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공歐陽公最長於墓誌表하고 以其序事處往往多태사공太史公逸調하야 唐以來學士大夫所不及者로되
而왕형공王荊公은 獨自出機軸하고 多巉畫曲折之言하며 其尤長者는 往往於序事中 一面點綴着色이 雋永遠出하야 令人覽之에 如走駿馬於千山萬壑之中 而層巒疊嶂이 應接不暇하니 序事中之劒戟也라
송宋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정봉대부正奉大夫 지허주군주사知許州軍州事 兼管內堤堰橋道勸農
행급사중事 上柱
남창군개국공國 남창군개국공南昌郡開國公 賜紫金魚袋
매공梅公之墓 在
선주宣州선성현宣城縣장안향長安鄕서산리西山里하다
公有五子하니 정신鼎臣德정신臣보신寶臣보신輔臣청신淸臣이니
청신淸臣今獨在
하야 爲尙書司門郞中
이러니 以
구양공公行狀及
之銘
으로 來請文以刻墓碑
하니 時
희령熙寧元年八月四日也
라
爲탁지원외랑郞탁지원외랑度支하야 以將광덕군廣德이라가
超遷郞秩하야 進추밀원직학사直추밀원직학사樞密이라
01. 한림시독학사 지허주군주사를 지낸 매공의 신도비
구양공歐陽公(歐陽脩)은 묘지墓誌와 묘표墓表를 가장 잘 지었고, 사실事實을 서술敍述한 곳은 왕왕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의 빼어난 격조에 비견할 만한 곳이 많아서, 당대唐代 이후의 학사 대부들이 이에 미칠 수 없다.
그런데 왕형공王荊公(王安石)만은 독자적인 기축機軸을 발현하여 우뚝하게 드높고 깊은 곡절을 드러낸 말이 많으며, 더욱 훌륭한 점은, 사실을 서술한 가운데 왕왕 어느 한 면을 돋보이도록 수식修飾을 가하여 아름다우면서도 심오함이 원대하게 빼어남이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열람하면 마치 준마駿馬를 타고 천산만학千山萬壑 가운데를 달려 층층으로 이루어진 산과 겹겹의 절벽을 미처 완상할 겨를이 없게 하는 것과 같으니, 사실을 서술한 글 가운데 날카롭고 빼어나기가 검극劍戟과 같다.
문장 전체를 서序로 시작하여 명銘으로 마쳤으니, 또한 비문체碑文體의 변조變調라 할 수 있다.
송宋나라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정봉대부正奉大夫 행급사중行給事中 지허주군주사知許州軍州事 겸兼 관내제언교도권농사管內堤堰橋道勸農事 상주국上柱國 남창군개국공南昌郡開國公 식읍이천삼백호食邑二千三百戶 식실봉육백호食實封六百戶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받은 매공梅公의 묘墓가 선주宣州 선성현宣城縣 장안향長安鄕 서산리西山里에 있다.
공公은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정신鼎臣‧덕신德臣‧보신寶臣‧보신輔臣‧청신淸臣 등이다.
현재 청신淸臣만이 생존하여 상서사문낭중尙書司門郎中으로 있는데, 공公의 행장行狀 및 낙안樂安 구양공歐陽公이 지은 명銘을 가지고 와서, 비문碑文을 지어 묘비墓碑에 새길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니, 때는 희령熙寧 원년元年(1068) 8월 4일이었다.
공公의 선조先祖는 매백梅伯이니 후대後代에 그 나라 이름을 성씨姓氏로 정하였네.
주대周代를 지나서 진대秦代에 이르기까지는 사서史書에 조상祖上들의 명자名字가 보이지 않고,
매현梅鋗과 매복梅福이라는 분이 계셔서 한대漢代의 인명록人名錄에 드러나 있네.
공公은 매복梅福의 후손으로 이름이 순詢이고 자字는 창언昌言이었네.
선조先祖의 삼대三代는 벼슬을 하지 않으시고 능양陵陽 마을에 사셨네.
공公은 전시殿試에 급제하여 이풍利豐의 판관判官이 되셨고,
2년 만에 장작감將作監의 승丞으로 발탁되셨다가,
인화현仁和縣의 재宰가 되자 사람들의 많은 칭찬을 받으셨네.
어사대御史臺의 추감관推勘官이 되어 황상皇上을 모시고 진사시進士試의 고관考官이 되었고,
천자天子께서 한 번 보시고는 뜻을 같이할 만한 기재奇材로 여기셔서,
조서詔書를 내리셔서 “등용하라!” 하시고, 드디어 시중서사인試中書舍人에 명命하셨고,
직집현원直集賢院이 되시니 붉은색의 관복과 은어대銀魚帶를 하사下賜하셨네.
이때에 이계천李繼遷이 우리의 서쪽 변방을 침노하니,
노약자老弱者들은 물자운송과 성곽수호에 고생하고, 장정壯丁들은 전사戰死한 사람이 많았으며,
영주靈州에서 위태로움을 고告하니 황제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셨네.
공公이 적임자適任者를 골라 반라지潘羅支에게 사신使臣을 보내어 설득하기를 청하니,
병법兵法에 이른바 오랑캐로 오랑캐를 치게 한 것이네.
황제께서 “누구를 보낼까?” 하시자 “신臣만 한 적임자가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는데,
황제께서 “나는 너를 가상하게 여기지만, 막히고 무너지면 어찌하랴.” 하시니,
공公이 절을 올리고 꿇어앉았다가 일어나서 큰 소리로 말씀 올리기를,
“진실로 서방西方의 병란兵亂을 진정鎭定시킬 수 있다면 신臣은 목숨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하니,
국서國書를 내어주시며 “그곳으로 가서 너의 계책을 이루도록 하라!” 하셨으나,
그 땅에 이르렀다가 칙명勅命을 받고 돌아와 보니 영주靈州는 포기한 후後였네.
