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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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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남안군南安軍학교學校에 대한 기문記文
此等文軸 多澹宕하야 不可爲法이라
이러한 문장은 담박澹泊하고 호탕한 것이 많아서 법으로 삼을 수 없다.
考年譜하면 乃安置時所作이니라
연보年譜를 살펴보면 바로 동파東坡담주儋州에 안치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古之爲國者四 也, 也, 封建也, 學校也러니 今亡(無)矣 獨學校僅存耳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네 가지였으니 정전井田육형肉刑봉건封建학교學校였는데, 지금 다 없어지고 오직 학교學校만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古之爲學者四 其大則取士論政하고 其小則弦誦也러니 今亡矣 直誦而已
옛날에 학교에서 시행한 것이 네 가지였으니, 큰 것은 선비를 뽑고 정사를 논하고, 작은 것은 현악기를 타고 글을 외우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오직 외우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임금의 말씀에 “여러 완악하여 참소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 만약 이 충직忠直함에 있지 않으면,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힘으로써 이것을 밝히며 종아리를 쳐서 잘못을 기억하게 하며 작은 잘못을 글에 써서 기억하게 하여, 함께 살고자 해야 한다.
工以納言으로 時而颺之하야 格則承之庸之하고 否則威之라하시니라
악공樂工이 이들이 바친 말을 가지고 때로 드날려서 이들이 악행을 고쳐서 바로잡혔으면[] 올려서[] 등용하고, 바로잡히지 않았으면 위엄을 보인다.”라고 하셨다.
格之言 改也 이라하고 承之言 薦也 라하니라
이라는 말은 고친다는 뜻이니 《논어論語》에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잘못을 고칠 것이다.[유치차격有恥且格]”라고 하였고, 이라는 말은 천거해서 올린다는 뜻이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제맹齊盟(동맹同盟)에 쓸 희생犧牲을 받들어 올린다.[봉승제희奉承齊犧]”라고 하였다.
庶頑讒說하야 不率是敎者 舜皆有以待之하시니 夫化惡 莫若進善이라
완악하여 참소하는 말을 해서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여러 사람들을 임금이 모두 대처함이 있었으니, 을 교화하는 것은 한 사람을 올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擇其可進者하야 以射侯之禮 擧之하고
그러므로 올려줄 만한 자를 가려서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히는 로써 등용하였다.
其不率敎甚者 則撻之하고 小則書以記之하니 非疾之也 欲與之竝生而同憂樂也
그리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 중에 심한 자는 종아리를 치고 심하지 않은 자는 글에 써서 기억하게 하였으니, 이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요, 더불어 살면서 근심과 즐거움을 함께하고자 하신 것이었다.
士之有罪로되 而尙未可棄者 使樂工으로 採其謳謠諷議之言而颺之하야 以觀其心하야 其改過者 則薦之하고 且用之하며 其不悛者 則威之屛之하야 之類 是也 舜之學政也니라
이는 선비 중에 죄가 있으나 아직 버릴 만하지 않은 자이므로,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가요와 풍의諷議하는 말을 채집하여 드날려서 그 마음을 관찰하게 하여, 허물을 고친 자는 올려서 천거하고 또 등용하며, 고치지 않은 자는 위엄을 보이고 물리쳐 먼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는 따위가 이것이니, 이는 임금의 학정學政이다.
射之中否 何與於善惡이완대 而侯以明之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히고 맞히지 못하는 것이 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어째서 과녁으로 하고 함을 밝혔는가?
何也 (由)[曰]射 所以致衆而論士也 衆一而後 論定이라
이는 활쏘기가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서 선비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니,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인 뒤에야 의논이 정해지는 것이다.
하니 由此觀之하면 以射致衆하고 衆集而後論士 蓋所從來遠矣니라
공자孔子께서 확상矍相의 마당에서 활을 쏘실 적에 구경꾼이 담처럼 모여 있었는데, 제자들로 하여금 술잔을 들어 올리고 차례대로 구경꾼을 세 번 내치게 하자 남아 있는 자가 겨우 몇 명뿐이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활쏘기로 여러 사람을 불러 모으고 사람들이 모인 뒤에 선비를 논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반궁泮宮에 있으면서 죄수를 바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반궁泮宮에 있으면서 죽인 적의 왼쪽 귀를 바친다.”라고 하였으며,《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학궁學宮에서 〈전쟁을 위해〉 이루어놓은 계책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향교鄕校에서 노닐면서 집정대신執政大臣을 비판하자, 혹자가 자산子産에게 이르기를 “향교鄕校를 헐어버리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子産曰 不可하다
이에 자산子産이 대답하기를 “안 됩니다.
