次婦之賢에 始則於其夫之言하고 夫亡 則於其兄之子之言으로 爲案하니 有法이라
진씨陳氏는 於
소주蘇州爲
좌찬선대부大姓
이니 좌찬선대부夫人者
는 태자중윤太子中允諱
지무之武지무之태자중윤子요 某官贈
태상경太常卿諱
욱郁지무之孫
이요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諱質
지무之曾孫
이며 而
태상박사太常博士지무之妻也
라
聰明順善하야 動有禮法하고 以不及養舅姑也라 故於祭祀尤謹하니라
박사博士祿賜는 盡之宗族朋友하고 不足則出衣服簪珥助之호되 而不言하고
撫박사博士之兄子하야 如已子하고 哭박사博士三年을 未嘗如진씨陳氏러라
除喪大貧하니 顯者求以爲妻하고 族人强之호되 不可하고 又强之하니 則涕泣自誓러라
然夫人之行은 非特出於二人之言이라 凡習진씨陳氏왕씨王氏者는 皆知其爲賢하야 而哀其志러라
其封曰영가현군永嘉縣君이요 其卒於소주蘇州하니 以치평治平二年十一月九日로 年三十八이라
其葬以三年十一月某日에 從박사博士於閶門之西原하다
부인婦人의 현숙賢淑함을 차례로 기술記述하면서, 그 부군夫君이 한 말로 시작하여 부군夫君이 사망한 후의 일은 형의 아들이 말한 것을 토대로 기술한 것이, 법도法度에 맞는다.
진씨陳氏는 소주蘇州의 대성大姓으로, 부인夫人은 태자중윤太子中允 휘諱 지무之武의 따님이고, 모관某官을 지내고 태상경太常卿에 추증追贈된 휘諱 욱郁의 손녀孫女이며,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휘諱 질質의 증손녀曾孫女이고, 태상박사太常博士 왕군王君 휘諱 봉逢의 아내이다.
총명聰明하고 성실하게 순종하였으며, 예법禮法에 맞게 행동하였고, 출가出嫁해서는 시부모媤父母가 이미 작고作故하여 봉양奉養할 수 없었으므로, 그분들의 제사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박사博士가 봉록俸祿을 받으면 종족宗族과 붕우朋友의 접대에 모두 쓰고, 부족하면 의복이나 패물을 팔아 도와드리면서도 이를 입 밖에 들어낸 일이 없었다.
첩妾을 곱게 꾸며서 남편을 시침侍寢하도록 바치기를 꺼리지 않았으나, 박사博士는 끝내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대체로 내가 박사博士에게 들은 것들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박사博士의 형兄의 자식들을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감싸 길렀고, 박사博士의 삼년상三年喪을 치르면서 진씨陳氏처럼 슬퍼한 사람이 없었다.
상喪을 마치고 매우 가난하게 지내니, 현달顯達한 사람이 아내로 삼겠다고 청혼請婚을 하였고, 가족들도 강요하였으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으며, 거듭 강요하였지만 눈물을 흘리며 끝내 수절守節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대체로 내가 박사博士의 형兄의 아들인 경원景元에게서 들은 것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부인夫人의 행실은 다만 두 사람의 말에서 나온 것뿐이 아니라, 진씨陳氏와 왕씨王氏의 일을 익히 아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의 현숙賢淑함을 알고 있고 그 정절貞節을 애긍哀矜히 여겼다.
그 봉호封號를 영가현군永嘉縣君이라 하였고, 부인이 소주蘇州에서 졸卒한 때가 치평治平 2년 11월 9일이었으며, 향년享年이 38세였다.
부인의 장례葬禮는 치평治平 3년 11월 모일某日에 박사博士를 따라서 여문閭門의 서쪽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살아 있을 때에는 이분을 따랐고, 죽어서도 이분을 따라서 함께 묻혔네.
운명을 따르며 절의節義를 지켰으니, 자손이 없은들 어찌 슬퍼할 게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