某는 拘於此하야 鬱鬱不樂하니 日夜望深甫之來하야 以豁吾心이라가 而得書하니 乃不知所冀로라
況自京師去潁이 良不遠하고 深甫家事에 會當有暇時어늘 豈宜愛數日之勞하야 而不一顧我乎아
向說天民할새 與深甫不同하야 雖蒙丁寧相敎나 意尙未能與深甫相合也로라
三者는 皆執其志之所殖而成善者也로되 而未及乎知命하니 大人則知命矣라하니라
孔子之所謂善者如此하니 則以容於吾君爲悅者는 未可謂能成善者也요 亦曰容而已矣니라
以容於吾君爲悅者는 則以不容爲戚이요 安吾社稷爲悅은 則以不安爲戚이라
吾身之不容과 與社稷之不安은 亦有命也어늘 而以爲吾戚이면 此乃所謂不知命也니라
夫天民者는 達可行於天下하고 而後行之者也라 彼非以達可行於天下爲悅者也니
視吾之窮達하야 而無悅戚於吾心은 不知命者면 其何能如此리오
且深甫謂以民繫天者하야 明其性命莫不稟於天也라하니
有匹夫求達其志於天下하야 以養全其類하니 是能順天者라 敢取其號亦曰天民가
深甫曰 安有能視天以去就호되 而德顧貶於大人者乎아하니
某則以謂古之能視天以去就로되 其德貶於大人者有矣라하노니 卽深甫所謂管仲이 是也라
此乃吾所謂德不如大人이로되 而尙能視天以去就者라하노라
深甫曰 正己以事君者는 其道足以致容而已니 不容은 則命也라 何悅於吾心哉리오
正己而安社稷者는 其道足以致安而已니 不安은 則命也라 何悅於吾心哉리오
正己以正天下者는 其道足以行天下而已니 不行은 則命也라 何窮達於吾心哉리오하니
某則以謂大人之窮達에 能이라도 無悅戚於吾心이오 不能이라도 毋欲達이라
然而千里而見王은 是予所欲也어니와 不遇故로 去 豈予所欲哉리오
하노라하시니 夫孟子
는 可謂大人矣
로되 而其言如此
하니
然則所謂無窮達於吾心者는 殆非也니 亦曰無悅戚而已矣니라
深甫曰 惟其正己而不期於正物이라 是以使萬物之正焉이라하니
某以謂期於正己而不期於正物이라야 而使萬物自正焉이라하면 是는 無治人之道也니 無治人之道者는 是老莊之爲也라
正己不期於正物者非也요 正己而期於正物者도 亦非也라
正己而不期於正物은 是無義也요 正己而期於正物은 是無命也니
物正焉者는 使物取正乎我而後能正이니 非使之自正也라
孟子所謂
이라 不期於正物而使物自正
이면 則一人橫行於天下
호되 武王無爲怒也
니
深甫嘗試以某之言
으로 與
論之
하니 二君猶以爲未也
어든 願以敎我
하노라
문단을 나누어 분변分辨한 곳에 스스로 일종의 침착한 식견識見이 드러나 있다.
모某는 이곳에서 얽매어 지내면서 가슴속에 답답하게 뭉친 분만憤懣으로 즐겁게 지내지를 못하니, 심보深甫께서 오셔서 내 마음을 풀어 주시기를 밤낮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편지만을 받게 되니 기대하던 바에 크게 어긋나게 되었소.
더구나 경사京師에서 영주穎州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고, 심보께서는 집안의 일을 처리하면서 가끔 한가한 때도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수일數日의 수고를 아껴서 나를 한번 찾아주지 않는 것이오?
붕우간朋友間의 도道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이 사람은 심보에게 바람이 없을 수가 없소.
지난번 천리天理에 밝은 현자賢者 즉 천민天民에 대하여 토론할 때에 심보深甫와 견해가 같지 않아서, 비록 진정어린 가르침을 받았으나, 의견이 아직도 심보와 서로 합치될 수가 없다오.
