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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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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序事簡而不詳世系
然譬之兵家者 少敗衆已
남성인南城人이니 왕씨王氏 諱無무구无咎 보지補之
初補강도현위江都縣尉라가 丁父憂하고 服除 調위진현주부衛眞縣主簿하다
嘗棄천태현령天台縣令하고 以與予共學이러니 久之 無以衣食其妻子하야 乃去補남강현주부南康縣主簿하다
會予召至경사京師하야 因留敎授러니 上方興學校하야 以經術造士어늘 予言君可敎國子라하야 命且下 而君死하다
君所在 學者歸焉하고 賢士대부大夫皆慕與之游
然君寡合하야 常閉門治書호되 唯與予言莫逆하니라
희령초熙寧初하야 所謂質直好義하고 不爲利疚하야 予獨知君而已러라
君之死 年四十有六이니 희령熙寧二年閏十一月丁巳
至四年二月壬申하야증씨曾氏 始克葬君남성현南城縣예교향禮敎鄕장의리長義里하다
銘曰
安時所難하고
於呼鮮哉인저 可謂君子로다


06. 왕보지의 묘지명
사적事跡의 서술이 간략하고 세계世系도 밝혀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병가兵家의 이론에 비유한다면, 적은 병력으로 많은 군대를 패배시키는 방법이다.
남성인南城人이니, 왕씨王氏이고, 무구无咎이며, 보지補之이니, 가우嘉祐 2년(1057)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강도현위江都縣尉에 보임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물러났고, 상기喪期를 마치자 위진현주부衛眞縣主簿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천태현령天台縣令을 사임하고, 나와 함께 학문을 닦았는데, 오래 지나자 처자妻子를 먹여 살릴 수가 없어서, 내게서 떠나서 남강현주부南康縣主簿보임補任되었다.
그때 마침 나는 소환되어 경사京師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면서 교수敎授로 있었는데 황상皇上께서 바로 그때 각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경술經術의 교육으로 선비를 양성하려 하셨으므로, 나는 그가 국자감國子監에서 가르칠 만하다고 건의하여, 임명장을 내리려 하였는데 이 사망한 것이다.
이 머무는 곳에는 배우려는 자들이 모여들었으며, 현사賢士대부大夫들이 그와 교유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은 그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고, 늘 문을 닫고 책을 읽을 뿐이었으며, 오직 나와 대화를 하면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희령초熙寧初하여 이른바 ‘질실質實하고 곧으며 를 좋아하고,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아서, 안회顔回와 한가지로 배우기를 싫증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만이 홀로 그러한 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망하였을 때에 46세였으니, 희령熙寧 2년 윤11월 정사일丁巳日이었다.
희령熙寧 4년 2월 임신일壬申日에 이르러서야 부인夫人 증씨曾氏와 아들 이 비로소 남성현南城縣 예교향禮敎鄕 장의리長義里안장安葬할 수 있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을 지었다.
시대時代운명運命 때문에 겪게 된 고난을 편안히 여기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았네.
아아! 이는 드문 일이니, 군자君子라 이를 만하도다!


역주
역주1 王補之墓誌銘 : 墓主 王无咎(字 補之)는 王安石과 師友之間으로, 下級官吏를 지냈으며, 文集 10卷을 남겼다 하나 逸失되어 傳하지 않는다. 熙寧 4년(1071)에 下葬했다 한 것으로 보아 本 墓誌銘은 그 즈음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嘉祐二年進士也 : 嘉祐 2년의 進士試는 歐陽脩가 知貢擧가 되어 主宰하였는데, 險怪奇澁한 太學體의 文風을 배격하고 傑出한 人物을 多數 合格시켰으니, 蘇軾, 蘇轍, 曾鞏, 王安禮, 王无咎 등이 모두 당시에 합격하였으며, 그때 王无咎는 33세였다.
역주3 於回而學不厭者 : 顔回처럼 배우기에 싫증을 내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뜻으로, 顔回는 孔子가 가장 아끼던 弟子로, 孔子는 《論語》 〈子罕〉편에 “나는 그가 계속 노력하는 것만 보았지 그가 노력을 중단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하였다.
역주4 學以爲己 : 學問의 목적이 자신의 수양에 있을 뿐이요 남에게 보이기 위해 힘쓰지 않았다는 의미로, 《論語》 〈憲問〉에서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이라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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