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국공公은 진국공晉진국공公之中子요 而今宰相弟라
진국공公諱某요 자字某니 九歲에 用진국공晉진국공公恩으로 수 비서성 교서랑守秘書省校書郞하다
진국공晉진국공公薨에 恩改태상시봉례랑太常寺奉禮郞하다
服除하고 久之에 會封禪恩하야 改대리평사大理評事라가 감봉상부주세監鳳翔府酒稅하다
又會祀분음汾陰하야 改위위시승衛尉寺丞이라가 歸하야 以最升지소무현사知邵武之지소무현사邵武縣하다
獻
문장文章하야 得試學士院
하니 재상宰相才之
하야 호되
親在하니 願得進官職也요 不願得科名이라하니 從之하야 수주통판通判秀수주통판州라가 改대리시승大理寺丞하다
歸하야 又獻문장文章하고 表乞治劇郡하야 得회양군淮陽軍이라가 改태자중사太子中舍하다
하야 恩加改
전중승殿中丞이러니 是歲
에 賜緋衣銀魚
하고 지림강군知臨江軍이라가 還
하야 得
목주睦州하다
薦者數人이어늘 天子以公名屬審官이라가 又徙수주지사知수주지사遂州하다
以제국태부인齊國太夫人疾로 辭還하야 改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하다
上便宜數事로 得引對하야 因自贊하니 天子欲稍進用之로되 而遭제국태부인齊國太夫人之喪以去하다
居無何에 목주睦州人왕직王稷이 上書斥公赦前數事하니 服除에 猶坐是감건주세監虔州稅하다
명도明道元年에 恩改比가부部員外郞하고 건주통판通判건주통판建州라가 改가부駕部하다
起爲比部하야 감사주양료監泗州糧料하고 又坐法免이라가
起爲虞部
하야 감요주전감監饒州하다 復得比部
라가 歸
하야 羈居
경사京師하다
久之에 乃出監江陰軍酒稅라가 道疾病하야 上書自言호되
先신臣恕得幸先皇帝하야 至大신臣하고 신臣階先신臣以得仕하야 屢進所學하야 蒙記識하니이다
方壯少時에 頗汲汲欲自奮하야 收一日之效하야 以卒事陛下之分이나 而孤行單立하야 無黨友之助하고 又薄命不幸하야 數遭小人하니 以見困蹶하야 負先臣餘敎하고 辱陛下器使之恩이로소이다
今老矣니 念終無以報盛성덕德하고 除媿恥일새 夙夜憂畏하니 以故得病하야 病且死로소이다
無田園以歸하고 無彊有力子弟以養하야 唯男一人세창世昌이 去年爲進士하야 得가경원해嘉慶院解나 臣兄在中書하야 奏不得試禮部하고 今當爲遠官하야 去臣旁遠甚이로소이다
陛下憐之하사 幸聽臣分司하시고 改세창世昌소주蘇상주常間一官하사 以卒養臣이면 天地之賜也니이다
臣誠窮하니 卽無自言이면 誰當爲臣言者乎잇가 書入未報하야 竟卒於강녕江寧하니 得年若干이요 時某年月也라
夫人某氏요 子男兩人이니 세창世昌은 천주泉之진강주부晉江主簿요 次세장世長은 前死하다 女兩人이니 皆已嫁하다
주부主簿將以某年月에 葬公某處하야 葬有日에 使來乞銘하다
初에 공公爲임강군臨江軍에 先君爲之佐하고 其後二十五年에 모某得회남주부主簿於회남주부淮南하야 而兄事之하니 仍世有好에 義不可以辭無銘也로다
公은 名臣子로 少壯得美仕하고 間以문장文藝自進하니 意自以爲且貴富世其家라 而遭平世하야 槪以문장文法持臣下라 故其材不得有所肆하고 而卒以齟齬窮하니 其感激怨懟 往往見於문장文辭라
주부主簿離其藁爲二十卷하니 讀之에 知其心之所存也요 而其求分司語는 尤悲하니 因掇其大槪而存之하노라 噫라
진진국공陳晉國公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현재 재상宰相으로 계시다.
