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帝之
하니 深惟
하야 未燭於理
하야 志勤道遠
하야 治不加進
하니
夙興夜寐
나 朕德有所未至
하고 敎有所未孚
하야 闕政尙多
하고 和氣或盭(戾)
라
田野雖闢
이나 民多亡(無)聊
하고 邊境雖安
이나 兵不得撤
하고 利入已浚
이나 浮費彌廣
하고 軍冗而未練
하고 官冗而未澄
하며 이나 禮樂未具
하야
意在位者 不以敎化爲心하고 治民者 多以文法爲拘라
禁防繁多하야 民不知避하고 敍法寬濫하야 吏不知懼하야
하고 淫雨過節
하야 暖氣不效
하며 江河潰決
하야 百川騰溢
하니 永思厥咎
컨대 深切在予
라
京師
는 諸夏之根本
이요 王敎之淵源
이어늘 無禁
하고 不度
라
治當先內
어늘 或曰 何以爲京師
오하며 政在摘姦
이어늘 或曰 不可
라하나니
推尋前世
컨대 하고 하니 道非有弊
어늘 治奚不同
고
富人强國하고 尊君重朝하며 弭災致祥하고 改薄從厚는 此皆前世之急政이요 而當今之要務니 子大夫는 其悉意以陳하고 毋悼後害하라
非智有所不能이요 而明有所不察이라 緩急之勢異也니이다
夫言之於無事之世者는 足以有所改爲나 而常患於不信하고 言之於有事之世者는 易以見信이나 而常患於不及改爲하니
此는 忠臣志士之所以深悲요 天下之所以亂亡相尋이로되 而世主之所以不信也니이다
今陛下處積安之時
하고 乘不拔之勢
하사 而天下嚮風
하고 動容變色而海內震恐
하니 雖有一事之失常
과 一物之不獲
이라도 固未足以憂陛下也
라
所謂親策賢良之士者는 以應故事而已니 豈以臣言으로 爲眞足以有感於陛下耶잇가
雖然이나 君以名求之라도 臣以實應之니 陛下爲是名也나 臣敢不爲是實也릿고
伏惟制策에 有念祖宗先帝大業之重하고 而自處於寡昧하사 以爲志勤道遠하야 治不加進이라하시니
臣竊以爲陛下卽位以來
로 歲歷三紀
하야 於事變
하고 審於情僞
가 不爲不熟矣
로되
然以爲志勤道遠은 則雖臣至愚나 亦未敢以明詔爲然也니이다
陛下苟知勤矣면 則天下之事 粲然無不畢擧하리니 又安以訪臣爲哉잇가
夫天以日運故로 健하고 日月以日行故로 明하고 水以日流故로 不竭하고 人之四肢以日動故로 無疾하고 器以日用故로 不蠹하니이다
天下者는 大物也니 久置而不用이면 則委靡廢放하야 日趨於弊而已矣니이다
陛下深居
之中
하시니 其憂勤而不息耶
를 臣不得而知也
요 其宴安而無爲耶
를 臣不得而知也
니이다
然이나 所以知道遠之歎이 由陛下之不勤者는 誠見陛下以天下之大로 欲輕賦稅則財不足하고 欲威四夷則兵不强하고 欲興利除害則無其人하고 欲敦世厲俗則無其具하며 大臣은 不過遵用故事하고 小臣은 不過謹守簿書하야 上下相安하야 以苟歲月하니
臣又竊聞之호니 自頃歲以來로 大臣奏事에 陛下無所詰問하시고 直可之而已라하니 臣始聞而大懼하야 以爲不信이러니
人君之言은 與士庶不同하야 言脫於口하면 而四方傳之하야 捷於風雨라
故로 太祖太宗之世엔 天下皆諷誦其言語하야 以爲聳動之具하니이다
今陛下之所震怒而賜譴者 何人也며 合於聖意하야 誘而進之者 何人也며 所與朝夕論議深言者 何人也며 越次躐等하야 召而問訊之者 何人也니잇고
四者를 臣皆未之聞焉하니 此臣所以妄論陛下之不勤也니이다
臣願陛下條天下之事에 其大者有幾며 可用之人이 有幾며 某事未治며 某人未用고하야
鷄鳴而起하사 曰 吾今日에 爲某事하고 用某人이라하시고
所用某人이 其人果才矣乎아하사 如是孜孜焉不違於心하야
屛去聲色하고 放遠善柔하며 親近賢達하고 遠覽古今이니
伏惟制策에 有夙興夜寐가 於玆三紀나 德有所未至하고 敎有所未孚하야 闕政尙多하고 和氣或盭라
田野雖辟이나 民多無聊하고 邊境雖安이나 兵不得撤하고 利入已浚이나 浮費彌廣하고 軍冗而未練하고 官冗而未澄하며 庠序比興이나 禮樂未具하야
意在位者 不以敎化爲心하고 治民者 多以文法爲拘라
禁防繁多하야 民不知避하고 敍法寬濫하야 吏不知懼하야
凡此陛下之所憂數十條者를 臣皆能爲陛下歷數而備言之하리이다
陛下誠得御臣之術而固執之하시면 則向之所憂數十條者는 皆可以捐之大臣하시고 而己不與하시리니 今陛下區區以向之數十條爲己憂者는 則是陛下未得御臣之術也니이다
方其未用也엔 常若有餘러니 而其旣用也엔 則不足하니 是豈其才之有變乎잇가
武王用太公
에 其相與問答
이 百餘萬言
이니 今之
是也
요 桓公用管仲
에 其相與問答
이 亦百餘萬言
이니 今之
是也
라
今陛下는 黙黙而聽其所爲하시니 則夫向之所憂數十條者를 無時而擧矣리이다
古之忠臣
은 其受任也
에 必先自
하야 曰 吾能辦是矣乎
아하고 度能辦是也
어든 則又曰 吾君能忘己而任我乎
아
能無以小人間我乎아하야 度其能忘己而任我也하고 能無以小人間我也하야 然後受之하며
旣已受之矣면 則以身任天下之責而不辭하고 享天下之利而不愧하니이다
今也엔 內不度己하고 外不度君하야 而輕受之하며 受之而衆不與也하야 則引身而求去어든 陛下又爲美辭而遣之하시고 加之重祿而慰之하시니이다
夫引身而求退者는 非果廉節而有讓也라 是邀君以自固也요 是自明其非我之欲留하야 以逃謗也요 是不能辦其事하고 而以其患遺後人也어늘
若夫德有所未至하고 敎有所未孚者는 此實不至也니이다
德之면 必有以著其德之之形하고 敎之면 必有以顯其敎之之狀하나니 德之之形은 莫著於輕賦요 敎之之狀은 莫顯於去殺이어늘
夫以選擧之重而不取才行
하고 官吏之衆而不行考課
하며 하고 貧富之相役而占田之數無限
하니 天下之闕政
이 則莫大乎此
하니
然
이나 臣聞天下之民
이 常偏聚而不均
이라 은 有可耕之人
이나 而無其地
하고 은 有可耕之地
나 而無其人
이라하니
夫以吳蜀荊襄之相形
이로되 而餓寒之民
이 不能去狹而就寬者
로 世以爲
이라하니 非也
니이다
行者無以相群이면 則不能行하고 居者無以相友면 則不能居하나니 若輩徙饑寒之民이면 則無不聽矣리이다
邊境已安而兵不得撤者는 有安之名이나 而無安之實也니이다
臣欲小言之면 則自以爲愧요 大言之면 則世俗以爲笑하리니 臣請略言之호리이다
古之制北狄者
는 未始不通
하니 今之所以不能通者
는 是
爲之障也
일새니이다
議者以爲絶域異方이라하야 曾不敢近하니 而況於取之乎잇가
不取靈武
면 則無以通西域
이요 西域不通
이면 則契丹之强
을 未有
也
리이다
然靈武之所以不可取者는 非以數郡之能抗吾中國이요 中國自困而不能擧也며
其所以自困而不能擧者
는 以不生不息之財
로 養不耕不戰之兵
하야 塊然如巨人之病
하야 非不
然大矣
나 而手足不能以自擧
일새니이다
欲去是疾也인댄 則莫若捐秦以委之하야 使秦人斷然如戰國之世에 不待中國之援하고 而中國亦若未始有秦者니이다
有戰國之全利하고 而無戰國之患이면 則夏人을 擧矣리이다
其便
은 莫如稍徙緣邊之民
의 不能戰守者於空閒之地
하고 而以其地
로 益募民爲
이니 屯田之兵
이 稍益
이면 則向之戍卒
을 可以稍減
이요 使數歲之後
에 緣邊之民
을 盡爲耕戰之夫
리니 然後
에 數出兵以苦之
하야 要以使之厭戰而不能支
면 則折而歸吾矣
리이다
如此면 而北狄始有可制之漸이요 中國始有息肩之所하리이다
