托通判與客相對之言하고 而又托之書하야 以爲一篇文案이라
爲閣於其舍之西偏
하고 旣成
에 與客升以飮
하야 而爲之名曰 見山
이라하고
吾人이 脫於兵火하고 洗沐仁聖之膏澤하야 以休其父子者 餘百年이라
於今天子恭儉하사 陂池苑囿臺榭之觀이 有堙毁로되 而無改作하시니 其不欲有所騷動하야 而思稱祖宗所以憫仁元元之意殊甚이라
故人得私其智力하야 以逐於利而窮其欲하고 自雖蠻夷湖海山谷之聚로 大農富工豪賈之家라도 往往能廣其宮室하고 高其樓觀하야 以與通邑大都之有力者로 爭無窮之侈라
夫民之富溢矣로되 吏獨不當因其有餘力하야 有以自娛樂이면 稱上施耶아
又況撫之爲州는 山耕而水蒔하고 牧牛馬 用虎豹하니 爲地千里요 而民之男女以萬數者 五六十이라 地大人衆如此하고 而通判與之하야 爲之父母하니 則其人이 奚可不賢이리오
吾所以樂爲之就此而忘勞者는 非以爲吾之不肖 能長有此요 顧不如是면 不足以待後之賢者爾니라
且夫人之慕於賢者는 爲其所樂을 與天下之志로 同而不失이니 然後能有餘以與民하야 而使皆得其所願이라
而世之說者曰 召公爲政於周할새 方春에 舍於蔽芾之棠하야 聽男女之訟焉하고 而不敢自休息於宮하니
此殆非召公之實事
와 詩人之本指
요 의 吝細褊迫者之所好
니 而吾之所不能爲
라하니라
於是酒酣에 客皆歡하야 相與從容譽施侯所爲하고 而稱其言之善하니라
閣之上에 流目而環之면 則邑屋草木川原阪隰之無蔽障者皆見이어늘
豈以山之在吾左右前後
하고 若伏若騖
하야 爲獨能適吾目之所觀邪
아
施侯는 以客爲知言하고 而以書抵予曰 吾所以爲閣而名之者如此하니 子其爲我記之하라하다
數辭로되 不得止하고 則又因吾叔父之命以取焉이어늘 遂爲之記하야 以示後之賢者하야 使知夫施侯之所以爲閣而名之者하노니 其言如此하니라
05. 무주撫州 통판청通判廳의 견산각기見山閣記
통판通判이 객客과 대화한 말에 가탁假託하고, 또 받은 편지에 가탁하여 이로써 한 편의 문장을 지었다.
무주撫州의 통판通判이신 태상박사太常博士 시후施侯께서 청사廳舍의 서쪽 곁에 누각樓閣을 건축하고, 건물이 완성되자 빈객賓客들과 함께 누각에 올라가서 잔치를 열고, 그 누각의 이름을 ‘견산見山’이라 지었다.
“우리들이 전쟁을 겪지 않고 어질고 성스러운 황상皇上의 은택에 젖어서 그 부모와 자식과 함께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백여百餘 연年이 되었소.
지금의 천자天子께서는 겸손하고 검소하셔서, 피지陂池와 원유苑囿와 대사臺榭의 훌륭한 경관景觀이 매몰되고 파괴되었어도 고쳐 짓지를 않으시고, 백성들을 번잡하게 동원하고자 하지 않으시며, 선대先代의 제왕들이 백성들을 가련히 여기고 인자하게 구휼救恤하려 하였던 뜻에 맞추기를 매우 열심히 하고 계시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이 그들의 지혜를 사익私益을 위해 쓰게 되어, 이익利益을 추구하며 그들의 사욕私慾을 끝까지 다 채우려 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비록 변방邊方의 만이蠻夷가 거주하는 호해湖海 산곡山谷의 취락聚落 가운데도 대농大農, 부공富工, 대상인大商人의 집들은 왕왕 그 건물을 넓게 짓고 그 누관樓觀을 높게 짓기도 하면서, 사통팔달한 대도시의 유력자들과 사치스러움을 끝없이 경쟁하고 있소.
대저 백성들의 재부財富가 넘쳐나는데, 오직 관리들만이 여력餘力이 있어도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건물을 짓는 것을 부당하다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황상皇上께서 배푸시는 뜻에 합당한 일이겠소.