공公은 진국공晉國公의 둘째 아들로서 지금 재상으로 계신 분의 아우이다.
진국공晉國公의 휘諱는 아무개[某]이고 그분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적事蹟은 사관史官의 기록에 수록되어 있다.
공公의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모某이며, 9세에 진국공晉國公의 은덕으로 수 비서성 교서랑守秘書省校書郞이 되었다.
진국공晉國公이 훙薨하시자 은덕으로 태상시봉례랑太常寺奉禮郞으로 옮겼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오랜 기간이 지나서 봉선封禪의 행사에 은혜를 입어서 대리평사大理評事로 옮겼다가 감봉상부주세監鳳翔府酒稅가 되었다.
다시 분음汾陰에서 후토后土에 제사 지낼 때에 은혜를 입어서 위위시승衛尉寺丞으로 옮겼다가, 돌아와서 고과考課에 상등上等으로 올랐으므로 소무邵武로 승진해가서 지소무현사知邵武縣事가 되었다.
문장文章을 지어 올리니 학사원學士院에서 불러 시험을 보였고, 재상宰相이 재능才能이 있음을 인정하여 과거科擧 합격 명부에 올리기를 의론하였는데, 공公이 굳게 이를 사양하며
“형님이 재상 자리에 있으니, 관직官職에 나아갈 수 있게 되기만을 원할 뿐이고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뜻을 따라서 수주통판遂州通判에 임명하였다가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바꾸었다.
돌아와 다시 문장文章을 지어 올리고, 표表를 올려서 정무政務가 번극繁劇한 큰 고을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하여, 회양군淮陽軍을 다스리게 되었다가 태자중사太子中舍로 옮겼다.
금상今上께서 즉위卽位하시자 은전恩典을 가하여 전중승殿中丞으로 옮겼는데, 이해에 비의은어緋衣銀魚를 하사下賜하고 지림강군知臨江軍에 임명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목주睦州를 다스리게 되었다.
몇 사람의 추천이 있었으므로 천자天子께서 공公을 심관원審官院의 일원一員으로 삼았다가 다시 수주지사遂州知事로 옮겼다.
모친母親인 제국태부인齊國太夫人의 병환 때문에 사임辭任하고 돌아왔다가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으로 바뀌었다.
황상皇上께서 몇 가지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고자 하실 때에 불러서 물어보셨는데, 자신을 천거하니 황상께서 차츰 올려 쓰실 뜻을 가지게 되었으나, 제국태부인齊國太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목주睦州 사람 왕직王稷이 사면령赦免令이 있기 이전의 몇 가지 일로 공公을 배척하는 글을 올렸으므로, 상기喪期를 마친 후 오히려 이 일에 연좌連坐되어 감건주세監虔州稅로 좌천되었다.
명도明道 원년元年(1032)에 은전恩典을 입어서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으로 바뀌었고 건주통판建州通判이 되었다가 다시 가부駕部로 바뀌었다.
천거薦擧를 받아들여 길주지사吉州知事로 옮겨주었다가 법法을 위반하였다 하여 면직免職되었다.
그 후 복직復職되어 비부比部에 서임敍任되고 감사주양료監泗州糧料가 되었으나, 또 법法을 위반하였다 하여 면직되었다.
다시 복직되어 우부虞部에 서임되어 감요주전감監饒州錢監이 되었다가 다시 비부比部에 서임되어 돌아와서 경사京師에 우거寓居하였다.
