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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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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주공周公에 대한
이라
논변을 잘하였다.
論周公者多異說 何也
주공周公을 논하는 자들이 이설異說이 많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宜乎說者之異也니라
주공周公의 변고에 하여 성인聖人의 불행에 처했으니, 말하는 자들이 이설異說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凡周公之所爲 亦不得已而已矣시니 若得已而不已 則周公 安得而爲之시리오
무릇 주공周公이 행하신 것은 또한 부득이해서 하였을 뿐이니, 만약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으셨다면, 주공周公과 같은 분이 어찌 이런 짓을 하셨겠는가?
成王幼하야 不能爲政이어늘 周公 執其權하사 以王命으로 賞罰天下하시니 是周公不得已者 如此而已시니라
성왕成王이 어려서 정사政事를 다스릴 수 없으므로 주공周公이 그 권한을 집행하여 왕명王命으로써 천하 사람들에게 을 주고 을 내리셨으니, 이는 주공周公이 부득이해서 한 것이 이와 같았을 뿐이다.
지금 유자儒者들이 말하기를 “주공周公천자天子의 지위에 올라서 이라고 칭하고 제후諸侯들에게 조회朝會받았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부득이해서 한 일이겠는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주공周公총재冢宰의 지위를 맡아 백관百官을 바로잡자, 여러 형제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소공召公태보太保가 되고 주공周公태사太師가 되어 성왕成王을 도와 좌우에서 보필하는 신하가 되었는데 소공召公이 기뻐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며,
又曰 이라하니 則是周公 未嘗踐天子之位而稱王也
또 이르기를 ‘주공왈周公曰’, ‘왕약왈王若曰’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주공周公이 일찍이 천자天子의 지위에 올라 이라고 칭한 적이 없는 것이다.
周公稱王이면 則成王 宜何稱
주공周公이라고 칭했다면 성왕成王을 마땅히 무엇이라고 칭해야 하겠는가?
將亦稱王耶
장차 성왕成王이라고 칭해야 하겠는가?
將不稱耶
아니면 장차 이라고 칭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不稱則是廢也 稱王則是二王也 而周公 何以安之시리오
이라고 칭하지 않는다면 이는 폐위된 것이요, 이라고 칭한다면 이것은 이 둘인 것이니, 어찌 주공周公이 이것을 편안히 여기실 수 있었겠는가?
인저하시니 儒者之患 患在於名實之不正이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유자儒者의 걱정은 반드시 이 바르지 않음에 있다.
亦有以文王爲稱王者하니 以聖人으로 爲後世之僭君 急於爲王者耶인저
그러므로 또한 문왕文王을 칭했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문왕文王 같은 성인聖人을 후세의 참람한 군주가 이 되기를 급급하게 여긴 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天下雖亂이나 有王者在어늘 而己自王이면 雖聖人이라도 不能以服天下리라
천하天下가 아무리 혼란하더라도 왕자王者가 따로 있는데 문왕文王이 스스로 이라고 칭한다면, 문왕文王이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천하를 복종시킬 수 없는 것이다.
高帝擊滅項籍하고 統一四海한대 이라
옛날에 한 고조漢 高祖항적項籍을 쳐서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자, 제후諸侯대신大臣들이 서로 모여서 고조高祖황제皇帝로 추대하려고 하였으나, 고조高祖는 오히려 덕이 부족하다고 사양했었다.
이어늘 而謂文王亦爲之耶
오직 진승陳勝오광吳廣은 시끄럽게 스스로 이라고 칭하기에 급하였는데, 문왕文王 또한 진승陳勝오광吳廣이 한 짓을 했다고 하겠는가?
무왕武王나라를 정벌하여 군대가 맹진孟津을 건너가서 목야牧野에 모였을 적에, 무왕武王이 이번의 정벌은 선군先君문고文考의 명령이라고 칭하면서 제후諸侯들을 명령한 내용에 여전히 ‘문고文考’라고 하였을 뿐이었고,
무성武成〉에 이르러 이윽고 시망柴望으로 하늘에 고유하여 백관百官들이 분주히 달려와 나라의 명을 받은 뒤에야 “우리 문고文考이신 문왕文王이 능히 공을 이루었다.”라고 칭하였으니,
由此觀之하면 則是武王 不敢一日妄尊其先君이어시든
이로써 살펴보건대 무왕武王이 단 하루도 자기 선군先君이라고 함부로 높이지 못한 것이다.
