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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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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장자사당莊子祠堂에 대한 기문記文
長公 好讀하야 而得其髓
장공長公은 《장자莊子》를 읽기 좋아하여 그 정수를 얻었다.
能設爲奇瑰之論 如此하니라
그러므로 기괴奇瑰한 의논을 가설하기를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莊子 蒙人也 嘗爲
장자莊子몽현蒙縣 사람인데, 일찍이 몽현蒙縣칠원리漆園吏를 지냈다.
沒千餘歲 而蒙 未有祀之者러니 縣令秘書丞 始作祠堂하고 求文以爲記하니라
죽은 지 천여 년 동안 몽현蒙縣에는 장자莊子를 제사하는 곳이 없었는데, 현령縣令비서승 왕긍秘書丞 王兢이 처음으로 사당을 짓고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삼가 《사기史記》를 살펴보니 “장자莊子양 혜왕梁 惠王제 선왕齊 宣王과 동시대 사람이었는데, 그 학문이 엿보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요컨대 근본은 노자老子의 말로 귀결되었다.
其著書十餘萬言 大抵率寓言也
그러므로 그가 저서著書한 10여만 가 대부분 우언寓言이었다.
作漁父, 盜蹠, 胠篋하야 以詆訾孔子之徒하고 以明老子之術이라하니 知莊子之粗者
어부漁父〉․〈도척盜蹠〉․〈거협胠篋〉을 지어서 공자孔子의 무리를 비방하고 노자老子의 학술을 밝혔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장자莊子의 대강만을 안 것이다.
余以爲 莊子 蓋助孔子者 要不可以爲法耳
내가 생각하건대 장자莊子는 아마도 공자孔子를 도운 자인 듯한데, 요컨대 그것을 법으로 삼을 수 없을 뿐이다.
나라 공자公子미복微服을 하고 도망갈 적에 문을 나가려 하자, 문지기가 난색을 표하였다.
其僕 操箠而罵曰 隷也不力이라한대 門者出之하니라
이에 마부는 채찍을 잡고 공자公子를 꾸짖기를 “이 종놈이 힘을 쓰지 않는다.”라고 하니, 문지기가 공자公子를 내보내주었다.
事固有倒行而逆施者하니 以僕爲不愛公子 則不可 以爲事公子之法 亦不可
일은 진실로 거꾸로 행하고 으로 베푸는 경우가 있으니, 마부가 공자公子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도 안 되고, 또 그것이 공자公子를 섬기는 법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莊子之言 皆實予而文不予하고 陽擠而陰助之하니 其正言 蓋無幾
그러므로 장자莊子의 말은 모두 실제는 공자孔子를 인정했으나 글은 인정하지 않았고, 겉으로는 공자孔子를 배척했으나 속으로는 도왔으니, 자신의 생각을 바르게 말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至於詆訾孔子하야는 未嘗不微見其意하니
공자孔子를 비방함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그 뜻을 은미하게 나타내지 않은 적이 없다.
其論之徒 以至於其身 皆以爲로되 而孔子不與하니 其尊之也至矣니라
그리고 천하의 도술을 논할 적에 묵적墨翟금골리禽滑釐팽몽彭蒙신도愼到전병田騈관윤關尹노담老聃의 무리로부터 자신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일가一家라고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니, 공자孔子를 높임이 지극한 것이다.
이나 余嘗疑盜蹠, 漁父 則若眞詆孔子者 至於讓王, 說劍하야는 皆淺陋하야 不入於道
그러나 내 일찍이 의심하기를 〈도척盜蹠〉과 〈어부漁父〉는 참으로 공자孔子를 비방한 듯하고, 〈양왕讓王〉과 〈설검說劍〉에 이르러서는 모두 내용이 매우 천박하고 누추해서 에 들어가지 못할 듯하다.
反復觀之하야 得其寓言之意하니 終曰 陽子居西遊於秦할새 遇老子한대 老子曰 而睢睢하고 而盱盱하니 而誰與居
나는 반복해서 읽어보고 〈우언寓言〉의 뜻을 얻었으니, 끝에 이르기를 “양자거陽子居(양주楊朱)가 서쪽으로 나라에 갈 적에 노자老子를 만났는데,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네가 눈을 부릅뜨고 흘겨보고 있으니, 누가 너와 함께하겠느냐?
