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오씨吳氏니 諱某요 자字某니 其先건안建安大姓이라
曾大父諱某
니 건주자사建州長
건주자사史요 大父諱某
니 관역순관館驛巡官 검교상서이부원외랑檢校尙書吏部員外郞이니 皆
所置也
라
方이씨李氏時에 이부부군吏部府君之父子로 同時仕江남당南者以十數러니 至이부부군君之考諱某하야 始以汀정주州군사추관軍事推官歸하야 選於송조朝하야 신정현주부主정주鄭之신정현주부新鄭신정현주부簿하니라
君少孤하야 事母夫人至孝하고 與其弟가軻相愛하니라
春秋祭先人에 雖老矣나 眡牲省器를 皆不以屬子孫하고 俯仰齋慄하야 如見其饗之者하며 已祭에 未嘗不悲哀也러라
讀書에 取大指通而已요 或勸之謀利하면 曰吾貧久矣니 人以我爲憂나 而我以是爲樂하니 不能改也라하다
有子三人하니 보甫신申염冉이니 皆不使事生産하고 曰 士而貧이 多於工商而富也라하다
三人者皆以
하고 而
신申爲
태평주太平州군사추관軍事推官하다
君年七十八의 某年某月某日에 卒於태평太平之官舍하니 보甫等護其柩하고 歸葬於강주江州某縣某鄕某原하니 某年某月日也라
始에 君所居毁於水어늘 乃奉母夫人하고 來客강주江州하야 愛其山川而遂家之라 故其葬也以歸焉하니라
신申之友
이 論次君之事如此
하니 而
신申以告曰
선친先남양인人不幸
하야 力爲善而不獲顯於天下
러니
予不及識君矣나 然予之故人이 多能言君之敎諸子盡其道라 故卒皆有立하고 而신申之문장文行이 尤以知名於世라
方今士大夫之列於朝者는 天子於其父母에 皆有以寵嘉之하야 其官封之卑鉅視其子하야 所以勸天下之爲父母하고 而慰其子之心하니 以君之善敎而子之材로 宜及其身에 有高爵盛位之報焉이로다 其生也에 旣不及하니 其沒也에 孰知其不卒享也哉리오
오처사의 일생을 서술하면서, 고의로 자신의 생각만으로 글을 썼다.
군君은 오씨吳氏이고, 휘諱는 모某이며, 자字는 모某이니, 그 선조先祖는 건안建安의 벌족閥族이었다.
증조曾祖 휘諱 모某는 건주자사建州刺史였고, 조부祖父 휘諱 모某는 관역순관館驛巡官 검교상서이부원외랑檢校尙書吏部員外郞이었는데, 모두 강남江南 이씨李氏가 설치했던 관직이었다.
이씨李氏가 세운 남당시대南唐時代에 일족一族 가운데 이부부군吏部府君의 부자父子와 동시에 남당南唐에서 벼슬한 사람이 십여 명이었는데, 군君의 선고先考인 휘諱 모某에 이르러 비로소 정주訂州의 군사추관軍事推官으로서 우리 송조宋朝에 귀순歸順하니, 조정朝廷에서 선임選任하여 정주鄭州의 신정현주부新鄭縣主簿로 삼았다.
군君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부인母夫人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으며, 그의 아우 가軻와도 우애가 깊었다.
춘추春秋로 선친께 제祭를 올릴 적에 늙은 이후에도 희생犧牲을 살피고 제기祭器를 돌보는 일을 모두 자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하였고,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두려운 듯 조심하여 마치 흠향歆饗하는 분을 직접 뵙는 듯이 하였으며, 제사가 끝난 후에는 슬퍼하고 애달파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글을 읽을 때에는 대의大義에 통通함을 취取할 뿐이었고, 혹 이익利益을 도모하기를 권하면, 말하기를 “내가 가난하게 지낸 지 오래되었고, 남들은 나를 위해 이를 근심하지만, 나는 이를 낙樂으로 여기고 있으니, 바꿀 수가 없소.” 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보甫와 신申과 염冉인데, 모두 생계生計를 도모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말하기를 “선비로서 가난하게 지내는 것이 기술자나 상인이 되어 부유하게 지내는 것 보다 낫다.” 하였다.
세 사람이 모두 지방에서 시행하는 향공진사과鄕貢進士科에 합격하였고, 신申은 태평주太平州의 군사추관軍事推官이 되었다.
군君이 78세가 되던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태평太平의 관사官舍에서 졸卒하자, 아들 보甫 등이 그의 관棺을 모셔다 강주江州의 모현某縣 모향某鄕의 모원某原에 귀장歸葬하였으니, 그때가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이었다.
부인夫人은 군君보다 먼저 졸卒하여 다른 곳에 하장下葬하였으니, 남양南陽 섭씨葉氏이다.
처음에 군君이 거처하던 곳이 수해를 입어 허물어지니, 이에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강주江州로 와서 객지생활을 하였는데, 그곳의 산천을 사랑하게 되어, 드디어 그곳에 정착하였으므로, 그곳으로 돌아가 장례를 모시게 된 것이다.
신申의 친구인 남양인南陽人 장힐張頡이 군君의 사적事績을 이와 같이 차례로 정리하니, 신申이 이를 가지고 와서 고告하기를 “선친先親께서 불행하게도 힘써 선행善行을 닦으셨지만 천하에 드날림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이제 장례를 갖추어 모셨으니, 묘지명墓誌銘을 지어서 후세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미처 군君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의 친구들 중에는, 군君이 아들들을 가르칠 때에 그 도道에 맞게 하기를 지극하게 하였으므로, 끝내는 모두가 입신출세立身出世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고, 신申의 문장文章과 행실行實은 세상에 더욱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바로 이 시대에 사대부士大夫들로 조정朝廷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은, 천자天子께서 그들의 부모에게까지 총애를 베푸심이 있어서, 그들에게 그 아들의 벼슬에 맞추어 높거나 낮은 관작官爵을 추봉追封해주어, 천하天下의 부모父母 된 이들을 고무鼓舞하고 그 자손의 마음을 위무慰撫해주시니, 군君이 도道에 맞게 잘 가르치고, 자식들이 재능이 있으니, 마땅히 그의 몸에 높은 작위와 성대한 벼슬로 보답함에 이르렀어야 할 것인데,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그가 몰沒한 후에도 끝내 이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누가 알았으랴.
선비가 혹 인仁을 행하여도, 미명美名이 한 고장에 그쳤다가,
그 후손後孫이 흥기興起함에 이르러 그 소문이 이에 빛을 발하기도 하도다.
혹 덕업德業을 행하기를 부지런히 해도, 전傳해짐이 끊기기도 하지만,
오직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은, 실로 군君에게 훌륭한 아들이 있어서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