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覽學記하니 曾王二公爲最라 非深於學이면 不能記其學如此라
天下에 不可一日而無政敎라 故學不可一日而亡於天下니라
와 春秋合樂
과 養老勞農
과 尊賢使能
과 攷藝選言之政
으로 히 無不出於學
이라
於此養天下智仁聖義忠和之士하야 以至一偏一伎一曲之學을 無所不養하고
而又取士大夫之材行完潔
하며 而其施設
이 已嘗試於位而去者
를 以爲之師
하니라 하야 以敎不忘其學之所自
하고 遷徙偪逐
하야 以勉其怠而除其惡
하니
一日取以備公卿大夫百執事之選이면 則其材行이 皆已素定하고 而士之備選者는 其施設이 亦皆素所見聞而已요 不待閱習而後能者也라
古之在上者 事不慮而盡하고 功不爲而足하니 其要如此而已라
後世엔 無井田之法하고 而學亦或存或廢하니 大扺所以治天下國家者 不復皆出於學이요
而學之士 群居族處하야 爲師弟子之位者는 講章句 課文字而已라
至其陵夷之久하야는 則四方之學者 廢而爲廟하야 以祀孔子於天下로되 斲木摶土하야 如浮屠道士法하야 爲王者象하고
州縣吏春秋帥其屬하야 釋奠於其堂이나 而學士者或不預焉이라
今天子卽位若干年에 頗修法度하야 而革近世之不然者하시니
當此之時하야 學稍稍立於天下矣나 猶曰 州之士滿二百人이라야 乃得立學이라
於是에 慈溪之士는 不得有學하고 而爲孔子廟如故나 廟又壞不治러니라
今
在中
하야 言於州
하고 使民出錢
하야 將修而作之
라가 未及爲而去
하니 時慶曆某年也
라
後
에 하야 則曰 古之所以爲學者
는 吾不得而見
이요 而法者
는 吾不可以毋循也
라
而治其四旁爲學舍
하야 講堂其中
하고 帥縣之子弟
하야 起先生
爲之師
하야 而興於學
하다
夫吏者 無變今之法하고 而不失古之實하니 此는 有道者之所能也니 林君之爲 其幾於此矣로다
林君은 固賢令이요 而慈溪는 小邑이니 無珍産淫貨하야 以來四方遊販之民이나 田桑之美는 有以自足하야 無水旱之憂也라
無遊販之民이라 故其俗一而不雜하고 有以自足이라 故人愼刑而易治요
夫以小邑으로 得賢令하고 又得宜爲人師者하야 爲之師하니 而以修醇一易治之俗하고 而進美茂易成之材면 雖拘於法하고 限於勢하야 不得盡如古之所爲나 吾固信其敎化之將行하고 而風俗之成也로라
夫敎化는 可以美風俗이라 雖然이나 必久而後에 至於善이어늘
而今之吏는 其勢不能以久也하니 吾雖喜且幸其將行이나 而又憂夫來者之不吾繼也라 於是에 本其意以告來者하노라
03. 자계현慈溪縣에 학교를 세운 일을 기록한 기記
내가 학기學記들을 열람해 보니 증공曾鞏과 왕안석王安石 두 분이 가장 잘 지었으니, 학교學校에 대한 학식이 심오深奧하지 않으면 그 학기學記를 이와 같이 지을 수가 없다.
천하天下에 단 하루도 정치政治와 교화敎化가 없어서는 안 되므로, 정치와 교화를 맡은 학교學校도 천하天下에 단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옛적에 천하의 농토에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하고, 당黨에는 상庠을, 수遂에는 서序를, 나라 안에는 학學을 설치하는 제도를 두었다.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 춘추春秋에 행하는 여러 음악과 무용의 합동연주, 노인 봉양과 농민 위로, 현자賢者를 받들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함, 학생들의 덕행德行 기예技藝의 시험과 좋은 건의를 받아들임 등의 정사政事에서부터, 이미 정해진 계책을 받아들임, 적군을 죽이고 베어온 귀의 숫자로 논공論功함, 죄수罪囚를 신문訊問하는 일 등에 이르기까지, 학교學校에서 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이곳에서 천하의 지智와 인仁과 성聖과 의義와 충忠과 화和를 지닌 사士들을 양성하고, 한 가지 학식學識과 한 가지 기능機能과 한 가지 국부적局部的인 일의 교육에 이르기까지 길러 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또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재행材行이 온전하고 깨끗하며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이미 평가받고 퇴직한 사람을 각종 학교의 선생님으로 삼았고, 석전釋奠과 석채釋菜의 예禮로써 그 학문의 근본되는 바를 잊지 않도록 가르치고, 잘못을 범한 사람을 옮기거나 내쫓아서, 이로써 그 태만한 사람을 면려勉勵하고 그 악행惡行을 제거하게 하였다.
그렇게 되니 사士들이 조석朝夕으로 보고 듣는 것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도道의 근본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들이 익숙해지도록 익히는 것이 반드시 인의仁義에 관한 것이었고, 배우는 것은 반드시 모두 그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양성된 인물을 어느 날 뽑아서 공公과 경卿과 백관百官의 선발에 대비하면, 그들의 능력과 행실이 모두 이미 평소에 평가받았던 대로 갖추어져 있고, 이렇게 사士로서 선발되어 충원된 사람들은 그들이 시행하는 일들이 또한 모두 평소에 보고 들었던 대로 할 뿐이니, 다시 훈련하고 연습하기를 기다린 이후에야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옛날 윗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는 일에 염려를 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효과를 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효험이 충분하게 나타났으니, 그 요점要點이 이와 같았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이 천하 국가를 훌륭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었고, 학교를 세웠던 본래의 취지였다.