善者 吾行之하고 不善者 吾改之 是吾師也라한대
사람들이 향교에 가서 비판하는 말 중에 좋은 것은 내가 그것을 실행하고 또 좋지 못한 것은 내가 그것을 고치면, 이것이 곧 나의 스승입니다.”라고 하였다.
孔子聞之하시고 謂子産仁人이라하시니라
공자孔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자산子産한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셨다.
古之取士論政者 必於學하니 有學而不取士하고 不論政하면 猶無學也
옛날에 선비를 뽑고 정사를 논하는 것을 반드시 학궁學宮에서 하였으니, 학궁學宮이 있는데도 선비를 취하지(선발하지) 않고 정사를 논하지 않는다면 학궁學宮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學莫盛於東漢하니
학교學校동한시대東漢時代보다 더 성한 적이 없다.
士數萬人 하야으로 皆折節下之하고 常出其口하니 其取士論政 可謂近古
선비 수만 명이 마른 나무에 숨을 불어넣어 살게 만들고 산 나무에 숨을 불어넣어 말라 죽게 해서, 삼공三公구경九卿으로부터 모두가 허리를 굽혀 그들에게 몸을 낮추었고, 삼부三府에서 사람들을 천거하여 관직을 제수할 적에 항상 그들의 입에서 나왔으니(결정되었으니), 선비를 가려 뽑고 정사를 논한 것이 옛날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나 卒爲 何也
그러나 끝내 이것이 당고黨錮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曰 此 王政也 王者不作이어늘 而士自以私意行之於下 其禍敗固宜니라
이것은 왕자王者정사政事이니, 왕자王者가 나오지 않았는데 선비들이 자기들끼리 아래에서 사사로운 뜻으로 행한다면, 그 화패禍敗를 당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朝廷以來 三致意於學矣
우리 조정은 경력慶曆희령熙寧소성紹聖 연간으로부터 이후로 세 번 학정學政에 마음을 다하였다.
이라도 必有學이어든 況南安 江西之南境으로 儒術之富 與이요 而太守朝奉郞曹侯登 以治郡顯聞하야 所至 必建學이라
그리하여 비록 먼 지방의 군현郡縣이라도 반드시 학교學校가 있는데, 더구나 남안南安강서江西의 남쪽 지역으로 유학자儒學者의 많음이 지방과 대등하고, 태수太守조봉랑 조후朝奉郞 曹侯 을 잘 다스리기로 크게 소문나서 부임하는 곳마다 반드시 학교學校를 세웠다.
南安之學 甲於江西하니라
이 때문에 남안南安학교學校강서江西 지방의 으뜸이 되었다.
仁人也 而勇於義
조후曹侯(조등曹登)는 어진 사람이고 의리를 행함에 용감하였다.
其建是學也 以身任其責하야 不擇劇易하고 期於必成하니 士以此感奮하야 不勸而力하고 費於官者 爲錢九萬三千이요 而助者不貲
그가 학교學校를 세울 적에 몸소 책임을 맡아서 일의 어렵고 쉬움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완성할 것을 기약하니, 선비들이 이 때문에 감격하고 분발하여 권면하지 않아도 힘썼으며, 에서 돈을 소비한 것이 9만3천 이고, 민간에서 도운 것도 적지 않게 많았다.
爲屋百二十間하야 禮殿講堂 視夫之居하며 凡學之用 莫不嚴具
120칸짜리 집을 지어서 예전禮殿(대성전大成殿)과 강당講堂방군邦君의 거처에 비교할 만하였으며, 학교學校의 모든 기물들이 엄격히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又以其餘 增置廩給하야食數百人하니 始於紹聖二年之冬하야 而成於四年之春이라
그리고 또 남은 돈을 가지고 곡식을 마련하여 수백 명의 생도를 먹이고 있었는데, 소성紹聖 2년(1095) 겨울에 시작하여 4년 봄에 완성되었다.