太白 若辱이요 盛德 若不足이라하니
크게 결백한 것은 욕된 듯하고, 은 부족한 듯하다.’라고 하였다.
陽子居蹴然變容이라
그러자 양자거陽子居가 흠칫 놀라 용모를 바꾸고 사과하였다.
양자거陽子居가 처음 서쪽으로 갈 적에는 객사에 묵는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맞이하고 전송하며 가공家公(주인主人)은 자리를 양보하고 〈주인主人의〉 아내는 수건과 빗을 들고 있었으며, 객사에 머무는 자들은 자리를 피하고 불을 피우는 자는 부엌을 피하였는데, 그가 돌아올 적에는 객사에 묵는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친근해져 서로 자리를 다투었다.”라고 하였다.
하면 曰 列禦寇之齊라가 中道而反하야 曰 吾驚焉이로라
그 중간에 있는 〈양왕讓王〉․〈설검說劍〉․〈어부漁父〉․〈도척盜蹠〉의 네 편을 제거하여 〈열어구列禦寇〉에 합치면, “열어구列禦寇나라에 가다가 중도中道에 돌아와서 ‘내가 깜짝 놀랐다.
吾食於十漿 而五漿先餽라하니
내가 목이 말라 음료 열 사발을 열 사람에게 시켜 먹었는데, 음료를 파는 다섯 사람이 다섯 사발을 갖고 와서 〈값을 받지 않고〉 그대로 주었다.’고 말하였다.”라고 글이 서로 이어진다.
然後 悟而笑曰 是固一章也라호라
나는 그런 뒤에야 깨닫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한 이다.”라고 하였다.
莊子之言 未終이어늘 而昧者剿之하야 以入其言하니 余不可以不辨이라
장자莊子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미련한 자들이 앞의 말을 끊고 그 말을 집어넣었으니, 이것을 분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凡分章名篇 皆出於世俗이요 非莊子本意니라
장자莊子》에 무릇 을 나누고 편명篇名을 붙인 것은 모두 세속에서 나왔고, 장자莊子의 본의가 아니다.
역주
역주1 莊子祠堂記 : 本集에는 이 글의 말미에 ‘元豐元年十一月十九日記’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17권에도 이 글이 元豐 원년(1078) 11월 19일에 王競을 위하여 지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역주2 莊子 : 莊周가 지은 책으로 《南華經》이라고도 하는데, 道家의 元祖라 할 수 있는 老聃(李耳)이 지은 《老子》와 함께 老莊으로 불린다.
역주3 蒙漆園吏 : 蒙은 蒙縣으로 전국시대 宋나라에 있었던 고을로, 지금의 河南省 商丘市 동남쪽에 있었다. 蒙縣에 漆園城이 있는데, 莊子는 이곳의 말단 관리로 있었다.
역주4 王兢 : 字가 彦履이고 鄧州 穰縣 사람으로 嘉祐 연간에 진사로 출사하여 벼슬이 左朝請大夫에 이르렀으며, 《宋人傳記資料索引》에 보인다.
역주5 莊子……以明老子之術 : 이 내용은 《史記》 〈老子韓非列傳〉에 그대로 보인다. 寓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는데, 唐나라 司馬貞은 《史記索隱》에서 “莊子가 著書한 10여만 字가 모두 主․客을 세워서 이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였으므로 偶言이라 한 것이다. 또 音이 寓이니, 寓는 寄(부칠 기)字의 뜻이다. 그러므로 別錄에 이르기를 ‘사람의 성명을 지어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고 그 사람에게 말을 부쳤다.’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莊子》에 〈寓言〉篇이 있는 것이다.[其著書十餘萬言 率皆立主客 使之相對語 故云偶言 又音寓 寓寄也 故別錄云 作人姓名 使相與語 是寄辭於其人 故莊子有寓言篇]”라고 注하였다.
