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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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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0. 크게 탄식하다 진소장秦少章을 전송하다
奇偉之氣不可遏이라
기이하고 뛰어난 기운을 막을 수가 없다.
하야 云 孝章 實丈夫之雄者也
공북해孔北海(공융孔融)가 조공曹公(조조曹操)에게 준 편지에 성효장盛孝章(성헌盛憲)을 논하여 말하기를 “효장孝章은 실로 뛰어난 장부이다.
游談之士 依以成聲이어늘 今之少年 喜謗前輩하야 或譏評孝章하니 孝章 要爲有天下重名하야 이라하니라
유세遊說하는 선비들이 그를 의지하여 명성을 이루었는데, 지금 연소年少한 자들이 선배를 비방하기 좋아하여 혹 성효장盛孝章을 비방하니, 성효장盛孝章은 요컨대 천하에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어서 구목九牧의 사람들이 함께 칭찬하고 감탄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吾讀至此 未嘗不廢書太息也로라
내가 글을 읽다가 이 부분에 이르면 일찍이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曰 嗟乎
아! 슬프다.
英偉奇逸之士 不容於世俗也 久矣
영특하고 거룩하고 기이한 선비들이 세속世俗에 용납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雖然이나 自今觀之하면 孔北海, 盛孝章 猶在世로되 而向之譏評者 與草木同腐 久矣니라
그러나 지금 살펴보면 공북해孔北海성효장盛孝章은 아직도 명성이 세상에 남아 있는데, 지난번에 이들을 비난하던 자들은 초목草木과 함께 썩은 지 오래되었다.
吾擧進士하야 試於禮部할새 見吾文하고 曰 此 我輩人也 吾當避之라하시니라
옛날 내가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예부禮部에서 시험볼 적에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구양수歐陽脩)이 내 글을 보고 말씀하기를 “이 사람은 〈그 문장과 학문의 수준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니, 내 마땅히 그에게 양보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러니 曾未數年 忽焉若潦水之歸壑하야 無復見一人者하니 此豈復待後世哉리오
이때에 선비들이 표절하고 베끼는 것을 작문作文하는 일로 여겨 모여서 나를 비방하였고, 또 곳곳마다 을 비방하는 자들이 시장을 이룰 정도로 많았는데, 일찍이 몇 년이 못 되어 장맛물이 갑자기 도랑으로 빠진 것과 같아서 다시는 한 사람도 볼 수 없었으니, 이 어찌 다시 후대를 기다리겠는가?
今吾衰老廢學하야 自視缺然이로되 而天下之士 不吾棄하고 以爲可以與於斯文者 猶以文忠公之故也니라
지금 내가 노쇠하여 학문을 버려두고 하지 않아서 스스로를 돌아보면 부족한데, 천하天下의 선비들이 나를 버리지 않고 아직도 내가 사문斯文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충공文忠公의 칭찬 때문이다.
此兩人者 士之超逸絶塵者也 非獨吾云爾 二三子亦自以爲莫及也
장문잠張文潛(장뢰張耒)과 진소유秦少游(진관秦觀), 이 두 사람은 선비 중에 초일超逸하여 세속을 뛰어넘은 자이니, 이것은 비단 나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요, 저 사람들도 스스로 남들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士駭於所未聞하야 不能無異同이라
그런데 선비들은 듣지 못한 바에 놀라서 이동異同의 논의가 없지 못하다.
紛紛之言 常及吾與二子하니 吾策之審矣
그러므로 분분紛紛하게 비방하는 말이 항상 나와 두 사람에게 미치니, 내 이것을 분명하게 깨우쳐주겠다.
士如良金美玉하야 市有定價하니 豈可以愛憎口舌 貴賤之歟리오
선비는 좋은 금과 아름다운 옥과 같아서 시장에 정해진 값이 있으니, 어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말로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할 수 있겠는가?
少游之弟少章 復從吾游러니 不及期年 而論議日新하야 若將施于用者하니 欲歸省其親호되 且不忍去
진소유秦少游의 아우 소장少章(진구秦覯)이 다시 나를 따라 교유交游하였는데, 1이 못 되어 그의 의논이 날로 새로워져서 장차 쓰일 듯하니, 돌아가서 어버이에게 문안하고자 하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嗚呼
아!