學成而侯去하야 今爲潮州하니라
조후曹侯학교學校가 완성되자 떠나서 지금은 지조주사知潮州事로 있다.
自海南還할새 過南安하야 見聞其事
나는 해남도海南島에서 돌아올 적에 남안南安을 지나면서 이 일을 자세히 보고 들었다.
爲詳이라 士旣德侯不已하야 乃具列本末하야贏糧而從軾者 三百餘里하야 願紀其實이라
선비들은 이미 조후曹侯은덕恩德을 고마워해 마지않아서, 마침내 이 일의 본말本末을 자세히 열거하여 식량을 싸 짊어지고 나를 3백여 리를 따라오면서 그 사실을 기록해줄 것을 원하였다.
夫學 王者事也
학교學校왕자王者의 일이다.
首以舜之學政告之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맨 먼저 임금의 학정學政을 가지고 말하였다.
이나 遠矣하야 不可以庶幾어니와 有賢太守하면 猶可以爲鄭子産也하니 學者勉之하야 無愧於古人而已니라
그러나 임금은 세대가 멀어서 거의 바랄 수 없지만 어진 태수太守가 있어서 그래도 나라의 자산子産은 될 수가 있으니, 배우는 자들은 노력해서 고인古人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唐荊川曰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蘇文 本尙馳騁이요 而此作 尤渙散하야 不肯受約束이라
소동파蘇東坡의 문장은 본래 자유분방한 것을 숭상하였고, 이 작품은 더더욱 산만하여 제약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나 惟長公可耳 歐, 曾集內 無此也하니라
그러나 오직 장공長公(소식蘇軾)만이 이렇게 지을 수 있으니, 구양수歐陽脩증공曾鞏문집文集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
역주
역주1 南安軍學記 : 本集에는 이 글의 말미에 ‘建中靖國元年三月四日 奉郞提擧成都府玉局觀 眉山蘇軾書’ 25字가 있다. 이로써 이 글이 建中靖國 元年(1101)에 쓰였으며, 이때 蘇軾이 奉郞 提擧成都府玉局觀으로 在任하였음을 알 수 있다. 南安軍은 당시 江南西路에 속한 軍(郡)의 명칭인데, 지금의 江西省에 있었다.
역주2 儋州 : 지금의 海南島로 宋나라 초기에는 본래 儋州였으나, 熙寧 6년(1073)에 昌化軍으로 격하되었다. 東坡는 1097년부터 1100년까지 이곳에 안치되어 있었다.
역주3 井田 : 周나라의 井田法을 이른다. 井田이란 사방 1里의 땅을 네모반듯하게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해서 8가구의 농민들에게 지급하여 경작하게 하는 법이다. 이때 배분받은 면적은 각 100畝인데 이것이 私田이 되며, 한 가운데의 100畝는 公田이라 하여 국가에 바치는 세금으로 충당하였다.
역주4 肉刑 : 肉辟이라고도 하는데, 墨刑․劓刑․刖刑․宮刑․大辟 등 다섯 가지 육체에 가하는 형벌을 이른다. 墨刑은 이마에 刺字하는 형벌이고, 劓刑은 코를 베는 형벌이고, 刖刑은 발꿈치를 베는 형벌이고, 宮刑은 거세하는 형벌이고, 大辟은 사형이다.
역주5 舜之言曰……否則威之 : 이 내용은 《書經》 〈虞書 益稷〉에 그대로 보인다.
역주6 論語曰 有恥且格 : 《論語》 〈爲政〉에 “인도하기를 法으로써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刑罰로써 하면 백성들이 형벌만 면하려 하고 부끄러워함이 없을 것이다. 인도하기를 德으로써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禮로써 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잘못을 고칠 것이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라고 보이는데, 朱子의 《論語集註》에 ‘格’을 ‘이를 至’ 字로 보아 ‘善에 이를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그 다음에 東坡의 설을 취하였다.
