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後世不深考之하고 因以偏見獨識으로 遂以爲說하야 旣失其本이로되 而學士대부大夫共守之하야 不爲變者 蓋有之矣니 백이伯夷是已니라
以孔孟之可信으로 而又辯之를 反復不一하시니 是愈益可信也라
故孔孟이 皆以伯夷遭주왕紂之惡호되 不念以怨하고 不忍事之하야 以求其仁하고 餓而避하야 不自降辱하야 以待天下之淸하니 而號爲聖人耳라
夫상商衰而주왕紂以不仁으로 殘天下하니 天下孰不病주왕紂리오마는
而尤者
는 백이伯夷也
라 嘗與
태공太公으로 하니 當是之時
하야 欲
백이夷주紂者
는 二人之心
이 豈有異邪
리오
及무왕武王一奮에 태공太公相之하야 遂出元元於塗炭之中이어늘 백이伯夷乃不與는 何哉오
蓋二老는 所謂天下之大老로 行年八十餘니 而春秋固已高矣라
自海濱而趨
는 計亦數千里之遠
이요 문왕文王之興
으로 以至
무왕武王之世
는 歲亦不下十數
니 豈
서백伯夷欲歸
서백西伯이나 而志不遂
하야 乃死於北海邪
아
且무왕武王이 倡大義於天下에 태공太公은 相而成之어늘 而獨以爲非면 豈백이伯夷乎아
주紂之爲君은 不인仁也요 무왕武王之爲君은 인仁也니 백이伯夷固不事不인仁之주紂하고 以待인仁而後出이라가 무왕武王之인仁焉에 又不事之면 則백이伯夷何處乎아
余故曰 聖賢辯之甚明이어늘 而後世偏見獨識者之失其本也라하노라
使伯夷之不死
하야 以及武王之時
면 其烈
이 豈
태공太公哉
리오
백이伯夷에 대하여 논論한 부분은 천년千年 동안 없었던 뛰어난 견해이다.
일 가운데는 천세千世 이전에 나타난 것으로 성현聖賢이 이에 대하여 설명해놓은 것이 매우 자세하고 분명한 것도 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깊이 따져보지 않고 편견偏見과 독단적獨斷的인 견해를 근거로 이를 설명하여 이미 그 본질을 그르쳤는데, 학사學士와 대부大夫들이 모두 이 이론理論을 묵수墨守하면서 바꾸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 백이伯夷에 대한 견해도 바로 이런 예例에 해당된다.
대저 백이伯夷에 대하여 옛날에 평론한 분으로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계시다.
공자‧맹자의 말씀은 신뢰할 수 있고 또 이분들이 반복하여 설명하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이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구악舊惡을 원망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인仁을 추구하여 인仁을 얻었다.”,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굶어 죽었다.”, “은일隱逸을 일삼은 사람이다.” 하셨고,
맹자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백이는 자기가 섬길 만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악인惡人이 다스리는 조정에서는 벼슬하지 않았다.”, “주紂를 피하여 북해北海의 바닷가에서 살았다.”, “눈으로는 나쁜 색色을 보지 않았다.”, “못난 사람은 섬기지 않았다.”, “백대百代를 지나도 변함없이 섬겨야 할 스승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공자와 맹자는 모두 백이를 주왕紂王의 악정惡政을 만났으나 이를 원망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고, 차마 섬길 수는 없어서 어진 왕을 찾았고 굶주리면서도 악을 피하여, 스스로 몸을 굽히거나 욕된 일을 당하지 않고, 이런 자세로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렸으니,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마천司馬遷이, 무왕武王이 주紂를 칠 때에 백이伯夷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말렸다고 한 것이나, 천하가 주周나라를 받들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절의를 지키며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채미지가采薇之歌〉를 부르며 굶어 죽었다고 한 것이나, 한자韓子(韓愈)가 이를 근거로 하여 또한 그를 위해 송頌을 지어서, 이자二子(伯夷와 숙제叔齊)가 없었다면 반란叛亂을 일으키는 신하臣下와 부모를 해치는 자식이 후세에 연이어 나타났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 등, 이런 견해들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대저 상商나라가 쇠미해지면서 주왕紂王이 불인不仁한 행위로 천하를 해치니, 천하 사람 가운데 누구인들 그러한 주紂를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았겠는가.
더욱 심하게 원망하고 미워한 사람이 백이伯夷여서, 일찍이 태공太公과 함께 서백西伯(周 문왕文王)이 노인들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귀부歸附하려 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주紂를 토평하고자 하였던 두 사람의 마음이 어찌 달랐겠는가.
무왕武王이 한번 분연히 군사를 일으키자 태공太公은 그를 도와 드디어 백성들을 도탄 가운데서 구출하였으나, 백이伯夷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엇 때문이었던가.
이때에 백이伯夷와 태공太公 두 노인은 이른바 천하에 덕망이 높은 원로元老로서 연세年歲가 80여 세였으니, 춘추春秋가 본시 이미 높았다.
바닷가에서 문왕文王이 다스리는 도읍까지는 헤아려보건대 또한 수천 리의 먼 거리였고, 문왕文王이 흥기興起한 이후 무왕武王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지나간 세월이 또한 십여 년 이하는 아니었을 것이니, 어쩌면 백이가 서백西伯에게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해 바닷가에서 사망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문왕을 찾아오다가 도로에서 객사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문왕이 다스리는 도읍에 이르기는 하였으나 무왕의 시대에는 이르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었을까?
백이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한다면, 또한 이치상理致上 무왕武王이 주紂를 칠 때에는 백이가 생존해 있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무왕武王이 천하에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이끌자, 태공太公이 보좌하여 이를 이루었는데, 혼자서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면 어찌 백이伯夷라 할 수 있겠는가.
천하의 도道는 두 가지뿐이니, 바로 인仁과 불인不仁이다.
주紂가 군주君主 노릇하는 것은 불인不仁이고, 무왕武王이 군주君主 노릇하는 것은 인仁이니, 백이伯夷는 본시 불인不仁한 주紂를 섬기지 않고, 인仁한 군주를 기다린 이후에 세상에 나오려고 하다가 무왕武王이 인仁을 행하는데도 그를 섬기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백이伯夷는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였다는 것인가?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성현聖賢들이 매우 분명하게 설명해놓았는데, 후세에 편견을 가지고 독단獨斷하는 사람들이 그 근본을 훼손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백이가 죽지 않아서 무왕이 다스리던 시대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 공업功業을 이룬 것이 어찌 태공太公만 못하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