而況於文王之自王乎
그런데 하물며 문왕文王이 스스로 이라고 칭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라하니 是亦追稱而已矣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라와 나라가 분쟁을 해결하러 오자 문왕文王이 크게 흥성해졌다.”라고 하였으니, 이것 또한 추후에 문왕文王이라고 칭했을 뿐이다.
라하니 夫田常之時 安知其爲成子而稱之리오
사기史記》에 “노파가 상추를 뜯어 전성자田成子에게 귀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전상田常의 때에 어찌 전성자田成子라고 시호할 줄을 알아서 이렇게 칭했겠는가?
凡以文王周公爲稱王者 皆過也 是資後世之簒君而爲之藉也니라
그러므로 문왕文王주공周公을 칭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니, 이것은 후세의 찬탈하는 군주를 도와서 구실을 삼게 한 것이다.
진가陳賈맹자孟子에게 묻기를 “주공周公관숙管叔채숙蔡叔으로 하여금 나라를 감독하게 하셨는데 관숙管叔채숙蔡叔나라를 이끌고 배반했으니, 주공周公이 배반할 줄을 알면서 시켰다면 이것은 하지 못한 것이요, 알지 못하고서 시켰다면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주공周公은 아우이고 관숙管叔은 형이니, 주공周公의 잘못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하셨다.
從孟子之說이면 則是周公 未免於有過也
맹자孟子의 말씀을 따른다면 주공周公도 잘못이 있음을 면치 못하신 것이다.
非逆也 是其智不足以深知周公而已矣 周公之誅 非疾之也 其勢不得不誅也
관숙管叔채숙蔡叔이 배반한 것은 반역한 것이 아니요 이는 이들의 지혜가 주공周公의 마음을 깊이 알지 못한 것일 뿐이며, 주공周公관숙管叔채숙蔡叔을 주벌한 것은 이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요 형편상 주벌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管, 蔡 非所謂大惡也 兄弟之親 而非有大惡이면 則其道不得不封이니
그러므로 관숙管叔채숙蔡叔은 이른바 대악大惡이라는 것이 아니니, 형제간의 친함으로 대악大惡이 아니면 도리상 봉해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管, 蔡之封 在武王之世也 武王之世 未知有周公成王之事하니 苟無周公成王之事 則管, 蔡何從而叛이며 周公 何從而誅之리오
그리고 관숙管叔채숙蔡叔을 봉한 것은 무왕武王의 세대에 있었던 일인데, 무왕武王의 세대에는 주공周公성왕成王의 일이 있을 줄을 알지 못했으니, 만일 주공周公성왕成王의 일이 없었더라면 관숙管叔채숙蔡叔이 무슨 이유로 배반하였을 것이며, 주공周公이 무슨 이유로 이들을 주벌하셨겠는가?
曰 周公 居禮之變하야 而處聖人之不幸也라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주공周公의 변고에 하여 성인聖人의 불행에 처하였다.”라고 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周公論 : 이 글은 〈進論〉 50편 중의 하나인데 저작 연도는 미상이다.
周公은 周 武王의 아우로 이름은 旦이다. 武王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周公을 少昊의 옛 땅인 曲阜에 魯公으로 봉하였으나, 魯나라에는 아들 伯禽을 보내고 자신은 冢宰로서 조정에 남아 武王을 보좌해서 周나라를 안정시키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武王은 殷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紂王의 아들 武庚을 殷나라에 봉하고 아우인 管叔 鮮 등으로 하여금 武庚을 감시하게 하였는데, 武王이 죽고 어린 成王이 즉위하여 周公이 섭정하자, 管叔 등은 ‘周公이 장차 成王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려고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殷나라의 武庚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周公이 成王의 명을 받들어 이들을 토벌하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다음 成王이 장성하자 섭정의 지위를 내놓고 물러났다.
