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1)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占地步하니라
予少時 客遊金陵할새 浮屠慧禮者 從予遊하니라
予旣吏淮南하고 而慧禮得龍興佛舍하야 與其徒 日講其師之說하니라
嘗出而過焉하니 庳屋數十椽 上破而旁穿하고 側出而視後하니 則榛棘出人하야 不見垣端이러라
指以語予曰 吾將除此而宮之호리라
雖然이나 其成也 不以私吾後하고 必求時之能行吾道者하야 付之하리니 願記以示後之人하야 使不得私焉하노라하다
當是時하야 禮方丐食飮以卒日하야 視其居枵然이어늘
余特戲曰 姑成之하라
吾記無難者니라하다
後四年來하야 曰 昔之所欲爲 凡百二十楹이러니
賴州人蔣氏之力하야 旣皆成하니 盍有述焉고하니
何其能也
蓋慧禮者 予知之호니 其行謹潔하야 學博而才敏하고 而又卒之以不私하니 宜成此不難也로다
今夫衣冠而學者 必曰自孔氏라하니
孔氏之道易行也 非有苦身窘形하고 離性禁欲 若彼之難也니라
而士之行可一鄕하고 才足一官者 常少어늘 而浮屠之寺廟 被四海하니 則彼其所謂材者 寧獨禮耶리오
以彼之材 由此之道 去至難而就甚易 宜其能也리라
嗚呼
失之此而彼得焉 其有以也夫인저


08. 양주楊州 용흥사龍興寺 강원講院 건립기
일정한 지위를 확립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에 금릉金陵 땅을 여행한 일이 있는데, 스님 혜례慧禮라는 분도 나를 따라 함께 여행하였다.
그 후 나는 회남로淮南路관리官吏가 되었고, 혜례慧禮용흥사龍興寺주지住持가 되어 그 무리와 함께 날마다 부처님의 설법說法강론講論하였다.
내가 관부官府에서 나와 그곳을 방문해 보니, 낮고 작은 집에 수십개數十個의 서까래가 위가 허물어지고 곁이 뚫려 있었으며, 건물 곁으로 나와서 뒤를 바라보니 가시덤불이 사람 키보다도 높게 자라 있어서 담장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혜례慧禮가 이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이 가시덤불을 걷어내고 강원講院을 세우려 하오.
그러나 완성한 뒤에 내 뒷사람의 사유재산私有財産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우리 불도佛道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맡길 것이니, 를 지어 뒷사람에게 사재私財를 출연하지 않고도 이루었음을 보여주기 바라오.” 하였다.
그때에 혜례慧禮는 동냥을 하여 먹고 마시면서 날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허무맹랑하게 보였다.
이에 내가 장난삼아 말하기를, “우선 건물이나 지으시오.
그러면 내가 를 짓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소.” 하였다.
그 뒤 4이 지나서 또 찾아와 말하기를, “지난날에 짓고자 했던 것을 모두 120칸으로 완공完工하였소.
고을 사람 장씨蔣氏재력財力에 힘입어서 이미 모두 완공하였는데 어째서 를 지어 주지 않으시오?” 하였다.
아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대저 혜례慧禮라는 스님은 내가 아는 바로는 그 행실이 신중하고 고결하며 학식이 해박하고 재능이 민첩하므로, 또한 끝내 사재私財를 들이지 않고도 이를 이룸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임이 마땅하다.
〈세상에서 이미 부처가 도 줄 수 있고 도 줄 수 있다고 말하여, 그 말이 천하 사람들을 솔깃하게 하므로, 이를 존숭尊崇하여 지향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많은 것은 공연히 그런 것이 아니니, 불교佛敎를 배우는 사람 가운데는 재능才能탁월卓越하여 이로써 세상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의관衣冠정제整齊하고 유가儒家의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공자孔子를 근거로 한다고 말한다.
공자孔子하기가 쉬우므로 승려처럼 육신肉身궁곤窮困하게 괴롭히고 본성本性에서 떠나 금욕禁慾생활을 하면서 저들처럼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의 행실이 한 에서 인정을 받고 재능이 한 직책職責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사람이 언제나 희소稀少하지만, 스님들의 사원寺院은 온 천하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니, 그 이른바 재능을 인정받는 사람이 어찌 유독 혜례慧禮 한 사람 뿐이겠는가.
저들과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가儒家를 따른다면, 지극히 어려운 행동을 하지 않고 매우 행하기 쉬운 길로 나아가는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임이 마땅하다.
아아!
유가儒家는 이를 잘 못하는데 저 불가佛家들은 잘하고 있으니, 그렇게 된 데는 틀림없이 까닭이 있을 것이로다!


역주
역주1 楊州龍興講院記 : 이 記는 王安石이 淮南判官의 임기를 마치고 知鄞縣事로 있을 때인 皇祐 元年(1049)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世旣言……亦多有以動世耳 : 世旣言 以下는 저본에는 없으나 《宋文鑑》에 의거하여 補入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50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81, 1332호(두산위브파빌리온)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