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旣吏淮南하고 而慧禮得龍興佛舍하야 與其徒로 日講其師之說하니라
嘗出而過焉하니 庳屋數十椽이 上破而旁穿하고 側出而視後하니 則榛棘出人하야 不見垣端이러라
雖然이나 其成也에 不以私吾後하고 必求時之能行吾道者하야 付之하리니 願記以示後之人하야 使不得私焉하노라하다
當是時하야 禮方丐食飮以卒日하야 視其居枵然이어늘
蓋慧禮者를 予知之호니 其行謹潔하야 學博而才敏하고 而又卒之以不私하니 宜成此不難也로다
孔氏之道易行也라 非有苦身窘形하고 離性禁欲을 若彼之難也니라
而士之行可一鄕하고 才足一官者는 常少어늘 而浮屠之寺廟는 被四海하니 則彼其所謂材者 寧獨禮耶리오
以彼之材로 由此之道면 去至難而就甚易를 宜其能也리라
내가 젊었을 때에 금릉金陵 땅을 여행한 일이 있는데, 스님 혜례慧禮라는 분도 나를 따라 함께 여행하였다.
그 후 나는 회남로淮南路의 관리官吏가 되었고, 혜례慧禮는 용흥사龍興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그 무리와 함께 날마다 부처님의 설법說法을 강론講論하였다.
내가 전前에 관부官府에서 나와 그곳을 방문해 보니, 낮고 작은 집에 수십개數十個의 서까래가 위가 허물어지고 곁이 뚫려 있었으며, 건물 곁으로 나와서 뒤를 바라보니 가시덤불이 사람 키보다도 높게 자라 있어서 담장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혜례慧禮가 이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이 가시덤불을 걷어내고 강원講院을 세우려 하오.
그러나 완성한 뒤에 내 뒷사람의 사유재산私有財産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우리 불도佛道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맡길 것이니, 기記를 지어 뒷사람에게 사재私財를 출연하지 않고도 이루었음을 보여주기 바라오.” 하였다.
그때에 혜례慧禮는 동냥을 하여 먹고 마시면서 날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허무맹랑하게 보였다.
이에 내가 장난삼아 말하기를, “우선 건물이나 지으시오.
그러면 내가 기記를 짓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소.” 하였다.
그 뒤 4년年이 지나서 또 찾아와 말하기를, “지난날에 짓고자 했던 것을 모두 120칸으로 완공完工하였소.
고을 사람 장씨蔣氏의 재력財力에 힘입어서 이미 모두 완공하였는데 어째서 기記를 지어 주지 않으시오?” 하였다.
대저 혜례慧禮라는 스님은 내가 아는 바로는 그 행실이 신중하고 고결하며 학식이 해박하고 재능이 민첩하므로, 또한 끝내 사재私財를 들이지 않고도 이를 이룸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임이 마땅하다.
〈세상에서 이미 부처가 화禍도 줄 수 있고 복福도 줄 수 있다고 말하여, 그 말이 천하 사람들을 솔깃하게 하므로, 이를 존숭尊崇하여 지향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많은 것은 공연히 그런 것이 아니니, 불교佛敎를 배우는 사람 가운데는 재능才能이 탁월卓越하여 이로써 세상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유가儒家의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공자孔子를 근거로 한다고 말한다.
공자孔子의 도道는 행行하기가 쉬우므로 승려처럼 육신肉身을 궁곤窮困하게 괴롭히고 본성本性에서 떠나 금욕禁慾생활을 하면서 저들처럼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사士의 행실이 한 향鄕에서 인정을 받고 재능이 한 직책職責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사람이 언제나 희소稀少하지만, 스님들의 사원寺院은 온 천하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니, 그 이른바 재능을 인정받는 사람이 어찌 유독 혜례慧禮 한 사람 뿐이겠는가.
저들과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가儒家의 도道를 따른다면, 지극히 어려운 행동을 하지 않고 매우 행하기 쉬운 길로 나아가는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임이 마땅하다.
유가儒家는 이를 잘 못하는데 저 불가佛家들은 잘하고 있으니, 그렇게 된 데는 틀림없이 까닭이 있을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