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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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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책단 상
順敍
매우 순리적으로 서술하였다.
至深遠也 天下謀臣猛將 豪傑之士 欲有所逞於西北者久矣니이다
서북 지방의 두 오랑캐가 중국의 환란이 됨이 매우 깊고 심하여, 천하天下모신謀臣맹장猛將과 호걸스러운 선비들이 서북 지방에 분풀이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 들으니,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먼저 자신을 이길 수 없게 만들어 놓고서 적을 이길 수 있는 틈을 기다린다.’라고 하였습니다.
嚮者 臣愚 以爲西北雖有可勝之形이나 而中國未有不可勝之備
지난번에 어리석은 은 말하기를 “서북 지방에 비록 우리가 이길 수 있는 형세가 있으나, 우리 중국中國에 적이 우리를 이길 수 없게 하는 대비가 있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竊嘗以爲可特設一官하야 使獨任其責하야 而執政之臣 得以專治內事라하니이다
그러므로 은 일찍이 엎드려 생각하기를 ‘특별히 한 관원을 설치하고 책임을 홀로 맡게 해서 집정대신執政大臣들이 국내의 일을 오로지 다스릴 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苟天下之弊 莫不盡去하면 紀綱修明하고 食足而兵强하며 百姓樂業하고 知愛其君하야 卓然有不可勝之備 如此하리니 則臣固將備論而極言之호리이다
만일 천하天下의 병폐를 모두 제거한다면, 기강紀綱이 닦여 밝아지며 양식이 풍족하고 군대가 강하며 백성들이 생업을 즐거워하고 군주를 사랑할 줄 알아서 적이 우리를 이길 수 없게 하는 대비가 확고하게 마련됨이 이와 같을 것이니, 이 진실로 장차 자세히 논하고 지극히 말씀드리겠습니다.
夫天下將興 其積必有源하고 天下將亡 其發必有門하니 聖人者 唯知其門而塞之하니이다
천하天下가 장차 흥왕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누적되어 온 근원이 있고, 천하天下가 장차 망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비롯된 (단서)이 있으니, 성인聖人은 오직 그 단서를 알아서 막습니다.
古之亡天下者四 而天子無道不與焉이라
옛날에 천하天下를 멸망하게 한 것이 넷인데, 천자天子무도無道함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제후諸侯들이 강하고 핍박하여 망함에 이른 나라가 있으니, 나라와 나라가 이 경우입니다.
필부匹夫가 횡행하여 망함에 이른 나라가 있으니, 나라가 이 경우입니다.
대신大臣이 집권하여 망함에 이른 나라가 있으니, 나라와 나라가 이 경우입니다.
오랑캐들이 침략하여 망함에 이른 나라가 있으니, 나라와 후진後晉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使此七代之君 皆能逆知其所由亡之門하야 而塞之런들 則至於今 可以不廢어늘 惟其諱亡而不爲之備하고 或備之而不得其門이라 禍發而不救하니이다
만일 이 일곱 왕조의 군주들이 모두 말미암아 망하게 될 단서를 미리 알아서 막았더라면 그 왕조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을 터인데, 망하게 될 단서를 숨기고 대비하지 않았고, 혹 대비하더라도 그 방법을 제대로 얻지 못했기 때문에 화가 나타나도 구제하지 못한 것입니다.
夫天子之勢 蟠於天下하고 而結於民心者 甚厚
천자天子의 형세는 천하天下에 매우 두텁게 서려 있고 백성들의 마음에 깊이 맺혀 있습니다.
其亡也 必有大隙焉而日潰之하야
그러므로 망할 적에는 반드시 큰 틈이 있어서 날마다 서서히 무너집니다.
其窺之甚難하고 其取之甚密하야 曠日持久然後 可得而間이니 蓋非有一日卒然不救之患也
그리하여 엿보기가 매우 어렵고 취하기가 매우 은밀하여 오랫동안 시일을 소모한 뒤에야 틈을 엿볼 수 있으니, 이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서 구제할 수 없는 환란이 아닙니다.
是故 聖人 必於其全盛之時 而塞其所由亡之門하니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은 나라가 전성할 때에 말미암아 망하게 될 단서를 미리 막는 것입니다.