所謂利入已浚而浮費彌廣者
는 臣竊以爲 外有不得已之
하고 內有得已而不已之後宮
이라하노이다
金玉錦繡之工이 日作而不息하고 朝成夕毁하야 務以相新하며
主
之吏 日夜儲其精金良帛而別異之
하야 以待倉卒之命
하니
今不務去此等하고 而欲廣求利之門하시니 臣知所得之不如所喪也니이다
軍冗而未練者는 臣嘗論之曰 此는 將不足恃之過也라하노이다
然이나 以其不足恃之故로 而擁之以多兵하고 不蒐去其無用이면 則多兵은 適所以爲敗也니이다
官冗而未澄者
는 臣嘗論之曰 此
는 與
無法之過也
라하노이다
夫審官吏部는 是古者考績黜陟之所也어늘 而特以日月爲斷하니이다
今縱未能復古
나 호되 不以遠近爲差
하고 而以難易爲等
하야 第其人之所堪而別異之
하야 才者
는 常爲其難
하고 而不才者
는 常爲其易
하며 及其當遷也
하야는 難者
는 常速
하고 而易者
는 常久
니이다
內之審官吏部와 與外之職司가 常相關通하야 而爲職司者는 不惟擧有罪, 察有功而已라 必使盡第其屬吏之所堪하야 以詔審官吏部니이다
審官吏部는 常從內하야 等其任使之難易하고 職司는 常從外하야 第其人之優劣하야 才者常用하고 不才者常閑이면 則冗官可澄矣리이다
庠序興而禮樂未具者는 臣蓋以爲庠序者는 禮樂旣興之所用이요 非所以興禮樂也라하노이다
今禮樂鄙野而未完이면 則庠序不知所以爲敎니 又何以興禮樂乎잇가
如此而求其可封하고 責其皆讓하며 將以息訟而措刑者는 是却行而求前也니이다
陛下責在位者不務敎化하고 而治民者多拘文法하시니 臣不知
夫禁防이 未至於繁多로되 而民不知避者는 吏以爲市也요 敍法이 不爲寬濫이로되 而吏不知懼者는 不論其能否하고 而論其久近也니 纍係者衆하고 愁歎者多는 凡以此也니이다
乃六月壬子에 日食於朔하고 淫雨過節하야 暖氣不效하며 江河潰決하야 百川騰溢하니 永思厥咎하면 深切在予라
此豈非陛下厭聞諸儒牽合之論하야 而欲聞其自然之說乎잇가
臣聞五月二十三分月之二十
이 니 交當朔則食
이라하니 交者
는 是行道之險者也
라
今有二人幷行而犯霧露에 其疾者는 必其弱者也요 其不疾者는 必其强者也니이다
道之險은 一也로되 而陽氣之强弱異라 故로 夫日之食은 非食之日而後爲食이요 其虧也久矣니 特遇險而見焉니이다
陛下勿以其未食也로 爲無災하시고 而其旣食而復也로 爲免咎하소서
夫淫雨大水者는 是陽氣融液汗漫而不能收也어늘 諸儒或以爲陰盛이라하니 臣請得以理折之호리이다
夫陽은 動而外하니 其於人也엔 爲噓하니 噓之氣는 溫然而爲濕하고
陰은 動而內하니 其於人也엔 爲噏하니 噏之氣는 冷然而爲燥니이다
夏則川澤洋溢하고 冬則水泉收縮하니 此燥濕之效也라
是故로 陽氣汗漫融液而不能收면 則常爲淫雨大水하니 猶人之噓而不能噏也니이다
今陛下以至仁柔天下
하야 兵驕而益厚其賜
하고 戎狄桀傲而益加其禮
하야 蕩然與天下爲
溫煖之政
하사 萬事墮(隳)壞
로되 而終無威刑以堅凝之
하시니 亦如人之噓而不能噏
이니 此淫雨大水之所由作也
니이다
天地告戒之意와 陰陽消復之理가 殆無以易此矣리이다
而制策
에 又有五事之失
과 六
之作
은 劉向所傳
이요 呂氏所紀
니
此는 陛下畏天恐懼하야 求端之過하사 而流入於迂儒之說이니 此皆愚臣之所學於師나 而不取者也니이다
夫皇極者
는 皆得
이요 不極者
는 五事皆失
이니 非所以與五事幷列而別爲一者也
니이다
是故
로 有
하야 有極而無福
이어늘 曰五福皆應
이라하니 此亦自知其疎也
니이다
以爲有可行者하고 有不可行者하니 其可行者는 皆天事也요 其不可行者는 皆人事也라하니이다
若夫
는 本非有益於救災
요 特致其尊陽之意而已
니이다
由此言之하면 則亦何必正陽之月而後에 伐鼓救變을 如左氏之說乎잇가
盛夏報囚
는 先儒固已論之
하야 以爲
이라하니 固君子之所無疑也
니이다
伏惟制策
에 有京師
는 諸夏之
이요 王敎之淵源
이어늘 百工淫巧無禁
하고 豪右僭差不度
라하시니 此
는 在陛下身率之耳
니이다
이면 則天下以羅紈爲羞
하고 이면 則四方以膏粱爲污
하리니 雖無禁令
이나 又何憂乎
잇가
伏惟制策에 有治當先內어늘 或曰 何以爲京師오하며 政在摘姦이어늘 或曰 不可撓獄市라하시니
夫見其一偏하고 而輒擧以爲說이면 則天下之說을 不可以勝擧矣니이다
自通人而言之
하면 則曰 治內
는 所以爲京師也
요 不撓獄市
는 所以爲摘姦也
니 如使不撓獄市
하여 而害其爲摘姦
이면 則夫
也
니이다
伏惟制策에 有推尋前世하야 深觀治迹컨대 孝文은 尙老子而天下富殖하고
孝武는 用儒術而海內虛耗하니 道非有弊어늘 治奚不同고하시니
孝文之所以爲得者는 是儒術略用也니 其所以得而未盡者는 是用儒之未純也요 而其所以爲失者는 則是用老也니이다
何以言之
오 라하니 故
로 曰 儒術略用而未純也
라하노이다
始以區區之仁
으로 壞三代之
하야 而易之以髡笞
하고 髡笞不足以懲其罪
하면 則又從而殺之
하니 用老之失
이 豈不過甚矣哉
잇가
且夫孝武
도 亦可謂用儒之主也
로되 博延
而多興妖祠
하고 大興宮室而甘心遠略
하니 此豈儒者敎之
잇가
今夫有國者 徒知徇其名하고 而不考其實하야 見孝文之富殖하고 而以爲老子之功이라하고 見孝武之虛耗하고 而以爲儒者之罪라하면 則過矣니
此
는 之所以溺於宴安
하야 撤去禁防
하야 而爲
也
니이다
周公豳詩는 王業也로되 而係之國風하고 宣王北伐은 大事也로되 而載之小雅라하시니이다
其後累世
에 而至文王之時
하야는 則王業
이 旣已大成矣
어늘 而其詩爲
하니 二南之詩
도 猶列於國風
이어든 而至於豳
하야 獨何怪乎
잇가
昔
에 이 觀周樂
하고 以爲 大雅
는 曲而有直體
하고 小雅
는 思而不貳
하고 怨而不言
이라하니이다
夫曲而有直體者는 寬而不流也요 思而不貳하고 怨而不言者는 狹而不迫也니 由此觀之하면 則大雅小雅之所以異者는 取其辭之廣狹이요 非取其事之小大也니이다
伏惟制策에 有周以冢宰制國用하고 唐以宰相兼度支하니 錢穀은 大計也요 兵師는 大衆也어늘
臣以爲 宰相
이 雖不親細務
나 至於錢穀兵師
하야는 固當制其
虛利害
니 陳平所謂責之內史者
는 特以宰相不當治其簿書多少之數耳
니이다
昔唐之初
에 以郞官領度支
하야 而職事以治
러니 及兵興之後
에 始立
하야 參佐旣衆
하고 簿書益繁
하야 百弊之源
이 自此而始
하니이다
以宰相兼之가 誠得防奸之要니 而韋洪質之議는 特以其權過重歟인저
故
로 以爲賤臣不當議令
이라하니 臣常以爲有宰相之風矣
라하노이다
伏惟制策에 有錢貨之制는 輕重之相權이요 命秩之差는 虛實之相養이며
水旱蓄積之備와 邊陲守禦之方과 圜法에 有九府之名하고 樂語에 有五均之義하니 此六者는 亦方今之所當論也니이다
輕可改而重不可廢니 不幸而過인댄 寧失於重이니 此制錢〈貨〉之本意也니이다
命者는 人君之所擅이니 出於口而無窮이요 秩者는 民力之所供이니 取於府而有限하니
水旱蓄積之備
는 則莫若復隋唐之
이요 邊陲守御(禦)之方
은 則莫若依秦漢之
이니이다
周官
에 有太府, 天府, 泉府,
內府, 外府, 職內, 職金, 職幣
하니 是謂九府
니 太公之所行以致富
니이다
古者
