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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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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佳致蔚然이라
君諱이요 명숙明叔이니 화음華陰양씨楊氏
少卓犖하야 以文章稱天下하고
춘추春秋 不守先儒傳注하고 資他經以佐其說하니 其說超厲卓越하야 世儒莫能難也러라
及爲吏 姦發伏하고 振擿利害한대 大人之以聲名權勢驕士者 常逆爲君自絀하니 蓋君有以過人如此
然峙其能하고 奮其氣하야 不治防畛하야 以取通於世 故終於無所就以窮하니라
以父음직으로 수장작감주부守將作監主簿하고 數擧進士不中이라
數上書言事하니 其言有衆人所不敢言者러라
且死求職호되 辭焉하고
復用大臣薦하야 召君試學士院호되 又久之不就하다
積官至朝奉郞행대리시승行大理寺丞 통판하중부사通判河中府事 러니 而坐小法하야 絀監蘄州酒稅어늘 未赴하고 而以가우嘉祐七年四月辛巳 卒於하남河南하니 享年三十九
顧言曰 焚吾所爲書하야 無留也하고 以柩從先人葬하라하니 八年四月辛卯 從其父하야하남부河南府낙양현洛陽縣평악향平樂鄕장봉촌張封村하다
君曾祖諱津이요 祖諱수경守慶이니 방주사마坊州司馬상서좌승尙書左丞하다
父諱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致仕하니 特贈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하다
정씨丁氏하니 청하현군淸河縣君이요 상서우승尙書右丞之女
子男兩人하니 경략景略 수태상시태축守太常寺太祝이니 好書하야 學能自立이요 경언景彦 早卒하다
君有문집文集十卷하고 又別爲춘추정론春秋正論十卷 미언微言十卷 통례通例二十卷이라
銘曰
芒乎其孰始하야 以有厥美
昧乎其孰止하야 以終於此
納銘幽宮하야 以慰其子하노라


03. 대리시승을 지낸 양군의 묘지명
아름다운 운치가 하게 드러났다.
이고 명숙明叔이며 화음華陰 양씨楊氏자손子孫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뛰어났고 문장文章으로 천하의 칭송을 받았다.
춘추春秋》를 연구하면서, 선유先儒들의 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다른 경전經傳을 근거로 하여 그 학설學說보완補完하였으며, 그 학설이 뛰어나게 탁월하여 당시의 유학자儒學者들이 이의異義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관리官吏가 되자 간사奸邪한 행위를 밝혀내고 숨긴 것을 파헤쳐서, 이로운 것은 발전시키고 해로운 것은 제거하니, 대가집 사람들 가운데 성명聲名권세權勢가 있는 교만한 들이 항상 미리 에게 굽신거리게 되었으니, 대체로 이 남보다 뛰어남이 있기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그 능력이 뛰어남을 믿고 그 기상을 떨치며, 스스로를 제어하고 다스려서 세속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므로, 끝내 성취한 바가 없이 궁곤窮困하게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 이 부친의 관작으로 인하여 음직蔭職으로 수장작감주부守將作監主簿가 되었고, 여러 차례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안事案에 대하여 간언諫言을 하였는데, 그 말에 일반 사람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정문간공丁文簡公(丁度)이 장차 죽게 되었을 때에 을 위해 벼슬을 주기를 청하였으나, 은 이를 사양하였다.
그 후 다시 대신大臣의 천거가 있어서, 을 불러 학사원學士院에서 시험을 보게 하였으나,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
경력을 쌓아서 벼슬이 조봉랑朝奉郞 행대리시승行大理寺丞 통판하중부사通判河中府事 비기위飛騎尉에 이르렀으나, 하찮은 규정에 걸려 죄를 입어서 감기주주세監蘄州酒稅로 좌천되었는데, 부임하지 못하고 가우嘉祐 7년 4월 신사일辛巳日하남河南에서 하니 향년享年이 39세였다.
유언遺言하기를 “내가 지은 글들을 태워버리고 남겨두지 말며, 선친先親의 묘소 곁에 매장하라.” 하였으므로, 8년 4월 신묘일辛卯日에 선친을 따라서 하남부河南府 낙양현洛陽縣 평락향平樂鄕 장봉촌張封村안장安葬하였다.
증조曾祖 이고, 는 휘 수경守慶으로, 방주사마坊州司馬를 역임하였고 상서좌승尙書左丞증직贈職되었다.
부친父親이니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를 역임하고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으로 치사致仕하였는데, 특별히 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증직贈職되었다.
정씨丁氏와 혼인하였는데 청하현군淸河縣君이요, 상서우승尙書右丞 의 따님이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경략景略수태상시태축守太常寺太祝으로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자립할 만하고, 경언景彦은 일찍 사망하였다.
은 《문집文集》 10을 남겼고, 또 별도로 《춘추정론春秋正論》 10권, 《미언微言》 10권, 《통례通例》 20권을 지었다.
은 다음과 같다.
아득하도다! 그 누구에서 시작되어, 그런 훌륭함을 남기셨는가?
어두웁도다! 그 누가 그치게 하여, 이에서 마치게 되었는가?
을 그 유택幽宅에 드리면서, 이로써 그 자손子孫을 위로하노라.


역주
역주1 大理寺丞楊君墓誌銘 : 文中에서 嘉祐 8년(1063) 4월 辛卯日(20일)에 下葬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本 墓誌銘은 그 前後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 저본에 ‘按’으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3 丁文簡公 : 文簡은 丁度(990~1053)의 시호로, 樞密副使 參知政事를 역임했던 인물이며, 墓主가 바로 그의 사위였다.
역주4 飛騎尉 : 飛騎尉는 6品에 해당하는 勳官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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