子行矣하야 歸而求諸兄이면 吾何加焉이리오
그대는 떠나가서 돌아가 에게서 찾는다면 내 어찌 그대 형보다 낫겠는가?
作太息一篇하야 以餞其行하노니 使藏于家라가 三年然後出之하라
태식太息〉 한 편을 지어서 떠나는 길을 전송하니, 이 글을 집에 간직해두었다가 3년 후에 꺼내보아라.
역주
역주1 太息 送秦少章 : 이 글은 哲宗 元祐 5년(1090) 정월에 쓰였다. 秦少章은 이름이 覯이고 少章은 그의 字인데 揚州 高郵(지금의 江蘇省 高郵縣) 사람이다. 元祐 6년에 진사로 출사하여 臨安縣의 主簿를 역임하였으며 詩文에 능하여 명성이 있었다. 秦少游(秦觀)의 아우로 형제가 모두 東坡를 師事하였다. 本集에는 이 글 끝에 ‘元祐五年正月卄五日’이라는 아홉 字가 있다.
역주2 孔北海與曹公論盛孝章 : 孔北海는 孔融(153~208)으로 魯國(지금의 山東省 曲阜) 사람인데 字가 文擧이며 孔子의 후손이다. 後漢 獻帝 建安 연간에 학문이 뛰어난 문사들을 일컫는 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北海相으로 있으면서 功을 세워 孔北海로 알려지고 고상한 풍류로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曹公은 曹操(155~220)로 字가 孟德이고 廟號는 太祖이며 諡號는 武帝이다. 沛國 譙縣 사람으로 後漢 말기 黃巾賊의 난에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여러 군벌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승승장구하여 獻帝로부터 魏王에 봉해졌다. 뒤에 아들 曹丕가 선양을 받아 魏나라 황제가 된 뒤에 太祖 武帝로 추존되었다.
盛孝章은 後漢 말기의 명사로 이름이 憲이고 孝章은 그의 字인데 會稽 사람으로 器局과 度量이 고아하고 컸다. 吳郡太守를 지내다가 病으로 사직하였으나 孫權에게 탄압받아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평소 절친했던 孔融이 이 사실을 알고 당시 司空 兼 車騎將軍으로 있던 曹操에게 서신을 보내 盛孝章을 천거하며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曹操가 盛孝章을 불러 都尉로 삼고자 하였으나, 임명장이 이르기 전에 孫權에게 살해당하였다.
역주3 九牧之人 所共稱歎 : 九牧은 九州와 같은 말로 禹임금이 水土를 다스린 뒤에 천하를 冀州․兗州․青州․徐州․揚州․荆州․梁州․雍州․豫州의 아홉 州로 나누었는데, 후세에는 중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활용되었다. 이 내용은 孔融이 曹操에게 준 편지에 盛孝章을 높이 칭찬한 말이다.
역주4 歐陽文忠公 : 北宋의 저명한 정치가이며 문장가인 歐陽脩(1007~1071)로, 文忠公은 그의 시호이다. 字는 永叔이고 號는 醉翁 또는 六一居士이며 廬陵 사람이다.
역주5 方是時……所在成市 : 당시에는 과거시험에 聲律을 위주로 하여 이를 太學體라 하고 이 文體로 선비를 선발하니, 선비들이 다투어 괴벽하고 난삽한 문장을 지었다. 歐陽脩가 嘉祐 2년(1057)에 知貢擧가 되어 예전의 병폐를 통렬히 비판하고 東坡 형제를 선발하자, 경박한 자들이 모여 歐陽脩를 비방하고, 심지어는 그의 말 머리를 포위하고 욕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宋史 歐陽脩傳》
역주6 張文潛秦少游 : 張文潛(1054~1114)은 이름이 耒로 文潛은 字이며 楚州 淮陰(지금의 淮安市) 사람이다. 熙寧 연간에 진사로 출사하였는데 蘇軾에게 인정을 받고 깊이 교유하였다.
秦少游(1049~1100)는 이름이 觀으로 少游는 그의 字이고 號는 淮海居士이다. 元豐 8년(1085)에 진사로 출사하여 蔡州敎授와 秘書省正字 등을 역임하였는데, 아름답고 사색적인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두 사람은 黃庭堅․晁補之와 함께 蘇門四學士(蘇東坡 문하의 네 학사)로 칭해진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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