에 天子取諸侯之士
하야 이면 則市不二價
하고 이니 之所致以爲法
이니 皆所以均民而富國也
니이다
凡陛下之所以策臣者 大略如此요 而於其末에 復策之曰
富人强國, 尊君重朝, 弭災致祥, 改薄從厚는 此皆前世之急政이요 而當今之要務라하시니이다
恐臣不得盡其辭라 是以로 復擧其大體而槪問焉하시고
又恐其不能切至也라 故로 又詔之曰 悉意以陳하고 而無悼後害라하시니
陛下念祖宗之重하고 思百姓之可畏하사 欲進一人이면 當同天下之所欲進하고 欲退一人이면 當同天下之所欲退니이다
今者
에 每進一人
이면 則人相與誹曰
也
요 是某之所欲也
라하고
每退一人
이면 則又相與誹曰 是出於某也
요 是某之所
也
라하니
聖人在上
이로되 而天下之所以不盡被其澤者
는 이 附於左右
하고 而
이 盛於內也
라하면
徒見諫官御史之言이 矻矻乎難入하고 以爲必有間之者也라하며
臣不勝憤懣하야 謹復列之於末하오니 惟陛下寬其萬死하시면 幸甚幸甚이리이다
制科策
은 亦隨問條答
이니 在
에 亦未盡所欲言
이나 而中間持議
는 大較多通達國體
하니 非經生所及
이니라
01. 황제皇帝가 시험하는 제과책制科策 한 가지
짐朕은 조종祖宗의 대통大統과 선제先帝의 아름다운 공렬功烈을 계승하니, 깊이 생각하건대 과매寡昧하여 이치에 밝지 못해서 마음은 부지런하나 도道는 멀어 정치가 더 진전되지 않는다.
이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잔 지가 지금 삼기三紀가 되었으나 짐朕은 덕德이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고 가르침이 미덥지 못한 바가 있어서, 잘못된 정사政事가 아직도 많고 화기和氣가 혹 어그러지기도 하였다.
전야田野가 비록 개간되었으나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는 자가 많고, 변경이 비록 편안하나 병력을 철수하지 못하고, 재정수입의 근원을 크게 확대시켰으나 쓸데없는 비용이 더욱 많아졌으며, 군대는 많기만 하고 훈련되어 있지 못하고, 관원은 혼잡하기만 하고 깨끗하지 못하며, 상庠‧서序의 학교學校가 즐비하게 일어났으나 예악禮樂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집집마다 봉封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속이 드물고, 선비들은 서로 겸양하는 예절을 소홀히 한다.
이 때문에 우虞나라와 예芮나라처럼 분쟁이 그치지 못하고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처럼 형벌이 버려지지 못하였다.
짐작하건대 지위에 있는 자들이 교화敎化에 마음을 두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 문법文法(법조문)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금방禁防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법망을 피할 줄 모르고, 관리에 대한 고과考課가 지나치게 너그러워 관리官吏들이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힌 자들이 많고, 근심하고 탄식하는 자들이 많다.
지난 6월 임자일壬子日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고 장맛비가 지나치게 내려 따뜻한 기운이 드러나지 못하였으며 강하江河가 터져서 온갖 시내가 넘치니, 원인을 깊이 헤아려보건대 그 잘못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이 참으로 간절하다.
재변災變은 까닭 없이 생기지 않아서 잘못된 정사政事를 따라 일어나니, 오사五事의 잘못과 육려六沴가 일어남은 유향劉向이 전한 바이고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기록된 바이다.
오행五行을 어떻게 닦으면 오행五行의 본성을 얻게 되며, 사시四時를 어떻게 운행하면 사시四時가 시령時令(節氣)에 순하게 되겠는가? 정양正陽
의 달이 아닌 때에 북을 쳐서 일식日食의 변고를 구원하는 것이 경서經書에 부합하는가? 성하盛夏
의 때에 죄수의 형벌을 논하고 중죄수重罪囚의 처형을 보고하는 것이 옛 법에 근거가 있는가?
경사京師는 제하諸夏의 근본이고 왕교王敎의 근원인데, 백공百工들이 지나치게 공교롭게 세공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호우豪右들이 참람하여 법도를 지키지 않는다.
다스림은 마땅히 안(都城)을 먼저 해야 하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어떻게 경사京師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정사政事는 간사한 무리를 적발해내는 데에 달려 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옥獄과 시장市場을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다.
전대前代에 정치한 것을 미루어 살펴보건대 효문제孝文帝는 노자老子를 숭상했는데도 천하가 부유하고 백성이 많았으며, 효무제孝武帝는 유학儒學을 썼는데도 해내海內가 텅 비고 재물이 고갈되었으니, 도道에 병폐가 있는 것이 아닌데 다스림이 어찌하여 똑같지 않았는가?
왕정王政의 행하는 바는 시詩의 도道에 나타난다.
주공周公의 〈빈풍豳風〉 시詩는 왕업王業을 읊었는데도 〈국풍國風〉에 실렸고,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북쪽을 정벌한 것은 국가의 대사였는데도 〈소아小雅〉에 기재되었다.
주周나라는 총재冢宰로 하여금 국가의 재용財用을 통제하게 하였고, 당唐나라는 재상宰相으로 하여금 탁지度支를 겸하게 하였으니,
전곡錢穀(돈과 곡식)은 국가의 큰 계책이고 군대는 큰 무리인데
어찌하여 전곡錢穀을 진평陳平은 “마땅히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어야 한다.”고 대답하였으며,
위홍질韋洪質은 “재상에게 겸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가?
