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則卓越
하야 自放不羈
하고 不肯求
라 然有高節大度
하야 過人之材
하니
其族人
爲
재상宰相에 欲奏而官之
호되 非其好
하야 不就也
하니라
自장강江회수淮之上 영남嶺南之間으로 以至경사京師히 無不游하야 將相大人豪傑之士와 以至閭巷庸人小子히 皆與之交際하야 未嘗有所忤하야 莫不得其歡心이라
卒然以是非利害加之라고 而莫能見其喜慍하니 視其心하면 若不知富貴貧賤之可以擇而取也요 頹然而已矣러라
昔
當
하야 哀天下之士沈於得喪
하고 陷于毁譽
하야 離性命之情
하고 而自託於人僞
하야 以爭須臾之欲
이라
故其所稱述을 多所謂天之君子하니 若君者 似之矣로다
君讀書通大指하고 尤善相人이나 然諱其術하야 不多爲人道之하고 知音樂書畵奕碁하야 皆以知名於一時하니라
황우皇祐中에 近臣言君文章善篆한대 有旨召試호되 君辭焉하다
於是
에 할새 又言君善篆
하야 與
相上下
한대 又召君
하니 君卽往
하야
經成에 除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호되 不就也하다
가우嘉祐七年十一月甲子에 以疾卒于경사京師하니 年五十七이라
娶신씨辛氏하야 生二男하니 존存유孺는 爲진사進士요 五女子니 시기숙其長嫁상주常州진릉현주부晉陵縣主簿시기숙侍其璹하야 早卒하니 시기숙璹又娶시기숙其中女하고 次適소주蘇州오현위吳縣황원黃元하고 二人未嫁하다
君曾祖考諱某
니 저작좌랑佐강남江南이씨李氏하야 爲
건주建州군사추관軍事推官하고 祖考諱某
니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贈
공부상서工部尙書요 考諱某
니 경조부절도판관京兆府節度判官이라
君以某年某月某甲子에 葬윤주潤州단양현丹陽縣금산金山之東園하다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살았던 행적行蹟을 서술敍述하였으므로, 문장文章도 자유분방하다.
군君의 휘諱는 우직友直이고, 성姓은 장씨章氏이다.
젊어서는 특출하게 뛰어났고, 자유분방自由奔放하여 예법禮法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선발되어 임용됨을 추구하지 않았으나, 드높은 절의節義와 웅대한 도량度量으로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친족親族인 순국공郇國公이 재상宰相이 되었을 때에, 상주上奏하여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취임하지 않았다.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유역의 영남嶺南으로부터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어, 장상將相 대인大人들과 호걸豪傑스러운 선비로부터 여항閭巷의 평범한 사람 및 수양이 덜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와 교제하면서, 일찍이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어, 그들의 환심을 사지 않는 일이 없었다.
갑자기 옳고 그름을 따지고 이利와 해害를 가加해도 기뻐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을 보지 못했으니, 그의 마음을 살펴보면, 마치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을 가려서 취取할 줄을 모르는 듯이 하였으며, 공경하고 순순히 따를 뿐이었다.
옛적 열어구列御寇와 장주莊周가 문왕文王 무왕武王이 세웠던 주周나라의 말세를 당하여 천하天下의 선비들이 득실得失을 따지는 일에 빠지고 비난과 찬양에 함몰陷沒되어, 성명性命의 실정實情에 어긋나게 되고, 자신을 헛된 쟁투와 한 순간의 욕망에 맡겨버림을 불쌍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그들이 말하고 기술한 것에, 이른바 자연스러운 군자君子(至人과 신인神人)에 대한 것이 많으니, 군君 같은 사람이 그에 유사한 인물이라 하겠다.
군君은 책을 읽으면 대의大義에 통달하였고, 사람들의 관상觀相을 매우 잘 보았으나, 그 재능 드러내기를 꺼려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많지 않았고 음악音樂과 서화書畵와 바둑 장기 등에 능能해서, 이런 모든 일로써 한 시대에 이름이 알려졌다.
황우皇祐 연간年間에 근신近臣이 군君이 문장文章을 잘 짓고 전서篆書를 잘 쓴다고 아뢰니, 불러서 시험해보도록 명을 내렸지만 군君이 이를 사절辭絶하였다.
이때에 태학太學에서 석경石經을 전서체篆書體로 새길 적에, 군君이 전서篆書를 잘 써서 이사李斯, 이양빙李陽氷과 우열을 겨룰만 하다고 다시 아뢰자, 또 군君을 부르니 군君은 즉시 이에 응하였다.
그리하여 석경石經이 완성되자 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가우嘉祐 7년 11월 갑자일甲子日에 병病으로 경사京師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57세였다.
신씨辛氏와 결혼하여 두 아들 존存과 유孺를 낳았는데 모두 진사進士가 되었고, 딸이 다섯인데 장녀長女가 상주常州 진릉현주부晉陵縣主簿 시기숙侍其璹에게 출가出嫁하였다가 일찍 졸卒하자 시기숙侍其璹가 다시 둘째 딸과 혼인하였고, 그 다음 딸은 소주蘇州 오현위吳縣尉 황원黃元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 둘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군君의 집안이 건안建安에 거주한 지는 5대代가 되었고, 그 이전에는 예장인豫章人이었다.
군君의 증조고曾祖考 휘諱 모某는 이씨李氏가 강남江南에 세웠던 남당南唐에서 벼슬하여 건주建州 군사추관軍事推官을 지냈고, 조고祖考 휘諱 모某는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선고先考 휘諱 모某는 경조부절도판관京兆府節度判官이었다.
군君을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갑자某甲子에 윤주潤州 단양현丹陽縣 금산金山의 동원東園에 안장安葬하였다.
그리지도 않고 아로새기지도 않았으며, 발돋움하지 않았는데도 드높았도다.
고개 숙이고 초야草野에서 즐겁게 지내었고, 고개 들고 조정朝廷에서 노닐었도다.
속마음은 충실充實함이 있었으니, 이 명銘을 본다면 밝게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