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所謂儒者는 用於君則憂君之憂하고 食於民則患民之患이요 在下而不用이면 則修身而已니라
當요堯之時하야 天下之民이 患於洚水어늘 요堯以爲憂라
之生
에 天下之民
이 患有甚於洚水
하고 天下之君
이 憂有甚於
요堯나
然
하야 曾不以天下憂患
으로 介其意也
하니 夫二人者
는 豈不同道哉
아
蓋生於
우禹之時
하야 而由
안회回之行
이면 則
요 生於
안회回之時
하야 而由
우禹之行
이면 則
라
故曰 賢者用於君이면 則以君之憂爲憂하고 食於民이면 則以民之患爲患이요 在下而不用於君이면 則修其身而已라하노니 何憂患之與哉리오
夫所謂憂君之憂
하고 患民之患者
는 니 苟不義而能釋君之憂
하고 除民之患
을 니라
사기史記에 曰 제齊伐노魯어늘 공자孔子聞之하시고 曰 노魯는 墳墓之國이니 國危如此어늘 二三공자子는 何爲莫出고하시니
이라하시니 己以墳墓之國
으로 而欲全之
인댄 則
제齊오吳之人
은 豈無是心哉
리오
於史考之하면 當是時하야 공자孔子자공子貢은 爲匹夫니 非有경상卿相之位와 萬鍾之祿也어늘 何以憂患爲哉아
然則異於안회顔回之道矣니 吾所以知其傳者之妄이 二也니라
墳墓之國은 雖君子之所重이나 然豈有憂患而謀爲不義哉아
借使有憂患爲謀之義면 則豈可以變詐之說로 亡人之國하야 而求自存哉아
자공子貢之行
이 雖不能盡當於道
나 然
공자孔子之賢弟
자공子也
니 어든 矧曰
공자孔子使之也
리오
내가 역사歷史에 기록된 자공子貢의 사적事迹을 읽어보고 이를 전傳한 사람이 허탄虛誕한 말을 전한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공子貢이 어찌 유자儒者가 될 수 있겠는가.
대저 이른바 유자儒者는 군주君主에게 임용되면 군주가 근심하는 문제에 대하여 근심하고, 백성이 생산해 바친 곡식을 먹게 되면 백성들이 근심하는 문제에 대하여 근심해야 하며, 아래에 평민으로 있으면서 임용되지 않았을 때에는 심신心身을 수양修養할 따름이다.
요堯임금 때를 당하여 천하의 백성들이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함을 근심하자, 요堯임금도 이를 근심하였다.
그 때문에 우禹는 9년 사이에 세 차례나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도 그 자식들을 한 번도 살피지 않았던 것이다.
안회顔回가 생존했을 때에는 천하 백성들의 근심이 홍수가 났을 때보다 심하였고, 천하 군주들의 근심이 요堯임금 때보다 심하였다.
그러나 안회顔回는 우禹와 같은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누추한 뒷골목에서 홀로 즐거워하여 천하의 우환憂患이 그의 생각 속에 일찍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으니, 이 두 사람은 어찌 도道가 서로 달랐겠는가.
대체로 우禹가 생존했던 시대에 살면서 안회顔回의 행실을 따랐다면 이는 위아설爲我說을 주창한 양주楊朱 같은 무리인 것이요, 안회顔回가 생존했던 시대에 살면서 우禹의 행실을 따랐다면 이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창한 묵적墨翟 같은 무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현자賢者가 군주에게 임용되면 군주가 근심하는 문제에 대하여 근심하고, 백성들이 생산하여 바친 곡식을 먹게 되면 백성들이 걱정하는 일에 대하여 걱정하며, 평민으로 있으면서 군주에게 임용되지 않았으면 그 심신을 수양할 뿐이다.”라고 한 것이니, 어찌 다른 근심 걱정이 끼어들 여지가 있겠는가.
대저 이른바 군주의 근심거리를 근심하고 백성의 걱정거리를 걱정함은 또한 의義에 합당하게 하는 것이니, 진실로 의롭지 못한 행위로 군주의 근심을 풀어주거나 백성의 걱정을 제거해주는 일을 현자賢者라면 또한 부끄러이 여기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기史記》에 “제齊가 노魯를 치려 하니 공자孔子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노魯나라는 조상祖上의 분묘墳墓가 있는 고국이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느냐.’ 하셨다.
자공子貢이 이 때문에 떠나서 제齊를 설득하여 오吳를 치게 하고, 오吳를 설득하여 노魯를 구하게 하며, 다시 월越을 설득하고, 또다시 진晉을 설득하니, 다섯 나라가 이 때문에 서로 전쟁을 하여 어떤 나라는 더욱 강성해졌고, 어떤 나라는 깨트려졌고, 어떤 나라는 혼란해졌고, 어떤 나라는 패자霸者가 되어 마침내 이런 방법으로 노魯나라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그 말을 관찰해보고 그 사실을 고찰해보면, 자공子貢은 바로 장의張儀, 소진蘇秦, 진진陳軫, 소대蘇代 등 유세객遊說客의 무리와 다를 것이 없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하셨는데, 자기 조상의 분묘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를 보전하려 하였다면, 제齊나라나 오吳나라 사람들이라고 어찌 이런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니 어찌 그들 나라를 어지럽히려 하였겠는가.
이것이 내가 〈역사에 이 사실을〉 전한 사람이 허탄虛誕한 말을 전한 것임을 알게 된 첫번째 이유인 것이다.
역사를 고찰해보면 이때를 당하여 공자孔子와 자공子貢은 벼슬을 하지 않은 평민이니, 경상卿相의 지위地位에 있거나 만종萬鍾의 녹祿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엇을 근심하고 걱정하겠는가.
그런데도 이렇게 하였다면 안회顔回가 추구하였던 도道와는 다르니, 이것이 내가 이를 전傳한 사람이 허탄한 말을 전한 것임을 알게 된 두 번째 이유인 것이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나라는 비록 군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바이지만, 그러나 어찌 근심 걱정거리가 있다 해서 불의不義를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
가령 근심 걱정이 있어서 의리를 도모하려 하였다면, 어찌 요리조리 속이는 술책으로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여, 이로써 자기 나라의 보존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이를 전한 사람이 허탄한 말을 전한 것임을 알게 된 세 번째 이유인 것이다.
자공子貢의 행실行實이 비록 모두가 도道에 합당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공자孔子의 어진 제자弟子였으니, 본디 마땅히 이런 사술詐術을 쓰는 지경에는 이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하물며 공자孔子께서 그렇게 사주使嗾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학자學者들 가운데 공자孔子의 문도門徒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찬양한 것이 더러는 그 실상보다 과장된 것도 있고, 폄훼한 부분이 더러는 진실을 훼손한 것도 있었다.” 하였는데, 자공子貢이 비록 변설辯說에 능能하기는 하였지만, 어찌 이런 사술詐術을 쓰는 지경에까지야 이르렀겠는가.
이 또한 이른바 진실眞實을 훼손毁損하여 폄훼貶毁한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