전錢‧화貨의 제도는 경중輕重을 서로 저울질하고, 명命(품계)‧질秩(녹봉)의 차등은 허虛‧실實로써 서로 길러준다.
수재水災와 한해旱害를 대비하는 저축과 변방을 수비하는 방법이 있으며, 또 돈을 관리하는 방법에는 구부九府라는 명칭이 있고 《악어樂語》에는 오균五均의 뜻이 있다.
인민人民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강성하게 하며, 군주를 높이고 조정의 권위를 무겁게 하며, 재앙을 그치게 하고 상서로운 징조를 이루며, 야박한 풍속을 고쳐 후덕함을 따르는 것은, 이는 모두 전대前代에 시급히 여긴 정사政事요 지금의 중요한 정무政務이니, 자대부子大夫들은 부디 뜻을 다해 말하고 후환을 두려워하지 말라.
신臣은 들으니 “천하에 일(事變)이 없으면 공경公卿의 말이 기러기의 털보다도 가벼워지고,
천하에 사변事變이 있으면 필부匹夫의 말도 태산보다 무거워진다.”고 하였으니,
지혜가 능하지 못한 바가 있고 밝음이 살피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가 아니고 완급緩急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변事變이 없을 때에는 비록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그 신하(管仲)를 깊이 믿고 관중管仲이 군주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하는 사이와 장차 죽을 때에 매우 서글피 당부하는 말을 하였어도 구구區區한 세 명의 내시들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사변事變이 있고 또 다급함에 미쳐서는 비록 당唐나라 대종代宗은 용렬하였고 정원진程元振은 정사政事를 제멋대로 행사하였으며 유항柳伉은 천하고 소원疎遠한 신하였는데도, 유항柳伉의 한마디 말이 받아들여져서 하루아침이 못 되어 심복心腹에 있는 병을 제거하였습니다.
사변事變이 없는 세상에서 말하는 자는 사변事變이 없을 때에 충분히 고칠 수가 있으나 항상 믿음을 얻지 못함을 근심하고, 사변事變이 있는 세상에서 말하는 자는 믿음을 얻기는 쉬우나 항상 미처 고치지 못함을 근심합니다.
이것이 충신忠臣과 지사志士가 깊이 슬퍼하는 이유이고 천하에 혼란과 멸망이 교대로 찾아드는 이유이나, 세상의 군주들은 이를 믿지 않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오랫동안 편안한 때에 처하시고 동요될 수 없는 튼튼한 국세國勢를 타고 있어서 팔짱을 끼고 의상을 드리우기만 하시고서도 풀이 바람을 향하듯이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지며, 용모를 동動하고 얼굴빛을 바꾸면 해내海內가 놀라고 두려워하니, 비록 한 가지 일이 상도常道를 잃고 한 사람이 제 살 곳을 얻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진실로 폐하를 근심하게 하지 못합니다.
이른바 현량賢良한 선비들을 친히 책문策問한다는 것은 고사故事를 따라 행하실 뿐이니, 어찌 신臣의 말이 참으로 충분히 폐하를 감동시킬 수 있다고 여기겠습니까?
그러나 군주가 명분을 가지고 구하더라도 신하는 실제로써 응해야 하는 법이니, 폐하께서 명분을 가지고 구하시나 신臣이 감히 실제를 가지고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과制科 책문策問에 “조종祖宗과 선제先帝의 대업大業의 소중함을 생각하시고 과매寡昧함에 자처하셔서 마음은 부지런하나 도道는 멀어 정치가 더 진전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臣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삼기三紀를 지내 사변事變을 많이 경험하시고 정위情僞를 살피심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가 더 진전되지 않으니, 신臣조차도 이것을 의심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뜻은 부지런하나 도道가 멀어 정치가 더 진전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비록 신臣이 지극히 어리석으나 감히 임금님의 밝으신 말씀을 옳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마음은 부지런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나 도道는 먼 경우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힘쓸 줄을 아신다면 천하의 일이 찬란하게 다 거행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또 어찌 신臣에게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도道가 멀다고 탄식하시니, 이는 폐하께서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힘쓸 줄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이에 신臣은 부지런함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늘은 매일 운행하기 때문에 굳세고, 해와 달은 날마다 운행하기 때문에 밝고, 물은 매일 흘러가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사람의 사지四肢는 날마다 움직이기 때문에 병이 없고, 기물器物은 날마다 쓰기 때문에 좀먹지 않는 것입니다.
천하라는 것은 큰 기물器物이니, 이것을 오랫동안 버려두고 쓰지 않는다면 나약해지고 폐지되어 날로 피폐함에 달려갈 뿐입니다.
폐하께서 법궁法宮의 가운데에 깊이 거처하시니, 나라를 걱정하고 정사에 부지런하여 쉬지 않으시는지를 신臣이 알 수 없고, 연락宴樂하고 편안하여 하는 일이 없으신지도 신臣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道가 멀다는 탄식은 폐하께서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지 않으신 데에서 연유함을 신臣은 아오니, 이는 폐하께서 거대한 천하를 가지시고도 부세賦稅를 경감하고자 하시면 재물이 부족하고, 사방의 오랑캐들을 위협하고자 하시면 병력이 강성하지 못하고,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하고자 하시면 그럴 만한 사람이 없고, 세상을 돈후敦厚히 하고 풍속을 장려하고자 하시면 그 도구가 없으며, 대신大臣은 고사故事를 그대로 따름에 불과하고 소신小臣은 문서를 조심스레 지킬 뿐이어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편안하여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는 데에서 진실로 드러납니다.
이 때문에 신臣은 폐하께서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힘쓰시지 않는다고 망령되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臣이 삼가 들으니, 지난해 이후로 대신大臣들이 정사政事를 아룀에 폐하께서 힐문詰問하시는 바가 없고 곧바로 허락하실 뿐이라 하니, 신臣은 처음 듣고 크게 두려워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물러가서 그 효험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하고는 신臣 또한 감히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군주의 말은 사士‧서인庶人과 똑같지 않아 말씀이 입에서 나오면 사방의 사람들이 이것을 서로 전하여 폭풍우보다도 더 신속합니다.
그러므로 옛날 태조太祖와 태종太宗 때에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임금님의 언어를 외워 크게 분발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진노하여 견책譴責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며, 성상의 뜻에 부합해서 이끌어 등용한 자는 어떤 사람이며, 아침저녁으로 함께 정사政事를 논의하고 실정을 말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며, 차례를 뛰어넘어 불러 자문하시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네 가지를 신臣이 모두 듣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신臣은 폐하께서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힘쓰지 않는다고 망령되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臣은 원컨대 폐하께서 천하의 일 중에 큰 것이 몇 가지가 있으며 쓸 만한 사람이 몇 명이 있으며 무슨 일이 아직 다스려지지 않았고 누가 아직 등용되지 못했는가를 조목조목 나열하시어,
첫닭이 울면 일찍 일어나서 생각하시기를 ‘내가 오늘은 무슨 일을 시행하고 누구를 등용해야겠다.’ 하시고,
다른 날에는 또 생각하시기를 ‘내가 한 그 일이 과연 잘 이루어졌는가?
등용한 그 사람이 과연 재주가 있는가?’ 하고 살피셔서 이와 같이 부지런히 힘쓰고, 이를 마음에 잊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음악과 여색을 물리치고 유순하기만 잘하는 자들을 추방하며, 어질고 통달한 사람을 친근히 하고 고금古今의 역사歷史를 널리 보셔야 할 것입니다.
무릇 이것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힘쓰는 실제이니, 이렇게 하면 도道가 어찌 멀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책制策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잔 지가 지금 삼기三紀가 되었으나 덕德이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고 가르침이 미덥지 못한 바가 있어서, 잘못된 정사政事가 아직도 많고 화기和氣가 혹 어그러지기도 하였다.
