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공荊公誌弟평보平甫墓에 絶不露兄云云하니 蓋兩不相能而深忌之故耳라
군君임천臨川왕씨王氏니 諱안국安國이요 자字평보平甫라
贈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諱명明용지之曾孫이요 贈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兼상서령尙書令諱용지用之용지之孫이요 贈태사太師중서령中書令兼상서령尙書令 강국공康國公諱益용지之子라
自丱角으로 未嘗從人受學호되 操筆爲戱면 文皆成理러라
年十二에 出其所爲銘시詩賦論數十篇한대 觀者驚焉하니
自是遂以文學으로 爲一時賢士대부大夫譽歎하니라 蓋於書無所不該하고 於詞無所不工이나
然數擧進士不售
하야 擧
하니 有司考其所獻序言第一
호되 又以母喪不試
하다
喪三年토록 常在墓側하고 出血和墨하야 書佛經甚衆하니 州上其行義호되 不報하다
今上卽位하야 近臣共薦君材行卓越한대 宜特見招選이어늘 爲繕書其序言以獻하니 大臣亦多稱之하고
手詔褒異하다 召試하야 賜進士及第하고 除무창군절도추관武昌軍節度推官이라가 敎授서경西京國子하다
未幾에 숭문원교서校書숭문원교서崇文院이라가 特改저작좌랑著作佐郞 秘閣숭문원교서校대리시승理하니 士皆以謂君且顯矣나 然卒不偶하야 官止於대리시승大理寺丞하고 年止於四十七하야 以희령熙寧七年八月十七日에 不起하다
越원풍元豐三年四月二十七日에 葬강녕부江寧府종산鍾山母초국태부인楚國太夫人墓左百有十六步하다
妻증씨曾氏요 子방旊유斿요 女壻섭도葉濤요 處者四女라
도濤有學行하야 知名하고 방旊유斿는 亦皆嶷嶷有立하니 君祉所施 庶在於此로다
형공荊公이 그의 아우 평보平甫의 묘지墓誌를 지으면서, 자신이 그의 형兄임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둘이 서로 우애友愛 있게 지내지 못하고 서로 깊이 꺼렸었기 때문인 듯하다.
군君은 임천臨川 왕씨王氏로, 휘諱는 안국安國이고, 자字는 평보平甫이다.
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었던 휘諱 명明의 증손曾孫이고, 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 겸兼 상서령尙書令에 추증되었던 휘諱 용지用之의 손자孫子이며, 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 겸 상서령尙書令 강국공康國公에 추증되었던 휘諱 익益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배운 일이 없으면서도 붓을 잡고 희롱삼아 놀리면, 지은 글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였다.
12세 때에 그가 지은 명銘과 시詩와 부賦와 논論 수십數十 편篇을 내놓으니,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이로부터 드디어 문학文學으로 당시의 현사賢士와 대부大夫들의 칭예稱譽와 탄복을 받았고, 대체로 글을 지으면 조화롭고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시詩를 지으면 정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여러 차례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여 무재이등시茂才異等試에 응시하려 하니, 담당관擔當官이 그가 바친 〈서언序言〉을 살펴보고 1등을 주려 하였지만, 또한 모상母喪 때문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군君은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모부인母夫人 봉양에 진력하였다.
3연상年喪 동안 늘 묘 곁에서 시묘侍墓하였고, 피를 내어 먹을 갈아서 불경佛經을 기록해놓은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고을에서 그의 행실과 의리를 위에 보고하였으나, 비답批答이 없었다.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시자 근신近臣들이 함께 군君의 재능과 행실이 탁월함을 이유로 천거하니, 특별히 불러 보시고 선발할 뜻을 표하셨고, 이에 그가 지은 〈서언序言〉을 보완해 기록하여 올리니, 대신大臣들 가운데 이를 칭찬하는 사람이 또한 많았다.
이에 황상皇上께서 손수 조서詔書를 내려서 특별히 포상하도록 하시고, 불러 시험해보시고는 진사급제進士及第를 하사하시고, 무창군절도추관武昌軍節度推官에 제수하여 서경西京 국자감國子監의 교수敎授로 삼았다.
얼마 후에 숭문원교서崇文院校書로 삼았다가, 특별히 저작좌랑著作佐郞 비각교리秘閣校理로 바꾸어주니, 선비들이 모두 군君이 장차 능력을 드날릴 것이라고 여겼는데, 뜻을 얻지 못하고 졸卒하여, 벼슬이 대리시승大理寺丞에 그쳤고, 향년享年은 47세에 그쳐 희령熙寧 7년(1074) 8월 17일에 서거逝去하였다.
세월이 경과한 원풍元豐 3년 4월 27일에 강녕부江寧府 종산鍾山의 어머님 초국태부인楚國太夫人의 묘墓에서 160보 떨어진 곳에 안장安葬하였다.
부인夫人은 증씨曾氏이고, 아들이 방旊과 유斿이며, 사위가 섭도葉濤이고, 네 딸은 아직 출가出嫁하지 않았다.
사위 도濤는 학행學行이 있어서 이름이 알려졌고, 방旊과 유斿는 또한 모두 뛰어나게 총명하니, 군君의 복덕福德이 자손子孫에게 미쳐서 아마도 이에 이를 수 있게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