역주2 周公居禮之變 而處聖人之不幸 : 禮의 변고에 居했다는 것은 당시 周公이 정상적인 禮法으로는 조처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聖人의 불행에 처했다는 것은 武王이 죽고 어린 成王이 즉위하여 周公이 攝政하자, 殷나라의 武庚(祿父)을 감시하기 위해 三監으로 있던 庶兄 管叔 鮮이 아우인 蔡叔․霍叔과 함께 ‘周公이 어린 成王을 해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武庚과 함께 배반하였으므로 周公이 이들을 토벌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3 今儒者曰……稱王而朝諸侯 : 《禮記》 〈文王世子〉에 “周公이 踐祚했다.”라고 하였는데, 踐祚는 踐阼로도 표기하는데, 군주가 동쪽 섬돌에 서는 것으로 卽位라는 말과 같다.
《禮記》 〈明堂位〉에는 “옛날 殷나라 紂王이 天下를 어지럽혀서 鬼나라 侯를 포를 떠서 諸侯들에게 연향을 베풀었다. 이 때문에 周公이 武王을 도와서 紂王을 정벌하였는데, 武王이 죽고 成王이 어려서 周公이 天子의 지위에 올라 天下를 다스리셨다. 6년 만에 泰山의 明堂에서 諸侯들에게 조회받고 禮와 음악을 제정하고 度․量․衡을 반포하자 천하가 크게 복종하였는데, 7년 되던 해에 成王에게 정권을 되돌려주셨다.[昔殷紂亂天下 脯鬼侯 以饗諸侯 是以周公相武王 以伐紂 武王崩 成王幼弱 周公踐天子之位 以治天下 六年朝諸侯於明堂 制禮作樂 頒度量 而天下大服 七年致政於成王]”라고 하였다.
또 《書經》 〈周書 洛誥〉에는 “周公이 拜手稽首하고 말씀하기를 ‘나는 그대 밝은 군주에게 復命하노이다.’라고 하셨다.[周公 拜手稽首曰 朕復子明辟]”라는 말이 있고, 〈洛誥〉 끝에 “周公이 文王과 武王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명을 크게 보존하기를 7년 동안 하였다.[惟周公誕保文武受命 惟七年]”라는 내용이 있다. 이로 인해 鄭玄 등의 注疏家들은 周公이 실제로 천자의 지위에 올라 천자의 일을 행한 것으로 보고 ‘朕復子明辟’을 ‘짐이 그대(成王) 明辟에게 정권을 되돌려준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明辟은 明君의 뜻이다.
後漢 말기에 王莽은 이것을 근거로 어린 孺子를 황제로 옹립한 뒤에 자신이 周公의 일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결국 漢나라를 찬탈한 다음 新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書經集傳》을 낸 蔡沈 등은 ‘周公踐祚’는 원래 ‘周公相成王踐祚(周公이 成王이 踐祚하도록 도움)’인데, 기록하는 자가 ‘相成王’이란 세 글자를 누락시켜 후대의 의혹을 불러일으킨 것이며, ‘朕復子明辟’도 ‘나는 그대 밝은 군주에게 復命한다.’로 해석하여 鄭玄 등의 학설을 부정하였는데, 蘇軾 역시 똑같은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역주4 書曰周公位冢宰……群叔流言 : 冢宰는 관명으로 지금의 총리와 같은 직책이며, 群叔은 武王의 여러 아우로 成王의 숙부인 管叔 鮮, 蔡叔 度, 霍叔 處를 이른다.
《書經》 〈周書 蔡仲之命〉에 “周公이 冢宰로 있으면서 百官을 바로잡자, 群叔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이에 管叔을 商나라에서 죽이고, 蔡叔을 郭隣에 가두되 수레 일곱 대를 따르게 하고, 霍叔을 庶人으로 강등시켜 3년 동안 끼지 못하게 하였다.[惟周公位冢宰 正百工 群叔流言 乃致辟管叔于商 囚蔡叔于郭隣 以車七乘 降霍叔于庶人 三年不齒]”라고 하였다.