황제께서 공公의 재주를 살피시고 황제의 조서詔書를 지을 만하다고 보셨으나,
재상宰相 가운데 반대하는 자가 있어서 삼사三司에 머물면서 보좌하였네.
그 후에 반라지潘羅支가 과연 서방西方의 적敵을 물리치니,
장수將帥의 공과功過를 논하고 적敵에 대하여 예측하셨던 것이,
누구를 따르고 누구를 어기며, 누구를 물리치고 누구를 천거할지와
반역反逆할 자와 귀부歸附할 자를 공公이 귀신같이 알아맞혔네.
옥사獄事의 처리를 한 번 그르쳤다 하여 지방 고을의 졸倅로 쫓겨났고,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나갔다가 소주지사蘇州知事가 되어 국가의 동쪽 방어를 튼튼히 하였으며,
절강浙江의 전운사轉運使가 되어 이끌고 거느리기를 능能하게 하고,
3년 만에 공적功績이 보고되어 겨우 옛 관직을 회복하셨네.
다시 견책譴責을 받아 쫓겨나서 저 회주淮州의 지사知事가 되었을 적에
동료同僚인 허국공許國公 여이간呂夷簡과 이곳에서 서로 만나,
흔연히 함께 지내면서 즐거워하여 옮겨갈 것을 잊었었네.
호북湖北의 전운사轉運使에서 호주濠州로 옮겼는데,
또 관등官等이 강등降等되어 이곳을 떠나서 양주판관襄州判官에 보임되었으니,
나라의 역마驛馬를 상喪을 당하여 급히 떠나는 사람에게 빌려준 일에 연좌連坐되어서였네.
악주鄂州와 소주蘇州에서 지주知州 겸兼 관군사管軍事가 되었고,
황제의 부절符節을 가지고 관중關中 땅을 관할하여 전운轉運의 사무를 총관總管하니
광채光彩 나는 관복官服은 특별한 은총을 내리신 것이네.
영무군靈武郡의 수복收復을 도모圖謀하여 군사가 호로수葫蘆水를 건너려 할 때에,
진주秦州에 장군將軍 조위曹瑋가 있어, 공公과 함께 가기를 허락하였었는데,
때마침 조위曹瑋가 소환召還당하여 공公은 다시 포부를 이룰 수가 없었네.
함양咸陽에서 반란反亂을 일으킨 자가 있었으니, 공公이 천거薦擧했던 주능朱能이라 하는 자였네.
처음에는 비록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으나 후에는 잡아서 처형하니,
이 때문에 회주懷州에서 지주池州로 옮겨가서 다시 단련부사團練副使가 되셨네.
진종眞宗께서 승하昇遐하시자 죄과罪過를 모두 사면하셔서,
탁지원외랑度支員外郞이 되시고 광덕군廣德軍의 장長이 되셨다가
지방관으로 나가 네 고을의 지사知事를 역임하였으니, 초주楚州와 수주壽州와 섬주陝州와 형주荊州였네.
이어 용도각대제龍圖閣待制로 소환되어 수도首都의 형옥刑獄을 규찰糾察하였고,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우뚝하게 드러나서, 당당한 말씀은 바르고 공평하였으며,
학사로 있으면서 용도각 지키기를 오로지 하였네.
관리 전형銓衡의 직임職任을 마치고는 역거驛車를 타고 병주幷州로 부임하셨다가
낭중郎中의 관등官等을 뛰어넘어서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로 승진하셨네.
잠시 후 봉박사封駁司로 돌아가 국중國中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았고,
다시 전선銓選의 임무를 담당하여 승진시키고 좌천시키는 권한을 얻었네.
시독侍讀의 직책이 더해지고 군목사群牧使의 장長이 되셨으며
심관원審官院으로 옮기셔서 지심관知審官으로 복무하셨네.
공적功績과 경력經歷으로 급사중給事中이 되셨는데,
병病을 이유로 지허주사知許州事로 나아가 조용히 태평하게 지내시다가 졸卒하셨네.
공公은 젊었을 적에 뜻을 세우심이 남보다 뛰어나서,
주장하는 말이 비장하니 황제께서 기뻐하시며 특별히 예우하셨네.
후배들로 늦게 진출한 사람들이 모두 장상將相에 이르자,
공公은 노령老齡을 이유로 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고자 하셨네.
강정康定 신사년辛巳年(1041) 6월 10일에,
공公은 남창군南昌郡 개국공開國公이 되어 훈급勳級과 작위爵位가 으뜸이셨네.
부인夫人은 유씨劉氏로 미처 군봉郡封을 받지 못하고
후後에 팽성현군彭城縣君에 봉封해졌으니 공公보다 먼저 졸卒하였기 때문이었네.
고을의 산 서쪽에 점쳐 길지吉地를 얻어 부인夫人을 합장合葬하였네.
공公은 네 아들을 두셨으니 맏아들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전중승殿中丞을 지냈는데, 둘째 아들과 함께 공公보다 먼저 사망死亡하였네.
둘째에게는 동진사同進士를 하사下賜하였고, 셋째와 넷째는 모두 승丞과
장작將作과 전중殿中을 역임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였네.
오직 막내 아들만이 현달顯達하여 한때 위위승衛尉丞을 지냈고,
지금은 낭중郎中으로 있으면서 공公이 태어나서부터 졸卒할 때까지의 행적을 기술記述하여,
이를 가져와서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청하고, 비碑에 새겨 무궁토록 볼 수 있게 하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