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
남성인南城人이니 왕씨王氏요 諱無
무구无咎요 자字보지補之니 라
初補강도현위江都縣尉라가 丁父憂하고 服除에 調위진현주부衛眞縣主簿하다
嘗棄천태현령天台縣令하고 以與予共學이러니 久之에 無以衣食其妻子하야 乃去補남강현주부南康縣主簿하다
會予召至경사京師하야 因留敎授러니 上方興學校하야 以經術造士어늘 予言君可敎國子라하야 命且下에 而君死하다
當
희령초熙寧初하야 所謂質直好義
하고 不爲利疚
하야 니 予獨知君而已
러라
君之死에 年四十有六이니 실實희령熙寧二年閏十一月丁巳라
至四年二月壬申하야 妻증씨曾氏와 子인絪온縕이 始克葬君남성현南城縣예교향禮敎鄕장의리長義里하다
사적事跡의 서술이 간략하고 세계世系도 밝혀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병가兵家의 이론에 비유한다면, 적은 병력으로 많은 군대를 패배시키는 방법이다.
군君은 남성인南城人이니, 왕씨王氏이고, 휘諱는 무구无咎이며, 자字는 보지補之이니, 가우嘉祐 2년(1057)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강도현위江都縣尉에 보임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물러났고, 상기喪期를 마치자 위진현주부衛眞縣主簿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천태현령天台縣令을 사임하고, 나와 함께 학문을 닦았는데, 오래 지나자 처자妻子를 먹여 살릴 수가 없어서, 내게서 떠나서 남강현주부南康縣主簿에 보임補任되었다.
그때 마침 나는 소환되어 경사京師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면서 교수敎授로 있었는데 황상皇上께서 바로 그때 각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경술經術의 교육으로 선비를 양성하려 하셨으므로, 나는 그가 국자감國子監에서 가르칠 만하다고 건의하여, 임명장을 내리려 하였는데 군君이 사망한 것이다.
군君이 머무는 곳에는 배우려는 자들이 모여들었으며, 현사賢士와 대부大夫들이 그와 교유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군君은 그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고, 늘 문을 닫고 책을 읽을 뿐이었으며, 오직 나와 대화를 하면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희령초熙寧初를 당當하여 이른바 ‘질실質實하고 곧으며 의義를 좋아하고,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아서, 안회顔回와 한가지로 배우기를 싫증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만이 홀로 그러한 군君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군君이 사망하였을 때에 46세였으니, 실實은 희령熙寧 2년 윤11월 정사일丁巳日이었다.
희령熙寧 4년 2월 임신일壬申日에 이르러서야 부인夫人 증씨曾氏와 아들 인絪과 온縕이 비로소 군君을 남성현南城縣 예교향禮敎鄕 장의리長義里에 안장安葬할 수 있었다.
시대時代와 운명運命 때문에 겪게 된 고난을 편안히 여기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았네.
아아! 이는 드문 일이니, 군자君子라 이를 만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