沒千餘歲
에 而
몽현蒙에 未有祀之者
러니 현령縣令秘書丞
이 始作祠堂
하고 求文以爲記
하니라
作어부漁父, 盜蹠, 胠篋하야 以詆訾공자孔子之徒하고 以明노자老子之術이라하니 此는 知장자莊子之粗者라
余以爲 장자莊子는 蓋助공자孔子者니 要不可以爲法耳라
其僕이 操箠而罵曰 隷也不力이라한대 門者出之하니라
事固有倒行而逆施者하니 以僕爲不愛公子면 則不可요 以爲事公子之法도 亦不可라
故로 장자莊子之言은 皆實予而文不予하고 陽擠而陰助之하니 其正言이 蓋無幾라
其論
에 自
之徒
로 以至於其身
히 皆以爲
로되 而
공자孔子不與
하니 其尊之也至矣
니라
然이나 余嘗疑도척盜蹠, 어부漁父는 則若眞詆공자孔子者요 至於양왕讓王, 설검說설검劍하야는 皆淺陋하야 不入於道라
反復觀之하야 得其우언寓言之意하니 終曰 양자거陽子居西遊於진秦할새 遇노자老子한대 노자老子曰 而睢睢하고 而盱盱하니 而誰與양자거居오
하면 曰
열어구列禦寇之
제齊라가 中道而反
하야 曰 吾驚焉
이로라
장자莊子之言이 未終이어늘 而昧者剿之하야 以入其言하니 余不可以不辨이라
장공長公은 《장자莊子》를 읽기 좋아하여 그 정수를 얻었다.
그러므로 기괴奇瑰한 의논을 가설하기를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자莊子는 몽현蒙縣 사람인데, 일찍이 몽현蒙縣의 칠원리漆園吏를 지냈다.
죽은 지 천여 년 동안 몽현蒙縣에는 장자莊子를 제사하는 곳이 없었는데, 현령縣令인 비서승 왕긍秘書丞 王兢이 처음으로 사당을 짓고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삼가 《사기史記》를 살펴보니 “장자莊子는 양 혜왕梁 惠王과 제 선왕齊 宣王과 동시대 사람이었는데, 그 학문이 엿보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요컨대 근본은 노자老子의 말로 귀결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저서著書한 10여만 자字가 대부분 우언寓言이었다.
〈어부漁父〉․〈도척盜蹠〉․〈거협胠篋〉을 지어서 공자孔子의 무리를 비방하고 노자老子의 학술을 밝혔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장자莊子의 대강만을 안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장자莊子는 아마도 공자孔子를 도운 자인 듯한데, 요컨대 그것을 법으로 삼을 수 없을 뿐이다.
초楚나라 공자公子가 미복微服을 하고 도망갈 적에 문을 나가려 하자, 문지기가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마부는 채찍을 잡고 공자公子를 꾸짖기를 “이 종놈이 힘을 쓰지 않는다.”라고 하니, 문지기가 공자公子를 내보내주었다.
일은 진실로 거꾸로 행하고 역逆으로 베푸는 경우가 있으니, 마부가 공자公子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도 안 되고, 또 그것이 공자公子를 섬기는 법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장자莊子의 말은 모두 실제는 공자孔子를 인정했으나 글은 인정하지 않았고, 겉으로는 공자孔子를 배척했으나 속으로는 도왔으니, 자신의 생각을 바르게 말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공자孔子를 비방함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그 뜻을 은미하게 나타내지 않은 적이 없다.
그리고 천하의 도술을 논할 적에 묵적墨翟․금골리禽滑釐․팽몽彭蒙․신도愼到․전병田騈․관윤關尹․노담老聃의 무리로부터 자신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일가一家라고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니, 공자孔子를 높임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나 내 일찍이 의심하기를 〈도척盜蹠〉과 〈어부漁父〉는 참으로 공자孔子를 비방한 듯하고, 〈양왕讓王〉과 〈설검說劍〉에 이르러서는 모두 내용이 매우 천박하고 누추해서 도道에 들어가지 못할 듯하다.
나는 반복해서 읽어보고 〈우언寓言〉의 뜻을 얻었으니, 끝에 이르기를 “양자거陽子居(양주楊朱)가 서쪽으로 진秦나라에 갈 적에 노자老子를 만났는데,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네가 눈을 부릅뜨고 흘겨보고 있으니, 누가 너와 함께하겠느냐?
크게 결백한 것은 욕된 듯하고, 성盛한 덕德은 부족한 듯하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자거陽子居가 흠칫 놀라 용모를 바꾸고 사과하였다.
양자거陽子居가 처음 서쪽으로 갈 적에는 객사에 묵는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맞이하고 전송하며 가공家公(주인主人)은 자리를 양보하고 〈주인主人의〉 아내는 수건과 빗을 들고 있었으며, 객사에 머무는 자들은 자리를 피하고 불을 피우는 자는 부엌을 피하였는데, 그가 돌아올 적에는 객사에 묵는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친근해져 서로 자리를 다투었다.”라고 하였다.
그 중간에 있는 〈양왕讓王〉․〈설검說劍〉․〈어부漁父〉․〈도척盜蹠〉의 네 편을 제거하여 〈열어구列禦寇〉에 합치면, “열어구列禦寇가 제齊나라에 가다가 중도中道에 돌아와서 ‘내가 깜짝 놀랐다.
내가 목이 말라 음료 열 사발을 열 사람에게 시켜 먹었는데, 음료를 파는 다섯 사람이 다섯 사발을 갖고 와서 〈값을 받지 않고〉 그대로 주었다.’고 말하였다.”라고 글이 서로 이어진다.
나는 그런 뒤에야 깨닫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한 장章이다.”라고 하였다.
장자莊子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미련한 자들이 앞의 말을 끊고 그 말을 집어넣었으니, 이것을 분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장자莊子》에 무릇 장章을 나누고 편명篇名을 붙인 것은 모두 세속에서 나왔고, 장자莊子의 본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