심보深甫께서는, “군주君主를 섬기려 하는 사람은 내 군주에게 용납됨을 기쁘게 여기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키려 하는 사람은 내 나라의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만을 기쁘게 여기며, 천민天民은 천하天下에 뜻을 펴서 백성들에게 은택恩澤을 입힘을 현달顯達한 것으로 여겨야 하오.
이 세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그 목표로 수립한 바를 집행하여 선善을 이룬 자者이지만 천명天命을 아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대인大人은 천명天命을 아는 사람이오.” 하셨소.
모某는, 선자善者는 도道를 계승하여 실천하기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혜智慧가 그 지위에 이를 만하고 인仁으로 이를 지킬 수 있으며 위엄威嚴으로 임臨한다 해도 행위가 예禮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선善하다 할 수 없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무악武樂은 지극히 아름답기는 하나 지극히 선善하지는 않다.” 하셨소.
공자께서 말씀하신 선자善者는 이와 같은 사람이니, 나의 군주君主에게 용납됨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을 이른바 선善을 잘 이룬 사람이라 할 수가 없으므로, 또한 구차하게 용납만 받았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오.
내 군주에게 용납됨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은 용납되지 못함을 슬프게 여겨 근심할 것이고, 내 사직을 편안히 함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은 편안하게 하지 못함을 슬프게 여겨 근심할 것이오.
내 몸이 용납되지 못함과 사직이 편안하지 못함은 또한 명命에 달려있는 것인데, 이 때문에 내가 슬퍼하고 근심한다면, 이는 곧 이른바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는 것이오.
대체로 천민天民은, 기회가 이르러서 천하에 뜻을 펼칠 만하게 된 이후에 행行하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은 기회가 이르러서 천하에 뜻을 펼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므로 뜻을 얻지 못하여 실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해도 어찌 이 때문에 슬퍼하는 일이 있겠소.
내가 궁곤窮困하게 되거나 기회를 얻게 된 일이 내 마음을 슬프게 하거나 기쁘게 함이 없는 경지境地를, 천명天命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겠소.
또 심보께서는 백성들은 천도天道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그들의 성명性命이 하늘에서 품부稟賦받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소.
보통 사람도 그의 뜻이 천하天下에 이루어져서 이로써 그 동류同類들을 감싸 길러서 보전保全하게 되기를 추구함이 있는데, 이는 천명天命에 순응順應하는 사람이니, 감히 그 이름을 취하여 또한 천민天民이라 말할 수 있겠소?
어찌 천명天命에 따를 수 있으면서 천명天命을 모르는 자가 있을 수 있겠소.
심보深甫께서는, “하늘의 뜻에 맞게 나가거나 물러날 수 있으면서 덕德이 대인大人보다 뒤떨어지는 자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소.
그러나 모某는 옛날에 하늘의 뜻에 맞추어서 나가거나 물러날 수 있었으면서도 그 덕德이 도리어 대인大人보다 뒤떨어지는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곧 심보께서 말씀하였던 관중管仲이 이런 사람이오.
관중은 자신의 사상과 언행을 바르게 지키지 못했던 사람이오.
그러나 공자公子 규糾와 함께 죽지 않고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따른 것에 이르러서는, 그 취取함과 버림이 천명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소.
하늘의 뜻은 예부터 항상 그 백성百姓들을 심히 중하게 여기므로 공자孔子께서 그가 취하고 버린 것을 좋게 여기셔서,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가 행하는 충의忠義처럼 행동하여, 전야田野나 봇도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행위를 하겠는가.” 하셨으니,
이런 사람이 곧 내가 이른바 덕德은 대인大人만 못하면서도 오히려 하늘의 뜻에 맞추어서 거취去就를 결정할 수 있었던 사람인 것이오.
심보深甫께서는, “자신을 바르게 지켜서 군주君主를 섬기는 사람은 그 도道가 군주의 용납을 받기에 충분하게 할 뿐이고, 용납되지 못함은 곧 운명이겠지만, 그것이 어찌 내 마음에 기쁨이 될 것이 있겠는가?
