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書虞部郞中조군晁君의 諱중참仲參이요 자字효선孝先이니
以치평治平四年五月九日에 卒於통판서주사通判舒州事하다 其子以희령熙寧二年正月二十九日에 卜제주濟州임성현任城縣간의향諫議鄕여촌呂村之原以葬하고 狀君之行하야 來乞銘이어늘 掇其語爲銘曰
薦월주감주세監월주감주세越월주감주세酒라가 旋宅父憂하고
저주판관判官于저주판관滁라가 擢대리시승丞대리시승大理라
상서우부낭중尙書虞部郎中 조군晁君의 휘諱는 중참仲參이고, 자字는 효선孝先이다.
치평治平 4년(1067) 5월 9일에 통판서주사通判舒州事로 있으면서 졸卒하자, 그의 아들이 희령熙寧 2년 정월正月 29일에 길지吉地를 정하여 제주濟州 임성현任城縣 간의향諫議鄕 여촌呂村의 언덕에 안장安葬하고, 군君의 행장行狀을 엮어 가지고 와서 명銘을 지어주기를 청하기에 그 행장行狀에 있는 말을 수습하여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조씨晁氏는 영천穎川의 망족望族으로, 위衛나라에는 경卿에 오른 조병晁丙이 있었고,
조조晁錯은 지혜와 학술이 뛰어나 임용되어서, 한漢나라의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었었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는 역사에 전해지는 인물이 없다가,
조량정晁良正이 당唐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나, 크게 떨치지는 못하였네.
개봉開封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가, 거야현鉅野縣으로 옮겼고,
시대가 간난艱難해지니 은둔해 있다가, 송대宋代에 벼슬길에 나와서 드날렸네.
조형晁逈은 포의布衣에서 발신發身하여,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었고,
조종각晁宗慤이 집정執政이 되어, 부자父子가 한 시대에 벼슬을 함께하였네.
세 황제皇帝가 교체하는 동안 4대代가, 연이어 사후死後에 증직贈職을 받았고,
조전晁佺이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었으니, 군君의 증조고曾祖考셨네.
아들 조적晁迪을 두셔서,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고,
그분이 조종간晁宗簡을 낳으시니, 대대代代로 쌓은 공덕功德이 크게 발양發揚된 것이네.
경동로京東路와 경서로京西路의 전운사轉運使가 되었고, 형부刑部의 낭관郎官을 지내었네.
군君이 실로 그분의 후사後嗣로서, 어려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네.
중부仲父인 조보임晁保任은 상우현주부上虞縣主簿를 지내셨고,
지현사知縣事가 탐오貪汚하여 정무政務를 그르치니, 군君으로 교체하여 비로소 벼슬을 시작하였네.
조용히 화합을 도모하니, 관리들이 법을 농락하지 못하였고,
부정不正했던 자는 청렴淸廉함으로 마칠 수 있었고, 약자弱者는 기를 펴고 강자强者는 두려워하였네.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형옥刑獄을 담당하자, 내가 늘 했던 일처럼 능숙하게 처리하였고,
군君은 힘 하나 쓰지 않고, 죄수罪囚들을 고을 옥獄에 구금하니,
범문정공范文正公께서 이에 탄복하고 사랑하며 말씀하시기를,
“두려움은 사심私心을 억제하는 데 합당하고, 공무公務에 용감하여 두려움이 없다.” 하시니,
군君은 이 뜻을 지켜, 죽을 때까지 잘못이 없기를 바랐네.
추천을 받아 월주감주세越州監酒稅가 되었다가,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네.
저주판관滁州判官으로 있다가, 발탁되어 대리시승大理寺丞이 되었고,
여주汝州 섬성현陝城縣의 지현사知縣事로 돌아왔네.
호족豪族들이 관리官吏에게 뇌물을 주고, 토지土地는 권세가權勢家가 겸병兼倂하여,
백성의 노역勞役은 번거로워지고 또 곤궁해지니, 성城안의 민호民戶가 근심하고 탄식하였네.
군君이 기만적欺瞞的인 계약서를 거두어들이고, 당장 이를 바로잡아,
침탈侵奪당했던 것이 바로잡혀서 폐정弊政이 정리되니, 백성은 경계警戒하며 이에 고무鼓舞되었네.
황족皇族인 진왕秦王의 여러 후손들이, 무덤의 관리를 핑계로 성城안에 들어와 토색질을 하였으며,
그들의 하졸下卒들이 역리驛吏를 고문하고 구타하니, 군君께서 이들을 잡아서 처형하였고,
무덤 관리를 맡은 환관宦官들을 취조하려 하자, 수레를 감추고 밤에 달아나서,
내시성內侍省으로 들어갔으나, 그들이 범한 죄를 즉시 심문하였고,
이렇게 다스려 이듬해에 이르자, 말 모는 주졸走卒들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게 되었네.
일 처리 잘한다는 명성이 크게 떨쳐, 그 가문이 드러나게 찬양을 받았네.