그리고 《書經》 〈周書 大誥〉에 “武王이 殷나라를 이긴 다음 殷나라의 남은 백성들로 紂王 受의 아들 武庚을 封하고 三叔(管叔, 蔡叔, 霍叔)에게 명하여 殷나라를 감시하게 하였는데, 武王이 죽고 成王이 卽位하여 周公이 冢宰로서 成王을 보필하자, 三叔이 流言을 퍼뜨리기를 ‘周公이 장차 孺子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니, 周公이 자리를 피하여 동쪽 지방에 거처하였다.
뒤에 成王이 이것을 깨닫고서 周公을 맞이하여 돌아오자, 三叔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武庚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成王이 周公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殷나라를 정벌하여 討罪할 적에 이 〈大誥〉를 지어 天下에 크게 고한 것이다.[武王克殷 以殷餘民 封受子武庚 命三叔監殷 武王崩 成王立 周公相之 三叔流言 公將不利於孺子 周公避位居東 後成王悟 迎周公歸 三叔懼 遂與武庚叛 成王命周公 東征以討之 大誥天下]”라고 하였다. 受는 紂王의 이름으로 辛이라고도 칭하며, 武庚은 祿父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의 별명으로 보인다.
역주5 召公爲保……召公不說 : 《書經》 〈周書 君奭〉 書序에 “召公이 太保가 되었는데, 周公이 太師가 되어 成王을 도와 左右에서 보필하자, 召公이 기뻐하지 않으므로 周公이 〈君奭〉을 지어 설득하였다.[召公爲保 周公爲師 相成王爲左右 召公不說 周公作君奭]”라고 하였는바, 《書經集傳》에 의하면 蘇軾은 이 書序를 ‘召公의 뜻은 周公이 告老하고 돌아가기를 바란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書序는 《書經》의 편명 아래에 붙은 小序로 이 글을 짓게 된 동기 등을 설명한 글인데, 저자는 미상이다.
역주6 周公曰 王若曰 : ‘周公曰’, ‘王若曰’이라는 표현은 《書經》에 여러 번 보이는데, 周公의 말씀을 기록할 적에는 한결같이 ‘周公曰’이라 하였고, 成王의 말씀을 기록할 적에는 한결같이 ‘王若曰’이라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王若曰’은 ‘王이 대략 이와 같이 말씀하였다.’는 의미이다.
역주7 孔子曰 必也正名乎 : 이 내용은 《論語》 〈子路〉에 “子路가 孔子께 ‘衛나라의 군주가 선생님을 기다려 政事를 하려고 하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을 우선하시겠습니까?’라고 여쭙자, 孔子께서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라고 대답하셨다.”라고 보인다. 衛나라의 군주는 出公 輒을 이른다.
衛 靈公의 첩인 南子는 미모가 빼어나서, 靈公이 그녀를 몹시 사랑하여 夫人으로 삼았으나 淫行이 있었다. 이에 태자인 蒯聵가 그녀를 시해하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 사실을 알고 靈公이 크게 노하니, 蒯聵는 晉나라로 도망하였다. 그 후 靈公이 죽자, 衛나라 사람들은 蒯聵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으니 즉위할 수 없다고 하여, 대신 嫡孫인 蒯聵의 아들 輒을 후계자로 세웠다. 한편 晉나라에서는 蒯聵에게 병력을 주어 衛나라로 들여보내니, 이에 부자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朱子는 集註에서 이러한 일들을 들어 “이때 出公은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자기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아 명칭과 실제가 문란하였다. 그러므로 孔子께서 명분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으로 삼으신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8 諸侯大臣……然且辭以不德 : 이 내용은 《史記》 〈高祖本紀〉에 “5년(B.C. 202) 정월에 제후들과 여러 신하들이 漢王에게 皇帝에 오를 것를 청하자, 漢王이 이르기를 ‘내 현명하고 유능한 皇帝가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빈말로는 국가의 기업을 지켜나갈 수 없다. 나는 감히 帝位를 감당할 수 없다.’라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거듭 청하자 세 번 사양한 끝에 할 수 없이 帝位에 오를 것을 수락하고, 2월 甲午日에 氾水의 북쪽으로 나아가 皇帝의 자리에 올랐다.”라고 보인다.