전야田野가 비록 개간되었으나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는 자가 많고, 변경이 비록 편안하나 병력을 철수하지 못하고, 재정수입의 근원을 크게 확대시켰으나 쓸데없는 비용이 더욱 많아졌으며, 군대는 많기만 하고 훈련되어 있지 못하고, 관원은 혼잡하기만 하고 깨끗하지 못하며, 상庠‧서序의 학교學校가 즐비하게 일어났으나 예악禮樂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집집마다 봉封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속이 드물고 선비들은 서로 겸양하는 예절을 소홀히 한다.
이 때문에 우虞나라와 예芮나라처럼 분쟁이 그치지 못하고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처럼 형벌이 버려지지 못하였다.
짐작하건대 지위에 있는 자들이 교화敎化에 마음을 두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 문법文法(법조문)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금방禁防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법망을 피할 줄 모르고, 관리에 대한 고과考課가 지나치게 너그러워 관리官吏들이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힌 자들이 많고, 근심하고 탄식하는 자들이 많다.”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폐하께서 우려하시는 이 수십 조항을 신臣이 모두 폐하께 하나하나 열거하여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히 폐하를 위하여 대책을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신하를 어거하는 방법을 터득해서 굳게 지키신다면, 위에서 우려하신 수십 조항은 모두 대신大臣에게 맡겨두고 폐하 자신은 관여하지 않으실 수 있는데, 지금 폐하께서는 구구區區하게 위의 수십 조항을 가지고 자신의 근심으로 삼으시니, 이것은 폐하께서 신하들을 어거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천하의 이른바 현자賢者들을 폐하께서는 이미 얻어 등용하셨습니다.
그들이 등용되기 전에는 항상 재주(경륜)가 풍부한 듯하더니 등용된 뒤에는 부족하니, 어찌 그 사람의 재주가 예전과 변함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옛날에 사람을 등용하는 자들은 밤낮으로 사안을 제기하여 채찍질하였습니다.
무왕武王이 태공太公을 등용할 적에 함께 묻고 대답한 것이 백여 만 자였으니 지금의 《육도六韜》가 이것이고,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등용할 적에 함께 묻고 대답한 것이 또한 백여 만 자였으니, 지금의 《관자管子》가 이것입니다.
옛날 군주들은 그 신하를 반복하여 깊이 이해하고자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묵묵히 저들이 하는 바를 따르시니, 이렇게 하신다면 위에서 근심한 수십 조항은 거행될 시기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 충신忠臣들은 그 임무를 받을 적에 반드시 먼저 스스로 헤아리기를 ‘내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하고, 해낼 수 있다고 헤아려지면 또 생각하기를 ‘우리 군주가 자기 몸을 잊고 나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과연 소인小人 때문에 나에게 간격을 두지 않겠는가?’라고 해서 군주가 자기 몸을 잊고 나에게 맡길 수 있으며 소인小人 때문에 나에게 간격을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헤아린 뒤에 임무를 받았으며,
이미 임무를 받았으면 자기 몸으로 천하의 책임責任을 맡아 사양하지 않고, 천하의 이익을 누리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신大臣이 안으로는 자기를 헤아리지 않고 밖으로는 군주를 헤아리지 않고 가볍게 임무를 받으며, 임무를 받고서 여러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몸을 이끌어 물러가기를 구하는데, 그러면 폐하께서는 또 아름다운 말을 하여 보내시고 다시 중한 녹봉을 더하여 위로하십니다.
대신大臣들이 몸을 이끌어 물러가기를 구하는 것은 과연 그 사람이 청렴淸廉하고 절개節槪가 있고 사양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는 군주에게 요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권력을 견고히 하기 위한 짓이고, 이는 스스로 자신이 머물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 비방을 피하려고 하는 짓이며, 이는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서 그 폐해를 후인後人들에게 떠넘겨주는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따르신단 말입니까? 신臣
은 이 때문에 폐하께서 신하들을 어거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덕德이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고, 가르침이 미덥지 못한 바가 있다.”는 말씀은 이는 실제로 지극하지 못한 것입니다.
은덕恩德을 내리면 반드시 은덕恩德을 내린 형상이 드러나게 되고 가르치면 반드시 가르친 형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니, 은덕恩德을 내리는 형상은 부세賦稅를 경감하는 데서 가장 잘 드러나고 백성을 가르치는 형상은 사형死刑을 제거하는 데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지금 다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은 실제로 지극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관리를 뽑고 등용하는 일이 중한데도 재주가 뛰어나고 덕행德行이 있는 사람을 취하지 않으며, 관리가 많은데도 고과考課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으며, 농업과 말업末業(상공업)이 전도되었는데도 평적平糴의 법이 확립되지 못하며, 가난한 자를 부자가 착취하는데도 토지土地를 점유하는 숫자를 제한함이 없으니, 천하天下에 잘못된 정사政事로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러고도 화기和氣가 어떻게 어긋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야田野를 개간하는 것은 백성들을 부유하게 해주는 방법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는 까닭은 지방관의 잘못된 정사政事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臣이 들으니, “천하天下의 백성들이 항상 한쪽으로 모여 고르지 못하여, 오吳‧촉蜀 지방에는 농사지을 만한 사람은 있으나 농사지을 땅이 없고, 형荊‧양襄 지방에는 농사지을 땅은 있으나 농사지을 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전야田野도 다 개간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吳‧촉蜀 지방과 형荊‧양襄 지방의 형편이 서로 드러나 있는데도,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백성들이 끝내 경지가 좁은 곳을 버리고 경지가 넓은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세상에서는 살던 땅을 그리워하고 옮기는 것을 어렵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틀린 말입니다.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무리를 짓지 않으면 가지 못하고 거처하는 자들은 서로 이웃할 사람이 없으면 살지 못하니, 만약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백성들을 무리로 옮긴다면 명령命令을 듣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변경邊境이 이미 편안한데도 병력을 철수할 수 없는 것은 편안하다는 이름만 있고 편안하다는 실제가 없어서입니다.
신臣이 이것을 소소하게 말하자니 자신에게 부끄럽고 큰소리를 친다면 세속世俗의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니, 신臣은 청컨대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북적北狄을 제재한 자들은 일찍이 서역西域과 통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서역西域과 통하지 못하는 까닭은 서하西夏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어서입니다.
조정에서는 영무靈武 땅을 도외시度外視하여 버려둔 지가 거의 백 년이 되었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서하西夏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異方이라 하여 일찍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하물며 점령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러나 신臣은 일의 형편상 점령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영무靈武를 점령하지 않으면 서역西域과 통할 수 없고, 서역西域과 통하지 못하면 거란契丹의 강함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무靈武를 점령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무靈武의 몇 고을이 우리 중국中國에 대항하기 때문이 아니요, 우리 중국中國이 스스로 곤궁하여 점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국中國이 스스로 곤궁하여 점령하지 못하는 까닭은 생산되지 않고 불어나지 않는 재물財物을 가지고 농사農事도 짓지 않고 싸우지도 않는 군사들을 길러, 마치 다리가 병든 거인巨人이 덩치가 크지 않은 것은 아니나 수족을 스스로 들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병폐病弊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진秦(관중關中:장안長安) 지방 사람들에게 이 지역을 떼어 맡겨서, 그들로 하여금 결연히 전국시대戰國時代처럼 중국中國의 원조를 기다리지 않게 하고, 중국中國 또한 일찍이 진秦 지방이 있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것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온전한 이익이 있고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폐해가 없게 된다면, 서하西夏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편方便으로는 변경邊境 가까이 사는 백성 중에 싸우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자들을 공한지空閒地로 차츰 옮기고 이 땅을 가지고 더욱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둔전屯田하는 병사들이 점점 많아지면 예전의 수졸戍卒들을 차츰 줄일 수 있고, 몇 년 뒤에는 변경邊境 가까이에 사는 백성들을 모두 농사짓고 싸우기도 하는 장정壯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한 뒤에 자주 병력을 출동하여 서하西夏를 괴롭혀서 요컨대 서하西夏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을 싫어하여 버티지 못하게 한다면 결국에는 굴복하여 우리에게 귀의歸依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북적北狄을 비로소 통제할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될 것이고, 중국中國은 비로소 어깨를 편히 쉴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장차 군사들에게 군수품軍需品을 대주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니, 또 어떻게 병력을 철수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재정수입의 근원을 크게 확대시켰으나 쓸데없는 비용이 더욱 많아졌다.”는 것은 신臣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밖에는 어찌할 수 없는 두 오랑캐가 있고 안에는 두지 않아도 되는 후궁後宮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궁後宮에게 드는 비용은 한 적국敵國을 막는 것에 뒤지지 않습니다.