그 후 벼슬이 바뀌어 제음현령濟陰縣令에 태자찬선太子贊善이 되자.
현위縣尉를 지휘하여 도둑 찾아 체포하니, 민간인들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게 되었네.
목장牧場을 없애고 말을 조정에 바치고서, 그 땅을 농민에게 농토로 나누어주었고
과객過客들의 숙식宿食과 거마車馬의 뒷바라지에 비용을 다 써서 거의 가난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책임이 있는데 어찌 무관심할 수 있으랴.” 하였으며,
서책書冊에 의거하여 태수太守로서의 직무에 힘써, 조세租稅의 항목을 많이 줄였네.
벼슬이 박사博士에서 전임되어, 떠나서 개주開州를 다스리게 되자,
크게 학교를 증축하고, 글 읽는 선비를 인솔하여 공부하게 하였네.
온탕진溫湯鎭의 염정鹽井에서 염세鹽稅를 징수하지 않도록 하여,
한 해에 오만五萬 냥兩을 탕감해준 것은, 군君이 상주上奏하여 재가裁可를 받은 것이네.
백성들은 병이 들면 치료하지 않고, 의사醫師가 아닌 무당巫堂을 찾았는데,
약을 복용하도록 가르쳐서, 괴이한 부적들을 모두 버리게 하였네.
부모를 잃은 이들에게, 장가들고 시집가도록 뒷받침해 주었고,
아침부터 밤까지 공당公堂에 앉아 공무公務를 보고, 한가해서야 술을 마셨네.
영종英宗께서 황위皇位를 이으시자,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이 되었고,
비부比部와 가부駕部에 제수된 것은, 고과성적考課成績이 최상등最上等을 받아서였고,
지금의 천자天子의 은혜를 입어서, 비로소 정랑正郞의 자리에 올라
서주舒州를 맡아서 일년간一年間 다스리게 되자, 교령敎令을 질서정연하게 시행하고자 더욱 노력하였고,
굶주린 사람들이 이웃 고을에서 찾아오자, 아사餓死하지 않도록 진휼賑恤하였으며,
배불리 먹은 후 노약자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자, 다시 식량을 주어 보내었네.
재해災害를 제거하고자 힘써서, 처음부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종양하樅陽河에서 취取해온 세곡稅穀의 운송에, 나찰석羅刹石의 위험을 피하게 하고자,
지구진池口鎭에서 징수한 것을 나누어서, 동릉현銅陵縣으로 합치게 하니,
관부官府에서는 세곡稅穀을 잃지 않게 되었고, 조운선漕運船들은 위험한 운항을 피할 수 있어,
사람들은 이를 경하하여, 수십 년 이래로 없던 일이라 하였고,
환호하며 법령을 준수하여, 어린이와 늙은이 중에 구제받지 않은 이가 없었네.
고산孤山과 마당산馬當山에, 매년 많은 선박이 충돌하여 침몰하자,
추구포秋口浦를 뚫어서, 곧바로 뇌강雷江으로 달리게 하면,
오백五百 이里를 운항하는 동안에 바람과 파도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이 사실을 역로驛路를 거쳐 조정朝廷에 보고하자, 그 일의 처리를 군君에게 맡겼고,
겨울이 오면 그 일을 시작하려 하였는데, 군君께서 여름에 그만 사망하였으니,
향년享年이 오십오세五十五歲였고, 식자識者들이 아쉬워하며 탄식하였네.
공손씨公孫氏와 혼인하여 배필을 이루니 매우 화락하였네.
부인夫人은 영강군永康君에 봉封해졌고, 아들 넷을 낳았으니,
단인端仁, 단의端義와 단례端禮, 단지端智였네.
단인端仁은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상주사리常州司理로 있고,
단의端義는 교사재랑郊社齋郞이며, 나머지는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네.
다섯 딸 가운데 넷은 출가하여 선비의 아내가 되었으니,
석石과 단端과 우俁와 언彦이고, 그 가운데 우俁는 남편을 사별死別하였고,
막내딸은 어려서 아직 출가하지 않았고, 군君의 손孫이 오인五人이니,
손자孫子가 절節, 부符, 전籛이고, 나머지 둘은 손녀孫女이네.
군君은 일생 동안, 겉으로는 어두운 듯이 처신하였으나 마음속은 밝았고,
뜻밖의 오해를 사서 쫓겨났으나, 묵묵히 지내며 그들과 다투지 않았네.
봉록俸祿은 친족과 인척의 구제에 썼으므로, 먼 친척들도 은혜에 감사하였으며,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지 못해도, 웃고 대화함이 지난날과 같았네.
만년晩年에는 더욱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지내, 병을 앓으면서도 유언을 남기지 않았고,
바야흐로 숨이 끊기려 하면서도, 성명性命의 지극한 이치만을 말하였네.
아들이 묘지명墓誌銘을 구하고자, 상복喪服을 입은 채로 변경汴京으로 달려왔기에,
나의 하찮은 문장을 엮어서, 유택幽宅에 바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