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之處困者 什之八九로되 其能參於九卦하야 而不失者는 千之一萬之一이니 吾所以錄而存之니라
非夫智足以窮理하고 仁足以盡性하야 內有以固其德하고 而外有以應其變者면 其孰能無患哉아
古之人이 有極天下之困이로되 而其心能不累하고 其行能不移하야 患至而不傷其身하고 事起而不疑其變者는 蓋有以處之也니라
然而猶困焉者는 非吾行之過也요 時有利不利也일새라
蓋古之所謂困者는 非謂夫其行自困者요 謂夫行足以通而困於命者耳니라
蓋於此九卦者에 智有所不能明하고 仁有所不能守면 則其困也 非所謂困이요 而其處困也疏矣니라
夫惟深於此九者하야 而能果以行之者면 則其通也宜하야 而其困也有以處之리니 惟其學之之素也니라
且君子之行大矣에 而待禮以和하야 仁義爲之內하고 而和之以禮면 則行之成也라
而
之實
은 存乎謙
이니 謙者
는 禮之所自起
요 禮者
는 行之所自成也
라
故君子는 不可以不知履니 欲知履인댄 不可以不知謙이니라
夫禮는 雖發乎其心이나 而其文著乎外者也니 君子知禮而已면 則溺乎其文하고 而失乎其實하야 忘性命之本而莫能自復矣라
故禮之弊를 必復乎本이라야 而後可以無患이라 故君子는 不可以不知復이니라
雖復乎其本이라도 而不能常其德以自固면 則有時而失之矣니 故君子不可以不知恒이니라
雖能久其德이라도 而天下事物之變이 相代乎吾之前하나니 如吾知恒而已면 則吾之行이 有時而不可通矣니 是必度其變하야 而時有損益이라야 而後可라
夫學이 如此其至하고 德이 如此其備면 則宜乎其通也라
困於命이면 則動而見病之時也니 則其事物之變이 尤衆하야 而吾之所以處之者 尤難矣니라
故君子之學이 至乎井巽而大備하니 而後足以自通乎困之時라
後世之人은 一困于時면 則憂思其心하야 而失其故行하니 然卒至于不能自存也하니
세상에 궁곤窮困한 사람이 열에 여덟아홉이 되지만, 구괘九卦의 의의意義를 참조參照하여 처신處身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천 명에 한 사람, 만 명에 한 사람이 있을까 말까 하니, 내(茅坤)가 이 글을 이곳에 수록收錄하여 남겨놓으려는 뜻이 여기에 있다.
곤경困境에 처했을 때에 마음가짐과 행동을 도道에 합당하게 하는 것은 군자君子도 행行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저 지혜智慧가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하기에 충분하고, 인仁이 천성天性을 극진하게 드러내기에 충분하며, 안으로는 그 덕德을 굳건히 함이 있고, 밖으로는 그 변화變化에 적응適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곤경을 근심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천하天下의 지극한 곤경에 처했으면서 그 마음이 이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고, 그 행실이 이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어서, 환란患亂이 닥쳐도 그 몸을 상傷하지 않고, 사단事端이 일어나도 그 변고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대처할 방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에 대처對處하는 도道에 대하여 일찍이 성인聖人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이괘履卦의 뜻에 맞추어 성행性行을 조화롭게 하고, 겸괘謙卦의 뜻에 맞추어 예禮로써 제어制御하고, 복괘復卦의 뜻에 맞추어 스스로 그 득실得失을 알고, 항괘恒卦의 뜻에 맞추어 덕德을 한결같게 하고, 손괘損卦의 뜻에 맞추어 수신修身하여 해害를 멀리하고, 익괘益卦의 뜻에 맞추어 남과 나에게 이로운 일이 일어나게 하고, 곤괘困卦의 뜻에 맞추어 원망怨望할 일이 적게 하고, 정괘井卦의 뜻에 맞추어 의리義理를 밝게 분변分辨하고, 손괘巽卦의 뜻에 맞추어 변화變化에 적합한 계책을 세운다.” 하였으니, 이것이 그에 대처하는 도道이다.
대저 군자君子의 학문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제대로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천하天下의 도리道理에 형통亨通하기에 합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곤경에 처하였다면 내 행실의 잘못이 아니라, 시대를 만남에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어서인 것이다.