후궁後宮들의 노리개와 장식품을 대느라 금옥金玉과 금수錦繡를 만드는 공인工人들은 날마다 일하여 쉬지 못하고 아침에 만들었다가 저녁에 부숴 새롭게 만들기를 힘쓰며,
내탕고內帑庫를 주관하는 관리들은 밤낮으로 정제된 금金과 좋은 비단을 마련하여 따로 보관해두고서 임금님의 갑작스런 명령에 대비하고 있으니,
지금 이러한 것들을 버리려고 힘쓰지 않고 재정수입만 늘리려고 하시니, 신臣은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못할 것임을 알겠습니다.
군대가 많기만 하고 훈련되어 있지 못한 것은, 신臣이 일찍이 논하기를 “이는 장수將帥가 믿을 만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쓸모없는 자들을 찾아내어 제거하지 않는다면, 병력兵力을 많이 보유하는 것은 다만 실패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관원이 혼잡하기만 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은, 신臣이 일찍이 논하기를 “이는 심관이부審官吏部와 직사職司가 법도가 없는 탓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심관이부審官吏部는 바로 옛날 〈관리들의 성적을〉 고과考課해서 강등시키고 승진시키는 부서인데, 지금은 다만 근무기간만 가지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옛 법을 회복시킬 수는 없으나, 대략 군현郡縣을 나누되 거리의 원근遠近을 가지고 차등을 두지 말고 다스리기에 어려운 정도를 가지고 차등을 두고서, 군현郡縣을 맡은 자가 감당할 수 있는가를 가지고 구별하여 재주가 있는 자는 항상 어려운 곳을 다스리고 재주가 없는 자는 항상 쉬운 곳을 다스리게 하며, 승진할 때가 되면 어려운 곳을 다스리는 자는 항상 빨리 승진하고 쉬운 곳을 다스리는 자는 항상 늦게 승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진실로 필요한 점이 있습니다.
중앙의 심관이부審官吏部와 지방의 직사職司가 항상 소통疏通해서, 직사職司의 관리가 된 자는 수령 중에 비단 죄 있는 자를 들춰내고 공이 있는 자를 살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자기에게 소속된 수령 중에 직책을 감당할 만한 자를 모두 차등을 매겨서 심관이부審官吏部에게 보고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심관이부審官吏部에서는 항상 중앙에서 맡길 직책의 난이도를 차등 매기고, 직사職司에서는 항상 지방에서 그 사람(수령)의 우열을 차등하여, 재주 있는 자가 항상 등용되고 재주 없는 자가 항상 한직閑職을 맡게 한다면, 쓸데없는 관원[冗官]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庠‧서序의 학교學校가 일어났는데도 예악禮樂이 갖추어지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신臣은 상庠‧서序라는 곳은 예악禮樂이 이미 일어난 뒤에 쓰는 곳이고 예악禮樂을 일으키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예악禮樂이 이렇게 비루하여 완전하지 못하다면 상庠‧서序에서는 가르칠 바를 알지 못할 것이니, 또 어떻게 예악禮樂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고서 집집마다 모두 봉封해질 만한 아름다운 풍속이 있기를 바라고 선비마다 모두 겸양하기를 바라며, 장차 분쟁을 그치게 하고 형벌을 쓰지 않고자 하는 것은, 이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전진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위에서 향하는 것은 아랫사람들이 달려가는 것이니, 하물며 이어서 상賞을 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위에서 저버리는 것은 아랫사람들이 버리는 것이니, 하물며 이어서 벌을 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지금 폐하께서 지위에 있는 자들은 교화敎化를 힘쓰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문법文法(법조문)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은 것을 책망하시니, 신臣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조정에서 상주고 벌주는 것을 어떻게 시행하고 계십니까?
혹시라도 교화敎化 때문에 죄를 얻고 문법文法 때문에 상을 받는 자가 많지 않습니까?
금방禁防이 많지 않는데도 백성들이 피할 줄 모르는 것은 관리들이 금방禁防으로 이익을 구하기 때문이요, 관리에 대한 고과考課가 지나치게 너그럽지 않은데도 관리들이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은 관리가 유능한지 유능하지 않은지를 따지지 않고 관직官職을 맡은 기간이 오래인지 짧은지를 논하기 때문이니, 감옥에 갇힌 자들이 많고 근심하고 탄식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책制策에 이르시기를 “근년 이래로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났다.
마침내 지난 6월 임자일壬子日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고 장맛비가 지나치게 내려 따뜻한 기운이 드러나지 못하였으며 강하江河가 터져서 온갖 시내가 넘치니, 원인을 깊이 헤아려보건대 그 잘못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이 참으로 간절하다.
재변災變은 까닭 없이 생기지 않아서 잘못된 정사政事를 따라 일어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폐하께서 여러 학자들이 억지로 끌어 맞추는 의논을 듣기 싫어하시어 자연自然스러운 말을 듣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臣은 감히 다시 《홍범전洪範傳》과 〈오행지五行志〉를 취하여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뜻을 가지고 미루어보겠습니다.
저 일식日食이라는 것은 양기陽氣가 험險함을 밟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양기陽氣가 험險함을 밟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신臣
이 듣건대 “5개월 하고 한 달을 23분한 것의 20분이 1교交가 되는데, 교交가 초하루를 당하면 먹힌다.”라고 하였으니, 교交는 바로 해가 길(黃道)을 가는 데 있어 험險한 것입니다.
그러나 혹 일식日食이 있기도 하고 혹 일식日食이 없기도 하는 것은 양기陽氣에 강하고 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다가 안개와 이슬을 맞았는데, 그중에 병이 드는 자는 반드시 약한 자이고 병들지 않는 자는 반드시 강한 자일 것입니다.
길이 험한 것은 똑같으나 양기陽氣의 강하고 약함이 다르기 때문이니, 해가 먹히는 것은 해가 먹히는 날을 만난 뒤에 먹히는 것이 아니고, 그 먹힘이 오래되었는데 다만 험함을 만나 나타날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해가 아직 먹히지 않았다 하여 재앙災殃이 없다고 여기지 마시고, 이미 먹혔다가 회복되었다 하여 허물을 면했다고 여기지 마소서.
신臣은 생각하건대 해가 먹히지 않은 것은 다만 험險함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일 뿐입니다.
많은 비가 지나치게 내려 홍수가 지는 것은 양기陽氣가 한만汗漫하게 녹아서 거두지 못하기 때문인데, 여러 학자들은 혹 이것을 음陰이 성하다고 말하니, 신臣은 이치를 가지고 이 주장을 꺾어보겠습니다.
양陽은 동動하고 밖에 있으니, 사람에게 있어서는 숨을 내쉬는 것이 되는데, 내쉬는 기운은 따뜻하고 습기濕氣가 있습니다.