역주9 惟陳勝吳廣乃囂囂乎急於自王 : 陳勝과 吳廣은 秦나라의 虐政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난 인물들이다. 이들은 본래 秦나라 戍卒들로 당시 일단의 농민을 이끌고 봉기하여 秦나라에 대항하였는데, 이들이 陳縣을 점령한 뒤에 곧바로 張楚라는 나라를 세워, 陳勝은 楚王이 되고 吳廣은 假王이 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0 武王伐商……蓋猶曰文考而已 : 武王이 商나라 紂王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제후들과 함께 孟津을 건너가 牧野에 모였을 적에 〈泰書 上․中․下〉 세 편을 지어 군사들에게 맹세하였는데, 여기에 모두 文王을 文考라고 칭하였다.
《書經》 〈周書 泰書〉 상편에는 “지금 商王 受가 上天을 공경하지 않고 下民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있다.……皇天이 震怒하여 우리 文考에게 命하시어 엄숙히 하늘의 위엄을 받들어 행하게 하셨는데, 大勳을 이루지 못하셨다.[今商王受 弗敬上天 降災下民……皇天震怒 命我文考 肅將天威 大勳未集]”라고 하였으며, 또 “나 小子는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文考에게 명령을 받아 上帝에게 類祭祀를 지내고 冢土에 宜祭祀를 지내고서 너희 무리를 데리고 하늘의 벌을 이루려 하노라.[予小子夙夜祗懼 受命文考 類于上帝 宜于冢土 以爾有衆 底天之罰]”라고 하였다.
하편에는 “아! 우리 文考께서 日月이 비추고 임하듯이 하여 四方에 빛나시며 西土에 드러나셨으니, 우리 周나라는 크게 多方을 받을 것이다.[嗚呼 惟我文考 若日月之照臨 光于四方 顯于西土 惟我有周 誕受多方]”라고 하였다. 武王은 아버지인 文王을 文考, 어머니인 太姒를 文母라고 칭하였다.
역주11 至於武成……克成厥勳 : 〈武成〉은 《書經》의 편명인데, 武王이 殷나라를 이기고 돌아와 여러 神에게 祭祀하고 諸侯들에게 고한 말씀과 시행한 政事를 함께 기록한 책이다. 柴는 섶나무를 태워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고, 望은 나라 안의 山川에 제사하는 것으로, 이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하늘과 산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이 내용은 《書經》 〈周書 武成〉에 “丁未日에 周나라 사당에 祭祀할 적에 邦․甸과 侯․衛의 제후들이 크게 분주하여 豆와 籩을 잡더니, 3일이 지난 庚戌日에 柴․望하여 크게 武成을 告由하였다.[丁未祀于周廟 邦甸侯衛駿奔走 執豆籩 越三日庚戌柴望 大告武成]”라고 보인다. 豆는 나무로 만든 제기이고 籩은 대나무로 만든 제기이다.
역주12 詩曰……文王蹶厥生 : 詩는 《詩經》 〈大雅 綿〉을 이른다. 虞나라와 芮나라는 殷나라 때에 있었던 두 제후국의 이름이다. 虞나라와 芮나라의 두 군주가 서로 田地의 소유권을 다투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에 함께 周나라에 朝會 가서 文王에게 판결을 받고자 하여 周나라 국경에 들어가니 밭 가는 자들은 밭두둑을 사양하고 길 가는 자들은 길을 양보하였으며, 도읍에 들어가니 남녀가 서로 길을 달리하고 머리가 반백이 된 자가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았으며, 朝廷에 들어가니 士는 大夫가 되기를 사양하고 大夫는 卿이 되기를 사양하였다.
이에 두 나라의 군주가 감동하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小人이니, 君子 나라의 경계를 밟을 자격이 없다.”라고 하고 서로 사양하여 다투던 전지를 閒田으로 삼고 물러갔다. 제후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文王에게 귀의하여 周나라가 크게 흥왕했다 한다.