대체로 옛날의 이른바 궁곤窮困이라는 것은 그 행실 때문에 스스로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행실은 통달하게 대처하기에 충분하였는데 명命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뿐임을 이르는 것이다.
대체로 이 아홉 괘卦에 의거해보면, 지혜智慧가 밝게 처리할 능력이 없고, 인仁함이 이를 고수固守할 능력이 없어서, 그래서 궁곤窮困하게 되었다면, 이는 이른바 정상적인 궁곤이 아니고, 궁곤에 처해서도 이를 알지 못하여 이에 대처하기를 소루疏漏하게 한 것일 뿐이다.
오직 이 아홉 괘卦의 뜻을 깊이 이해하여 과감하게 이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그 형통함에 합당하여, 궁곤에 처하게 된다 해도 이에 적절히 대처할 수가 있을 것이니,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은 오직 그 배운 것이 근본이 되어서인 것이다.
또한 군자君子가 큰일을 행할 때에는 예禮로 대하여 조화調和를 이루어 인의仁義로 내심內心을 닦고 예禮로써 조화調和를 이루게 되면, 대행大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예禮의 실상實相은 겸손謙遜함에 있는 것이니, 겸손謙遜이라는 것은 예禮를 바탕으로 하여 드러나고, 예禮라는 것은 행위行爲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이괘履卦의 의의意義를 몰라서는 안 되니, 이괘履卦의 의의意義를 알고자 한다면 겸손謙遜을 상징하는 겸괘謙卦를 몰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저 예禮라는 것이 비록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는 하나, 그 형식形式은 밖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니, 군자君子가 예禮를 아는 데만 그칠 것 같으면, 그 형식形式에 빠져서 그 실상實相을 잃게 되어, 성명性命의 근본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이를 회복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형식에만 얽매이는 예禮의 폐단을 반드시 근본의 회복을 통하여 벗어나야 하나니, 그런 뒤에야 근심거리가 없어질 수 있으므로, 군자는 복괘復卦의 의의意義를 몰라서는 안 된다.
근본을 회복했다 해도 그 덕德을 항구恒久하게 지녀서 스스로를 굳건히 할 수가 없다면 때때로 이를 잃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항괘恒卦의 의의意義를 몰라서는 안 된다.
비록 그 덕德을 항구恒久하게 지닌다 해도, 천하天下 사물事物의 변화變化가 내 앞에서 서로 교대하여 바뀌는데, 만약 내가 덕德을 항구恒久하게 지니는 데만 그친다면 나의 행위가 변화에 형통하게 대처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이에 반드시 그 변화를 헤아려서 때때로 더함도 있고 덜어냄도 있은 이후에야 올바르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는 손괘損卦와 익괘益卦의 의의意義를 몰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저 학문學問이 이와 같은 경지境地에 이르고, 덕德이 이와 같은 경지를 갖추게 되면, 당연히 형통하게 된다.
그런데도 오히려 궁곤하게 되었다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운명運命 때문에 궁곤하게 된 것이다.
운명 때문에 궁곤해졌다면, 움직였다 하면 곧 궁곤함을 당하게 되는 때이니, 그런 때에는 사물의 변고가 더욱 많이 일어나서, 내가 이에 대처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행위가 일을 합당하게 처리함에 통달하고 시대의 변화에 적절하게 적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리義理를 잘 분별分別하고 임기응변臨機應變에 능숙한 연후然後에야 끝까지 형통亨通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괘井卦는 의리義理를 분변分辨하는 기준이 되고, 손괘巽卦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을 행行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학문學問은 정괘井卦와 손괘巽卦의 의의意義에 통달通達함에 이르러서야 크게 갖추어지고, 그렇게 된 이후에야 궁곤窮困을 당할 때에도 스스로 형통亨通하게 되기에 충분하게 된다.
공자孔子께서 “《역易》을 지은 사람은 우환憂患이 있었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은 궁곤窮困을 당했을 때에 스스로 형통亨通하도록 대처對處하기에 충분하였음을 이르는 것이다.
후세後世 사람들은 시대時代의 추세趨勢 때문에 궁곤해지면, 그 마음을 근심스러운 생각으로 수고롭혀 그 행동의 준칙을 상실하게 되니,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을 보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겠는가.
이곳에 열거한 아홉 괘卦의 의의意義를 몰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