음陰은 동動하고 안에 있으니, 사람에게 있어서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되는데, 들이마시는 기운은 차갑고 건조합니다.
한 사람을 가지고 하늘과 땅을 미루어보면 하늘과 땅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봄과 여름은 한 번 숨을 내쉬는 것이고, 가을과 겨울은 한 번 숨을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천택川澤이 흘러넘치고 겨울에는 수천水泉이 줄어드니, 이것이 건조하고 습함의 효험입니다.
이 때문에 양기陽氣가 한만汗漫하게 녹아서 거두지 못하면 항상 장맛비와 홍수가 되니, 이는 마치 사람이 숨을 내쉬기만 하고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지극한 인仁으로 천하를 회유하여 병사들이 교만한데도 은사恩賜를 더욱 후하게 내리시고 오랑캐들이 오만한데도 더욱 예禮를 베푸시어 널리 천하 사람들을 인자하게 대하시고 따뜻한 정사政事를 펴셔서, 만사가 무너지는데도 끝내 위엄과 형벌로써 단단히 응집함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이 숨을 내쉬기만 하고 들이마시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장맛비와 홍수가 이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경계를 고하는 뜻과 음양陰陽이 사라지고 회복되는 이치가, 아마도 이것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제책制策에 또 이르시기를 “오사五事의 잘못과 육려六沴가 일어남은 유향劉向이 전한 바이고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기록된 바이다.
오행五行을 어떻게 닦으면 오행五行의 본성을 얻게 되며, 무슨 정사政事를 행하면 사시四時가 시령時令에 순하게 되겠는가? 정양正陽
의 달이 아닌 때에 북을 쳐서 일식日食의 변고를 구원하는 것이 경서經書에 부합하는가? 성하盛夏
의 때에 죄수의 벌을 논하고 중죄수重罪囚의 처형을 보고하는 것이 옛 법에서 근거한 것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폐하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여 조심한 나머지 재이災異의 단서를 찾음이 지나쳐 우활迂闊한 학자들의 말에 빠져 들어간 것이니, 이는 모두 어리석은 신臣이 스승에게 배운 것이나 취하지 않는 바입니다.
오행五行이 서로 어긋남은 본래 여섯에 이르지 않습니다.
육려六沴라는 것은 여러 학자들이 육극六極을 가지고 오행五行에 분배하고자 한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처음으로 황극皇極을 가지고 덧붙여서 여섯(六沴)을 만들었습니다.
황극皇極은 오사五事가 모두 맞는 것이고 불극不極은 오사五事가 모두 잘못된 것이니, 오사五事와 나란히 나열되어 별도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모眊가 있고 또 몽蒙이 있어 극極만 있고 복福이 없는데도, 말하기를 “오복五福이 다 응한다.”라고 하니, 이는 그들 또한 자신들의 말이 엉성함을 알 것입니다.
여씨呂氏(呂不韋)의 시령時令은 유종원柳宗元의 의논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시령時令은 행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행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행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늘의 일이고 행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사람의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日‧월月‧성星‧신辰과 산천山川의 신神에 제사하고 사社(土地神)에 제사할 적에 북을 치는 것은 본래 재변災變을 구원하는 데 유익한 것이 아니고, 다만 양陽을 높이는 뜻을 지극히 했을 뿐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9월 초하루에 신辰이 방수房宿에 모이지 않으니, 악사樂師가 북을 연주하고 색부嗇夫가 달려가고 서인庶人이 달려간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또한 하필 정양正陽의 달에만 북을 쳐 재변災變을 구원하기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설說과 같이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여름에 죄수에 대한 처벌을 보고하는 것은 선유先儒들이 진실로 논하여 이르기를, “중니仲尼가 제齊나라 광대를 죽인 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군자들이 의심하지 않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책制策에 “경사京師는 제하諸夏의 표준이고 왕교王敎의 근원인데, 백공百工들이 지나치게 공교롭게 세공하는 것을 금禁하지 않고 호우豪右들이 참람하여 법도를 지키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으니, 이는 폐하께서 몸소 솔선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후궁後宮들이 대련大練으로 꾸미면 천하 사람들이 고운 비단옷을 입는 것을 수치로 여길 것이고, 대신들이 곁겨만 벗긴 거친 쌀을 먹으면 사방에서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먹는 것을 치욕으로 여길 것이니, 비록 금령禁令이 없더라도 또 무엇을 걱정하시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책制策에 “다스림은 마땅히 안(都城)을 먼저 해야 하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어떻게 경사京師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정사政事는 간사한 무리를 적발해내는 데에 달려 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옥獄과 시장市場을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는 모두 한쪽에 치우친 말이니,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쪽만 보고 곧 이것을 들어서 말한다면 천하 사람의 말을 이루 다 들 수가 없습니다.
사리를 통달한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도성都城을 다스리는 것은 경사京師를 위한 것이고 옥獄과 시장市場을 흔들지 않는 것은 간악함을 적발하기 위한 것이니, 만약 옥獄과 시장市場을 흔들지 않는다고 해서 간악함을 적발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저 조참曹參이란 자는 도망간 죄인들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책制策에 “전대前代를 미루어 정치한 자취를 깊이 살펴보건대 효문제孝文帝는 노자老子를 숭상했는데도 천하가 부유하고 백성들이 많았으며,
효무제孝武帝는 유학儒學을 썼는데도 해내海內가 텅 비고 재물이 고갈되었으니, 도道에 병폐가 있는 것이 아닌데 다스림이 어찌하여 똑같지 않은가?”라는 내용이 있었으니,
효문제孝文帝가 옳은 까닭은 유학儒學을 대략 사용했기 때문이니, 그 옳은데도 미진한 까닭은 유학儒學을 씀이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잘못된 까닭은 바로 노자老子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말씀드리는가 하면, 효문제孝文帝가 가의賈誼의 말을 얻은 뒤에 대신大臣을 대함에 예禮가 있었고 제후諸侯를 어거함에 방법이 있었으나, 예악禮樂을 일으키고 선우單于의 목에 사슬을 매는 데에 이르러서는 겨를이 없다고 사양하였으니, 저는 이 때문에 유학儒學을 조금만 쓰고 순수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자老子를 사용한 잘못으로 말하면 이러한 사실이 있습니다.
처음 구구區區한 인仁으로 삼대三代 시대時代의 육형肉刑을 없애고는 죄인을 머리 깎고 볼기 치는 것으로 바꾸고, 머리 깎고 볼기 치는 것으로는 그 죄를 징계懲戒할 수 없게 되자 또 따라서 죽였으니, 노자老子를 사용한 잘못됨이 어찌 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효무제孝武帝도 또한 유학儒學을 사용한 군주君主라고 이를 수 있으나 방술사方術士들을 널리 초빙하여 요망한 제사를 많이 일으켰고 궁실宮室을 크게 짓고 먼 지역의 경략經略을 좋아하였으니, 이 어찌 유자儒者들이 시킨 것이겠습니까?
지금 나라를 소유한 군주들이 다만 그 이름을 따를 줄만 알고 그 실제를 상고하지 않고서, 효문제孝文帝 때에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많은 것을 보고는 노자老子의 공이라 하고, 효무제孝武帝 때에 해내海內가 텅 비고 재물이 고갈되는 것을 보고는 유자儒者의 죄라고 말하니, 이는 잘못입니다.
이 때문에 당唐나라 명황明皇이 연안宴安에 빠져 금방禁防을 철거함으로써 천보天寶의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책制策에 “왕정王政의 행하는 바는 시詩의 도道에 나타난다.