蓋臣以爲 當今之患 外之可畏者 이요 而內之可畏者 天子之民也
은 생각하건대 지금의 환란 중에 밖으로 두려워할 만한 것은 서융西戎(서하西夏)과 북적北狄()이고, 안으로 두려워할 만한 것은 우리 천자天子의 백성들이라고 여깁니다.
西戎, 北狄 不足以爲中國之大憂로되 而其動也 有以召內之禍하고 內之民 實執存亡之權이로되 而不能獨起하야 其發也 必將待外之變이니 先之以戎狄하고 而繼之以吾民이면 臣之所謂可畏者 在此而已니이다
서융西戎북적北狄은 중국의 큰 우환이 될 수 없으나 이들이 움직이면 내란의 화를 불러올 수 있고, 안에 있는 백성들은 실로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권한을 잡고 있으나 홀로 일어나지는 못해서 내란을 일으킬 적에 반드시 외부의 변고를 기다리니, 융적戎狄이 먼저 변란을 일으키고 뒤이어서 우리 백성들이 내란을 일으킨다면, 이 말하는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昔者 敵國之患 起於多求而不供이라
옛날 적국敵國의 환란은, 요구는 많은데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供者有倦이로되 而求者無厭하니 以有倦으로 待無厭이요 而能久安於無事 天下未嘗有也
공급하는 자는 지침이 있으나 요구하는 자는 만족함이 없으니, 지친 자가 만족함이 없는 자를 상대로 오랫동안 편안하여 무사했던 경우는 천하天下에 일찍이 있지 않았습니다.
夫二虜之患 特有遠近耳 而要以必至於戰하리이다
그러므로 저 두 오랑캐의 환란은 다만 멀고 가까운 차이만 있을 뿐, 요컨대 반드시 전쟁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敢問今之所以戰者 何也
감히 묻겠습니다, 지금의 전쟁에 대비하는 계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其無乃出於倉卒하야 而備於一時乎잇가
〈장구한 계책이 있지 못하고〉 창졸간에 나와서 일시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아닙니까?
且夫兵不素定하야 而出於一時인댄 當其危疑擾攘之間하야 而吾不能自必이면 則權在敵國이요 權在敵國이면 則吾欲戰不能하고 欲休不可
또 병략을 미리 정하지 못하여 일시적인 계책으로 나올 경우, 위태롭고 의심스럽고 소란한 때를 당하여 우리가 스스로 주도권을 잡는 것을 기필하지 못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적국에게 있게 되고, 주도권이 적국에게 있으면 우리는 싸우고자 해도 싸울 수 없고 휴전하고자 해도 휴전할 수 없게 됩니다.
進不能戰하고 而退不能休하면 則其計將出於求和 求和而自我 則其所以爲媾者必重하리니
나아가서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나서 휴전하지도 못하면 장차 화친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올 것이요, 우리가 먼저 화친을 요구하면 화친하는 데 대한 보상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軍旅之後 而繼之以重媾 則國用不足이요 國用不足이면 則加賦於民이요 加賦而不已 則凡暴取豪奪之法 不得不施於今之世矣
그리고 군대가 출동한 뒤에 많은 보상이 뒤따른다면 국가의 재정이 부족할 것이요,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지면 백성들에게 부세賦稅(세금)를 더 올릴 것이요, 부세賦稅를 더 올리고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포악하게 착취하고 강제로 빼앗는 법을 지금 세상에 시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天下一動이면 變生無方하리니 國之大憂 將必在此하리이다
그리하여 천하天下가 한 번 동요하면 변란이 생기는 것이 일정한 장소가 없을 것이니, 국가의 큰 우환은 장차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蓋嘗聞之컨대 用兵有權하니 權之所在 其國乃勝이라
이 일찍이 들으니 ‘용병用兵(전쟁)에는 주도권이 있으니, 주도권이 있는 나라가 마침내 이긴다.
是故 國無小大하고 兵無强弱하야 有小國弱兵而見畏於天下者 權在焉耳라하니이다
이 때문에 나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군대의 강하고 약함에 상관없이 작은 나라와 약한 군대로도 천하天下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주도권이 그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制於三尺之童하야弭耳而下之하야 曾不如狙猿之奮擲於山林하니 其故何也
천균千鈞의 무게가 나가는 큰 소가 삼척동자에게 제재를 받아 귀를 늘어뜨리고 복종해서 일찍이 원숭이가 산림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만 못하니, 그 이유는 어째서이겠습니까?
