熙寧二年
에 臣某
하야 遂與政
하고 而
러니 有旨
하야 爲之說以獻
하고 이라
이 이라가 遭漢而僅存
하니 賴學士大夫誦說
하야 以故不泯
이나 而世主莫或知其可用
이라
天縱皇帝大知하사 實始操之以驗物하시고 考之以決事러시니
又命訓其義하야 兼明天下後世하실새 而臣父子以區區所聞으로 承乏與榮焉이라
然言之淵懿어늘 而釋以淺陋하고 命之重大어늘 而承以輕眇하니 玆榮也 祗所以爲愧也歟인저
두 편의 서序를 고찰해보니, 모두 공이 황상皇上의 명에 응하여 지은 것들이다.
그 문장文章이 간략하면서도 그 법도는 스스로 모범이 될 만하다.
희령熙寧 2년(1069)에 신臣 모某는 《상서尙書》를 시강侍講한 것이 계기가 되어 궐내闕內에서 황상皇上을 모시면서 정사政事에 참여할 수 있었고, 신臣의 자식 방雱이 경연經筵에서 강술講述하는 일을 이어받았으며, 황상의 지시가 계시면 강론講論한 학설學說을 글로 정리하여 올리기도 하였는데, 8년(1075)에는 그 글을 태학太學으로 내려 보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虞, 하夏, 상商, 주周시대에 남긴 글인 《상서尙書》가 진秦나라의 분서焚書를 겪으면서 거의 없어졌다가 한漢나라에 이르러서야 겨우 남아있게 된 것은, 학사學士 대부大夫들 가운데 그 글을 암송하는 사람이 있었던 데에 힘입어서 그 때문에 민멸泯滅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 시대의 군주君主 가운데는 그 학문의 효용을 알지 못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하늘이 황상皇上께 큰 지혜를 부여하사, 진실로 비로소 이 학설을 근거로 하여 사물을 궁구하시고, 이 학설을 참고하여 사안事案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훈석訓釋하고 겸하여 천하 후세에 밝힐 것을 명하셔서, 신臣 부자父子가 변변히 아는 것도 없으면서 빈 자리를 이어받아 영예로운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글의 내용이 심오深奧하고 아름다운데도 이를 천박淺薄하고 고루固陋하게 훈석訓釋하였고, 명하신 일이 중대한 것인데도 가볍고 하찮은 식견 때문에 받들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영예로운 일이 다만 부끄러움만 될 뿐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