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諱침忱이요 자字명숙明叔이니 화음華陰양씨楊氏子라
治춘추春秋에 不守先儒傳注하고 資他經以佐其說하니 其說超厲卓越하야 世儒莫能難也러라
及爲吏
에 姦發伏
하고 振擿利害
한대 大人之以聲名權勢驕士者 常逆爲君自絀
하니 蓋君有以過人如此
라
然峙其能하고 奮其氣하야 不治防畛하야 以取通於世라 故終於無所就以窮하니라
初에 군君以父음직蔭으로 수장작감주부守將作監主簿하고 數擧進士不中이라
積官至朝奉郞
행대리시승行大理寺丞 통판하중부사通判河中府事 러니 而坐小法
하야 絀監蘄州酒稅
어늘 未赴
하고 而以
가우嘉祐七年四月辛巳
에 卒於
하남河南하니 享年三十九
라
顧言曰 焚吾所爲書하야 無留也하고 以柩從先人葬하라하니 八年四月辛卯에 從其父하야 葬하남부河南府낙양현洛陽縣평악향平樂鄕장봉촌張封村하다
君曾祖諱津이요 祖諱수경守慶이니 방주사마坊州司馬로 贈상서좌승尙書左丞하다
父諱해偕니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요 以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致仕하니 特贈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하다
娶정씨丁氏하니 청하현군淸河縣君이요 상서우승尙書右丞도度之女라
子男兩人하니 경략景略은 수태상시태축守太常寺太祝이니 好書하야 學能自立이요 경언景彦은 早卒하다
君有문집文集十卷하고 又別爲춘추정론春秋正論十卷과 미언微言十卷과 통례通例二十卷이라
군君의 휘諱는 침忱이고 자字는 명숙明叔이며 화음華陰 양씨楊氏의 자손子孫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뛰어났고 문장文章으로 천하의 칭송을 받았다.
《춘추春秋》를 연구하면서, 선유先儒들의 전傳과 주注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다른 경전經傳을 근거로 하여 그 학설學說을 보완補完하였으며, 그 학설이 뛰어나게 탁월하여 당시의 유학자儒學者들이 이의異義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관리官吏가 되자 간사奸邪한 행위를 밝혀내고 숨긴 것을 파헤쳐서, 이로운 것은 발전시키고 해로운 것은 제거하니, 대가집 사람들 가운데 성명聲名과 권세權勢가 있는 교만한 사士들이 항상 미리 군君에게 굽신거리게 되었으니, 대체로 군君이 남보다 뛰어남이 있기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그 능력이 뛰어남을 믿고 그 기상을 떨치며, 스스로를 제어하고 다스려서 세속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므로, 끝내 성취한 바가 없이 궁곤窮困하게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 군君이 부친의 관작으로 인하여 음직蔭職으로 수장작감주부守將作監主簿가 되었고, 여러 차례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안事案에 대하여 간언諫言을 하였는데, 그 말에 일반 사람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정문간공丁文簡公(丁度)이 장차 죽게 되었을 때에 군君을 위해 벼슬을 주기를 청하였으나, 군君은 이를 사양하였다.
그 후 다시 대신大臣의 천거가 있어서, 군君을 불러 학사원學士院에서 시험을 보게 하였으나,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
경력을 쌓아서 벼슬이 조봉랑朝奉郞 행대리시승行大理寺丞 통판하중부사通判河中府事 비기위飛騎尉에 이르렀으나, 하찮은 규정에 걸려 죄를 입어서 감기주주세監蘄州酒稅로 좌천되었는데, 부임하지 못하고 가우嘉祐 7년 4월 신사일辛巳日에 하남河南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39세였다.
유언遺言하기를 “내가 지은 글들을 태워버리고 남겨두지 말며, 관棺을 선친先親의 묘소 곁에 매장하라.” 하였으므로, 8년 4월 신묘일辛卯日에 선친을 따라서 하남부河南府 낙양현洛陽縣 평락향平樂鄕 장봉촌張封村에 안장安葬하였다.
군君의 증조曾祖는 휘諱 진津이고, 조祖는 휘 수경守慶으로, 방주사마坊州司馬를 역임하였고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증직贈職되었다.
부친父親의 휘諱는 해偕이니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를 역임하고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으로 치사致仕하였는데, 특별히 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에 증직贈職되었다.
정씨丁氏와 혼인하였는데 청하현군淸河縣君이요, 상서우승尙書右丞 도度의 따님이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경략景略은 수태상시태축守太常寺太祝으로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자립할 만하고, 경언景彦은 일찍 사망하였다.
군君은 《문집文集》 10권卷을 남겼고, 또 별도로 《춘추정론春秋正論》 10권, 《미언微言》 10권, 《통례通例》 20권을 지었다.
아득하도다! 그 누구에서 시작되어, 그런 훌륭함을 남기셨는가?
어두웁도다! 그 누가 그치게 하여, 이에서 마치게 되었는가?
이 명銘을 그 유택幽宅에 드리면서, 이로써 그 자손子孫을 위로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