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人은 건양建陽진씨陳氏니 嫁同縣人여군余君하야 爲繼室하다
여씨余氏는 世大姓也이니 夫人盡其産하야 以仁先母之子하고 而使익翼之四方遊學하야 戒曰 往成汝志必力하고 無以吾貧爲恤하라하다
於是에 익翼年十五니 蓋在外十二年이요 而後以進士起家爲吏하야 歸見夫人於鄕里하다
익翼숙송현위尉숙송현위宿松에 而夫人年七十八이라 以某年某月에 卒於숙송현위宿松之官舍하니 某年某月某日에 葬선주宣州선성현宣城縣鳳풍림향林鄕죽당리竹塘里하다
夫人之子
는 長曰某
니 死矣
라 익翼有文學
하고 善議論
하야 雖久困無所
이나 然一時文人多知之者
하니 其卒能追榮夫人乎
인저
묘지명墓誌銘이 200자字에 지나지 않는데도, 문장文章 속에 기운氣韻이 꺾여 저상沮喪된 부분을 기록한 곳이 많아서 비감悲感을 느끼게 한다.
부인夫人은 건양建陽 진씨陳氏로, 같은 현縣 사람인 여군余君에게 출가하여 그의 계실繼室이 되었다.
여군余君의 휘諱는 초楚이고, 아들 넷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둘은 부인이 낳은 아들이었다.
부인의 작은 아들 익翼이 세 살 되던 해에 여군余君이 졸卒하였다.
여씨余氏는 대대로 대성大姓이었는데, 부인夫人은 그 재산을 선부인先夫人이 낳은 아들들을 어질게 만드는 데 다 쓰고, 익翼으로 하여금 사방四方으로 스승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익히도록 하면서, 경계警戒하여 말하기를 “가서 네 뜻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진력盡力하고, 우리의 가난함을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에 익翼의 나이가 15세였는데, 대체로 집 밖에서 지낸 것이 12년이었으며, 그 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어 출세하였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부인夫人을 찾아뵈었다.
바로 이때에 부인은 문을 닫고 빈한貧寒하게 지내면서 거의 생존生存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모자母子가 함께 흐느껴 우니, 마을 사람들이 이를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현숙賢淑하도다.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으니 그의 봉록俸祿을 잡숫게 된 것이 당연하도다.” 하였으며, 그 후 그 아들의 봉록을 잡숫고 지낸 것이 14년이었다.
익翼이 숙송현위宿松縣尉로 있을 때에 부인夫人의 연세年歲가 78세였는데, 모년某年 모월某月에 숙송현宿松縣의 관사官舍에서 졸卒하니,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선주宣州 선성현宣城縣 풍림향風林鄕 죽당리竹塘里에 안장安葬하였다.
부인夫人의 아들 가운데 큰아들을 모某라 하는데 먼저 사망하였고, 익翼은 문학文學에 재능이 있고 의론議論에 능能하였으며, 비록 오래도록 궁곤窮困하게 지낼지언정 윗사람의 뜻에 영합迎合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 시대의 문인文人들 가운데는 그를 아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마침내 부인夫人을 높여 영예榮譽롭게 할 수 있었다.
부인의 장례를 지낼 때에 임천臨川 왕모王某가 다음과 같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
구계句溪의 남쪽 언덕에, 새로 조성한 유택幽宅이 있으니,
누가 어머니 장지葬地를 정하고, 돌에 명銘을 새겨 묻었나?
아들은 민閔 땅의 여씨余氏이고, 어머니는 진씨陳氏이네.
외롭게 지킨 행적行蹟과 아름다운 그분의 인애仁愛여!
아들의 봉록俸祿으로 생을 마쳤으니, 그 이름 길이 묻히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