자신을 바르게 지켜서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은 그 도道가 편안함을 이루기에 충분하게 할 뿐이고, 편안함을 이루지 못함은 곧 운명이겠지만, 그것이 어찌 내 마음에 기쁨이 될 것이 있겠는가?
자신을 바르게 지켜서 이로써 천하天下를 바로잡는 사람은 그 도道가 천하에 실천하기에 충분하게 할 뿐이고, 실천되지 않는 것은 곧 운명이겠지만, 그것이 어찌 내 마음에 궁窮함과 달達함을 의식하게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소.
모某는 생각하기를, 대인大人의 궁달窮達에 대한 태도는, 잘되어도 내 마음에 기쁨이나 슬픔이 없고 잘못되어도 현달을 추구하고자 함이 없는 것이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십四十이 되자 궁달窮達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게 되었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어찌 편안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천리千里를 찾아와서 왕王을 뵌 것은 나에게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였는데, 알아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떠나게 된 것이니, 이것이 어찌 내가 하고자 한 바였겠는가?
왕王이 행여 마음을 바꾼다면 나는 날마다 이를 기다리겠노라.” 하셨는데, 대저 맹자孟子는 대인이라 말할 수 있는데도 그 말씀이 이와 같았소.
그렇다면 이른바 내 마음에 궁달窮達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것이니, 또한 궁窮하건 달達하건 마음에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을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오.
심보深甫께서는, “오직 자신을 바르게 지킬 뿐이요 남을 바로잡는 것은 기대하지 않아서 이 때문에 만물을 바르게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소.
모某는 생각건대, 자기를 바르게 지키기를 기약하면서 타인을 바로잡기를 기대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바르게 하도록 한다면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도道가 없는 것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도를 무시하는 것은 노장사상가老莊思想家들의 주장이오.
이른바 대인大人이라는 사람이 어찌 노장사상가들의 주장을 따르겠소.
자기만을 바르게 지키면서 타인을 바로잡기를 기약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고, 자기를 바르게 지키면서 타인을 바로잡기를 기필期必하는 것도 또한 잘못이오.
자신만을 바르게 지키면서 타인을 바로잡음은 기약하지 않는 것은 의리義理가 없는 것이고, 자기를 바르게 지키면서 타인을 바로잡기를 기필하는 것은 천명天命을 무시하는 것이오.
대인이라고 이르는 사람이 어찌 의리와 천명을 무시하는 일을 고려하겠소.
양자揚子는 말하기를, “먼저 자신을 다스리고 그런 후에 타인을 다스리는 사람을 큰일을 담당할 만한 그릇이라 이른다.” 하였는데, 양자가 이른바 큰일을 담당할 만한 그릇이라는 것은 대체로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신 대인大人인 것이오.
백성이 바르게 된다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나의 바름을 모범으로 삼아 따르게 한 이후에야 바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니, 그들을 스스로 바르게 하도록 한 것이 아니오.
무왕武王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 사람들의 선善과 악惡이 모두 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니, 천하 사람들이 어찌 감히 그 뜻을 뛰어넘음이 있으리오.” 하셨으니, 천하에 한 사람(殷의 말왕末王인 폭군暴君 주紂를 지칭함)이 천명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날뛰는 것을 무왕께서는 부끄럽게 여기신 것이오.
맹자께서 말씀하신바, “무왕武王께서 한번 노怒하시자 천하의 백성들이 편안해졌다.” 하신 것이 천하 사람을 바로잡기를 기필期必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바르게 되도록 한 것이라면, 한 사람이 천하에서 멋대로 날뛴다 해서 무왕께서 그 때문에 노하여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오.
맹자께서 몰歿하신 후 대인大人에 대한 설명을 잘해서 노장사상老莊思想으로 방종放縱해 지는 것을 막은 사람으로는 양자揚子가 있을 뿐이오.
심보께서 일찍이 모某의 주장에 대하여 상군常君과 함께 비판하시면서, 두 분께서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여기셨으니, 이를 저에게 가르쳐 주시기 바라오.