역주7 春秋傳曰 奉承齊犧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昭公 13년에 “叔向이 〈齊人에게〉 말하기를 ‘밝으신 先王의 제도는 제후에게 해마다 聘問하여 朝貢의 일에 專心하게 하고, 3년마다 朝見하여 禮節을 익히게 하고, 6년마다 會合하여 天子가 威嚴을 보이고, 12년마다 盟約하여 信義를 밝혔습니다. 聘問하여 貢賦에 專心하게 하고 朝見하여 禮節의 등차를 익히게 하고 회합하여 威嚴을 보이고 信義를 神에게 밝게 고하는 일을 예로부터 누구도 어기지 않았으니, 存亡의 道가 항상 여기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우리 晉나라는 先王의 禮에 따라 會盟을 주관하면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齊盟(同盟)에 쓸 犧牲을 받들어 임금님(齊侯)께 고하고서 일이 잘 마무리되기를 바랐는데, 임금님께서 「나는 기어이 이 일을 폐지시키겠다.」라고 하시니, 굳이 齊盟할 것이 있겠습니까? 임금님께서 생각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齊人이 두려워하여 대답하기를 ‘小國이 말을 하면 大國이 裁斷하는 것이니,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미 가르침을 들었으니 恭敬히 받들고 가서 회맹에 참가하겠습니다만, 출발의 더디고 빠름은 晉君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하였다.[叔向曰……明王之制 使諸侯歲聘以志業 間朝以講禮 再朝而會以示威 再會而盟以顯昭明 志業於好 講禮於等 示威於衆 昭明於神 自古以來 未之或失也 存亡之道 恒由是興 晉禮主盟 懼有不治 奉承齊犧 而布諸君 求終事也 君曰 余必廢之 何齊之有 唯君圖之 寡君聞命矣 齊人懼對曰 小國言之 大國制之 敢不聽從 旣聞命矣 敬共以往 遲速唯君]”라고 보인다.
杜預는 《春秋左氏經傳集解》에서 “齊犧는 齊盟에 쓰는 犧牲을 이른다.”라고 注하였다.
역주8 僰之寄之 : 《禮記》 〈王制〉에 “王이 三公․九卿․大夫․元士에게 명하여 모두 학교에 들어와 배우게 하고서,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王이 직접 학교를 시찰하며,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王이 3일 동안 성찬을 들지 않고 먼 지방으로 물리치되, 西方을 棘이라 하고 동방을 寄라 하니, 종신토록 선비의 대열에 끼워주지 않는다.[王命三公九卿大夫元士 皆入學 不變 王親視學 不變 王三日不擧 屛之遠方 西方曰棘 東方曰寄 終身不齒]”라고 보인다.
鄭玄의 注에는 이에 대해 “棘은 마땅히 僰이 되어야 한다. 僰은 핍박을 말하니, 하여금 夷狄에게 붙어서 핍박받게 하는 것이다.[注棘當僰 僰之言偪 使之偪寄於夷戎]”라고 注하였다.
그러나 陳澔는 《禮記集說》에서 “鄭玄의 注에 ‘棘을 僰이라 하였고 또 僰을 핍박함이다.’라고 하였으나, 僰은 본래 西戎의 지명이다. 나는 본래의 글자대로 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한다.[鄭注 以棘爲僰 又以僰訓偪 僰本西戎地名 愚謂不若讀如本字]”라고 注하여 鄭玄과 견해를 달리하였다.
역주9 孔子射於矍相之圃……則僅有存者 : 이 내용은 《禮記》 〈射義〉에 “孔子가 矍相의 마당에서 활을 쏘실 적에 구경꾼이 담처럼 에워싸고 있었는데, 활쏘기가 司馬에 이르자 子路를 시켜서 활과 화살을 잡고 나아가 활을 쏠 사람을 맞이하면서 이르기를 ‘敗軍한 장수와 나라를 망하게 한 大夫와 남의 養子가 두 번 이상 된 자는 들어오지 말고, 그 나머지는 모두 들어오시오.’라고 하니, 떠나가는 자가 半이고 들어오는 자가 半이었다.
또다시 公罔裘와 序點으로 하여금 술잔을 들고 말하게 하시니, 公罔裘가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어리고 장성하여 효도하고 공경하며, 늙어서 禮를 좋아하여 流俗을 따르지 아니하여, 몸을 닦고 죽음을 기다리는 자가 계십니까? 이러한 분은 이 자리에 머무시오.’라고 하니, 떠나는 자가 半이었고 머무는 자가 半이었다.
