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숭반內殿崇班 광덕군병마도감廣德軍兵馬都監전군錢君之墓 在화주和州之역양歷陽계롱현雞籠鄕영창리永昌里라
當五代時하야 諸侯王僭悖어늘 獨常順事中오월국國하야 道閉無所出이면 則間以其方物로 取海上輸之天子하니라
至송宋受命하야 欲一天下하니 오월왕吳越王卽帥其屬하고 朝경사京師而盡獻其地어늘
天子受其地하야 王之회해淮海하야 而襃題其子孫하다
蓋至於今百年토록 전씨錢氏之有籍於朝廷者를 殆不可勝數요 而以才稱於世하고 嘗任事者 比比出焉하니라
君諱某요 자字某니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諱某之子요 소화군절도사昭化소화군절도사軍節度使諱某之孫이요 오월국吳越문목왕文穆王諱某之曾孫이니 전씨錢氏以才稱於世者也라
其爲子弟也엔 父昆稱良焉하고 其爲父兄엔 又能敎其子弟하며 其爲吏엔 又能修其職事하니 而天子常任之하야 以爲材하다
始以季父
蔭補
삼반차직三班借職이라가 稍遷至
내전숭반內殿崇班하야 지흠주知欽州하니 지흠주州人甚愛之
러라
歸하야 주사전중奏事殿中하니 稱旨하야 遂遷내전승제內殿承制하고 제점광남서로형옥提點廣南西路刑獄하다
在광서廣西四年에 以功次遷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하야 刺擧當法하니 賢士대부大夫多譽之러라
當是時하야 농지고儂智高爲姦하야 數嫚邊吏호되 邊吏莫能抗하고 諸州又皆無兵이라
君卽奏請戍광덕군병마도감兵以待變하야 奏至五六호되 而大臣終不許어늘 卽復上書求罷호되 又不許러니 而농지고儂智高果反하다 君坐詘三官하야 요주감주監요주감주饒州요주감주酒라가 居久之에 稍復遷至내전숭반內殿崇班 광덕군병마도감廣德軍兵馬都監하다
至광덕廣德之明年의 가우嘉祐二年은 君年七十一矣니 以三月某甲子卒하다
소화군절도사昭化之治화주和州也 凡十八年이라 有惠愛於화주州人이러니 其卒에 子孫遂留以葬이라
故君子기淇기沂옥沃부溥奉君喪하야 以某年某月某甲子에 歸葬於영창永昌先人之兆하다
而기淇기沂以余曾從事於文辭라하야 自군君之將葬으로 至於今三年에 跋涉而從余하야 以求銘數矣요 然不止而愈勤이라
내전숭반內殿崇班 광덕군병마도감廣德軍兵馬都監 전군錢君의 묘墓가 화주和州의 역양歷陽 계롱현雞籠縣 영창리永昌里에 있다.
전씨錢氏는 처음에 평민 발신發身하여 오월吳越의 왕王이 되었다.
오대시대五代時代를 당當하여 제후왕들이 참람僭濫한 패역悖逆을 자행恣行하였으나, 전씨錢氏의 오월국吳越國은 홀로 항상 중원中原의 조정에 순종하고 이를 받들어, 길이 막혀서 갈 수가 없을 때면 간간이 그 토산물을 해상을 통하여 천자天子에게 바쳤다.
송宋나라가 천명天命을 받아 건국하여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니, 오월왕吳越王은 즉시 그 신료臣僚들을 인솔하고 경사京師에 이르러 알현하고 그 땅을 모두 바쳤다.
이에 천자天子께서는 그 땅을 접수한 후 그를 회해淮海의 왕王으로 삼고, 그 자손들도 포상하여 명예를 선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100년 동안 전씨錢氏들 가운데 조정 벼슬아치의 명부에 이름이 오른 자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며, 재능이 있어서 세상의 칭찬을 받고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사람이 연이어 나왔다.
군君의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모某이며,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휘諱 모某의 아들이고, 소화군절도사昭和軍節度使 휘諱 모某의 손자이며, 오월국吳越國 문목왕文穆王 휘諱 모某의 증손曾孫이니, 전씨錢氏는 재능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자제였을 때에는 부형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고, 부형이 되어서는 또한 그 자제들을 잘 가르쳤으며, 관리가 되어서는 또 그 직분을 잘 수행하니 천자께서 늘 그들을 임용해 쓰면서 재능이 있다고 여기셨다.
처음에 숙부叔父 사공思公의 벼슬 덕분으로 음보蔭補로 삼반차직三班借職에 임용되었다가, 차츰 승진하여 내전숭반內殿崇班에 이르고 지흠주知欽州가 되니, 흠주欽州 사람들이 그를 매우 친애하였다.
중앙으로 돌아와 주사전중奏事殿中이 되었는데, 일 처리가 황상皇上의 뜻에 맞았으므로 드디어 내전승제內殿承制로 옮겨서 제점광남서로형옥提點廣南西路刑獄이 되었다.
광서廣西 지방에 있는 4년 동안에 공로를 세워 차츰 승진하여 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가 되었는데, 간악奸惡한 자를 검거하고 공로功勞가 있는 자를 천거함을 법도에 합당하게 하니, 많은 현사賢士와 대부大夫들이 칭찬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농지고儂智高가 간악한 짓을 자행하여 자주 변방의 관리들을 능멸하였으나, 변방의 관리들이 이를 제어할 수가 없었고, 여러 주州에는 또한 모두 군대가 없었다.
이에 군君이 즉시 수비할 군사를 갖추어 변고에 대비해야 한다고 상주上奏하였으나, 상주上奏가 대여섯 번에 이르러도 대신大臣이 끝내 허락하지 않자, 즉시 다시 글을 올려 면직免職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이 또한 허락하지 않았는데, 농지고儂智高가 과연 반란을 일으키니, 군君은 제대로 막지 못한 책임에 걸려서, 관등官等이 3등급等級 강등降等되어 쫓겨나서 요주감주饒州監酒가 되었다가, 오래 지나서 차츰 다시 승진되어 내전숭반內殿崇班 광덕군병마도감廣德軍兵馬都監에 이르게 되었다.
광덕廣德에 부임한 이듬해인 가우嘉祐 2년(1057)은 군君의 나이 71세였는데, 그해 3월 모갑자某甲子에 졸卒하였다.
망인亡人의 조고祖考이신 소화군절도사昭化軍節度使께서 화주和州를 다스린 것이 총 18년인데, 고을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졸卒하자 자손들이 드디어 그곳에 하장下葬하고자 하였다.
그 때문에 군君의 아들 기淇와 기沂와 옥沃과 부溥가 군君의 유체遺體를 받들어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갑자某甲子에 영창永昌의 선산先山에 안장安葬한 것이다.
그리고 기淇와 기沂는 일찍이 나를 따라서 문사文辭를 배운 일이 있다 하여 군君을 안장하고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 멀고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찾아와 나를 따르면서 여러 차례 명銘을 지어주기를 청하였고, 그러고도 그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나를 따르고 있다.
이와 같으니 내가 명銘을 지어주지 않을 수가 없도다.
이에 그를 위해 군君의 행적을 차례로 서술하여 돌아가서 무덤에 새겨놓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