오랜 후에 감강음군주세監江陰軍酒稅로 나가게 되었는데, 도중途中에 병病에 걸리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臣의 선친先親인 서恕는 선황제先皇帝의 총애를 받아 대신大臣에 이르렀고, 신臣은 선신先臣으로 인하여 음보蔭補로 벼슬을 얻어서, 신이 배운 바를 여러 번 진언進言하여 알아주심을 입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떨치고자 열심히 노력하며 뒷날에 효과를 거두어서 이로써 폐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잘 받들어 이행하려 하였으나, 외롭게 홀로 행하면서 당우黨友들의 도움도 받지 못하였고, 또 불행히도 운명이 궁박하여 여러 차례 소인小人들을 만나니, 곤난困難과 실패失敗를 겪어 선신先臣께서 남겨주신 가르침을 저버렸고, 폐하陛下께서 중용重用해주신 은혜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늙어서, 생각하건대 끝내 성덕聖德에 보답을 못할 듯하여,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기에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두려워하고 번민하다 보니, 이 때문에 병을 얻어 그 병 때문에 장차 죽게 될 듯합니다.
돌아갈 전원田園도 없고, 유력한 자제子弟가 가까이 있어서 봉양하는 일도 없으며, 오직 하나뿐인 자식 세창世昌이 지난해에 진사시進士試의 응시應試 자격으로 가경원해嘉慶院解 자리를 얻었으나, 신臣의 형兄이 중서성中書省에 있으므로 친혐親嫌을 이유로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상주上奏하였고, 이제 먼 지방의 관직을 담당하게 되어서 신臣의 곁에서 매우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이를 가련하게 여기셔서 행여 신臣을 분사分司에 근무하도록 허락해주시고, 세창世昌을 소주蘇州와 상주常州 사이의 한 벼슬로 바꾸어주셔서, 이로써 끝까지 신臣을 봉양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천지天地를 하사下賜해주신 것 같은 큰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신臣이 진실로 곤궁에 처하였으나 스스로 말씀을 올리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가 신臣을 위해 말씀을 올려주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서上書가 황제께 전해지기도 전에 드디어 강녕江寧에서 졸卒하였으니, 향년享年이 모세某歲이고 졸卒한 때는 모년某年 모월某月이었다.
부인夫人은 모씨某氏이고, 아들 둘을 두었는데, 세창世昌은 천주泉州의 진강주부晉江主簿이고, 둘째 세장世長은 전前에 사망하였으며, 딸이 둘인데 모두 이미 출가하였다.
주부主簿로 있는 아들이 모년某年에 공公을 모처某處에 하장하려 하면서, 장례 날이 잡히자 사람을 시켜 나에게 명銘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처음 공公이 임강군臨江軍에서 벼슬할 때에 선친先親이 보좌한 일이 있었고, 그 후 25년이 지나서 모某(王安石 자신自身)가 회남주부淮南主簿가 되었을 때에 형으로 섬겼으니, 대代를 이어 친親하게 지냈기에 의리상義理上 명銘 짓기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공公은 명신名臣의 아들로서 젊어서 좋은 벼슬자리를 얻었고, 간혹 문장文章을 지어 상관上官에게 올려서 스스로 진출하기를 청하기도 하였고, 장차 그 집안의 부귀를 대를 이어 계승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태평한 시대를 만나서 법도에 합당하게 신하의 도리를 다하려 하였으나,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가 없었고, 시대 풍조와 어그러져서 궁곤하게 지냈으니, 그 원한怨恨과 한탄恨歎이 왕왕 그의 문장 속에 드러나기도 한다.
주부主簿가 그의 원고原稿를 분야별로 나누어 정리하여 20권卷으로 편집하였는데, 이를 읽어보고 그분이 마음속에 간직했던 뜻을 알게 되었으며, 분사分司의 자리를 요청한 말이 더욱 비장하므로, 그 내용의 대강을 적취하여 묘지墓誌에 실어놓게 된 것이니, 아아!
여기에 나무가 있어, 한 뿌리에서 나서 중간에 갈라졌네.
그 재목됨이 똑같았고, 심은 때도 동일하였는데,
한 그루는 잘려서 불태워졌고, 다른 한 그루는 다듬어서 종묘의 제기를 만들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