莊周는 寓言에 대해 자신이 지은 〈寓言〉에서 “나의 글 가운데 열에 아홉은 寓言이다.……寓言은 外物을 빌려 道를 논한 것이다. 아버지가 제 자식의 중매쟁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칭찬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寓言을 많이 쓰는 것은 나의 죄가 아니고 사람들의 죄이다.[寓言十九……藉外論之 親父不爲其子媒 親父譽之 不若非其父者也 非吾罪也 人之罪也]”라고 말하였다. 〈漁父〉․〈盜蹠〉․〈胠篋〉은 모두 《莊子》에 실린 글들의 편명으로 〈胠篋〉은 〈外篇〉에, 〈漁父〉․〈盜蹠〉은 〈雜篇〉에 실려 있다.
역주6 楚公子微服出亡……門者出之 : 이 故事는 자주 인용되나 정확한 출처는 미상이다. 이 내용은 행동거지나 행색으로 볼 때 형편없는 마부가 公子를 함부로 꾸짖는 것을 보고, 문지기는 公子가 대단한 인물이 아닐 것이라고 오판하여 公子를 놓아 보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公子를 孔子에, 마부를 莊子에 비유하여 莊子가 비록 孔子를 비방하였으나 진심은 孔子를 높여서 그러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7 天下道術 : 당대에 유행한 思想과 學術(學問)을 이른다.
역주8 墨翟禽滑釐(금골리)彭蒙愼到田騈關尹老聃 : 墨翟(B.C. 480~B.C. 420)은 전국시대 宋나라 출신의 사상가로 儀禮보다 실천을 중시했고 ‘兼愛說’(博愛主義)을 주장하였는데, 저서에 《墨子》가 있다.
禽滑釐는 전국시대 魏나라 사람으로 字가 愼子이며 墨子의 수제자였다. 그의 후손들이 그의 字를 성으로 삼아 愼氏가 되었다고 한다.
彭蒙과 愼到와 田騈은 모두 齊나라 稷下의 학궁에 모여 학문을 연구하던 학자들인데, 彭蒙은 道家 계열의 학자인 듯하나,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田騈은 齊나라의 사상가로 陳騈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사상은 道家에 근본하여 ‘齊萬物’을 주장하였다. 《田子》란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愼到는 趙나라의 사상가로 저서에 《愼子》가 있는데, 본래 12편이었으나 지금은 5편만 남아있다. 그의 사상은 道家에 근본하면서도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뒤에 韓非子의 法家에 수용되었다.
關尹은 尹喜로 전국시대 秦나라의 사상가이며 老子의 제자이다. 函谷關의 守將이었으므로 關尹이라 불렸다. 《史記》 〈老子韓非列傳〉에 의하면 老子가 周나라의 쇠락함을 보고 周나라를 떠나 函谷關에 이르렀을 적에 關의 守將인 尹喜가 부탁하여 《道德經》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그는 청명하고 결백해야 神人과 통할 수 있다는 ‘貴淸說’을 주장하였다. 老聃은 老子로 본서 〈王君寶繪堂記〉와 〈李氏山房藏書記〉의 역주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9 一家 : 학문의 한 파를 이른다.
역주10 陽子居西遊於秦……舍者與之爭席矣 : 이 내용은 《莊子》 〈寓言〉에 그대로 보인다. 陽子居는 爲我說을 주장한 楊朱이며 子居는 그의 字이다. 家公은 객사의 주인을 이른다. ‘太白若辱 盛德若不足’은 老子 《道德經》 41장에도 보이는데, 이는 몹시 결백한 사람은 恥辱을 당한 것처럼 자신을 낮추고 盛德이 있는 사람은 부족한 것처럼 겸손해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11 去其讓王……以合於列禦寇之篇 : 《莊子》의 〈雜篇〉을 보면 〈庚桑楚〉․〈徐无鬼〉․〈則陽〉․〈外物〉․〈寓言〉․〈讓王〉․〈盜蹠〉․〈說劍〉․〈漁父〉․〈列禦寇〉․〈天下〉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讓王〉․〈盜蹠〉․〈說劍〉․〈漁父〉를 빼고 〈寓言〉의 끝 부분과 〈列禦寇〉의 첫 부분을 곧바로 연결시켜야 함을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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