余嘗譜其世家호니 所謂今태주泰州해릉현주부海陵縣主簿者也라
君旣與兄원元相友愛하야 稱天下하고 而自少卓犖不羈하고 善辨說하야 與其兄俱以智略으로 爲當世大人所器러니라
於是에 得召試爲태묘재랑太廟齋郞이라가 已而요 選태주泰州해릉현주부海陵縣主簿하다
貴人多薦君有大材하니 可試以事요 不宜棄之州縣이라하고 君亦常慨然自許하야 欲有所爲러라
士固有離世異俗하야 獨行其意라가 罵譏笑侮困辱而不悔는 彼皆無衆人之求요 而有所待於後世者也니 其齟齬固宜로다
若夫智謀功名之士 窺時俯仰하야 以赴勢物之會호되 而輒不遇者를 乃亦不可勝數라
辯足以移萬物호되 而窮於用說之時하며 謀足以奪三軍호되 而辱於右武之國하니 此又何說哉아
君年五十九요 以가우嘉祐某年某月某甲양자현子에 葬진주眞州之揚양자현子縣감로향甘露鄕某所之原하다
子男 瓌는 不仕하고 장璋은 진주사호참군眞州司戶參軍이요 기琦는 태묘재랑太廟齋郞이요 임琳은 진사進士라
女子五人이요 已嫁二人하니 진사進士주봉선周奉先과 태주泰州태흥현령泰興縣令도순원陶舜元이라
허군許君은 특출한 기상氣象이 많았는데, 형공荊公이 지은 지誌도 그와 같다.
군君의 휘諱는 평平이고, 자字는 병지秉之이니, 성姓은 허씨許氏이다.
내가 일찍이 그 집안의 세계世系를 상고해보니, 이른바 지금의 태주泰州 해릉현주부海陵縣主簿로 있는 사람이었다.
군君은 이미 그의 형兄 원元과의 우애友愛로 천하의 칭송을 받았고, 어려서부터 특출하게 뛰어나 얽매이는 바가 없고, 변설辨說에 능하여, 그 형과 함께 뛰어난 지략智略으로 모두 당세當世의 대인大人들에게 큰 인물이 되리라고 촉망을 받았다.
보원寶元 연간年間에 조정에서 방략方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를 두어서, 천하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비를 초빙하니, 섬서대수陝西大帥 범문정공范文正公과 정문숙공鄭文肅公이 경쟁적으로 군君의 행위를 기록하여 천거하였다.
이에 불러들여서 시험삼아 태묘재랑太廟齋郞에 임명하였다가, 그 후에 태주泰州의 해릉현주부海陵縣主簿로 뽑아간 것이다.
지위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 군君이 큰 재능을 가졌으니 이에 합당한 일을 맡겨서 시험해봄이 마땅하고, 주현州縣에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추천하였고, 군君 자신도 늘 개연慨然히 자신의 능력을 자신하여 합당한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의 지략智略과 능력을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졸卒하였으니, 아아!
선비가 진실로 속인俗人들과 다른 뜻을 가지고 세상과 떨어져서 홀로 그의 뜻을 행하다가, 비난과 모멸과 곤욕을 당해도 후회하지 않는 것은, 저들이 모두 일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무시하고, 후세에 기대하는 바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니, 그들이 중인衆人들과 뜻이 맞지 않는 것은 본시 당연한 일이다.
대저 지혜를 지니고 공명을 이루기를 도모하는 선비들 가운데도, 시속時俗을 엿보며 굽신거리면서 세력 있는 인물 만나기를 추구하되, 만나지 못하는 자도 이루 다 셀 수가 없을 만큼 많이 있다.
변설辯說이 만인萬人의 마음을 옮기기에 충분하면서도 주장을 펼 때에 곤난困難을 겪고, 계책이 삼군三軍의 장수를 잡아오기에 충분한데도 무공武功을 숭상하는 나라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하나니, 이를 어찌 다 말할 수가 있겠는가.
저 허군許君도 후세後世에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도다.
군君의 향년享年이 59세였고, 가우嘉祐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갑자일某甲子日에 진주眞州의 양자현陽子縣 감로향甘露鄕 모소某所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아들 괴瑰는 벼슬하지 않았고, 장璋은 진주사호참군眞州司戶參軍이며, 기琦는 태묘재랑太廟齋郞이고, 임琳은 진사進士이다.
딸이 다섯인데 둘은 진사進士 주봉선周奉先과 태주泰州 태흥현령泰興縣令 도순원陶舜元에게 이미 출가出嫁하였다.
발탁拔擢해주는 이가 있어서 일어났다가, 제지하는 자가 없는데도 그쳐버렸네.
여기서 그치고 말았으니, 누가 그를 그렇게 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