序點이 또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며, 禮를 좋아하여 변치 않으며, 90세와 100세가 되어도 道를 말함에 어지럽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이러한 분은 이 자리에 머무시오.’라고 하니, 겨우 몇 명이 남아 있었다.[孔子射於矍相之圃 蓋觀者如堵牆 射至于司馬 使子路 執弓矢 出延射曰 賁(僨)軍之將 亡國之大夫 與爲人後者不入 其餘皆入 蓋去者半 入者半 又使公罔之裘序點 揚觶而語 公罔之裘 揚觶而語曰 幼壯孝弟 耆耋好禮 不從流俗 修身以俟死者 不 在此位也 蓋去者半 處者半 序點 又揚觶而語曰 好學不倦 好禮不變 旄期 稱道不亂者 不 在此位也 蓋僅有存者]”라고 보인다.
역주10 詩曰……在泮獻馘 : 泮은 泮宮으로 제후국의 太學을 이른다. 이 내용은 《詩經》 〈魯頌 泮水〉의 제5장에 “밝고 밝으신 魯侯여! 능히 그 德을 밝히셨도다. 이미 泮宮을 지으니, 淮夷들이 복종하는 바로다. 굳세고 굳센 범 같은 신하들이 泮宮에서 賊의 왼쪽 귀를 바치며, 皐陶와 같이 신문을 잘하는 자가 泮宮에서 죄수를 바치리로다.[明明魯侯 克明其德 旣作泮宮 淮夷攸服 矯矯虎臣 在泮獻馘 淑問如皐陶 在泮獻囚]”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의 《詩經集傳》에 “馘은 잡은 적의 왼쪽 귀이다. 淑은 잘함이요, 問은 죄수를 신문하는 것이다. 囚는 사로잡은 죄수들이다. 옛날에 出兵할 적에는 學宮에서 이루어진 法을 받고, 돌아옴에 미쳐서는 學宮에서 釋奠하고 신문할 자(포로)와 왼쪽 귀를 베어온 것을 告하였다. 그러므로 詩人이 魯侯가 泮宮에 있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功이 있기를 기원한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11 禮曰 受成於學 : 學은 太學으로, 이 내용은 《禮記》 〈王制〉에 “天子가 장차 출정하려 하면 上帝께 類제사를 지내고 社에 宜제사를 지내며, 아버지 사당에 造제사를 지내고 정벌하는 땅에서 禡제사를 지내며 祖廟에서 출정의 길흉을 점치고 학교에서 이루어진 계책을 결정한다.[天子將出征 類乎上帝 宜乎社 造乎禰 禡於所征之地 受命於祖 受成於學]”라고 보이는데, 陳澔는 《禮記集說》에서 “受成於學은 太學에서 그 계책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12 鄭人游于鄕校……謂子産仁人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襄公 31년에 “鄭나라 사람들이 鄕校에 모여 놀면서 執政大臣의 잘잘못을 의논하니, 大臣인 然明이 子産에게 ‘鄕校를 허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子産이 말하기를 ‘이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이 朝夕으로 물러나와 鄕校에서 놀면서 執政大臣의 善․惡을 의논한다 하니, 저들이 善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행하고 저들이 惡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고친다면, 이들이 바로 우리의 스승인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鄕校를 허문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仲尼께서 이 말을 듣고 ‘이로써 보건대, 사람들이 子産을 不仁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하셨다.[鄭人遊於鄕校 以論執政 然明謂子産曰 毁鄕校何如 子産曰 何謂 夫人朝夕退而游焉 以議執政之善否 其所善者 吾則行之 其所惡者 吾則改之 是吾師也 若之何毁之……仲尼聞是語也 曰 以是觀之 人謂子産不仁 吾不信也]”라고 보인다.