후세後世에는 정전井田의 법이 없어지고 학교 또한 존치存置했다 폐지廢止했다 하게 되니, 대체로 천하 국가를 바르게 다스리는 근원根源이 되는 것이 다시는 모두 학교에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의 학생들은 친족親族들끼리 무리지어 모여서 함께 지내며, 스승과 제자의 자리에 있게 되면 장구章句나 익히고 글짓기만 과업課業으로 삼을 뿐이다.
이렇게 쇠미해진 지 오래되니 사방에 있던 학교들이 폐교廢校되어 사당祠堂으로 변하여, 온 천하에서 공자孔子께 제사나 지내고, 나무를 깎거나 진흙을 이겨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의 법을 모방하여 공자의 상象을 군왕君王의 상象처럼 소조塑造하고 있다.
주州와 현縣의 관리들이 춘추春秋로 그 속료屬僚들을 인솔하고 그 당堂에서 석전釋奠의 예를 행하기도 하지만, 학사들은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사당이 세워진 것이 학교가 폐교됨에서 시작되어서, 근세의 제도가 이와 같게 된 것이다.
이제 천자天子께서 즉위하신 지 몇 년이 되었을 뿐인데도, 법도를 바르게 세우고 근세의 옳지 않은 것들을 혁파하신 것이 매우 많다.
이런 때를 당하여 학교가 차츰 온 천하에 설립되었지만, 아직도 한 현縣의 학생이 200명에 차야만 학교를 세울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에 자계현慈溪縣의 학사學士들은 학교에서 배울 수가 없게 되었고, 공자의 사당은 옛날처럼 남아 있지만 그 사당 또한 무너졌는데도 수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유군劉君이 그 가운데 있으면서 주州에 건의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돈을 출연出捐하도록 하여 수리하고 증축하고자 하였지만, 일을 시행함에 이르지 못하고 떠나니 이때가 경력慶曆 모년某年이다.
그후 임조군林肇君이 현령縣令으로 부임하여 말하기를, “옛날 학교를 세웠던 기준을 내가 제대로 알 수가 없고, 그리고 학생이 200인 이하면 학교를 세울 수 없다는 법 규정을 내가 준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그러나 내가 다스리는 백성이 여기에 있으니 가르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고,
즉시 백성들이 갹출醵出했던 돈으로 공자孔子의 사당祠堂을 짓기를 지금의 법령대로 하고,
사당 사방에 학사學舍를 짓고 그 가운데 강당講堂을 두고, 현縣의 자제들을 이끌고 선생 두순군杜醇君을 불러내어 스승으로 삼아서 학교를 일으키게 되었다.
현령縣令 임군林君은 그 도道를 지닌 사람이로다!
대저 관리가 되어서 현재 시행되는 법을 변경하지 않고 옛 제도의 진실함도 실추시키지 않았으니, 이런 일은 도道를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임군林君이 행한 것이 거의 이에 가깝도다!
임군林君은 본시 현명한 수령이고 자계慈溪 땅은 작은 고을이며, 진귀한 물산이나 사치스럽고 교묘한 물건이 생산되어서 사방의 장사꾼들이 왕래하는 그런 곳은 아니지만, 농사農事와 양잠養蠶에 적합하여 이로써 자급자족自給自足할 수 있고, 홍수나 한발의 걱정이 없는 고장이다.
왕래하는 상인이 없으므로 그 풍속이 순일純一하여 잡되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형벌刑罰을 두려워하여 조심하므로 다스리기가 용이容易하다.
그리고 내가 본 바로는 그 고을의 학사들 가운데 또한 빼어나게 아름답고 훌륭한 인재들이 많으니, 학문을 쉽게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으로 모신 두군杜君은 월越 땅에 은거隱居하던 군자君子로 그의 학문과 행실이 사람들의 스승이 되기에 합당한 분이다.
대저 작은 고을이면서도 어진 수령을 얻었고, 또한 사람들의 스승이 되기에 합당한 분을 얻어서 스승으로 모신데다가, 순일純一하여 다스리기 쉬운 풍속風俗을 잘 가다듬고, 빼어나게 아름답고 훌륭한 인재들을 학문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비록 법에 얽매이고 형세形勢에 제한을 받아서 옛 성현들이 행했던 바를 모두 이룰 수는 없다 해도, 그 교화敎化가 장차 행해지고 순미醇美한 풍속이 이루어질 것임을 나는 굳게 믿노라.
대저 교화敎化를 통하여 풍속을 순미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이런 일은 반드시 오랫동안 시행한 이후에야 완선完善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관리가 그 형편상 이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으니, 내가 비록 앞으로도 그대로 행해짐을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길 것이나, 또한 뒤에 부임赴任한 사람이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게 될까봐 근심이 되어서, 이에 그 뜻의 근본 되는 것을 기록하여 앞으로 부임할 사람들에게 이를 알도록 하고자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