주공周公의 〈빈풍豳風〉 시詩는 왕업王業을 읊었는데도 〈국풍國風〉에 실렸고,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북쪽을 정벌한 것은 국가의 대사였는데도 〈소아小雅〉에 기재되었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신臣이 들으니, “〈빈풍豳風〉 시詩는 후직后稷과 공류公劉가 왕업王業을 이루기 어려웠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대代가 지나 문왕文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업王業이 이미 크게 이루어졌는데도 그 시詩를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이라 하였으니,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시詩도 오히려 〈국풍國風〉에 나열되었는데 〈빈풍豳風〉 시詩에 대해서만 유독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있겠습니까?
옛날 계찰季札이 주周나라 음악을 보고 말하기를 “〈대아大雅〉는 곡진하면서도 올곧은 체體가 있고, 〈소아小雅〉는 생각하면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원망하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곡진하면서도 올곧은 체體가 있다는 것은 너그러우면서도 방탕한 데로 흐르지 않은 것이고, 생각하면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원망하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좁으면서도 박절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관찰해보면 〈대아大雅〉와 〈소아小雅〉가 다른 까닭은 그 내용의 넓고 좁음을 취한 것이고 일의 크고 작음을 취한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책制策에 “주周나라는 총재冢宰로 하여금 국가의 재용財用을 통제하게 하였고 당唐나라는 재상宰相으로 하여금 탁지度支를 겸하게 하였으니, 전곡錢穀은 국가의 큰 계책이고 군대는 큰 무리인데
어찌하여 진평陳平은 ‘〈돈과 곡식을〉 마땅히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어야 한다.’고 대답하였으며,
위홍질韋洪質은 ‘〈돈과 곡식을〉 재상에게 겸하여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신臣은 생각하건대 재상은 비록 작은 일을 직접 다스리지 않으나, 전곡錢穀과 군대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마땅히 재정의 남고 부족함과 군대의 이롭고 해로움을 제재하여야 하니, 진평陳平의 이른바 “〈돈과 곡식을〉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은 다만 재상이 문서의 많고 적은 숫자를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옛날 당唐나라 초기에는 낭관郞官에게 탁지度支를 겸직시켜서 직사職事가 잘 다스려졌는데, 전란이 일어난 뒤에 비로소 사액使額을 세워 참모하는 보좌補佐들이 많아지고 문서가 더욱 복잡해져서, 온갖 병폐의 근원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에 배연령裴延齡과 황보박皇甫鎛이 모두 아래 백성에게서 재물을 긁어모아 윗사람에게 아첨하여 세상에 드물게 권력을 행사함에 이르렀습니다.
재상에게 이것을 겸직시키는 것이 진실로 간사함을 막는 요점을 얻은 것이니, 위홍질韋洪質이 말한 뜻은 다만 그 권세가 지나치게 중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덕유李德裕가 말하기를 “미천한 신하臣下에게는 법령法令을 의논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신臣은 항상 이덕유李德裕에게 재상의 풍모가 있다고 여깁니다.
엎드려 생각해보건대 제책制策에 “전화錢貨의 제도는 경輕‧중重을 서로 저울질하고 명命(품계)‧질秩(녹봉)의 차등은 허虛‧실實로써 서로 길러준다.
수재水災와 한해旱害를 대비하는 저축과 변방을 수비하는 방법이 있으며, 또 돈을 관리하는 방법에는 구부九府라는 명칭이 있고 《악어樂語》에는 오균五均의 뜻이 있다.”라고 하셨으니, 이 여섯 가지 또한 지금 마땅히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 단목공單穆公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돈이 너무 가벼움을 걱정하면 무거운 돈을 많이 만들어 통용通用하고, 만약 무거운 돈을 감당하지 못하면 가벼운 돈을 많이 만들어 통용通用하되 또한 무거운 돈을 폐지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벼운 것은 바꿀 수 있어도 무거운 것은 폐지할 수 없으니, 불행히 잘못될 경우 차라리 무거움에 잘못되어야 하니, 이것이 전화錢貨를 만든 본의本意입니다.
명命(품계)은 군주가 마음대로 내리는 것이니 입에서 나와 무궁하고, 질秩(녹봉)은 백성의 힘으로 바치는 것이니 나라의 창고에서 취하여 한계가 있습니다.
무궁한 명命으로 한계가 있는 질秩을 기르니, 이는 허虛(품계)‧실實(녹봉)이 서로 길러주는 것입니다.
수재水災와 한해旱害를 대비하는 저축은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의창義倉제도를 회복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변방을 수비하는 방법은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경졸更卒제도를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주관周官》에 태부太府‧천부天府‧천부泉府‧옥부玉府‧내부內府‧외부外府‧직내職內‧직금職金‧직폐職幣가 있으니, 이것을 구부九府라 이르는데 태공太公이 시행하여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옛날 천자天子가 제후국諸侯國의 선비를 취하여 나라를 고르게 하면 시장에 물건 값이 통일되고 사민四民이 항상 고르게 되니, 이것을 오균五均이라 이르는데, 어진 왕王들이 이것을 사용하여 법法으로 삼았으니, 모두 백성을 고르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무릇 폐하께서 신臣에게 책문策問하신 것이 대략 이와 같고, 그 끝에 다시 책문策問하시기를
“인민人民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강성하게 하며, 군주를 높이고 조정의 권위를 무겁게 하며, 재앙을 그치게 하고 상서로운 징조를 이루며, 야박한 풍속을 고쳐 후덕함을 따르는 것은 모두 전대前代에 시급히 여긴 정사政事요 지금의 중요한 정무政務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신臣은 폐하의 성聖스러운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성상聖上께서 위에서 신臣에게 책문策問하신 것이 각각 그 일을 가리켜 말씀하셨는데,
신臣이 말씀을 다 아뢰지 못할까 염려하셔서 다시 대체大體를 들어 개략적으로 물으셨으며,
또 내용이 간절하고 지극하지 못할까 염려하셔서 또 명령하시기를 “뜻을 다하여 말하고 후환後患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신臣이 이 때문에 감히 다시 미친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천하라는 것은 군주의 소유가 아니고 천하 사람들이 군주로 하여금 주관하여 다스리게 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의 소중함을 생각하시고 백성들이 두려워할 만한 존재임을 생각하시어, 한 사람을 등용하고자 하시면 마땅히 천하 사람들이 등용하고자 하는 바와 똑같게 하시고, 한 사람을 물리치고자 하시면 마땅히 천하 사람들이 물리치고자 하는 바와 똑같게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을 등용할 때마다 천하 사람들이 서로 비방하기를 “이 사람은 아무개에게 등용된 자이고, 이 사람은 아무개가 좋아하는 자이다.”라고 말하며,
한 사람을 물리칠 때마다 또 서로 비방하기를 “이 사람은 아무개에게 내쫓긴 자이고 이 사람은 아무개가 미워하는 자이다.”라고 하니,
신臣은 감히 이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온 것은 반드시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무지한 백성들이 서로 도로에서 비방하기를
“성군聖君이 위에 계신데도 천하 사람들이 그 은택을 모두 다 입지 못하는 까닭은 군주가 총애하는 소인小人들이 좌우에 붙어 있고 여알女謁이 안에서 성행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그러나 천하 사람들이 혹 이것을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다만 간관諫官과 어사御史들이 열심히 간언諫言하여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을 보고는 반드시 이간질하는 자가 있다고 여기며,
다만 촉蜀 지방의 아름다운 비단과 월越 지방의 기이한 기물器物이 방공方貢을 통하지 않고 관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니,
이와 같다면 위에서 말씀하신바 ‘시급한 정사政事와 중요한 정무政務’를 폐하께서 어느 겨를에 행하시겠습니까?
신臣은 분하고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다시 끝에 나열하오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臣의 만 번 죽을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제과制科의 책문策問은 또한 물음에 따라 조목조목 대답한 것으로, 소장공蘇長公(蘇軾)에 있어 또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였으나, 중간의 지론持論은 대체로 국가의 체통體統을 많이 통달하였으니, 경학經學하는 유생儒生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