록 스스로 제 몸을 아끼지는 않으나 어찌 하루아침에 죄를 얻은 뒤에 천하와 후세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우리 임금님을 비난하게 될 것을 홀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선제先帝(神宗)께서 신臣을 불러 대궐에 오르게 해서 고금古今의 일을 물으시고 신臣에게 지금 이후로 일(政事)을 만나거든 즉시 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후 신臣이 여러 번 일을 논했으나 시행되지 못했기에 마침내 다시 시문詩文을 지어 사물事物에 의탁해서 풍자하였으니, 이것은 행여 널리 퍼져 임금님께 도달해서 성상聖上의 마음을 감동시켜 깨닫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이정李定과 서단舒亶, 하정신何正臣 세 사람이 이로 인해 신臣이 조정을 비방한다고 말해서 신臣이 마침내 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근사近似한 점이 있으니, 풍간諷諫을 비방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臣이 초草한 마사麻詞(任命詞)에 이르기를 “백성들 또한 수고롭다.”고 하자, 조정지趙挺之가 “선제先帝를 비방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흰 것을 검다고 하고 서쪽을 동쪽이라 하여 전혀 근사近似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은 이로써 조정지趙挺之의 험하고 독함이 이정李定과 서단舒亶, 하정신何正臣보다 더 심하고, 신臣이 참소를 당하는 것이 합관요蓋寬饒와 유계劉洎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고 신하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하였으니,
신臣이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고 구차히 지내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부화뇌동하고자 한다면 안으로는 본심에 부끄럽고 위로는 현명한 군주를 저버리는 것이요,
만약 지조를 변치 않고 아는 것을 모두 말씀드린다면 신臣의 원수들이 서로 공격하여, 죽지 않으면 폐출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스럽고 자애로우신 폐하께서는 신하 노릇하기가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고 신臣이 이에 대처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움을 가엾이 여기셔서 끝까지 보전하여 다투지 않을 자리에 놓아주시고, 또 특별히 지휘(지시)를 내리셔서 신臣이 예전에 아뢴 것들을 조사하여 조속히 시행하게 하소서.
신臣은 은혜에 감사하고 지은 죄를 알아서 하늘에 기원하여 명을 청하면서 격절激切하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