당시 王은 天子를 이르는바, 文王은 제후로서 西伯이라고 칭했으며, 王은 殷나라의 紂王이었다. 그러다가 武王이 천하를 소유하고는 자기 아버지를 文王, 할아버지를 王季, 증조인 古公亶父(단보)를 太王으로 추존하였는바, 東坡는 文王이 생전에 자신을 王이라고 칭할 리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史記 周本紀》
역주13 史記曰……歸乎田成子 : 成子는 田常의 시호인데, 시호는 사후에 지어지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田常은 본래 성이 陳이었는데 田氏로 바꿨으며, 본명이 恒인데 뒤에 漢 文帝의 이름을 諱하여 常으로 바꿔 불렀다. 田常은 齊나라의 대부로 민심을 얻자 簡公을 시해하고 平公을 옹립하여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史記》 〈田敬仲完世家〉와 《論語》 〈憲問〉에 “陳成子가 簡公을 시해하자, 孔子께서 목욕하고 조회하여 哀公에게 아뢰셨다. ‘陳恒이 君主를 시해하였으니, 토벌할 것을 청합니다.’[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恒弑其君 請討之]”라고 보이는바, 여기에서도 죽은 뒤에 내려진 시호인 成子로 陳恒을 칭하고 있다.
역주14 陳賈問於孟子曰……不亦宜乎 : 陳賈는 齊 宣王의 신하이다. 宣王이 燕나라를 공격하여 50일 만에 점령하였으나, 仁政을 베풀라는 孟子의 말씀을 듣지 않고 약탈을 자행하자, 燕나라 사람들이 배반하여 다시 昭王을 세우고 齊나라에 항거하였다. 이에 宣王은 孟子에게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陳賈가 宣王에게 아뢰기를 “王은 염려하지 마소서. 왕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周公과 비교하여 누가 더 仁하고 또 지혜롭다고 여기십니까?”라고 하니, 왕이 “아! 이 무슨 말인가?”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陳賈가 다시 말하기를 “周公이 管叔으로 하여금 殷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管叔이 殷나라를 가지고 배반하였으니, 〈周公이〉 이것을 알고 시켰다면 이는 仁하지 못한 것이요, 알지 못하고 시켰다면 이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니, 仁과 智는 周公도 다하지 못하셨는데 하물며 王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제가 孟子를 뵙고 해명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陳賈가 孟子를 뵙고 “周公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니, 孟子께서 “옛 聖人이시다.”라고 대답하셨다. 陳賈가 “管叔으로 하여금 殷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管叔이 殷나라를 가지고 배반했다고 하니,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孟子께서 “그렇다.”라고 대답하셨다. 陳賈가 “周公은 〈管叔이〉 장차 배반할 것을 알면서 시키셨습니까?”라고 묻자, 孟子께서 “알지 못하셨다.”라고 대답하셨다. 陳賈가 “그렇다면 聖人도 허물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孟子께서 “周公은 아우요 管叔은 형이니, 周公의 허물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대답하셨다.[陳賈曰 王無患焉 王自以爲與周公孰仁且智 王曰 惡 是何言也 曰 周公使管叔監殷 管叔以殷畔 知而使之 是不仁也 不知而使之 是不智也 仁智周公未之盡也 而況於王乎 賈請見而解之 見孟子 問曰 周公何人也 曰 古聖人也 曰 使管叔監殷 管叔以殷畔也 有諸 曰 然 曰 周公知其將畔而使之與 曰 不知也 然則聖人且有過與 曰 周公弟也 管叔兄也 周公之過 不亦宜乎] 《孟子 公孫丑 下》
역주15 管蔡之叛 : 管蔡는 管叔 鮮과 蔡叔 度를 이른다. 周公은 武王을 보필하여 殷나라를 이기고 殷나라 紂王의 아들 武庚을 殷나라의 옛터에 봉한 다음, 庶兄인 管叔 鮮과 庶弟인 蔡叔 度 및 霍叔 處로 하여금 殷나라를 감시하게 하고 이들을 三監이라고 칭하였다. 管․蔡․霍은 모두 國名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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