權在人也일새니이다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我欲則戰하고 不欲則守하야 戰則天下莫能支하고 守則天下莫能窺하니 昔者 秦嘗用此矣
우리가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수비해서, 싸우면 천하天下가 지탱하지 못하고 수비하면 천하天下가 엿보지 못해야 하니, 옛날에 나라가 일찍이 이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나라 군대가 함곡관函谷關의 관문을 열고 출정하여 제후諸侯들을 공격하면 제후諸侯들이 나라에게 땅을 떼어주며 화친하기를 요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諸侯割地而求和於秦호되 秦人 未嘗急於割地之利하야 若不得已而後應이라
그리하여 제후諸侯들이 땅을 떼어주며 나라에게 화친을 요구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은 일찍이 땅을 떼어 받는 이익을 급하게 여기지 않아서 항상 부득이 화친하는 것처럼 한 뒤에 요구에 응하였습니다.
諸侯常欲和하고 而秦常欲戰하니 如此 則權固在秦矣니이다
그러므로 제후諸侯들은 항상 화친하고자 하였고 나라는 항상 싸우고자 하였으니, 이와 같으면 진실로 주도권이 나라에 있게 됩니다.
且秦 非能强於天下之諸侯로되 秦惟能自必하고 而諸侯不能이라 是以 天下百變하야 而卒歸於秦하니이다
나라가 천하天下제후諸侯들보다 크게 강한 것이 아니었으나 나라만이 스스로 주도권을 기필하였고 제후諸侯들은 기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하天下가 백 번 변하여 끝내 나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제후諸侯들의 이로움은 진실로 합종合從에 있었는데, 아침에는 진진陳軫의 말을 따라 모여서 합종을 하다가 저녁에는 장의張儀의 계책을 따라 흩어져서 연횡連橫을 하였습니다.
秦則不然하야 橫人之欲爲橫 從人之欲爲從 皆使其自擇而審處之하니 諸侯相顧하야 而終莫能自必이면
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연횡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연횡하고자 하는 것과 합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합종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스스로 선택하여 쓰게 하고 자세히 살펴 대처하니, 제후諸侯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끝내 스스로 기필하지 못하였습니다.
則權之在秦 不亦宜乎잇가
그렇다면 주도권이 나라에게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嚮者 可以見矣니이다
지난 보원寶元 연간과 경력慶曆 연간에 있었던 하서河西의 전쟁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其始也 不得已而後戰하고 其終也 逆探其意하야 而與之和하고 又從而厚餽之하야 惟恐其一日復戰也하니 如此 則賊常欲戰하고 而我常欲和니이다
처음에는 부득이한 뒤에 싸웠고 종말에는 적의 뜻을 미리 탐지하여 저들과 화친하였고, 또 이어서 많은 세폐歲幣를 바쳐서 행여 하루라도 다시 싸울게 될까 두려워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적은 항상 싸우고자 하고 우리는 항상 화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賊非能常戰也 特持其欲戰之形하야 以乘吾欲和之勢하야 屢用而屢得志
적이 항상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싸우려는 형세를 유지하여 화친하고자 하는 우리의 형세를 이용해서, 여러 번 이 방법을 사용하여 그때마다 저들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是以 中國之大 而權不在焉이니이다
이 때문에 우리 중국에게 주도권이 있지 못한 것입니다.
欲天下之安인댄 則莫若使權在中國이요 欲權之在中國인댄 則莫若先發而後罷하니 示之以不憚하고 形之以好戰而後 天下之權 有所歸矣리이다
천하天下가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주도권이 중국에 있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주도권이 중국에 있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고 뒤에 그만두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우리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적에게 보여주고 전쟁을 좋아하는 뜻을 나타낸 뒤에야 천하天下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今夫庸人之論 則曰 勿爲禍始라하니 古之英雄之君 豈其樂禍而好殺이리오
지금 용렬한 사람들의 의논에 말하기를 “전쟁을 도발하여 의 단서를 만들지 말라.”고 하니, 옛날에 영걸스러운 군주들이 어찌 화를 일으키기를 좋아하고 살상하기를 좋아했겠습니까?