역주13 噓枯吹生 : 이 내용은 《後漢書》 〈鄭太傳〉에 “孔公緖가 淸談과 高論을 잘하여 마른 나무에 숨을 불어넣어 살게 만들고 산 나무에 숨을 불어넣어 말라 죽게 할 수 있으나, 軍事에 대한 재능이 없어 창의 자루나 잡고 있다.[孔公緖淸談高論 噓枯吹生 竝無軍旅之才 執銳之幹]”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李賢의 注에는 “말라 죽은 것은 숨을 불어넣어서 살려내고, 살아 있는 것은 숨을 불어넣어서 말라 죽게 하니, 이는 談論으로 남을 억제하고 드날리게 하는 바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枯者噓之使生 生者吹之使枯 言談論有所抑揚也]”라고 하였다.
역주14 三公九卿 : 三公은 천자를 보좌하여 군정의 대권을 맡은 최고위의 세 관직을 이르는데, 시대마다 호칭을 달리하였다. 周나라는 太師․太傅․太保를 三公이라 하였고, 秦나라와 前漢은 丞相․太尉․御史大夫, 또는 大司馬․大司空․大司徒를 三公이라 하였고, 後漢 이래로는 대개 太尉․司徒․司空을 三公이라 하였다.
九卿은 중앙정부의 행정을 맡은 9개의 고위 관직을 이르는데, 이 또한 시대마다 호칭을 달리하였는바, 周나라는 小師․小傅․小保․冢宰․司徒․司空․司馬․司寇․宗伯을 九卿이라 하였고, 秦나라는 奉常․郎中令․衛尉․太僕․廷尉․典客․宗正․治粟內史․小府를 九卿이라 하였고, 漢나라는 太常․光祿勳․衛尉․太僕․廷尉․大鴻臚․宗正․大司農․小府를 九卿이라 하였다. 조선조에서는 領議政․左議政․右議政을 三公이라 하였다.
역주15 三府辟召 : 三府는 三公이 관장하고 있는 각 府署를 합칭하는 말이고, 辟召는 재야에 있는 선비를 추천받아 三公이 禮를 갖추고 불러 관직을 제수함을 이른다.
역주16 黨錮之禍 : 後漢時代에 두 번에 걸쳐 발생한 黨錮의 옥사를 이르는데, 黨錮는 朋黨의 무리를 禁錮시킨다는 의미이다.
後漢 桓帝 때에 외척들을 주살하고 桓帝가 친정하는 과정에서 환관들이 공을 세워 정권을 잡았다. 이로 인해 환관들에 의한 정치적 폐단이 심해지자, 司隷校尉 李膺과 太傅 陳蕃 등이 太學生들과 연합하여 스스로 淸流라 칭하며 환관들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환관들이 주동하여 延熹 9년(166) 詔令을 내려 淸流의 黨人 200여 명을 체포하고, 다음 해에 黨人의 禁錮詔令을 내려 이들을 종신토록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제1차 黨錮의 옥사이다.
桓帝가 후사 없이 죽자 河間孝王의 曾孫인 靈帝(168~189)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겨우 12세였다. 외척 竇武가 정권을 장악하고 陳蕃과 함께 환관들을 모두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반역죄로 몰려 멸족의 화를 당하였다. 환관들이 다시 득세하여 李膺, 杜密 등을 주륙하고 黨人과 太學生들을 대거 체포하였으며, 이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을 모두 폐출하거나 禁錮하니, 이것이 제2차 黨錮의 옥사이다. 《後漢書 黨錮列傳》
역주17 慶曆熙寧紹聖 : 慶曆은 仁宗의 연호로 1041년부터 1048년까지이고, 熙寧은 神宗의 연호로 1068년부터 1077년까지이고, 紹聖은 哲宗의 연호로 1094년부터 1098년까지이다.
역주18 荒服郡縣 : 都城에서 매우 먼 지방의 郡縣을 이른다. 荒服은 五服 가운데 가장 먼 지역이다. 五服이란 고대에 王畿 이외의 지역을 원근에 따라 다섯으로 나누었는데, 5백 리 안을 甸服, 1천 리까지를 侯服, 1천5백 리까지를 綏服, 2천 리까지를 要服, 2천5백 리까지를 荒服이라고 하였다.
역주19 閩蜀 : 閩은 지금의 福建省 일대를 이르고, 蜀은 지금의 四川省 일대를 이른다.
역주20 邦君 : 본래 諸侯를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서는 太守나 刺史와 같은 지방장관의 의미로 쓰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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