또 더군다나 무주撫州 땅은 산에는 밭을 일구어 갈고 물이 있는 곳에는 논을 만들어 모내기를 하며, 소와 말을 기르고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며, 땅은 천리千里에 이르고 남녀男女 백성들은 5,60만萬에 달하여, 땅의 넓음과 사람의 많음이 이와 같고, 통판通判이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부모노릇을 하니, 그 사람을 어찌 어질다 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나 비록 어질다 해도 그들을 다스리는데 어찌 수고로움이 없을 수 있겠소.
그런데 다만 관람觀覽하며 노닐고 빈객賓客을 접대하며, 이렇게 그 한가한 때를 보낼 만한 곳이 없다면, 이는 아마도 선왕先王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통치자를 힘껏 봉양奉養하게 한 뜻에 맞지 않을 듯하오.
내가 이곳에 취임하여 즐겁게 이를 건축建築하며 수고로움을 잊은 것은, 못난 이 사람이 이것을 길이 소유하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이렇게 해놓지 않는다면 후일後日의 현자賢者를 대우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였소.
또한 인민들이 그런 현자賢者를 사모한다면, 그가 즐기는 것이 천하 사람들의 지향志向과 서로 같을 것이고, 이를 실추시키지 않은 후에야 이로써 백성들과 더불어 넉넉히 지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모두 그들의 소원所願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될 것이오.
그런데 세상에 이를 비판하는 사람은, ‘소공召公이 주周나라에서 정사政事를 처리할 때에 봄이 되자 무성한 팥배나무 아래에 머물면서 백성들의 쟁송爭訟을 처리하고 감히 스스로 좋은 건물에서 쉬지를 않았으니,
이는 백성들이 나를 받들기를 지나치게 부지런히 하느라 농사지을 시기를 해칠까 두려워해서였다.
대체로 그 어렵고 괴로움을 숨기고 스스로 백성들이 잘되도록 애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 백성들이 사랑하고 사모하여 시가詩歌를 지어 읊고 노래하며 그분이 머물렀던 감당甘棠나무를 차마 베지 못함에 이르렀으니, 지금 전해오는 《시경詩經》의 〈감당甘棠〉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슬프도다!
이는 아마도 소공召公 때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고, 이 시詩를 지은 시인詩人의 본 뜻도 이런 것이 아니었던 듯하며, 다만 묵자墨子의 비루한 말과 불필요한 군더더기 행위이거나, 인색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쩨쩨하게 따지는 국량局量이 협소한 자들이 좋아하는 것일 뿐이니, 나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요.” 하였다.
이에 술이 거나해지자 빈객賓客들이 모두 기뻐하며, 서로 조용히 시후施侯가 행行한 바를 칭찬하고 그의 말이 훌륭함을 찬양하였다.
한편 그 건물의 아름답고 웅대함과 건물의 이름을 붙인 소이所以를 찬미하여 말하기를,
“견산각見山閣 위에서 눈을 돌려 둘러보니, 고을의 집들과 초목과 개울 및 평원과 높고 낮은 땅들이 막히는 것이 없이 모두 보이는데,
시후施侯께서는 유독 산山만 보이시는지 견산각見山閣으로 이름을 지으신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어쩌면 나의 전후와 좌우에 펼쳐져 있는 산山들이, 용龍이 서려 있는 듯, 호랑이가 걸터앉은 듯, 엎드려 있는 듯, 내달리는 듯한 것들이 유독 내 눈으로 관람하는 바에 딱 들어맞음이 있어서인가요?
또한 내 마음이 이에 얻는 것이 있어서 이를 즐거워해서일 것입니다.” 하였다.
시후施侯는 그 빈객이 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겨서 이를 적어서 내게 주며 말하기를, “내가 건물을 세우고 이름을 지은 이유가 이와 같아서이니 그대는 나를 위해 이런 뜻으로 기記를 지어 주시오.” 하였다.
몇 차례 사양하였지만 포기하지를 않고 내 숙부叔父를 통하여 지어 주도록 요청하기에, 드디어 기記를 지으면서, 이를 뒷날의 현자賢者들에게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시후施侯께서 건물을 짓고 이름을 붙인 소이所以를 알게 하고자 하였으니, 그분의 말씀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