당 태종唐 太宗천하天下를 평정하고도 또 해마다 군대를 출동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였고, 말년에도 정벌을 늦추지 아니하여 천 리 밖에서 비바람을 맞으면서 직접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한 것이 두 번이었으니, 무릇 태종太宗이 이처럼 출정한 것은 모두 먼저 선제공격을 가하여 나라를 강한 위치에 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當時 群臣 不能深明其意하고 以爲敵國無釁이어늘 而我則發之라하니이다
당시에 여러 신하들은 태종太宗의 뜻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적국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우리가 전쟁을 일으킨다.”라고 비판하였습니다.
夫爲國者 使人備己 則權在我 而使己備人이면 則權在人이라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남으로 하여금 자기 나라를 대비하게 하면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게 되고, 자신이 남을 대비하면 주도권이 남에게 있게 됩니다.
當太宗之時하야 四夷하야 以備中國이라 中國之權하니이다
태종太宗 당시에는 사방 오랑캐들이 승냥이(이리)처럼 돌아보면서 중국을 대비하였으므로 중국의 주도권이 대단하게 된 것입니다.
苟不先之하면 則彼或以執其權矣 而我又鰓鰓(葸葸)焉惡戰而樂罷하야 使敵國으로 知吾之所忌하야 而以是取必於吾하리니 如此 則雖有天下라도 吾安得而爲之리잇고
만일 중국에서 선제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저들이 혹 주도권을 잡게 되었을 것이요, 게다가 또 우리 중국이 적을 두려워해서 싸우기를 싫어하고 전쟁을 그만두는 것을 좋아하여 적국으로 하여금 우리가 전쟁을 꺼린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이로써 우리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 갔을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비록 천하天下가 있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唐之衰也 惟其厭兵而畏戰하야 一有敗衂이면 則兢兢焉縮首而去之
나라가 쇠약해질 적에는 오직 병란을 싫어하고 전쟁을 두려워해서 한 번 패하면 두려워하고 두려워해서 고개를 숙이고 도망갔습니다.
是故 姦臣 執其權하야 以要天子러니
이 때문에 간신들이 권력을 잡고서 천자天子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헌종憲宗에 이르러서 분발하고 돌아보지 아니하여, 비록 다소 좌절하더라도 저상되지 않았습니다.
當此之時하야 天下之權 在於朝廷하야 伐之 則足以爲威하고 舍之 則足以爲恩이라
이때를 당해서는 천하天下의 주도권이 나라 조정에 있어서, 정벌하면 충분히 위엄이 되고 놓아주면 충분히 은혜가 되었습니다.
曰 先發而後罷하면 則權在我矣라하노이다
그러므로 은 말하기를 “우리가 먼저 전쟁을 도발하고 뒤에 그만두면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주
역주1 策斷 上 : 仁宗 嘉祐 6년(1061)에 蘇軾은 制科에 응시하여 당시에 만연되어 있는 사회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策 25편(〈策略〉 5편, 〈策別〉 17편, 〈策斷〉 3편)을 지어 仁宗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策斷〉 3편 가운데 첫 번째 편으로 본래의 제목은 〈策斷 一〉이다.
역주2 二虜爲中國患 : 二虜는 서쪽 변방의 西夏와 북쪽 변방의 遼나라를 가리키는바, 一本에는 ‘二虜’ 두 글자가 ‘西北’으로 표기되어 있다.
역주3 兵法曰 先爲不可勝以待敵之可勝 : 兵法은 《孫子兵法》으로 이 내용은 〈形篇〉에 보인다. 張預의 《孫子兵法十家注》에 “‘先爲不可勝’은 바로 ‘知己’에 해당하고, ‘以待敵之可勝’은 바로 ‘知彼’에 해당한다.”라고 注하였는데, ‘知彼知己’는 〈謀功〉에 “적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보인다.
역주4 諸侯强逼而至於亡者 周唐是也 : 周나라는 洛邑으로 천도한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는바, 이러한 내용은 《史記》 〈周本紀〉에 “平王이 즉위하자 犬戎의 침입을 피하여 도읍을 洛邑으로 옮겼다. 周나라는 平王 때에 이르러 衰微해졌는데, 세력이 강성한 제후들이 주위의 제후들을 병합하여 齊․楚․晉․秦 등이 비로소 강성해졌으며, 政事가 이들 方伯으로부터 나왔다.[平王立 東遷於雒邑 辟戎寇 平王之時 周室衰微 諸侯彊竝弱 齊楚秦晉始大 政由方伯]”라고 보인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周나라 왕실은 이미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여 天子國이라는 이름만이 남아 있었으며, 제후들이 서로 병탄하고 세력을 키워 패권을 다투다가 마침내 秦나라에 의해 天下가 통일되었다.
唐나라는 玄宗 이래로 藩鎭을 중시하여 安史의 亂이 발발하였으며, 安史의 亂 이후 藩鎭의 세력이 더욱 공고해져서 명목상으로는 唐나라의 신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독립된 할거 세력으로 戰國時代의 제후와 같았다. 이들은 각자의 세력 기반을 스스로 세습하였으며 왕실의 명령 없이 주변 세력을 무력으로 병탄하여 唐나라 왕실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는데, 朱全忠에 의해 907년에 멸망하였다. 安史의 난은 玄宗 天寶 14년(755)에 范陽節度使 安祿山이 간신 楊國忠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킨 데 이어, 그의 部將인 史思明이 일으킨 난을 이른다.
역주5 匹夫橫行而至於亡者 秦是也 : 匹夫는 보잘 것 없는 한 지아비란 뜻으로 陳勝을 이른다. 陳勝은 이름이 涉인데 吳廣과 함께 부역하는 戍兵들을 거느리고 현지로 가던 도중 장맛비가 내려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해 사형을 받게 될 처지에 놓이자, 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봉기하여 秦나라의 虐政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들이 봉기하자, 秦나라의 虐政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크게 동조하여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秦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끝내 멸망하였다.
賈誼의 〈過秦論〉에 “陳涉은 깨진 옹기로 창문을 내고 노끈으로 문지도리를 만든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요 남의 집 종살이하는 천한 사람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무리였다.
그의 재능은 中庸(中等)에 미치지 못하였고 仲尼와 墨翟의 어짊과 陶朱, 猗頓의 부유한 재산도 없었으나 行伍(兵卒)의 사이에서 출발하고 밭두둑의 가운데에서 몸을 일으켜 피폐하고 흩어진 군사들을 이끌고 수백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전전하면서 秦나라를 공격할 적에 나무를 베어 병기를 만들고 대나무를 들어 깃대를 삼으니, 天下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양식을 싸 짊어지고 그림자처럼 따라 山東 지방의 호걸들이 마침내 모두 일어나 秦나라 일족을 멸망시켰다.[陳涉 甕牖繩樞之子 甿隸之人 而遷徙之徒也 材能不及中庸 非有仲尼墨翟之賢 陶朱猗頓之富 躡足行伍之間 俛起阡陌之中 率疲散之卒 將數百之衆 轉而攻秦 斬木爲兵 揭竿爲旗 天下雲會響應 贏糧而景從 山東豪傑 遂竝起而亡秦族矣]”라고 보인다.
역주6 大臣執權而至於亡者 漢魏是也 : 漢나라는 前漢의 경우 大臣이었던 王莽의 찬탈로 멸망하였고, 後漢의 경우에는 武臣 董卓의 전횡 때문에 여러 제후들이 떨쳐 일어나 극심한 혼란을 겪다가 丞相 曹操의 아들 曹丕에게 멸망당하였다. 魏나라 또한 太傅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전횡하였으며, 정권이 司馬氏에게 세습되어 司馬懿의 아들 司馬師와 그의 아우 司馬昭로 이어지다가 결국 司馬昭의 아들 司馬炎(武帝)에 의해 제위를 찬탈당하여 멸망하였다.
역주7 蠻夷內侵而至於亡者 二晉是也 : 二晉은 西晉과 五代時代의 石氏의 後晉을 이른다.
西晉은 匈奴族이 건국한 漢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흉노족의 족장 劉淵이 西晉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漢王이라 칭하다가 308년에 平陽에 도읍하고 漢나라를 건국한 다음 황제를 칭하였는데, 310년에 劉淵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劉聰이 西晉을 공격하여 313년에 洛陽을 함락시키고 懷帝를 시해하였으며, 洛陽에서 도주하여 長安에서 즉위한 愍帝가 명맥을 유지하다가 316년에 劉曜에게 항복하자 西晉은 마침내 멸망하였다. 이후 司馬睿가 江東에서 즉위하니 이것이 바로 東晉인데, 이를 전후로 南北朝時代가 전개되어 백여 년 동안 중국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큰 혼란에 빠졌다.
五代時代의 後晉은 後唐의 河東節度使였던 石敬瑭이 契丹의 도움을 받아 건국하였는데 이 때문에 契丹에 화북의 燕雲 16州를 떼어주고 매년 비단 30만 필을 조공으로 바쳤다. 石敬瑭이 죽고 그의 조카인 石貴重이 즉위한 다음 契丹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契丹은 즉각 군대를 남하시켜 947년에 後晉을 멸망시켰다.
역주8 西戎北狄 : 西夏와 遼나라를 이른다. 戎과 狄은 서쪽과 북쪽의 오랑캐를 지칭하는 말로 동쪽은 東夷, 남쪽은 南蠻이라 칭한다.
역주9 千鈞之牛 : 鈞은 고대의 重量 단위로 30斤을 이른다. 千鈞은 3萬 斤으로, 실제로 소의 무게가 이처럼 무거운 것이 아니라 몸집이 크고 무거움을 형용한 것이다.
역주10 開關出征……則諸侯莫不願割地而求和 : 關은 函谷關을 이른다. 函谷關은 黃河 남안의 靈寶 남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동쪽 中原으로부터 서쪽 關中(지금의 西安)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곳은 동서 20여 리에 걸친 황토층의 깊은 골짜기로 兩岸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어 그 모양이 마치 函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는바, 秦나라 당시 이곳은 秦나라를 보호하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에 天下第一關으로 불렸다. 秦나라는 函谷關을 나와 여러 제후국들을 침략하였는데, 침략당한 나라들은 대부분 영토를 할양하고 강화를 맺었다.
역주11 朝聞陳軫之說……而散爲橫 : 陳軫은 전국시대 때 游說家로 楚나라 夏邑(지금의 河南省 商邱市) 사람이다. 처음에는 張儀와 함께 秦 惠王을 섬겨 서로 총애를 다투었는데, 惠王이 張儀를 중용하여 相國으로 임명하자, 楚나라로 돌아갔다.
秦나라가 齊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齊나라와 楚나라가 맹약을 맺고 있어서 감히 齊나라를 공격할 수가 없었다. 이에 秦나라는 두 나라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 張儀를 楚나라에 보내 齊나라와의 맹약을 파기하고 秦나라와 맹약할 것을 설득하였다. 신하들이 모두 찬성하였으나 오직 陳軫만은 이것이 秦나라의 흉계임을 알아채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楚 懷王은 陳軫의 말을 듣지 않고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楚․齊의 사이가 멀어졌으며 懷王은 끝내 秦나라에 들어갔다가 억류당해 秦나라에서 죽었다.
從은 蘇秦이 주장한 合從策으로 秦나라 외의 여러 제후들이 연합하여 秦나라에 대항하는 정책이며, 橫은 張儀가 주장한 連橫策으로 自國의 이익만을 우선하여 秦나라와 우호관계를 맺는 정책이다.
그러나 東坡의 말이 당시 제후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合從을 陳軫의 주장이라고 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陳軫을 蘇秦의 오류로 보아 여러 제후들이 처음에는 蘇秦의 合從策을 따랐다가 곧바로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合從策을 버리고 連橫한 것을 비판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合從은 合縱으로, 連橫은 連衡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역주12 寶元慶曆之間 河西之役 : 寶元(1038~1039)과 慶曆(1041~1048)은 모두 宋 仁宗 때의 年號이다. 寶元 원년에 西夏의 元昊가 처음 황제를 칭하자 宋나라가 공격하여 西夏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은 慶曆 4년에 宋나라가 매년 歲幣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講和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역주13 唐太宗旣平天下……以從事於夷狄 : 《唐書》 〈太宗本紀〉에 의하면, 太宗은 貞觀 3년(629)에 突厥을 정벌하고 貞觀 8년(634)에 吐谷渾을 정벌하고 貞觀 12년(638)에 吐藩을 정벌하고 貞觀 13년(639)에 高昌을 정벌하고 貞觀 15년(641)에 薛延陀를 정벌하여 거의 매년 주변의 오랑캐 세력들을 정벌하였다.
역주14 暴露於千里之外 親擊高麗者再焉 : 暴露는 노천에서 따가운 햇볕과 비바람에 시달리며 野營함을 이른다. 高麗는 高句麗이다. 貞觀 18년(644) 주변의 세력들을 평정한 太宗은 당시 가장 강성한 高句麗를 정벌하기 위해 親征에 나섰다. 張亮을 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江淮, 嶺峽의 군사 4만 명과 戰艦 500 척을 거느리고 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平壤으로 진출하게 하고, 李勣(李世勣)을 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步騎 6만과 蘭州․河州 등에서 항복한 胡兵을 거느리고 遼東으로 나가 합세하여 함께 전진하게 하였다.
다음 해 唐軍은 遼河를 건너 高句麗를 공격하여 遼東城 등 10여 개의 城을 함락하였으나 安市城에서 高句麗軍의 강력한 저항을 만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군량이 떨어지고 매서운 추위에 일부 병사들이 얼어 죽자 철군하였다.
이후 貞觀 21년부터 貞觀 22년에 걸쳐 太宗은 李勣으로 하여금 계속 高句麗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뚜렷한 전공을 얻지 못하다가 貞觀 23년에 太宗이 죽자, 高句麗 침공은 일단 중지되었다.
李勣은 본래의 姓名이 徐世勣이었는데, 唐나라의 國姓인 李氏姓을 하사받고 뒤에 太宗 李世民의 ‘世’字를 諱하여 李勣으로 썼는바, 高宗 때에 大總官이 되어 高句麗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역주15 狼顧 : 이리는 의심이 많아 항상 뒤를 돌아보므로 두려워하면서 조심스럽게 처신함을 이로써 비유하였다.
역주16 憲宗奮而不顧……舍之則足以爲恩 : 憲宗(778~820)은 唐나라 제11대 황제로 德宗의 손자이고 順宗의 아들이며 이름은 純이다. 永貞 원년(805)에 즉위한 順宗이 중풍을 앓자, 바로 동년에 양위하여 황제에 올랐다.
憲宗은 과단성이 있어 민심을 추스르고 황권을 강화하였다. 淮蔡節度使 吳少誠이 죽고 그의 아들 元濟가 스스로 후사가 되어 세습을 청하였으나 憲宗이 허락하지 않자, 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武元衡과 裵度만이 토벌을 청하고, 나머지 신하들은 모두 吳元濟의 청을 들어주어 사태를 수습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憲宗은 과감히 토벌을 강행하였는데, 때마침 唐鄧節度使 高霞寓가 토벌전에 패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대부분 군대를 해산하고 토벌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憲宗은 “이기고 지는 것은 兵家의 보편적인 형세이다.[一勝一負 兵家常勢]”라고 일축하고, 裵度를 淮西節度使에 제수하고 군대를 증강하여 蔡州를 공격하게 하여 마침내 吳元濟를 사로잡았다.
憲宗에 대해서는 《新唐書》 〈憲宗本紀〉 贊에 “憲宗은 성품이 굳세고 분명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즉위 이래로 慨然히 분발하여 참람한 叛徒들을 평정하는데 뜻을 두어 충성스런 謀策을 잘 따르고 여러 신하들의 의논에 미혹되지 않아 끝내 성공하였다. 吳元濟를 주벌한 뒤로 강성한 藩鎭들과 사나운 장수들이 모두 과오를 뉘우치고 순종하니, 이때를 당하여 唐나라의 威令이 거의 다시 떨치게 되었다.[憲宗剛明果斷 自初卽位 慨然發憤 志平僭叛 能用忠謀 不惑羣議 卒收成功 自吳元濟誅 彊藩悍將 皆欲悔過而効順 當此之時 唐之威令 㡬於復振]”라고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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